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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메이지 유신의 '정한론'실체는 본토회복이라는 한반도통합

작성자대한민국 코리아|작성시간13.10.22|조회수373 목록 댓글 5

 

 

고대 백제는 전쟁의 방법이 아니라, '구다라'라는 문화보급과 인구이동을 통하여 열도를 백제화하였다.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는 대한민국의 '한류'보급을 통하여 전쟁을 막고, 열도 및 아시아와 세계의 대한민국화를 실현해 나가야 한다.

 

 

[자료]일본 메이지 유신의 '정한론'실체는 본토회복이라는 한반도통합 

 

서기 503년 고대 백제 무령대왕이 일본 나라(奈良) 현 오시사카(忍坂)궁의 친아우 오호도 왕자(후에 게이타이 일왕이 됨)에게 청동거울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을 보냈다.

 

현재 일본국보로 지정돼 있는 이 거울의 둘레에는 "사마(斯麻·무령왕의 이름)가 아우의 장수를 빌며 이 거울을 보낸다."는 형 무녕대왕의 애틋한 마음을 담은 명문(銘文) 48자가 한자로 새겨져 있다.

 

무녕왕의 아들 성왕은 백제와 일본을 장악하는 (540년) 통합제왕(긴메이 천황)이 되었다. 성왕은 일본을 장악한 후 4촌인 게이타이왕의 장남에게 왕위를 계승했는데 그가 안칸 천황이다. 안칸 천황의 대를 이어 동생이 28대 센칸 천황이 되었고 3남이 29대 긴메이 천황이 되었다. 모두 성왕과는 4촌이었다.

 

긴메이 천황(성왕) 때 가장 왕성한 백제의 정기를 남겼던 것이다. 긴메이는 3남 1녀를 두었는데 4남매가 세습적인 왕권을 이어 받았다. 장남이 바다쓰 천황 (28대) 차남 요우메이 천황 (29대) 3남이 스슌천황 (30대) 을 이어 4녀인 스코이 천황 (31대)이 두 번째로 백제의 왕족으로 여 천황이 되었고 다시 32대는 바다쓰 천황의 장남 조메이 천황 (33대 ) 백제 무왕과는 4촌 사이다.

 

계속하여 35대 덴친 천황과 백제의 의자왕은 아주 친밀한 형제애를 누렸던 사이였다. 나당 연합군에 백제가 망하자 대부분의 백제 유민들이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덴친왕은 당에 잡혀갔다가 돌아온 풍 왕자 ‘융’을 일본으로 불러들여 신하 복신을 내세워 백제 부흥운동을 펼쳤다.

 

덴친 왕은 백제 수복의 야망을 품고 병력 27,000명과 전함 400척을 백제에 보내 당과 백강 전투에서 대전을 벌였으나 중과부족으로 나당연합군에게 패하였고 백제의 부흥운동도 왕족 간의 세력 다툼으로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 후 다카노스 천황 고니 (49대)왕에 이어 망국 백제의 한을 뒤로 하고 '일본'으로 국호를 바꾼 간무천황 (781-809 )이 50대로 그 명성이 천추에 빛났고, 51대 하이세이 천황, 52대 사가천황 53대 준나 천황 (823-833년)에 이루렀던 황금기를 맞았던 것이다.

 

간무 천황은 무녕대왕의 직계 혈통이다. 이렇듯 일본백제의 왕족 역사는 일본 황실 실록 족보 [신찬성씨록]에 기록된 사실이었다. 그 후 일본은 다까의 개혁으로 무사도가 지배하는 중앙집권의 평안시대를 맞아 백제왕족의 기록이 사라졌다. 결론적으로 15대에서 63대에 이루는 272년을 지배한 백제의 유물은 아스까 문화라는 유적으로 남게 되었다.

 

그러나 그 한은 도래인의 고통으로 남았다.

 

일본의 인종은 한국계 도래인과 남방계, 아이노족으로 크게 분류하지만 일본인의 절반이 백제와 가야에서 온 도래인이다. 그리고 소수의 남방계와 아이노족이다. 반도에서 온 도래인들은 이미 일본의 정통민족으로 변해버렸는데도 한국계를 도래인으로 존재하려 하는 것이다. 이는 도래인을 가장한 개인적인 야심과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는 위장 전술이 정한론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정한론은 처음 백제의 부흥운동으로 일본의 힘을 빌어 의자왕의 왕자 풍이었고, 가야의 후손 풍신수길, 백제의 후손 메이지, 히로히또의 야심으로 이어졌다. 도래인은 적응자와 부적응자로 구분하는데 적응자는 정통 일본인이 되었고 부적응자는 도래인으로 살아왔던 아픔이 있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일본인으로 충성을 다한 그들의 가슴엔 슬픔이 고여 있다는 것, 같은 일본인이면서 도래인이라고 왕따를 당해 왔다는 것이었다. 정한론의 의미도 다르다. 스스로 일본 토박이가 된 도래인이 잘난 척 한 광란적 침략 행위와 나라 잃어 쫓겨 온 한 삭임이나 조국 사랑의 정신이 행동으로 나타난 정한론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해석이 다르다. 풍신수길과 메이지, 히로히또의 정한론과 도고 시게노리의 정한론은 다르다.

 

백제나 가야 후손과 일본 천황가 등 본토수복의 한풀이에 의한 정한론이 있는가 하며 도고 시게노리나 이즈노나 사이또, 후지와라의 정한론은 조국사랑이란 데서 그 본질이 다르다. 그들은 피의 진리를 지켜 온 한국인이었다. 현재 재일 교포들의 심정은 언젠가는 일본인이 되어 본토에 대한 나쁜 감정으로 대할지 모른다. 도래인에 의한 정한론은 일본사회에서 대우받지 못한 울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입지 전환의 한 방편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정한론은 일본인의 근성이며 잠재된 희망이었다. 화산과 지진 해일로 언젠가는 일본이 침몰한다는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조상의 나라로의 귀환이라는 위장술로 본토수복의 정한론을 꿈꾸어 왔던 것이다.

 

정한론의 미명아래 한국은 늘 괴로움을 당했다. 한국인의 피를 받는 후손들이 벌이는 조국 사랑이 아니고 개인의 정권욕이나 입지를 넓혀가는 어리석은 생각이 낳은 유치한 야망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은 없습니다. 일본은 백제가 만든 나라인데 지네 조상도 모르는 민족입니다. 이 나라는 망해야 합니다. 아니 망하고 말 겁입니다. 로마가 사라지듯이 말입니다…… "

 

메이지의 정한론인 한.일합방은 정한론의 실체였다. 정한론파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이다가키 다이스케, 소에지마 다네오미 가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저항하며 무력으로 조선을 치자고 결행하였다. 마침내 수상 이와쿠라 도모이의 반대에도 정한파들은 1875년 운양호로 강화도를 침범하여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이와쿠라 도모이는 정한론을 반대했다. 그는 (1825-1883) 교도에서 출생한 백제인의 후손이였다. 그는 고메이 일왕의 사저로 들어 가서 정권을 창출하였다. 그는 마침내 고메이 천황을 살해하고 메이지 유신의 주도파들에게 유신정부를 수립하게 만들어준 위인이다. 그러나 그는 철저한 정한론을 반대했던 인물이다. 도고 시게노리는 외상도 도모이 수상의 영향을 받고 처음엔 정한론에 강한 비판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차츰 메이지 유신의 공신들 특히 가고시마 사쓰마번과 죠슈번 시모노세키 출신 무사들이 정한론에 동조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 속엔 도래인의 한삭임이 고여 있었던 것이다. 살아 남기 위한 고통이었다. 아무튼 그는 철저한 정한론 정국의 외상이었던 것은 논리에 맞지 않았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당시 서부열강이 조선을 먹어 삼키려고 했던 시국에 조국이 타국의 속국이 되는 것 보다 일본의 통치국이 되는 것, 그것은 후손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는 이론은 엄청난 넌센스 였다. 정한론의 목적은 그들의 정권유지 즉 메이지 유신의 성공을 기대한 대 작전이었다. 정한론이 도래인들의 조국 본토를 수복할 음모와 계략이라도 미화했던 것은 위장이라는것, 전쟁을 좋아하는 가고시마 규슈 무사들의 망동이라는 것이다. 진정 가슴에 사무친 도래인의 한이라면 일본을 정복하여 한국에 편입시키는 작업을 했어야 하는 것이다.

 

규슈를 백제의 난민이 장악했고 가고시마를 고구려 유민이 고베를 가야의 유민이 상주한 땅이었고 그 후손이 일본 천황이거늘 무엇이 두려웠단 말인가? 그런데 그들은 정한 제국주의 전쟁 광 외상으로 한국계 도고 시게노리를 받아드린데는 이런 이유가 있었다. 도고 시게노리의 야망어린 고뇌를 대충 이해 할 수 있었다. 히로히또의 정한론은 철저히 위장된 것이었다. 한국인이 생각하는 히로히또 (1926-1989 ) 천황은 군부독재에 휘말린 나약한 황제라고 일컬어지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선왕인 메이지가 이룬 탄탄한 대로 위에 한일 합병의 반석을 두텁게 하였다. 앞으론 나서지 않고 뒤에서 조정하는 정치력을 발휘한 군주이며 그 군국주의 사고가 세계를 제패하려 했던 위인이다. 그는 1901년에 태어나서 1989년에 죽을 때가지 일본의 살아있는 신이었다. 그는 88년 간 세계사를 바꾼 악인이며 잔인무도 한 전쟁광으로 2차 대전을 일으킨 일본 군국주의의 괴수였다.

 

그 모든 것은 이토오 히로부미의 치밀한 건국 이념으로 실행되었던 것이다. 이등박문은 히로히또를 움직여 만주국을 탄생시켰던 것이다. 그는 도조 군국 내각의 꼭두각시였을까? 그는 치밀한 두뇌를 가진 과학자였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그는 독일과 손을 잡고 경제부흥을 일으켰다. 국력이 증강하자 그는 아시아 공략의 야심을 품고 일본 군국주의를 창건하였고 대정시 히로타고키 외무대신 과 쇼아시 마쓰오까 외상과 도조 히데키 군국주의 국방장관, 도고 장군을 움직여 철통같은 군국 내각을 만들어 대동아 전쟁을 계획했던 것이다. 히로히또 천황은 아버지의 고뇌를 알아 냈다. 아버지는 늘 일본 왕족사를 뒤척였다. 그 속에서 백제의 일본통치 치욕사를 알았고 그 자신의 뿌리를 캐던 중 천황가가 백제의 왕손이라는 사실을 알고 아들에게 깊게 각인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의 뇌리엔 부친처럼 본토수복의 야망이 있었다.

 

히로히또 천황은 일본의 저명한 사학자들을 불러 들여 고대사 연구를 강행하였다. 일본 왕족사 사실 기록에서 백제와 일본은 2왕조 1국가란 사실을 알아 냈고 그것을 현실화하려고 선친보다 강력한 야욕을 불태웠다. 일본 천황들의 고뇌는 화산과 지진의 재화로 일본열도가 침몰하면 한국으로 가야 한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백제땅 본토 회귀라는 미명의 침락이었던 것이다. 히로히또는 도조와 도고 장군, 그리고 히로타고끼 수상을 불러 들여 만주국 건설과 대동아 제국 건설의 은밀한 계락을 세우고 있었다. 일본의 조선 점령은 조선이나 일본 국익을 위해서 당연하다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그것은 백제가 약소 일본을 자연스럽게 점령했듯이 강대국 일본이 약소국 조선을 점령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며 한일합방의 대국이 되는 것이며 훗날 역사는 과업을 극 찬양할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어차피 조선은 서양의 열강의 식민지가 될 바엔 동족이 다스리는 것이 훌륭한 귀결이라는 것이었다.

 

만주국은 1931년부터 1945년까지 15년간 존재한 이상국가였다. 만주국이 성립되자 일본은 중국의 반격을 막기 위해 만주에 대병력인 관동군을 주둔시켰다. 메이지 천황의 정한론은 한.일 합방이었다. 메이지 천황은 한일합방이 조선 침략을 미화하는 것이 아니고 일본화하는 작업도 아니며 일본과 조선이 한나라가 되는 작업이라고 회유했다.

 

한일합방의 칙령은 첫째, 사회 간접자본을 확충하여 조선내의 모든 도시 계획 철도 항만 도로 신설과 시설을 지금 일본 수준으로 만들 것이며 둘째. 창씨를 개명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을 평등한 동족으로 혼성하며 셋째, 모든 행정 구역을 일본식으로 개편하며 조선내의 인구는 단계적으로 만주로 이동시킬 안을 마련할 것이며 넷째, 한국인은 일본인이기에 일본인과 똑같은 대우를 할 것이며 일본 국민에 준하는 대우를 하며 건강한 남성은 대동아군으로 징집하고 군대 못 가는 노약자는 공장과 탄광 산업시설에 투입하며 다섯째, 한국인은 일본인과 같은 대우로 고용하며 조센징이란 말을 쓰지 말고 힘든 노동이나 험한 일은 중국인으로 대처하며 여섯째, 일본인과 한국인의 결혼을 권장한다. 라는 6개조항의 한일합방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리고 한일합병 추진 행정 각료를 일본인으로 임명하고 하급관리는 조선인에게 할애하였다. 그리고 대 일본 총 행정수반엔 이등방문이 임명한 것은 그가 제2의 실권자라는 것이다. 이제 조선총독부는 제2의 일본 수도이며 세계가 인정하는 한일합병 통치기구였다. 1910년부터 1945년 36년 동안 한일 합병국은 수난을 겪으면서 맥을 이어갔다. 한일합병의 국가 명칭은 “ 대 일본 조선” 으로 하고 총독부 관제를 편성하였다. 총독은 육해군 대장으로 메이지 천황의 직속 하에 두었다. 총독은 한국의 영토를 보호하고 실무는 천황에 파견한 내각 총리대신이 맡았다. 천황의 직속 명령 하에 관제가 바뀌었다.

 

총독부 조직은 총독관방. 총무. 내무 탁지. 농상공. 사법의 5부와 9국을 두었고 전국을 12부, 13도, 317군, 4322면에 한국인은 도지사 이하 관직으로 임명하였다. 제1대 총감인 데라우찌는 민생 안정 동화정책을 펼치면서 강력한 무단정치를 실시하였다. 헌병 경찰 제도를 만들어 각도의 경찰국장을 헌병감으로 배치하였는데 그 수가 2만 명이 넘었다. 1919년 삼일 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무단정치의 폐단을 인정하고 문화정책을 펼치면서 경찰은 비무장 병으로 교체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통치 변화는 대개 3기로 나눌 수가 있었다.

 

제 1단계는 1910년부터 1918년까지 제국주의의 무단정치로 토지조사 사업세원 개발을 주로 하였고 제2단계는 1919년부터 1936년까지 민족자결주의의 문화정치를 펼쳤고 제3단계는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전체주의 민족성 말살운동과 창씨개명 토지조사를 하여 국토를 총괄하는 동양척식주식 회사를 만들어 식민지 악탈 활동을 전개하였고 민족자본이 진출하지 못하게 굴림 했으며 전시도 원령에 신사참배를 강행하였다. 메이지 천황은 외무상 고무라 쥬따로를 시켜 본격적인 조선을 식민지 하려는 야욕을 드러냈다. 고무라 쥬따로는 미국 하버드 대학 경제학부를 나온 인텔리젠트였다. 그는 조선식민 통치의 틀을 마련하여 천황에게 보고하였다. 천황은 쥬따로의 계획을 강행하기 위해 국제 전문가인 이등박문 이또오에게 지시하여 1905년에 대병력을 한국에 이동시켜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등박문은 한국을 외세로부터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군대를 끌고 궁궐로 들어가서 황제와 대신들을 위협하고 조약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이에 참정대신 한규설이 완강히 반대하였으나 을사5적신 인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이 찬성하여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의 내용은 1. 일본외무성이 한국의 외교 관계사무를 총지휘하며 2. 한국은 일본외무성을 배제한 어떤 국제 조약이나 유대를 할 수 없으며 3. 한국 황제 밑에 일본의 통감을 두어 한국의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한다. 이 조약은 외교권 뿐 아니라 내정 간섭을 하게 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고 돌아온 쥬따로 외상에게 후한 술상을 내놓았다. 그 자리엔 이등박문도 있었다. 이등박문은 영국 케임부리지 대학을 나온 인텔리젠트이고 쥬따로는 하버드 대학을 나온 인텔리로 메이지 천황의 부레인 이었던 것이다.

 

풍신수길의 정한론 풍신수길은 장수들을 불러 모으고 대명정론을 논의했다. 모든 장수들은 장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이상 거절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명을 친다는 것은 자가당착에 빠진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명을 친다는 것은 명목일 뿐 조선과 전쟁을 하는 것이다. 조선이 스스로 길을 빌려줄 리가 없었다. 만일 그 길로 조선을 정복한다며 자연스럽게 조선 본토를 수복하는 것이다. 바로 이점을 노린 것이다. 풍신수길은 출정 준비를 마쳤다. 그는 대마도 사령부로 전국의 현에서 차출된 병력을 집결시켰다. 일본열도 370개 현에서 10만의 무사들이 모였다. 엄청난 저력이었다. 그리고 각 현의 수령에게 전함 10척씩을 배당하여 제조하였고 군량미를 모은 대 장정의 근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출정준비가 완료된 것이다.

 

병력 10만 전함 1,200척, 군량미 30만 석이었다. 풍신수길은 대마도 성주를 통하여 조선의 선조 왕께 통첩하였다. 정명 치벌에 나서는 일본군에게 길을 열라고 전했다. 그는 전국의 무사들에게 다시 충정을 맹서받고 이들의 출세를 보장하는 명목으로 명 정벌이란 허무맹랑한 객기를 부렸던 것이다. 혈기 충정한 전국에서 모인 무사들의 힘을 와해하는 방법으로 그들을 전쟁에 몰아 죽일 생각이었다. 그것은 조선을 점령하고 무사의 기를 꺾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거두는 것이었다. 임진왜란으로 조선의 피해만큼 일본의 피해도 엄청났다. 결국 패전국이 된 풍신수길은 정권을 넘겨주는 비운을 맞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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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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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윤대중 | 작성시간 13.10.22 흔히 한국말은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들 합니다.
    또한 비슷해 보이는 주장도 누가 어떤 목적으로 하는냐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옵니다.
    무릇 어떤 사람에 만인에게 자신을 내세울때에는 언행이 일치되어야 하며,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호남사람이면서 친일매국세력의 후예들인 성누리당세력을 옹호하고 찬양하면서
    거기에 비판적인 사람들을 종북좌파로 매도하고(결론적으로 님과 동향인들이 종북좌파)
    경상도사람들을 흉노족 성문란혈통으로 비하하는등
    도무지 정체성이 애매모호한 님의 주장을 계속 보아 오면서
    이글(남의 주장들을 짜집기 하고 각색 한 것인지 아님 님만의 연구결과물인지)
    을 쓴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군
  • 답댓글 작성자미리내은하 | 작성시간 13.10.23 동감!
  • 작성자대한민국 코리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0.22 오리지날 한국인들은 한글 독해력과 내용의 이해력이 뛰어 나지만, 코카서스 피가 흐르는 개흉노족은 전혀 이해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헛소리를 하는 것이다. 현재 일본은 망국 백제인들이 바꾼 국호이다. 그리고 야마토왜왕조를 백제계가 차지하고 열도를 평정한 이후 현재 일본천황가는 백제황실이 명백하다. [일본서기]창세신화를 보면 담로가 일본은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담로는 백제의 식민지다.고로 현재 일본은 백제가 낳았다는 것이다. 고로 이들 일본천황가의 본토는 한반도 백제가 되는데, '정한론'이라는 것이 일본백제입장에서는 본퇴회복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 답댓글 작성자대한민국 코리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10.22 문제는 신라에 대한 적대감을 깔고 군사력을 동원해서 무력으로 국권을 강탈하고 식민지를 만들었기 때문에 한반도인들에게는 또 다시 원한이 쌓이는 것이고, 일본에 대한 적대감이 생기는 일이기 때문에 코리아 대칸의 주장은 전쟁을 막고 대한민국의 세계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고대 백제가 그랬던 것 처럼(구다라는 한류) 열도 및 아시아와 세계를 대상으로 한류문화를 전파하여 민심을 사로 잡아 평화공존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전체문장 읽어 보지도 않고 댓글달지 말 것.
  • 답댓글 작성자윤대중 | 작성시간 13.10.22 보통 학문의 깊이가 앏고 인격수양이 전혀 안된 분들이
    정곡을 찔리면 발끈하고 화를 내더군요.
    위 글과 비슷한 내용은 인터넷상에서 자주 접하는 내용이고 역사에 조금만 관심있음 다 생각하는 내용임.
    그러나 누가 어떤시기에 어떤의도를 가지고 주장하느냐에 따라 아주 다른 내용이 되어버림.
    님이 과거 여기저기 남겼던 수많은 글들을 보았을때
    그 의도에 많은 의심을 갖게 만드는 글임.
    참고로 나는 부계혈통과 모계혈통모두가 지난 수천년간 한반도 서남단에서 집성촌을 이룬
    오리지널 토종 한국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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