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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자유혼과 해륙노선으로 공존번영추구한 고구려는 통일한국의 미래/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요양(국사교과서내용 개정바람)

작성자나는나였다|작성시간14.04.01|조회수304 목록 댓글 0

 

 

 

[다물]대한민국 국민정신교육자료

 

 

 대한민국의 국제적 국호는 고구려다

 

 

처음에는 미약하였으나 나중에는 창대했던 고구려

 

 

고구려의 기상 정도는 되어야 통이 크다 할 수 있다

 

 

단군한국을 회복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기상이 고구려의 상무정신이다

 

 

단군한국을 회복한다는 다물을 국시로 삼았던 고구려는 개국초기에 중국 한나라와 동부여 등 주변세력과 힘겨운 투쟁으로 홀로서기를 하였고 마침내 요하를 건너 번한국의 땅이였던 서토로 향하면서 영토가 광대했고,

 

찰갑기마군단과 비사성을 수군기지로 삼아 발해만을 장악한 수군을 활용해서 수백 년 동안 중국 중원을 쟁패하며 최강 국가의 존재감을 구가했다.

 

자유혼의 기상, 하늘과 통하는 미의식은 물론이고, 적이 뚫지 못하는 찰갑제작과 고구려땅에서 베링해협을 건넌 남미 고리족 인디언까지 이어지는, 자연환경을 최대한 활용한 산성축조에 뛰어난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세계의 모든 종족들과 교류하고 공존하는 포용력과 통솔력도 있었다. 우리 DNA에는 이런 고구려의 혼이 스며 있고 핏줄 속에는 힘찬 기상이 맥박치고 있다.

 

 

   

 

 

 

 


윤명철 동국대 사학과 교수

 

역사는 과거로 끝나지 않는다. 현재다. 나아가 미래다. 따라서 역사학은 “사실이 무엇인가?(what)”를 찾는 데서 끝나면 안 된다. “왜(why) 일어났는가?”를 규명하고 “어떻게(how)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작업이 역사학이다. 검증이 끝난 해결 모델을 찾는 것이다.

고구려 역사를 다시 꺼내는 것은 이런 역사학의 본질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 한민족의 발전 모델로 고구려를 상정하는 것은 충분히 타당한 일이다.

고구려는 멸망한 이후 현재까지도 부단하게 사실이 왜곡되고 존재가 말살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며 한민족의 고구려 계승을 부정했다. 이런 상황은 역설적이다. 그 전까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고구려의 존재와 가치를 중국이 일깨웠기 때문이다. 얼마나 중요한 역사이기에 자국에 편입하려 하겠는가.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가 처음부터 자기들 역사이며 백제 신라와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다. 중국 문헌인 ‘후한서’에도 “고구려, 옥저, 예는 다 조선 땅에 있다”고 적혀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 첫머리에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썼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 “신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맥은 모두 단군의 자손(故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穢與貊皆檀君之壽也)”이라고 기술했다. 고주몽이 첫 번째로 벌인 정복사업에 대해 ‘삼국사기’는 “다물려어위복구토(多勿麗語謂復舊土)”라고 기록했다. ‘다물’은 고구려 말이며 옛 땅(구토)을 수복한다는 말이란 뜻이다. 이때 말하는 다물은 언어적 측면을 넘어 고구려의 국시이자 모든 것의 통일을 의미한다.

통일한국, 국제사회 역할 제시해야

2014년 동아시아가 세계무대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화대국을 내건 중국, 제국 부활을 외치고 있는 일본, 태평양 재진출을 시도하고 있는 러시아, 동아시아로 향하는 미국 등이 ‘신대륙주의’와 ‘신해양주의’라는 이름의 대결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한반도와 중앙아시아, 유럽을 연결하는 유라시아 벨트에 대한 논의도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동아시아가 세계의 새로운 중심이 된 것이다.

남북관계도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대통령이 ‘통일 대박’론으로 불을 지피며 통일 논의도 무성해지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통일된다면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역, 외교와 국제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지 전략을 새로 세우고 국제 사회에 대해 비전을 고민해 국제사회에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는 통일을 위한 현실적인 전략으로도 필요하다. 남북통일을 위해서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과 유엔 등 국제사회의 묵인과 동의, 협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국가전략과 탁월한 외교정책을 이 시점에서 재조명해볼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돼 있던 대흥안령의 훌른보이르 초원의 현재 모습. 물가에서 말과 양 떼가 방목되고 있다. 윤석하 사진작가 제공

 

통일은 우리 민족 최대 숙원 중 하나다. 동시에 통일은 우리 민족의 대도약에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통일 대박’이란 용어가 가슴에 와 닿는다.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이전의 고구려. 장수왕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최대 제국으로 성장시키려면 통일이 가장 큰 과제였다. 우선 장수왕은 주변국에 대한 정비를 끝냈다. 국제관계를 안정시켰으니 본격적으로 통일 정책을 추진했다.

첫 단계는 영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정치적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장수왕은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해양봉쇄 작전을 폈다. 백제와 신라가 중국 남북조와 교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를 폄하하는 국서를 북위에 보낸 바 있다. 475년 고구려의 3만 대군이 백제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죽였다. 고구려군은 계속 남진했다. 평택만을 장악했고 금강을 넘었다. 대전의 월평산성을 포함해 이 일대에는 이 무렵 고구려가 쌓은 성이 적지 않다.

신라와 가야도 공격했다. 내륙 항구도시인 국원경(충주), 소백산맥 이남의 영주 순흥 청송 등을 차례로 점령했다. 동해안도 공략했다. 삼척 울진 영덕으로 진격했다. 고구려군의 기세는 무서울 정도였다.

이제 장수왕의 영토 통일 전략 결과를 보자. 전라도 경상남도 충청도 일부를 빼고 한반도의 5분의 4 정도를 차지했다. 만주의 부여에 이어 한반도 백제 신라 가야가 자연스럽게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됐다. 한민족의 기본틀이 더욱 확고해진 것이다.

장수왕이 이어 추진한 것은 종족의 통일이었다. 지금은 우리 민족과 거리가 멀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만주 일대에는 고구려 방계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북부여 유민들이 세운 두막루국이 대표적이다. 몇몇 사료(史料)를 비교하면 부여와 선비계인 실위, 거란과 같은 계통인 해와 고막해는 서로 말이 통했고 생활풍습도 비슷했다. 북만주와 동만주 강 일대에 거주하는 물길(숙신 읍루 말갈 여진 만주족으로 명칭이 변한다)도 그런 종족 중 하나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이 종족들을 오랑캐라고 멸시했다. 하지만 큰 틀로 볼 필요가 있다. 그 종족들은 우리 민족과 혈연공동체 언어공동체 역사공동체다. ‘남’이 아니란 얘기다.

이런 종족들이 어울려 사는 고구려는 요즘 말로 다문화 체제였다. 고구려 영토에는 논농사 농경지, 밭농사 농경지, 대초원, 건조지대, 삼림, 해양이 혼재돼 있었다. 쉽게 말해 농경민 유목민 사냥꾼 해양민이 어울려 독창적인 문화를 일군 것이다.

고구려가 강력한 제국으로 우뚝 서려면 이 다문화 공동체를 온전히 유지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와 사상의 통일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야 주변 국가들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장수왕은 이 통일을 위해 고조선(원조선)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사상을 끄집어냈다. 그것은 바로 ‘조화와 상생’이었다.

 


 



 

 

고구려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제국이다. 700년 이상 존속했다. 고구려 민중의 자의식은 절정에 달했다. 문화는 한껏 융성했다. 대륙과 해양이라는 광대한 영토를 유기적으로 관리했던 ‘해륙국가’였다. 고구려의 중요한 가치 또 하나. 고구려는 통일에 가장 근접했던 국가였다.

21세기 전반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격동기다. 문명의 내용과 질이 대전환을 하고 있다. 세계 질서도 재편 중이다. 특히 동아시아는 ‘혼돈의 각축장’이다. 일본은 군사비 지출 세계 4위 해군력 2위를 바탕으로 평화헌법 폐지, 집단자위권, 핵무장의 노골화, 주변 국가와의 영토 분쟁 등 여러 잡음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은 자국과 미국의 ‘주요 2개국(G2) 시대’를 선언하며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 한다. 일본과는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분쟁을,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는 난사(南沙) 군도와 시사(西沙) 군도 분쟁을 벌이고 있다. 이어도의 영토 분쟁화도 시도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도 동아시아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미국은 군사 정치적으로 중국을 외곽 포위하면서 힘의 축을 동아시아로 이동시키고 있다. 러시아 또한 신동방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북한은 ‘핵보유국’임을 선언했다. 북한의 미래는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다. 냉전이 끝났다지만 동아시아는 그렇지 않다. 또 다른 형태의 냉전이 시작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함마저 느껴진다.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 한민족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구려의 역사를 다시 꺼내야 할 두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구려의 성공 전략이 곧 오늘날의 미래 전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고구려는 ‘대안’이다. 어떤 분야에서?

고구려 장군총. 고구려의 사상과 논리 미학의 결정체로 인정받고 있다. 윤명철교수제공

첫째, 국가 발전 전략이다. 동아시아는 만주와 중국 대륙, 한반도, 일본 열도와 함께 삼면이 해양으로 돼 있다. 지중해적 형태다. 고구려는 지정학적으로 북방 유목민족, 중국, 백제와 신라에 포위돼 있었지만 국제질서의 틀을 간파하고 육지뿐 아니라 해양까지 발전시켰다. ‘동아지중해 중핵(CORE) 조정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둘째, 경제 영토의 장악과 물류망의 확장이다. 요동 지방은 철, 광산물 등 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경제적 요충지였다. 북만주의 초원과 동만주의 숲은 말, 소와 같은 가축, 나무, 질 좋은 모피 등 고부가가치 상품의 생산지였다. 고구려는 여기에 육로와 해로 교통망을 발전시켜 물류 허브를 구축했다. 대륙과 해양을 망라해 쌍방무역, 다자간 중계무역도 활발했다. 현재의 한반도종단철도(TKR), 중국횡단철도(TCR), 시베리아횡단철도(TSR), 해양길(SEA-LANE)을 연계시킨 것과 동일한 시스템이다.

셋째, 정체성과 자의식이다. 국가와 민족이 발전하려면 자의식은 필수조건이다. 열등감에 빠져 있고, 배타적이고, 능동성이 결여된 국가는 침체하거나 멸망한다. 조선처럼. 고구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주변 국가들과 대등한 자세에서 관계를 맺었다. 창조적으로 사고했다.

넷째, 세계관이다. 고구려를 알면 좁은 ‘반도사관’을 벗어날 수 있다. 거시적인 사유, 범공간적인 행동 방식, 국제질서 등 더 큰 범주에서 전략적 사고를 할 수 있다. 우리 역사는 바다에 포위된 수동적 역사가 아니다. 만주 일대와 해양을 아우른 고구려가 그것을 증명한다.

다섯째, 통일의 문제이다. 최초의 조선인 고조선, 즉 ‘원조선’의 후손임을 표방하며 건국된 고구려에 통일은 그 자체가 명분이었고, 국시였다. 따라서 민족 통일의 명분과 역사적 정당성, 추진 방식과 전략을 배울 수 있다. 정치체제나 국토를 통합하고 분단 체제를 극복하자며 근시안적으로 통일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통일, 세계관의 통일, 문화의 통일, 정치의 통일, 영역의 통일이어야 한다.

 


 

 [시론/윤명철]내가 만난 고구려

 

 

윤명철 동국대 교수·고구려사 및 동아시아 해양사 전공

 

여러 차례 갔던 곳이지만 지난 달에 ‘고구려’를 다시 방문하게 된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중국이 2012년 7월에 길림(吉林) 성 집안(集安) 시에서 서쪽인 마셴허(麻線河) 강가에서 광개토대왕비와 다른 ‘지안 고구려비’를 발견했다고 보도했기 때문이다. 이 비석을 보고 싶었다.

집안 일대는 고구려의 두 번째 도성인 국내성(國內城) 자리다. 집안은 백두산에서 뻗어온 산줄기들이 겹겹으로 둘러 싸고 있고, 그 안에 분지로 되어 있는 넓은 도시다. 한강이나 청계천처럼 압록강을 끼고 있기도 하다. 첫 번째 도읍지는 요녕(遼寧) 성에 속해 있는 환인(桓仁) 시 일대로 홀본(忽本) 성이다. 오녀산이라는 험준한 산 위에 성을 구축했다. 200m에 달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활용한 난공불락의 요새로 천지라고 불리는 연못도 있어서 장기 항전에 유리하다. 밑에서 위를 바라보면 신령스러움과 웅혼한 기상에 절로 가슴이 벅차오른다. 추모 임금은 이 곳에 도읍을 정하고 해모수를 천제로 추앙하며 천손을 자처했다. 홀본 성을 먼저 돌아 보고 국내성 쪽으로 이동했다. 자동차로 4시간 거리다.

집안시 인근의 마셴허 지역은 1000개가 넘는 고구려 고분이 밀집된 곳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고분단지 중 하나다. 유적 중 ‘천추총’과 ‘서대묘’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으며 유명한 광개토대왕비, 장군총, 광개토대왕릉 등도 자리 잡고 있다. 광개토대왕릉은 지름이 60여 m에 달하는 피라미드 위에 신전을 갖춘 채 웅장하게 서 있고, 장군총은 험준한 산과 압록강 사이의 터에 단단한 자태로 좌정하고 있다. 어쨌든 이 지역에서 발견된 비석이니만큼 고구려 비석일 가능성은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중국은 비석을 발견한 후 연구팀을 구성해서 즉시 고증에 들어 갔고, 몇 달 지나서야 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비는 높이가 170cm 정도이고, 앞면에는 218자가 새겨져 있으며, 현재까지는 150여 자가 판독되었다고 한다. 광개토대왕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작은 크기다. 비석의 석재는 장군총을 만들었던 석재와 같다고 하며, 제작 시기는 광개토대왕 때 또는 장수왕 때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발표 이후 중국은 완공 후 몇 년이 지나도록 잠가두었던 새 박물관을 느닷없이 개장하면서 이 비석을 실물이라며 전시했다. 새 박물관에 도착했다. 휴대전화와 카메라를 맡겨놓아야 입장이 가능해서 그러고 직접 보니 비석은 몸체보다 훨씬 큰 유리상자 안에 놓여 있었다. 생각보다는 작았고, 그나마 3m 이상 되는 거리 때문에 눈으로는 글자를 확인할 수 없었다. 전형적인 중국양식이라는데, 고구려다운 소박함과 기운 대신에 작위와 교만함이 느껴졌다. 그들이 의도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공개는 하되 접근은 차단’되어 검증이 어렵게 되었다. 동북공정의 그늘이 어른거린다.

고구려는 특별하고 ‘큰’ 나라다. 영토가 광대했고, 기마군단과 수군을 활용해서 전투에 능숙했으며, 사람들의 기질도 신체도 건강했다. 수백 년 동안 중국 중원을 쟁패하며 최강 국가의 존재감을 구가했다. 자유의지와 기상, 하늘과 통하는 신기가 넘치는 미의식은 물론이고 무기 제작과 산성 축조에 적용한 뛰어난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세계의 모든 종족들과 교류하고 공존하는 포용력과 통솔력도 있었다. 우리 DNA에는 이런 고구려의 혼이 스며 있고 핏줄 속에는 힘찬 기상이 맥박치고 있다.

우리는 오랫동안 식민사관의 연장인 ‘반도사관’에 사로잡혀 있고, 대학입시에서조차 국사를 제외한 지 오래다. 역사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이며, 미래를 발전시킬 모델을 제공한다. 고구려를 공부하자.

 

[윤명철 교수의 고구려 이야기]<1>왜 지금 고구려인가

《 21세기를 대한민국의 시대로 만들기 위한 전략을 고구려 역사에서 찾을 수 있을까. 고구려사와 해양사 전문가인 윤명철 동국대 교양교육원 교수(해양문화연구소장)는 “그렇다”고 말한다. 윤 교수는 고구려를 알면 국가 발전전략을 짤 수 있고, 고구려를 알면 민족의 정신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통일 정책 또한 고구려 역사에 해답이 있다고 한다. ‘왜 고구려인가’에 대한 윤 교수의 생각으로 고구려 이야기 첫 회를 시작한다. 》     
     

고구려 국내성과 별도로 마련된 군사수비성 겸 임시 수도인 환도산성을 멀리서 찍은 모습. 산성하고분군 전체와 환도산성 내부가 보인다. 성벽 방어시설, 궁지, 고분등이 보인다. 윤석하 사진작가 제공


 

윤명철 교수

역사는 과거로 끝나지 않는다. 현재다. 나아가 미래다. 따라서 역사학은 “사실이 무엇인가?(what)”를 찾는 데서 끝나면 안 된다. “왜(why) 일어났는가?”를 규명하고 “어떻게(how)할 것인가를 모색하는 작업이 역사학이다. 검증이 끝난 해결 모델을 찾는 것이다.

고구려 역사를 다시 꺼내는 것은 이런 역사학의 본질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 한민족의 발전 모델로 고구려를 상정하는 것은 충분히 타당한 일이다.

고구려는 멸망한 이후 현재까지도 부단하게 사실이 왜곡되고 존재가 말살되고 있다. 중국 정부는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동북공정을 추진하며 한민족의 고구려 계승을 부정했다. 이런 상황은 역설적이다. 그 전까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했던 고구려의 존재와 가치를 중국이 일깨웠기 때문이다. 얼마나 중요한 역사이기에 자국에 편입하려 하겠는가.

 

  

 

 

 

고구려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제국이다. 700년 이상 존속했다. 고구려 민중의 자의식은 절정에 달했다. 문화는 한껏 융성했다. 대륙과 해양이라는 광대한 영토를 유기적으로 관리했던 ‘해륙국가’였다. 고구려의 중요한 가치 또 하나. 고구려는 통일에 가장 근접했던 국가였다.

21세기 전반은 인류 역사상 최대의 격동기다. 문명의 내용과 질이 대전환을 하고 있다. 세계 질서도 재편 중이다. 특히 동아시아는 ‘혼돈의 각축장’이다. 일본은 군사비 지출 세계 4위 해군력 2위를 바탕으로 평화헌법 폐지, 집단자위권, 핵무장의 노골화, 주변 국가와의 영토 분쟁 등 여러 잡음을 일으키고 있다.

중국은 자국과 미국의 ‘주요 2개국(G2) 시대’를 선언하며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 한다. 일본과는 센카쿠(尖閣)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釣魚島) 분쟁을, 동남아시아 국가들과는 난사(南沙) 군도와 시사(西沙) 군도 분쟁을 벌이고 있다. 이어도의 영토 분쟁화도 시도하고 있다.

미국과 러시아도 동아시아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고 있다. 미국은 군사 정치적으로 중국을 외곽 포위하면서 힘의 축을 동아시아로 이동시키고 있다. 러시아 또한 신동방정책을 적극 추진하고 있다. 북한은 ‘핵보유국’임을 선언했다. 북한의 미래는 예측이 불가능할 정도다. 냉전이 끝났다지만 동아시아는 그렇지 않다. 또 다른 형태의 냉전이 시작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길함마저 느껴진다.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다. 우리 한민족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구려의 역사를 다시 꺼내야 할 두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고구려의 성공 전략이 곧 오늘날의 미래 전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고구려는 ‘대안’이다. 어떤 분야에서?

고구려 장군총. 고구려의 사상과 논리 미학의 결정체로 인정받고 있다. 윤명철교수제공

첫째, 국가 발전 전략이다. 동아시아는 만주와 중국 대륙, 한반도, 일본 열도와 함께 삼면이 해양으로 돼 있다. 지중해적 형태다. 고구려는 지정학적으로 북방 유목민족, 중국, 백제와 신라에 포위돼 있었지만 국제질서의 틀을 간파하고 육지뿐 아니라 해양까지 발전시켰다. ‘동아지중해 중핵(CORE) 조정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것이다.

둘째, 경제 영토의 장악과 물류망의 확장이다. 요동 지방은 철, 광산물 등 에너지 자원이 풍부한 경제적 요충지였다. 북만주의 초원과 동만주의 숲은 말, 소와 같은 가축, 나무, 질 좋은 모피 등 고부가가치 상품의 생산지였다. 고구려는 여기에 육로와 해로 교통망을 발전시켜 물류 허브를 구축했다. 대륙과 해양을 망라해 쌍방무역, 다자간 중계무역도 활발했다. 현재의 한반도종단철도(TKR), 중국횡단철도(TCR), 시베리아횡단철도(TSR), 해양길(SEA-LANE)을 연계시킨 것과 동일한 시스템이다.

셋째, 정체성과 자의식이다. 국가와 민족이 발전하려면 자의식은 필수조건이다. 열등감에 빠져 있고, 배타적이고, 능동성이 결여된 국가는 침체하거나 멸망한다. 조선처럼. 고구려는 사실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주변 국가들과 대등한 자세에서 관계를 맺었다. 창조적으로 사고했다.

넷째, 세계관이다. 고구려를 알면 좁은 ‘반도사관’을 벗어날 수 있다. 거시적인 사유, 범공간적인 행동 방식, 국제질서 등 더 큰 범주에서 전략적 사고를 할 수 있다. 우리 역사는 바다에 포위된 수동적 역사가 아니다. 만주 일대와 해양을 아우른 고구려가 그것을 증명한다.

다섯째, 통일의 문제이다. 최초의 조선인 고조선, 즉 ‘원조선’의 후손임을 표방하며 건국된 고구려에 통일은 그 자체가 명분이었고, 국시였다. 따라서 민족 통일의 명분과 역사적 정당성, 추진 방식과 전략을 배울 수 있다. 정치체제나 국토를 통합하고 분단 체제를 극복하자며 근시안적으로 통일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역사의 통일, 세계관의 통일, 문화의 통일, 정치의 통일, 영역의 통일이어야 한다.

 


고추모의 다물국시를 실현한 광개토태왕의 꿈

 

 -문명과 정치질서 주도한 단군한국의 영광회복-


요서와 내몽골 지방의 건조지대로, 초기 거란의 영역이었다. 광개토태왕이 즉위한 후 공격한 곳 중 하나다. 윤석하 사진작가 제공

 


 

윤명철 교수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崗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성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聖王)‘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國崗上廣開土地好太王)’.

모두 광개토태왕(대왕)을 기리는 칭호다. 영토를 크게 넓힌 위대한 통치가, 왕 중의 왕이란 뜻이 담겨 있다.

광개토태왕은 만주 일대를 지나 몽골 어귀까지 진출했다. 오늘날 중국 산둥 성의 면적은 15만 km². 연해주를 포함해 만주 일대가 약 150만 km²다. 일본 열도는 육지 부분만 약 37만 km²이고 한반도는 남북을 합쳐 22만 km²다. 이 영토의 크기를 고려하면서 고구려 영토를 가늠해 보라. 감동 그 자체가 아닌가.

414년 장수왕이 세운 광개토태왕릉비.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이란 글자가 음각돼 있다. 윤명철 제공

광개토태왕은 위엄과 무공을 사방에 떨쳤다(威武振被四海). 탁월한 정복군주였다. 하지만 거기에만 머물지 않는다. 태왕은 그 이상의 존재다. 태왕이 널리(廣) 열어간(開) 땅(土)은 논밭 같은 토지가 아니다. 질서이고 문명이며 또한 역사다. 태왕은 고구려를 넘어 동아시아 전역을 경영한 위대한 정치가였다.

태왕이 391년 18세로 임금이 되었을 때 고구려는 위기 상황이었다. 서북방 국경에서는 선비족의 연나라, 거란과 자주 전쟁을 벌였다. 강성해진 백제는 남쪽 황해도 지역을 끈질기게 공격해 왔다. 흉년이 겹치는 바람에 경제난도 가중됐다. 불교는 아직 낯선 이데올로기였다. 안정과 함께 혼란도 불러일으켰다.

내부 통일, 대외 전쟁에서의 패배감 극복과 승리 쟁취, 원조선(고조선)의 영토 회복과 종족의 통일, 그리고 경제적 성장과 밝은 미래…. 시대가 젊은 태왕에게 내린 과제들이었다. 하나같이 국가 발전을 위해 꼭 이뤄야 할 것들이었다. 태왕이 세운 전략은 남달랐다. “수습이 아니다. 확장으로 위기를 돌파하자!” 태왕은 즉위와 동시에 전쟁을 감행했다. ‘비문’과 ‘삼국사기’를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해보자.

‘즉위 첫해인 7월, 4만 대병력으로 예성강 일대와 개경 주변 지역을 점령했다. 9월에는 북상해 요서와 동몽골 사이에 거주하는 거란을 정벌했다. 포로로 잡혔던 백성들을 구출하고 요동을 경영하는 교두보를 차지했다. 10월에는 남진하여 백제의 최전방 기지이고, 해군의 주력 함대가 포진한 강화도의 관미성을 공격했다. 처절한 공방전 끝의 함락. 지금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해역을 안정적으로 확보함으로써 백제 수도권에 비수를 겨누게 됐다.’

고구려군은 산업이 발달한 덕택에 첨단무기로 무장할 수 있었다. 명실상부한 동아시아 최강의 군대. 태왕은 기동력과 파괴력이 강한 철기 병사를 전면에 내세웠다. 산악지대와 대평원, 초원과 삼림, 바다와 강 등 지형지물을 활용해 허를 찌르는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여기에 수군을 이용해 상륙작전을 벌였다. 그야말로 완전한 입체작전이었다.

군사적 성공을 거둔 태왕은 본격적으로 국가 발전 정책을 추진했다. 때마침 동아시아의 질서가 고구려에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중국 강남지역에는 한족 정권인 동진이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화북지방은 선비족 흉노계 티베트계 등 여러 종족의 국가가 서로 싸우고 있었다. 이른바 5호16국 시대의 대분열은 고구려의 약진에 적잖이 도움이 됐다.


경북 경주 노서동 신라고분에서 발견된 청동그릇. 밑바닥에 ‘국강상광개토지호태왕’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당시 신라가 광개토태왕에게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한 제사용 청동솥이다. 신라는 100여년간 고구려의 속국이였으나, 백제와 100년 나제동맹으로 고구려 남하를 저지하면서 진흥왕 이후에는 영토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배신에 분노한 백제의 맹공에 망국의 위기에 처하자, 중국 당나라 연호와 관제까지 사용하며 당나라 제후국이 된다. 신라가 자초한 자업자득이였다.

게다가 고구려는 지정학적으로 천혜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동아시아는 육지 중심의 세계가 아니다. 해양 면적이 더 넓고 광범위하다. 대부분의 교류와 무역은 물론이고 전쟁조차도 해양을 매개로 전개되는 횟수가 많았다. 지리적인 형태나 역사적인 성격으로 봐도 서양의 지중해와 유사점이 많아 ‘동아지중해’라고 부르기도 한다.

고구려는 동아지중해의 중핵(core)에 있다. 만주 일대와 한반도의 중북부 영토를 장악하고 서해와 동해 해양을 장악하면 ‘해륙통합형’ 국가를 만들 수 있다. 그러면 분열된 중국지역과 북방 초원을 해륙 양면으로 압박하면서 ‘동시 등거리 외교’를 추진할 수 있다. 또 백제 신라 가야 왜가 북중국과 직거래하는 것을 해양에서 통제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선 ‘6개의 전략 요충지’를 장악할 필요가 있었다. 랴오둥 반도 남단, 압록강 하구, 경기만,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남부, 그리고 동해 중부 해안이다.

태왕은 그런 꿈을 꿨다. “이 모든 게 성공한다면 동아시아 정치와 외교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중심이 될 수 있다! 배후를 의식하지 않고 통일을 이룰 수 있다. 새로운 자원을 확보하고 사방으로 뻗은 교통망 허브에서 무역 국가를 지향할 수 있다.”

복잡한 국제관계의 핵심을 일찌감치 파악한 광개토태왕. 그는 거시적이고 장기적인 관점과 국제관계라는 ‘큰 게임(great game)’의 틀에서 정책을 수립했던 우리 역사의 위대한 왕이었다.

 

 

평균 지름 66m인 광개토대왕릉의 현재모습. 원래는 피라미드처럼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상단에는 신전에 해당하는 건물이 있었다. 사진작가 윤석하 씨 제공

 

유목민들에게 영토는 ‘이동하는’ 것이다. 교통로는 선(線)이며 사방으로 뻗어나가는 항구는 점(點)이다. 몽골 유목민과 동만주 수렵민, 대항해 시대를 연 유럽인들의 영토 확장 전략은 이 선과 점을 늘리는 것이었다. 농경민들에게 영토는 ‘정착하는’ 것이다. 곡물을 영글게 하는 농지는 면(面)이다. 농경국가는 이 면을 늘리기 위한 전략을 짠다.

고구려는 어땠을까. 양쪽의 전략을 혼합했다. 면을 지배했고, 선과 점은 전략적으로 간접 지배하거나 관리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른바 ‘네트워크 시스템’이다. 이 시스템을 구축했기에 고구려는 ‘중핵 국가’로 성장할 수 있었다.

광개토태왕(대왕)은 최소한 6개의 전략 요충지를 장악하기로 했다. 압록강 하구, 경기만, 요동반도 남단, 두만강 하구와 연해주 남부, 동해 중부해안, 북만주다. 이 가운데 압록강 하구는 이미 장악한 상태. 태왕은 나머지 5곳의 장악에 나섰다. 군사 작전이 시작됐다.

즉위 초기 예성강 일대와 강화도를 노린 범(汎)경기만 작전을 펼쳤다. 백제 수군을 무력화시키고 국제 항구를 봉쇄하려는 의도. 396년 고구려 함대가 대동강 하구를 출발했다. 서해 5도 해역을 경유해 경기만에 도착했다. 주력군은 한강을 거슬러 왕성(서울 천호동 일대)으로 진격했다. 일부는 인천만과 남양반도 상륙 작전을 개시했다. 이 수륙양면 작전은 대성공이었다. 경기만 일대와 서해 중부 해상권은 고구려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요동반도는 고조선(원조선)의 영토. 게다가 요동성과 안시성 일대는 동아시아 최대의 철광지대이다. 이 때문에 훗날 러일전쟁에 이르기까지 항상 격전의 무대였다. 태왕은 402년 기병부대를 이끌고 현재 요서의 차오양(朝陽)인 숙군성을 점령했다. 이를 시작으로 지속적인 공략 끝에 다롄(大連)의 비사성과 창산(長山)군도 등에 해양 방어 체제를 구축할 수 있었다. 또한 서해를 ‘고구려의 바다’로 삼았다. 410년에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부여를 완전 정복했다. 이 모든 작전의 결과 고구려는 두만강 일대와 연해주 남부까지 영토로 만들었다.

남쪽으로도 내려갔다. 400년에 신라 구원이란 명분을 걸고 5만 대군을 발진시켰다. 군대는 신라 중심부를 거쳐 함안과 부산 일대까지 점령하였다. 물론 백제를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항구를 확보해 백제가 일본(왜)과 동맹을 맺는 걸 막고 교역망을 붕괴하려는 전략이었다. 더불어 동해 중부 해안의 항구를 확보하려는 것이다.

태왕은 북만주 지역에도 관심이 컸다. 398년 동류 송화강가에 살던 숙신을 공격하여 복속시켰다. 평원과 초원, 삼림은 지경학적으로 고부가가치 지역이고, 명마와 담비가죽 등은 값비싼 무역 품목이었다.

태왕은 22년 동안 쉼 없이 정복 작전을 펼쳤다. 중국의 분열 상황과 지정학적인 위치를 활용하여 ‘해륙국가’를 완성시켰다. 육지와 해양이 만나는 항구 지역들을 확보한 후에 약화된 중국 지역을 상대로 화전양면 정책을 구사하였다. 그렇게 해서 정치, 외교, 군사 등에서 관계를 조정하는 명실공히 동아지중해의 중핵국가 역할을 맡기 시작했다.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군사작전에 대한 내용도 기록돼 있다. 396년 경기만 작전을 음각한 부분이다. 윤명철 씨 제공

태왕의 이런 전략은 오늘날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향후 국가 발전 정책을 수립하는 데 참고할 내용이 적지 않다.

우선 대부분이 해륙교통의 요충지라는 점이다. 경기만은 황해남북 연근해항로와 황해중부 횡단항로, 동중국해 사단항로의 교차점이며 한강 하구가 만나는 해륙 교통로의 십자로이다. 인천 송도 평택 등은 경제특구 지역이다.

요동반도도 비슷하다. 중국 정부는 다롄을 경제특구로 만들었고, 웨이하이(威海)와 동중국해까지 연결했다. 2012년에는 항공모함(랴오닝)을 취역시키면서 황해를 ‘내해’라고 공언하기도 했잖은가.

두만강 하구 또한 북한의 나선지구, 중국의 훈춘(琿春), 러시아의 하산을 연결하는 경제특구 지역이다. 러시아는 1860년 이후에 블라디보스토크 항에서 태평양 진출을 시도하다 러일전쟁에서 패배했다.

일본은 1920년대 만주 진출을 시도하면서 ‘일본해 중심론’과 ‘두만강 경략론’을 펴기도 했다. 중국은 나진항을 조차지 상태로 만들었고, 청진항에 해군기지를 건설할 예정이다. 중국의 동해 진출을 막으려면 우리로서는 동해중부에 거점지역을 만들 수밖에 없다. 동해경제특구가 추진되는 고구려의 영토였다.

중국 정부는 2002년 3월부터 5년 동안 동북공정을 추진했다. 동북공정은 과제의 내용과 진행 과정에서 확인하였듯이 역사 문제만이 아니다. 실상은 정치 문제이고 경제 문제이다.

 

중국 지린 성 지안 현에서 발견된 통구 12호분의 벽화. 장수왕 때 만들어졌다. 철제품으로 무장한 개마무사 벽화의 모사도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광개토대왕(태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에게는 두 개의 시대적 과제가 있었다. 하나는 강대국의 완성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한반도와 만주 일대의 종족과 다양한 문화를 통일하는 일이었다.

중국의 화북 지방은 선비족인 북위로 통일되었고, 양쯔 강 하류의 강남 지방에는 한족의 송나라가 건국됐다. 소위 남북 분단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북방 초원에서는 몽골족의 일파인 유연이 유목국가를 세웠다. 유연은 424년 기병 6만 명을 동원하여 북위를 공격했다. 남쪽에서는 백제가 반격을 노리고 있었다. 신라는 고구려 지배에서 벗어나려 했다. 가야와 왜(倭)도 발언권을 높이고 있었다. 한마디로 당시 동아시아는 4개 강대국을 중심으로 중소 국가들이 새판을 짜는 전환기였던 것이었다. 만약 장수왕이 해양력을 더 강화시킨다면 동아 지중해의 중핵국가가 될 수 있었다.

장수왕 이후에 고구려 영향권으로 편입된 흥안령 일대(훌룬보이르 초원)에서 말을 방목하는 모습. 고구려는 이 지역의 말을 군수물자로 중국 남조 국가들에 수출했다. 윤석하 사진작가 제공

 

 

 

 

고구려는 700년 이상 강국으로 존재한 국가다. 동아시아에서 40개 가까운 국가들과 종족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하고 중국 왕조의 평균 수명이 200년 정도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단한 존재감이었다.

고구려는 중국이 분열하면 공격적으로 영토를 확장했고 수나라 당나라처럼 통일 국가가 출현하면 인근 말갈 돌궐 등 부족들과 연합전선을 펼쳐 국제전을 전개하는 역동적인 국가 전략을 구사했다. 고구려의 외교 전략은 역대 동아시아 국가 중에서 최고 수준이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해양과 육지를 연결하는 무역망을 만들었고 일본에서 중앙아시아까지 망라하는 광대역 외교정책을 펼쳤다.


다중-실리-평화-중재 외교 펼쳐


먼저 고구려의 지정학적 환경을 보자. 고구려는 만주 일대를 포함한 중국의 동북부, 연해주를 포함한 러시아의 동남부, 한반도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대륙국가이자 해양국가였다. 이런 점에서 필자는 고구려를 ‘해륙국가’라고 부른다.

황해와 동해 남태평양 등 고구려를 둘러싼 바다는 마치 서양의 지중해처럼 교역과 교류의 내해(內海) 같은 특성을 지니는데 필자는 이를 ‘동아지중해(동아시아 지중해)’라 칭해 왔다. 그 동아지중해의 중핵 국가가 바로 고구려였다.

고구려는 북방 초원은 물론이고 해양력을 바탕으로 동남아시아까지 교류를 활발히 했는데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인 사마르칸트는 실크로드의 교역 중심지였다. 실제로 사마르칸트 벽화에는 고구려 사신이 확실시되는 그림이 나온다.

400년 동안 지속된 중국 지역의 분열은 외교 강국으로서의 고구려의 위상을 드넓게 확장한 배경이 되었다. 이때 고구려의 외교는 몇 가지 특징을 지닌다.

첫째, 등거리 다중 외교다.

둘째, 군사력을 바탕으로 한 실리 외교다.

셋째, 해양과 대륙에 걸친 전방위 외교다.

넷째, 대화와 협상을 중시하는 평화 외교다.

다섯째, 주도권을 쥐고 조정하는 중재 외교다.

중국은 후한이 멸망하면서 삼국지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소위 ‘삼국 시대’가 열린다. 208년에 위나라와 오-촉 연합군 간에 벌어진 전투가 바로 그 유명한 ‘적벽대전’. 이 전쟁에서 조조의 위나라군은 대패한다.

조조가 죽은 후 오나라 손권은 위나라를 배후에서 압박하고 군마(軍馬)를 얻기 위해 요동 지방의 공손씨 정권에 사신을 파견한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하고 사신들은 억류당한다. 그런데 이 사신들 중 일부가 고구려로 탈출하면서 고구려와 오나라의 외교가 시작된다.

233년 고구려는 오나라 사신들을 돌려보내면서 값비싼 담비 가죽 1000장, 할계피(꿩과의 새) 10구 등도 함께 보낸다. 이때 고구려 배는 황해를 1000km 정도 내려가 상하이 만을 통과한 후에 양쯔 강을 따라 지금의 난징인 건업까지 들어간다. 손권은 크게 기뻐하며 고구려와 동맹을 맺는다.

이후 중국에는 남쪽은 동진, 북은 ‘5호 16국 시대’라는 대분열 시대가 도래한다. 황해 북부를 둘러싸고 고구려, 백제, 연, 후조, 동진 등 5개 나라가 각축전을 벌인다. 고구려 미천왕과 고국원왕은 요서 지방에 있는 연나라를 포위하는 정책을 쓰는 한편 화북 평원에 있는 후조와도 군사동맹을 맺었다.

후조는 300척의 배에다 곡식 30만 곡(5400만 L)을 실어 황해를 건너 고구려에 보내고 수륙합동으로 연을 공격할 것을 제안한다. 고립된 연나라는 포위망을 풀기 위해 남쪽의 동진과 우호관계를 맺고, 그 즉시 고구려는 사신단을 동진에 파견한다. 분열된 중국의 복잡한 역학관계를 활용하는 이 절묘한 등거리 다중외교는 광개토태왕 장수왕을 거쳐 문자왕 시대까지 변화무쌍하게 전개된다. 이런 상황이니 중국 대부분의 나라는 고구려와 외교관계를 맺어야만 했다. 워낙 군사적으로 강국인 데다가 무역이 활발했으므로 고구려를 적대시했다가는 적국이 되기 때문이다.


400년간 200여회 中에 사신 파견

약 400년 동안의 중국의 분열 시기에 고구려는 200회 가까이 중국 지역에 사신을 파견했다. 북위는 물론이고 남조의 동진, 송나라, 제나라, 양나라에도 광범위하게 자주 파견했다. 그뿐만 아니라 동해를 건너 왜국과도 교류하였고, 문자왕 때에는 제주도로 추정되는 섭라와도 무역을 했다. 그러면서도 백제, 신라, 가야가 국제 질서에 진입하지 못하게 바다에서 차단하여 외교적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다시 말해 북방 종족들과는 군사적인 대결을 자제하고 교역이나 연대를 하고 남북조와는 등거리 외교와 무역을, 그리고 백제, 신라, 왜와는 화친을 하면서도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복합적인 고난도 외교정책을 구사했던 것이다. 고구려는 또 바다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으므로 중요한 항구들을 확보해 이 항로들을 장악하는 데에 중점을 두기도 했다.

하지만 영원한 것은 없는 법. 강대국들 사이에서 중심 역할과 조정 역할을 하면서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떠오른 고구려였지만 중국이 통일되면서 도전에 직면한다. 더이상 등거리 다중 외교는 불가능해지고, 조정 역할도 위협을 받게 되었다. 마침내 국력을 확장하려는 중국 통일 국가와 국가의 운명을 건 일전이 기다리고 있었으니 바로 수, 당과의 전쟁이었다. 오랜 전쟁을 치르며 고구려의 국력은 약화되었고 마침내 국제무대에서 사라지게 된다.


통일한국, 국제사회 역할 제시해야

2014년 동아시아가 세계무대의 중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중화대국을 내건 중국, 제국 부활을 외치고 있는 일본, 태평양 재진출을 시도하고 있는 러시아, 동아시아로 향하는 미국 등이 ‘신대륙주의’와 ‘신해양주의’라는 이름의 대결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다.

여기에 한반도와 중앙아시아, 유럽을 연결하는 유라시아 벨트에 대한 논의도 다양하게 제기되고 있다. 동아시아가 세계의 새로운 중심이 된 것이다.

남북관계도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대통령이 ‘통일 대박’론으로 불을 지피며 통일 논의도 무성해지고 있다.

지금이야말로 우리가 통일된다면 동아시아의 평화와 교역, 외교와 국제관계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지 전략을 새로 세우고 국제 사회에 대해 비전을 고민해 국제사회에 제시할 필요가 있다. 이는 통일을 위한 현실적인 전략으로도 필요하다. 남북통일을 위해서는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강대국과 유엔 등 국제사회의 묵인과 동의, 협조가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고구려의 국가전략과 탁월한 외교정책을 이 시점에서 재조명해볼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고구려의 영역에 포함돼 있던 대흥안령의 훌른보이르 초원의 현재 모습. 물가에서 말과 양 떼가 방목되고 있다. 윤석하 사진작가 제공

 

통일은 우리 민족 최대 숙원 중 하나다. 동시에 통일은 우리 민족의 대도약에 필수 요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통일 대박’이란 용어가 가슴에 와 닿는다.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이전의 고구려. 장수왕도 똑같은 생각을 했다. 고구려를 동아시아의 최대 제국으로 성장시키려면 통일이 가장 큰 과제였다. 우선 장수왕은 주변국에 대한 정비를 끝냈다. 국제관계를 안정시켰으니 본격적으로 통일 정책을 추진했다.

첫 단계는 영토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면 정치적 통일을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 장수왕은 남쪽으로 진격하면서 해양봉쇄 작전을 폈다. 백제와 신라가 중국 남북조와 교류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미 백제 개로왕은 고구려를 폄하하는 국서를 북위에 보낸 바 있다. 475년 고구려의 3만 대군이 백제 한성을 점령하고 개로왕을 죽였다. 고구려군은 계속 남진했다. 평택만을 장악했고 금강을 넘었다. 대전의 월평산성을 포함해 이 일대에는 이 무렵 고구려가 쌓은 성이 적지 않다.

신라와 가야도 공격했다. 내륙 항구도시인 국원경(충주), 소백산맥 이남의 영주 순흥 청송 등을 차례로 점령했다. 동해안도 공략했다. 삼척 울진 영덕으로 진격했다. 고구려군의 기세는 무서울 정도였다.

이제 장수왕의 영토 통일 전략 결과를 보자. 전라도 경상남도 충청도 일부를 빼고 한반도의 5분의 4 정도를 차지했다. 만주의 부여에 이어 한반도 백제 신라 가야가 자연스럽게 고구려의 영역으로 편입됐다. 한민족의 기본틀이 더욱 확고해진 것이다.

장수왕이 이어 추진한 것은 종족의 통일이었다. 지금은 우리 민족과 거리가 멀어졌지만 당시만 해도 만주 일대에는 고구려 방계 종족들이 살고 있었다. 북부여 유민들이 세운 두막루국이 대표적이다. 몇몇 사료(史料)를 비교하면 부여와 선비계인 실위, 거란과 같은 계통인 해와 고막해는 서로 말이 통했고 생활풍습도 비슷했다. 북만주와 동만주 강 일대에 거주하는 물길(숙신 읍루 말갈 여진 만주족으로 명칭이 변한다)도 그런 종족 중 하나다.

조선시대 성리학자들은 이 종족들을 오랑캐라고 멸시했다. 하지만 큰 틀로 볼 필요가 있다. 그 종족들은 우리 민족과 혈연공동체 언어공동체 역사공동체다. ‘남’이 아니란 얘기다.

이런 종족들이 어울려 사는 고구려는 요즘 말로 다문화 체제였다. 고구려 영토에는 논농사 농경지, 밭농사 농경지, 대초원, 건조지대, 삼림, 해양이 혼재돼 있었다. 쉽게 말해 농경민 유목민 사냥꾼 해양민이 어울려 독창적인 문화를 일군 것이다.

고구려가 강력한 제국으로 우뚝 서려면 이 다문화 공동체를 온전히 유지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문화와 사상의 통일이 필수적이었다. 그래야 주변 국가들과의 경쟁에서도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장수왕은 이 통일을 위해 고조선(원조선) 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던 사상을 끄집어냈다. 그것은 바로 ‘조화와 상생’이었다.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가 처음부터 자기들 역사이며 백제 신라와 다른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고구려는 고조선을 계승한 나라다. 중국 문헌인 ‘후한서’에도 “고구려, 옥저, 예는 다 조선 땅에 있다”고 적혀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 첫머리에 주몽을 단군의 아들이라고 썼다. 이승휴는 ‘제왕운기’에 “신라 고례 남북옥저 동북부여 예맥은 모두 단군의 자손(故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扶餘 穢與貊皆檀君之壽也)”이라고 기술했다. 고주몽이 첫 번째로 벌인 정복사업에 대해 ‘삼국사기’는 “다물려어위복구토(多勿麗語謂復舊土)”라고 기록했다. ‘다물’은 고구려 말이며 옛 땅(구토)을 수복한다는 말이란 뜻이다. 이때 말하는 다물은 언어적 측면을 넘어 고구려의 국시이자 모든 것의 통일을 의미한다.

세종시 근처인 부강면 남성골산성에서 발견된 고구려 금제귀걸이. 서영일 한백문화재연구원 박사 제공

1979년 충북 충주의 남한강 가에서 고구려비가 발견되었다. 비문에는 ‘오월중고려태(대)왕조왕(五月中高麗太(大?)王祖王)’ ‘신라매금(新羅寐錦)’ 등의 글이 적혀 있었다. 신라왕이 와서 고구려 태왕에게 무릎을 꿇었다는 뜻이다. 이 글로 미뤄 짐작컨대 장수왕 시절 고구려는 우리 민족과 주변 종족을 통일시켜 제국의 반열에 올랐음에 틀림없다.

아쉽게도 장수왕은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다. 하지만 분열된 고조선 영토를 대체적으로 회복하고, 남북으로 흩어진 우리 민족과 방계 종족을 다시 흡수해 일원적 체계를 구축했다. 그 결과 고구려만의 독특하면서도 다양한 문화를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고구려가 동아시아의 중핵국가로 재정립(re-foundation)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던 것이다.

 

 

강화도에는 연개소문과 연관된 설화와 유적지들이 많이 있다. 하점면 고인돌공원 앞에는 연개소문을 기리는 추모비가 있다. 이경수 씨 제공

 

‘연(淵)은 성이고, 개소문은 이름이다. 외모가 뛰어나고 아름다우며, 기운이 호방해서 작은 일에 대범했다.’ ‘잔인무도하고, 몸에는 크고 작은 칼 다섯 자루를 차고 다녔다.’

이상은 삼국사기의 기록이다.

당 태종 이세민은 고구려를 치면서 몇 가지 명분을 내세웠다. 그 가운데 하나는 연개소문이 임금을 시해하고 백성들을 학대하며, 당의 명을 듣지 않아서 토벌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렇게 연개소문을 악의적으로 평가하고 전쟁을 도발하는 명분으로 삼은 것 자체가 연개소문이 뛰어나고 두려운 상대라는 반증이 아닐까?

그렇다면 연개소문은 어떤 인물이고, 그가 추진한 정책은 고구려와 우리 민족사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연개소문은 스스로 물에서 탄생했다고 말해서 사람들을 현혹시켰다고 한다. 동부(서부?)대인인 아버지가 죽자 귀족들은 그가 대대로 내려온 직위를 계승하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 그의 잔혹한 성품을 이유로 내세웠다. 결국 연개소문은 정변을 일으켜 대막리지(행정과 군사를 장악한 최고의 권력자)가 되어 무려 23년 동안 고구려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다.

그를 역사적 인물로 등장시킨 계기는 당나라와의 전쟁이었다.

당시 동아시아의 역학 관계로 보아 (패권을 놓고) 고구려와 당이 갈등을 빚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당은 수나라의 큰 패배를 설욕하려 했고, 한반도를 완전히 정복하려 했다. 하지만 건국 초기에는 민란과 권력 쟁탈전 등으로 내부가 혼란스러웠고, 국제적으로도 주변국들의 침입 등으로 불안정했다. 따라서 본격적인 전쟁 준비에는 시간이 걸렸다.

현실적으로 당나라에 비해 국력이 열세였던 고구려는 국가의 존엄을 지키면서 기존의 세력을 유지하려면 당나라 건국 초기에 주변국들과 우호관계를 만들면서, 전쟁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하지만 영류왕과 대부분 귀족들은 당과 유화정책을 취하고 있었다. 결국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눠졌다.

영류왕은 612년 평양성 방어전에서 대승을 거둔 인물이었지만 당의 공격에 수비전과 지구전을 택했다. 이에 연개소문은 반발했다. 그는 공격전을 선호한 강경파였다. 연개소문이 당에 선제공격할 것을 주장하자 영류왕은 그를 천리장성 감독관으로 쫓아낸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이를 받아들이는 대신 반란을 택했다. 그는 영류왕을 추종하던 온건파 대신들 100여 명을 죽이고, 영류왕까지 죽인 후에 스스로 대막리지로 등극하며 정치권과 군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제 연개소문과 당 태종의 정면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 되었다.

645년 5월, 당나라의 대공격이 육지와 바다에서 시작됐다. 요하(서만주의 요동과 요서를 나누는 강·고구려의 서쪽 경계) 전선이 무너지고 성들은 함락당했다. 안시성 전투가 벌어지자 연개소문은 즉시 압록강 방어를 맡은 15만 명의 고구려군과 말갈군으로 구성된 혼성군을 파견한다.

이 혼성군은 대패하지만 성주(城主)인 양만춘은 고군분투해 안시성 방어에 성공한다. 연개소문 군대는 퇴각하는 당 태종 군대를 계속 추격하여 당 태종을 여러 차례 위기에 몰아넣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이 북경 근처까지 진격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북경 주변에 ‘고려성’이라는 이름의 성이 있고 ‘고려’가 들어가는 지명이 여러 군데 있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했다.

어떻든 당 태종은 연개소문과의 첫 대결에서 대패한 이후 647, 648년 계속해서 요동반도 해안과 압록강을 공격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죽었다.

이런 국제 정세 속에서 당시 국내 정세는 어땠을까.

642년 신라의 김춘추가 연개소문을 찾아온다. 백제를 공격하고 고구려에 우호를 요청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빼앗긴 한강 유역의 영토를 요구했고, 김춘추가 이를 거절하자 그를 옥에 가두고 만다. 우여곡절 끝에 탈출한 김춘추는 훗날 당과 동맹을 맺어 고구려를 공격하게 된다.

연개소문 상상도.

연개소문은 왜와 가까웠던 백제와 공동 군사 작전을 펼치지만 강력한 동맹관계는 맺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 도중에 왜국에 사신을 자주 파견하여 고립을 타개하려 했다. 또 돌궐에도 사신을 보냈고, 멀리 중앙아시아의 강국(康國·현재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에도 사신을 파견했다. 당이라는 거대 제국에 맞서기 위해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한 것이다.

당나라는 산발적으로 고구려 국경을 넘보기도 했지만 연개소문이 살아있는 한 고구려 정벌을 성공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연개소문이 665년(?)에 죽으면서 고구려의 운명도 내리막길을 걷는다.

연개소문의 죽음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역사가들은 고구려 멸망 원인을 연개소문 사후의 내분 탓으로 돌리고 있다. 20여 년에 걸친 전쟁으로 민심이 떠났으며, 자식들이 권력 쟁탈전에 몰입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기록에 의하면 큰아들인 연남생은 동생들의 배신으로 당나라로 도피했다가 도리어 고구려를 공격했다. 동생인 연정토는 많은 군사와 백성들을 데리고 신라로 망명하였다. 절대 권력자 아들들의 권력 투쟁은 국가의 멸망으로 이어졌다. 연개소문의 타계 3년 후인 668년 9월에 평양성은 함락되고 고구려는 700년의 장구한 역사를 마감한다.

역사가들은 연개소문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한마디로 극과 극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연개소문은 임금을 죽인 역적이며 고구려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라고 평한 반면 신채호는 ‘고구려의 대정치가이자 대장군’으로, 박은식은 ‘국가의 존엄을 지키고 대륙을 호령했던 절세의 영웅’으로 평가하고 있다.

어떻든 대한민국이 글로벌 무대의 주역으로 뻗어나가는 이때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를 우리 국내적 시각으로만 가둘 일은 아닌 듯하다. 당시 국제 정세에서 당나라를 상대로 싸워 이긴 그의 호방한 상상력을 사료 발굴과 재평가 작업으로 다시 새길 필요가 있다.

고구려가 해양을 공략하던 당시 중심지 역할을 한 비사성이다. 황해와 발해 지역을 동시에 관측할 수 있다. 윤석하 사진작가 제공

 

 

589년 수나라는 400년 동안 분열됐던 중국을 통일한다. 정치권력과 군사력을 중앙으로 집중했고 중화주의를 발동해 동아시아 종주권을 확립했다. 반면 북방에서는 돌궐이 초원을 통일했다. 세력균형과 안정의 시대가 무너지고 질서재편을 위한 국제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이 되었다.

고구려는 무기를 개발하고 군사력을 강화했다. 말갈과 함께 거란을 끌어들였고, 적대국인 돌궐과도 제휴를 모색했다. 왜(일본)와는 담징 같은 승려들과 사신들을 파견해 대외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있었다. 수나라에 우호적이었던 백제와 신라와는 전쟁 중이었다. 고구려의 온달장군은 신라를 공격하다 전사했다.

598년 수나라와의 70년 전쟁의 서막이 올랐다. 고구려는 말갈을 동원해 해륙 양면으로 선제공격에 들어갔다. 수나라가 30만 대군을 파견했지만 육군은 요서에서 패하고 수군(水軍)은 황해 북부에서 궤멸됐다. 3개월 전투에서 죽은 수나라 군사가 10명 중 8, 9명꼴이었으니 단연 고구려의 압승이었다.

수나라 양제는 대규모 전면전을 준비했다. 대만과 북베트남을 정복하고 광동 성을 거점으로 동남아시아를 무역권에 포함시켰고 북경 외곽에서 절강성의 항주에 이르는 대운하를 건설했다. 이는 끊어졌던 물류망과 시장을 일원화하고 전쟁물자를 원활하게 운반하기 위해서였다.

612년, 113만3800명이라는 수나라 대군이 다시 쳐들어온다. 수천 척의 배가 출정했으며 800명을 태운 전함도 동원되었다. 수 양제는 고구려의 요동성(현 요양시)을 집중 공격했다. 당거(바퀴 달린 이동용 수레) 운제(높은 사다리)를 동원해 땅굴을 파기도 했다. 이때 벌어진 고구려와 수나라와의 전쟁은 세계 전쟁 사상 단일 전쟁으로는 최대 규모라 할 수 있다. 고구려는 이 전쟁에서 요동성을 지킴으로써 방어에 성공한다. 민관 합일에 의한 단합의 힘이었다.

수나라의 평양성 공격도 수포로 돌아간다. 고구려 작전에 말려든 수나라 군대는 파죽지세로 진격하다 평양성 60리 밖에서 고건무 장군의 공격을 받고 일시에 무너져 버린다. 패배감에 사로잡히고 군량미와 무기가 부족해진 수나라 군대는 퇴각하기에 급급했다.

이때 등장한 영웅이 바로 고구려의 을지문덕 장군이다. 그는 미리 살수(압록강설과 청천강설, 대양하설이 있다)에 군대를 매복해 두었다가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그의 전략으로 수나라 병사 30만 명 가운데 살아 돌아간 병사는 겨우 2700여 명에 불과했다. 수나라는 고구려에 패배한 것이 결정적 요인이 되어 건국 30년 만에 망한다.

수나라를 계승한 나라가 바로 당나라다. 당 태종은 중국 역사상 최고 군주로 평가받는 정치가. 당 태종은 지난 수나라 때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서라도 고구려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했다.

성급한 수 양제와는 달리 당 태종은 단계적으로 경제 외교 군사를 활용하는 전략을 폈다. 동남아시아와 남방교역을 활성화해 경제력을 강화했으며 북방의 강국인 돌궐을 동서로 분할시켰고 약화된 동돌궐과도 싸움을 벌여(630년) 승리했다. 이어 서남쪽의 강국인 토번(티베트)을 침략(638)했고,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 실크로드의 고창국(신강성의 투루판)을 공격해서 멸망시켰다(640년). 또 백제와 신라를 고구려의 대항세력으로 키워 분열정책을 취했다.

당나라는 수나라보다 강했다. 당나라에 겁을 먹은 고구려 일부 지배층은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얻은 포로를 돌려보내고, 국가기밀에 해당하는 봉역도(일종의 고구려 지도)를 달라는 당 태종의 요청을 받아들여 넘겨주는 유화책을 편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를 바로잡은 이가 바로 연개소문이다. 그는 642년 반란으로 정권을 잡은 뒤 당나라에 굴복하려는 내부의 ‘적’들을 제거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마침내 고구려의 실질적 지배자가 된 연개소문과 당 태종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밀고 밀리는 ‘고구려-당’ 전쟁을 벌인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는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와 종족을 모두 참여시켜 승리하지만 665년 연개소문이 죽으면서 내분으로 망한다.

중국은 “고구려는 중국 역사이고 중국의 지방정권이기 때문에 고구려와 수·당이 벌인 전쟁은 (중국의) 국내 전쟁”이라고 주장한다. 이게 바로 동북공정의 주장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벌인 전쟁은 겉으로는 고구려와 수나라 당나라가 맹주였지만 거란, 말갈, 토욕혼, 돌궐 백제 신라 왜까지 얽혀 동아시아의 종주권과 교역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운명을 건 국제전이었으며 여기서 당당히 승리한 우리 역사이다.

역사를 돌아보면 통일된 중국은 일정한 패턴을 갖고 제국을 완성해갔다. 1980년대 초부터 남방 경제특구정책, 몽골공정, 서남공정(티베트 지역) 서북공정(신장 지역), 그리고 동북공정에 이르고 있다. 혹시 중국은 21세기인 지금에도 대당(大唐)제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는 게 아닐까.[끝]

 

 

 

 

 

윤명철 교수와 강단사학자 여러분, 장수태왕은 지금의 북한평양성(장안성)으로 천도하지 않았답니다..

 

장안성(북한 평양성)으로 천도한 왕은 평원왕입니다/[삼국사기/고구려국본기/평원왕]二十八年 장안성으로 천도하다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은 거란의 요나라가 동경으로 삼은 요양입니다..[요사]

 

 

[遼史地理志] 卷三十八 志第八 地理志二 東京道"북위 태무제(A.D 423-452년)의 사자가 (고구려왕 장수태왕이) 기거하는 평양성에 왔는데, 이 곳은 요의 동경(요양)이다. 당 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이 곳에 안동도호부를 두었다." 元魏太武遣使至其所居平壤城遼東京本此 唐高宗平高麗 於此置安東都護府」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설치한 안동도호부가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니라 요양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그런데 윤명철 교수를 포함한 강단사학자들은 왜 장수왕이 북한 평양성으로 천도했다고 국민에게 세뇌주입을 시키는 것인가? 밥 먹고 역사연구하면서 왜 문헌비교연구를 하지 않는 것인가?


 

 

장수왕이 고국원왕 이후 도읍인 국내성을 떠나 427년 새로 정착한 평양은 [요사/ 지리지]에 기술하고 있는 요나라 시대의 동경도(東京道)에 대한 기록 등을 볼때 오늘날의 북한 평양일 수 없으며, 요녕성 요양이다.

   이 요사 지리지에서는 지금의 요양 일대인 동경도가 본래 조선(고조선) 땅이며,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고구려왕 장수왕이) 거주하고 있는 요양 평양성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3자인 북위 입장에서 기술한 내용이 정확히 맞는 것이다.


요양에 도읍한 고구려가 결국 지금의 북한평양으로 옮긴 것은 [삼국사기] 기록 등을 존중할 때 제25대 평원왕(재위 559-590) 시기다다.

    북경에 사신을 다녀온 연암 박지원이 "평양은 원래 한 곳이 아닌데 모두 조선 땅 평양 하나만을 생각한다."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음에도, 식민지시대 일본학자들이 고착화해 놓은 학설에서 우리 학계가 탈출하지 못하고 있다.

 

 

 


고로 장수태왕 14년에 천도한 평양성은 현재의 북한평양이 아니라 요양(평양)이다. 장수태왕은 광개토태왕 때 백제로부터 빼앗은 요서지방(遼西地方)을 지키기 위하여 요양으로 천도하기 2년 전인 A.D 425년에 북위(北魏)와 동맹을 맺었고, 북위와 전쟁 가능성이 없어지자, 수도를 요양으로 옮겼다.

 

 

이 요양의 평양성은 문자태왕, 안원태왕, 양원태왕, 평원태왕 때까지 사용되었다가 평원태왕 때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고 고구려를 노리자,다시 북한의 평양성(장안성)으로 천도하여 고구려의 최후와 함께 했다.

 

 

[한단고기-고구려국본기]"강남에는 월주가 있었다. 그 속현은 산음 산월 좌월이있었다. 문자제(문자태왕)의 명치 11년 11월에 이르러 월주를 공격하여 취하고, 서군현을 고쳐 송강 회계 오월 좌월 산월 천주라 했다 12년 신라의 백성을 천주(홍콩)로 옮기고 이로써 알맹이를 삼았다. 이 해에 백제가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병력을 파견하여 공격하여 요서의 진평 등의 군을 취하고 백제군을 폐했다."

 

 

장수태왕은 북위왕에게 국서를 보내 북위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정벌하자는 개로왕에 분노하여 한성백제를 초토화시키고 개로왕을 참살하였다. 그리고 남진하여 충북 단양에 중원고구려비를 세우고 한반도지역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며, 장수태왕의 손자인 문자태왕 시기에는 중국동해안 지역인 서백제 지역을 차지하여 수.당이 중국을 통일이전까지 그야말로 무적 고구려 천하를 실현하였다.

 


[몽골비사]대무진은 고리(고려=고구려)군장-징기즈칸이 고리족임을 알 수 있다.

고리는 단군한국의 봉후국으로

서요하 임황을 도읍지로 삼았던 나라로 1대 국왕이
단군왕검 천왕의 차님인 부소 황태자였다.

이 고리국 출신이 바로 22대 색불루 단군천왕으로

은나라가 단군한국의 영토를 침략하자 응징하고,

23대 아홀 단군천왕 때 중국대륙을 직접 통치했다.


고추모는 동부여에서 부여로 망명하여 부여공주 소서노와 혼인하고 아들이 없던
고무서 단군천왕의 후계자로 왕위에 즉위한 후에  그러한 영광된 선조들의 나라의 국호로
바꾸었던 것이다. 부여시조 해모수.부여동명왕 고두막이 모두 고리족 사람들이였다.


따라서 징기즈칸을 고리군장이라고 기록했을 때는

징기즈칸 선조들이 만주에서 나온 고리족임을 알 수 있다.

몽골인들이 한국을 솔롱고스라 칭함은 한국이 자신들의
뿌리가 되는 모국이기 때문이다. 솔롱은 솔방울을 의미하는 말로서
신단수 소나무의 열매를 의미한다. 이는 고리족의 뿌리가
소나무 지역인 한반도지역임을 명확히 증명하는 말이다.

고추모가 고구려를 세운 환인이 바로 골본(홀본)이다.
즉 고리의 뿌리지역이라는 의미다. 따라서 한반도지역이
맞고, 세계 최다 피라미드 무덤지역이기도 하다.

고대부터 해로 상징되는 하나님의 나라를
의미하는 한국은 남한지역을 의미했고, 북쪽으로 이주하면서
하나님께 제사를 지낸 환인.환웅.환검 임금들의 국호가 되었다. 
징기즈칸 역시 탱글이(둥글이=우주하나님)에게
기도를 하고 제사를 지냈다.

따라서 징기즈칸은 동방의 해를 자처하며
한반도에서 유럽까지 비추는 해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징기즈칸의 소원은 지구촌이
갈라지지 않는 하나의 나라(한국)을
세우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징기즈칸 사후 영토와 권력을 놓고
자식들과 손자들간의 권력다툼이
벌어져 분열하고 결국 사라지고 말았다.

징기즈칸은 정착하면 썩기 때문에
항상 말을 달리라고 했다고 한다.
징기즈칸은 소유욕보다는
모든 벽과 독점을 무너뜨리는
자유와 나눔의식이 강했는지
모르지만, 자식들과 손자들은
교류와 공존이 아닌 독점과
탐욕으로 고인 물들이 되어
버렸기 때문에  역사 속으로
사라져야 했던 것이다./윤복현

 

 

 



몽골4한국

 
킵차크한국[金帳汗國]·오고타이한국·일한국·차가타이한국을 말한다.

 


몽골제국의 분열조짐은 칭기즈칸시대 아들에게 땅을 분봉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칭기즈칸은 장남 조치, 차남 차가타이, 3남 오고타이에게서 북외몽골 및 그 서부를 봉지로 주었고, 막내아들 툴루이는 곁에 두었다. 오고타이(태종) 때에 이르러 바투가 남러시아에 킵차크한국을, 차가타이는 중앙아 시아에 차가타이한국을 건설하고, 오고타이는 외몽골·내몽골, 그리고 북중국을 점령하였으나 툴루이는 봉토를 갖지 못하였다.

 


  태종의 아들 정종이 일찍 죽자 쿠릴타이는 툴루이의 아들 헌종을 황제로 옹립하였으며, 헌종은 외몽골지방으로부터 북중국의 지배자가 되었다. 헌종은 새로운 봉지를 찾기 위해 동생 훌라구를 페르시아에 파견하여 일한국을 세우게 하는 한편 자신은 동생 쿠빌라이와 함께 남송(南宋)을 정복하기 위해 나섰다. 전쟁 도중에 헌종이 죽었으며, 쿠빌라이는 베이징[北京]으로 귀환하여 임시 쿠릴타이를 개최하고 1260년 대칸[大汗]에 즉위하였다. 그러자 이를 반대하던 사한국이 독립을 선언하였다.

 

 

  오고타이한국(1218∼1310)은 몽골적 색채가 가장 강한 나라였다. 오고타이한국의 지배자 하이두(Haidu)는 전몽골의 지배권을 얻기 위해 30여 년 중앙의 세조에 대항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그후 차가타이한국에 합병되었다.

 

 

즉, 칭기즈칸은 중앙아시아 원정을 떠나기에 앞서 미리 그 일대의 땅을 여러 아들에게 분봉(分封)했는데, 오고타이는 톈산북로[天山北路]의 에밀 지방(현재의 중국령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북서부에 위치)으로부터 이르티슈강 상류지방을 소령지(所領地)로 받았다. 오고타이[太宗]와 그의 아들 구유크[定宗]는 잇따라 몽골제국의 대칸[大汗]이 되어 수도인 카라코룸으로 옮겨갔으나, 남은 일족은 원래의 소령지를 계승하였다.

 

 

  구유크칸이 죽은 뒤 몽골제국의 대칸 자리는 툴루이가(家)의 몽케[憲宗]와 그 자손이 차지하여 오고타이가는 권력을 잃고 불만이 컸다. 특히 오고타이의 손자 카이두[海都]는 툴루이가의 쿠빌라이[世祖]가 원조(元朝)의 대칸이 되자 이에 항거하여, 중앙아시아의 차가타이한국도 지배하고 1260년대부터 1301년까지 원나라와 싸웠다.

 

 

그러나 카이두의 뒤를 이은 그의 아들 차바르[察八兒]는 차가타이한국의 두와칸에게 영토를 빼앗기고 1310년 도망하여 원나라에 귀순했기 때문에, 오고타이한국은 멸망하였다. 이 나라는 1세기도 채우지 못한 단명(短命)의 유목국가로서 제도나 문화면으로는 볼 만한 것을 남기지 못하였다.

 

 

   중앙아시아를 지배한 차가타이한국(1227∼1360)도 칸위[汗位] 계승권을 둘러싼 싸움 끝에 쇠퇴하여, 14세기 중엽에는 동투르키스탄의 동차가타이한국과 서투르키스탄의 서차가타이한국으로 분열되었다. 티무르제국이 일어나자 서차가타이는 그 영토의 일부가 되고 동차가타이는 그 속국이 되었다. 즉 차가타이는 아버지에게서 4,000명의 군대를 얻고, 한국의 영지 비시발리크에서 사마르칸트에 이르는 톈산[天山]의 계곡지대를 받아가지고 본영(本營)을 일리 분지의 알말리크에 두었다.

한국은 처음에는 오고타이, 구유크, 몽케 등 대(大)칸의 통제를 받았으나 1260년 쿠빌라이가 원(元)나라를 세우면서 독립을 꾀하였다. 그러나 오고타이의 손자 하이두는 쿠빌라이에 대항하여 전쟁을 일으켰으며, 그 결과 차가타이 한국은 하이두의 지배에 들어갔다.

 

 

  1301년 하이두가 죽자 차가타이가(家)의 두와 칸은 원나라와 화해하여 한국의 독립과 통일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두와의 여러 아들이 서로 분립하여 권력을 다투다가 마침내는 톈산 방면에 거점을 둔 동부 한가(汗家)와 서부 투르키스탄에 웅거한 서부 한가의 동서로 분열하였다.

 

 

서부에서는 투르크화한 한국의 귀족(아미르)들이 권력을 다투자, 그 중에서 티무르가 나타나서 서부 한가를 평정하고 1369년에 티무르 제국(帝國)을 건립하였다. 차가타이 한국은 조직화된 국가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정주지대(定住地帶)의 통치를 하였는데, 특히 징세(徵稅)는 토착민인 이슬람교도의 대관(代官)이 행하였다. 서부 한가는 14세기 초부터 투르크 이슬람화하였으나, 에센 부카를 시조로 하는 동부 한가는 모구리스탄 한국으로 불리며 몽골의 유목적 생활전통을 유지하기도 하였는데, 16세기 초까지 톈산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

 

 

  이슬람 영토에 세운 일한국(1256∼1411)은 초기에는 그리스도교를 옹호하고 이슬람교를 압박하였으나, 뒤에는 이슬람문화를 발전시켜 몽골·페르시아문화를 꽃피우고, 수학·지리학·역사학 분야의 학자를 많이 배출하였다.

 

즉, 시조인 훌라구칸은 칭기즈칸의 손자이며, 헌종 몽케칸의 아우이다. 일한이란 투르크어로 '나라의 왕'이라는 뜻이며, 훌라구왕조 군주의 칭호이다. 1253년 훌라구는 아버지 몽케칸의 명령에 따라 이란 원정길에 올라 1258년 바그다드를 공략하여 아바스왕조의 칼리프 정권을 멸하고, 1259년 일한국을 건설하였다.

 

  역대로 타브르즈를 수도로 하였다. 초기의 군주는 네스토리우스파(派) 그리스도교와 불교를 보호하여 이슬람교국인 이집트의 맘루크왕조와 싸우고, 로마 교황 및 프랑스와는 외교관계를 맺었다. 제7대 가잔칸은 일한국 중흥의 영주(英主)로서 이슬람교를 보호하여 국교로 삼았고, 중앙집권정치를 확립하였으며 토지제도를 개혁하고 이슬람사원을 세웠으나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교국가와도 우호관계를 맺었다.

 

  제8대 올자이투칸도 유럽과 관계를 맺고, 맘루크왕조를 공격하였으며, 한편 종실(宗室)인 원(元)왕조와 유대하여 동족인 차가타이한국과 대립하였다. 제9대 아부사이드 칸(재위 1317∼1334) 때부터 일한국은 쇠퇴하였으며 귀족들이 왕권을 둘러싸고 항쟁하여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결국 서(西)투르키스탄에서 일어난 티무르[帖木兒]에게 정복되어 1411년 멸망하였다.

 

  킵차크한국(1243∼1502)은 14세기 초 우즈베크와 자니베크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안으로 러사아 제후를 지배하고 밖으로 동로마제국 황제와 친교를 맺는 한편 이집트와 통혼하여 국가의 기틀을 튼튼히 하였다. 흑해무역을 독점하여 경제적으로 번영하였으며, 이슬람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자니베크가 죽은 뒤 내란이 일어나고 티무르제국의 침입을 받아 쇠퇴하여 16세기 초 모스크바대공 이반 3세에게 멸망하였다.


즉 금장한국(金帳汗國)이라고도 한다. 칭기즈칸의 장자 주치[求赤:拙赤]는 이르티슈강(江) 이서(以西)의 스텝을 영지로 받았으나 주치의 사후 그의 차남 바투는 몽골 서정군의 총수가 되어 러시아 및 동유럽 각지를 석권함과 동시에 남러시아를 확실히 장악하여 킵차크 한국의 기초를 구축하였다.

 

 

신도(新都) 사라이가 이룩된 볼가강의 하류지방은 유라시아의 스텝을 경유하는 실크로드와 북방으로부터의 모피로(毛皮路)가 교차되는 요충을 점하여 오랫동안 투르크계 하자르족이 활약하는 무대가 되어 있었다. 몽골군이 출현했을 때에는 같은 투르크계 킵차크족이 북쪽의 불가르, 서쪽의 슬라브 및 동로마, 동남의 이슬람권과의 사이의 중계무역에 의하여 번영하였다.

 

 

또 몽골의 지배자가 급속히 투르크화, 이슬람화한 현상도 같은 사실에서 유래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나라는 그 중계적 입장을 더욱 강화하였으며 제3대의 베르케 칸이 건설한 신(新)사라이는 구(求)사라이와 함께 국제시장으로서 크게 번창하였다. 그러나 제9대 우즈베크 칸의 최성기 이후 14세기 말부터 티무르군에게 유린되는 등 퇴색이 짙어져서 국토는 카잔 ·크림 ·아스트라한의 3한국으로 분열되고 그들이 대립 ·항쟁하는 가운데 모스크바 대공 이반 3세에게 멸망하였다./두산대백과사전>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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