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입된 집단은 무덤을 남긴다...신라왕조세운 주역은 흉노쇠망시 모용선비족에 흡수되어 고구려 정벌에 동원되었다가 대패하여 동해안으로 흘러 들어 온 흉노족
작성자나는나였다작성시간14.07.13조회수593 목록 댓글 0
동방의인 코리아대칸이
삼태극 카페 게시판을 통하여
지금까지 수없이 밝혀준 내용으로
신라왕조를 세우고 경주지역에
왕릉급인 대형 적석목곽분을 남긴
주인은 4세기 모용선비족에 흡수되어
고구려 정벌에 동원되었다가
고구려 북부전선에서 고국원태왕의
동생인 고무 대장군이 이끄는
고구려 기마군에게 대참패를 한 후
동해안을 타고 들어 온 모용선비족의
기마용병집단인 흉노족이다
* 국호를 신라를 정하고 순장을 금지하고 농경을 시작한 지증왕의 아들로
신라의 중앙집권화를 실현한 법흥왕(이름:모즉지=>김원종) 이후 대형화는 소형화된다 *
흉노족은 중앙 아시아 초원세력으로
서남해 마고성의 남방식 고인돌 석관묘양식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적석목곽분은 중앙 아시아 초원민족의
무덤양식이라는 사실은
역사의 상식이다
부정한 자들은 역사를 운운하지 말 것이다
무덤은 인간들이 남기는 부정할 수 없는
역사의 흔적으로 적석목곽분을 남겼다는 것은
늑대개를 조상으로 삼는(그래서 동방의인
코리아대칸이 백인족과 혼혈된 혼혈족이기에
노랑개족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중앙 아시아 초원세력이 경주로
유입되었다는 고고학적 증거다
신라의 북쪽 고구려, 백제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匈奴風(흉노풍)의 유적과 유물이 어찌하여 한반도의 동남단 신라(그리고 가야)에서만 나타나고 있는지는 한국 고대사의 오랜 수수께끼였다. 4세기 중반의 어느 날, 말을 탄 一團(일단)의 무사들이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경주 땅에 밀려들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불청객이었지만 그들은 우세한 武力(무력)으로 경주 땅을 정복하고는 신라의 지배층이 되었다. 그리고는 한 동안 馬上(마상)에서 권력을 휘두르다 기마족의 문화를 짙게 남겨둔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갔다. 匈奴(흉노)의 피를 이어받은 「鮮卑族 慕容氏(선비족 모용씨)」, 훗날 金(김)으로 성을 바꾸는 신라 왕족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4세기께 신라 땅 경주에는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이 출현하고 있다. 바닥에 냇돌을 깔아 목관을 안치하고 그 주위에 통나무로 상자모양의 목곽, 즉 방을 만들었다. 그리고는 그 위에 돌을 쌓아 올리고 바깥에는 흙을 부어 거대한 봉분을 조성하는 방식이다
경주 땅에서 적석목곽분을 조성한 세력은 4세기 중반 이후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金씨 왕족이란 것이 정설이다. 이 적석목곽분이 匈奴族(흉노족)을 비롯한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이 조성했던 무덤과 매우 유사한 방식으로 조성됐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이를 만든 金씨 왕족의 뿌리가 대초원지대의 기마민족임을 알게 해 주었다. 무덤 형식만 바뀐 것이 아니라 적석목곽분에서 나온 출토물도 과거와 크게 달라진다. 신라 적석목곽분은 가히 「騎馬文化의 타임캡슐」이라 할 만하다.
중앙아시아 대초원지대의 기마유목민족들이 즐겨 사용했던 각종 제품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기 때문이다. 금관과 장신구, 금으로 만든 허리띠, 띠 고리(버클), 각배(뿔잔), 보검, 유리제품 등은 스키타이族과 흉노族 등의 기마민족들이 즐겨 사용한 것과 비슷하거나 동일한 제품들로 밝혀졌다
* 문헌과 고고학적으로 잘 정리한 내용으로 소개합니다 *
신라왕조세운 주역은 흉노쇠망시 모용선비족에 흡수되어 고구려 정벌에 동원되었다가 대패하여 동해안으로 흘러 들어 온 흉노족
[자료]慕容씨에서 金씨로의 創氏改名(KBS 장한식 기자 )
신라 김씨왕이 선비족 모용씨였다는 결정적 문헌은 있을 수 없다. 金씨왕들은 기존의 신라인들과 힘을 합쳐 새 나라를 건설하는 입장이었던 만큼 「우리는 대대로 신라 땅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다」는 기록을 남기는 게 정상이지 「원래는 모용 선비였는데 석씨 임금을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는 기록을 남길 리 만무하다.
하지만 金씨왕의 기원이 모용선비임을 알게 해주는 약간의 단서는 있다. <사진8-신라 지배층의 얼굴> 신라 법흥왕에게는 두 개의 姓(성)과 이름이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권 법흥왕의 기록을 그대로 옮겨본다.
<법흥왕이 즉위하니 이름은 원종이다. 『책부원구란 옛 책에는 성은 募(모), 이름은 泰(태)라 했는데, 태는 遺事(유사:책 이름) 王曆(왕력)에는 秦(진)이라 돼 있다』 지증왕의 원자로서 어머니는 연제부인이요 왕비는 박씨, 보도부인이다. (法興王立, 諱原宗『冊府元龜, 姓募名泰, 泰, 遺事王曆作秦』, 智證王元子, 母延帝夫人, 妃朴氏 保刀夫人)>
김부식은 삼국사기를 저술하면서 법흥왕 김원종의 성과 이름을 募泰(모태) 또는 募秦(모진)으로 괴상하게(?) 적고 있는 고기록의 출처를 밝혀두었다.
金씨로 알고 있는 법흥왕의 성과 이름을 이런 식으로 표기하고 있는 사례는 삼국사기뿐만 아니고 중국의 다른 역사서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姚思廉(요사렴)이란 당나라 학자가 쓴 梁書(양서)에는 신라 법흥왕이 즉위 8년, 서기 521년 중국 강남에 자리잡고 있는 漢族의 나라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친 사정을 기록하면서 신라 임금의 성은 「募(모)」요 이름은 「秦(진)」 이라고 적고 있다.
그 뒤 이연수란 당나라 학자가 편찬한 南史(남사)란 역사책에는 법흥왕의 성을 「募(모)」 이름을 「泰(태)」로 기록하고 있다. 秦과 泰는 글자 모양이 비슷하기 때문에 梁書(양서)의 기록을 南史(남사)에서 옮겨 적다 오기한 것으로 보인다. 또 다른 중국역사서 通典(통전)에는 법흥왕의 성명을 「慕秦」으로 적고 있다.
-모용씨(慕容씨)에서 김(金)씨로의 창씨개명
이제는 慕容씨가 언제 어떻게 해서 金씨로 성을 바꿨는지 알아볼 차례다. 서기 521년 법흥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 정사서에서 신라왕의 성을 모(慕, 募)로 적고 있고 그로부터 3년 뒤인 524년 봉평신라비에 법흥왕의 성을 牟(모)로 적고 있다고 할 때 적어도 524년까지는 신라왕의 성이 「慕」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564년 진흥왕이 사신을 보냈을 때 중국측은 왕의 성을 金으로 적고 있으므로 「慕」에서 「金」으로의 성씨 변화가 일어난 때는 524~564년 사이 40년간으로 좁혀진다. 법흥왕 시절일 수도 있고 진흥왕 在位기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법흥왕은 모진과 김원종 두 개의 성명이 전해지는 반면, 진흥왕은 金으로 시작하는 이름뿐이므로 법흥왕 시절 창씨개명이 단행됐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모(용)씨란 기마민족의 성을 버리고 중국식 金씨 성을 취한 배경은 殉葬(순장)의 금지(법흥왕의 아버지 지증왕 때 일), 율령제 실시, 불교 公認 등을 통해 기마족의 나라 신라를 농경문화민족으로 바꾸고자 했던 법흥왕의 개혁정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위에서 든 필자의 책 2부 참고). 모용씨에서 金씨로의 성씨 변화는 엄청난 사건인데 전혀 기록이 없다는 데 대해 의문이 들 수 있다.
이에 대해 나는 법흥왕이 숨지고 6년이 지난 진흥왕 6년 이사부와 거칠부 등 왕실 종친이 주축이 되어 꾸민 「國史(국사)」에 그 혐의를 둔다. 국사는 신라 金씨왕실의 정통성을 반석 위에 두고자 했던 일종의 통치이념서다.
이런 책을 통해 신라 金씨 왕실은 하늘이 보낸 선택된 종족이며 신라 초기부터 대대로 살아온 것처럼 역사를 조작(?)했다고 본다. 「國史」는 그 책이 전해지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을 알 길이 없지만 삼국사기 등에 그 기록이 전해졌다고 볼 때 역사 날조의 증거들은 수없이 찾아볼 수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엉성한 왕의 계보이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보자. 모용씨≒金씨 세력에 의해 타도된 것으로 짐작되는 마지막 昔씨 임금이 흘해이사금이다.
그는 아버지 昔于老(석우로)가 서기 249년에 죽고 61년이 지난 310년에 즉위하는데 그때부터 46년을 왕위에 있었다고 돼 있다. 昔于老가 살았을 때 『우리 집안을 일으킬 아이다』고 칭찬했다니 아버지 昔于老가 숨질 때 적어도 열 살은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왕위에 오른 310년에 흘해는 70세쯤 됐을 것인데 46년간이나 왕위에 있었다니 선뜻 믿기 어렵다.
내물왕은 미추왕의 조카이자 사위인데 미추왕은 284년에 숨진다. 그 사위 내물왕은 402년에 숨진다. 장인과 사위의 사망 연대가 1백18년이나 차이날 수는 없다.
또 제3대왕과 14대 임금은 둘 다 儒理(유리), 또는 儒禮(유례)로 그 이름이 똑같다. 삼국사기 저자 김부식조차도 「두 임금의 이름이 같으니 어느 편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불평할 정도다. 왜 그럴까? 국사를 편찬한 김씨 왕족이 자신들의 조상이 昔씨 왕실을 몰아낸 사실을 숨기려고 昔씨 임금으로 이어지는 계보 한가운데 미추왕을 끼워넣다 보니 이같은 엉성한 王曆(왕력)이 나왔다고 여겨진다.
즉 성씨를 모(용)씨에서 金씨로 바꾼 법흥왕이 숨진 뒤 얼마 되지 않아 신라 金씨 왕실은 자신들의 뿌리를 감추는 일종의 「알리바이 조작 작업」을 펼쳤으니 바로 국사의 편찬인 것이다. 이 때문에 金씨의 뿌리가 모용씨였다는 사실은 철저히 인멸됐을 것이다.
다만 중국의 몇몇 역사서와 경주에서 머리 떨어진 울진 봉평리의 돌비석 정도에서 김씨의 뿌리가 모(용)씨였다는 단서가 남아 있을 뿐이다.
어쨌든 법흥왕이 모(용)씨 성을 포기하고 金이란 중국식 姓을 채택하면서 기마족의 신라통치는 막을 내렸다. 金씨왕들은 스스로를 기마족이 아닌 농경족의 임금으로 자리매김하고는 유교적 관료체제로 나라를 다스려 나갔다. 그 이후 한국인들은 1천4백년 이상 기마족의 기억을 망각한 채 철저히 농경민족으로 바뀌고 말았다. 핏줄 속에 흐르는 기마족 특유의 진취적인 유전인자를 애써 억눌러 가면서…●
-소수의 모용씨가 어떻게 신라를 정복했을까?
선비족 모용씨가 경주 땅으로 진출했다고 하더라도 불과 수천명으로 신라를 정복하고 왕위를 차지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충분히 가능했다.
모용씨가 들어왔을 때 「신라」는 없었고 斯盧國(사로국)이 맹주가 된 「辰韓(진한) 연맹」이 존재했을 것이다. 3세기 후반인260~280년경 삼한지역을 여행한 사람들의 견문을 기록한 것으로 보이는 陳壽(진수)의 三國志 魏書 東夷傳(삼국지 위서동이전)에 따르면 弁韓(변한) 12개국과 辰韓(진한) 12개 나라는 섞여 살았고 변-진한 24국의 총 가구수는 4~5만호였다 하니 진한연맹 12개국은 2~3만호쯤 됐을 것이다. 그렇다면 辰韓의 총 병력은 어느 정도 됐을까?
1가구에 평균 1명의 병사가 있었다고 보면 3만명 정도로 추산할 수 있다. 342년경의 사정도 비슷했다고 보면 모용씨 군단보다는 월등히 많은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병사의 숫자가 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유일한 변수는 아니다. 무기 수준과 사기, 전투 편제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게 마련이다. 우선 무기 수준과 전술면에서 보면 진한연맹과 모용씨 군대 간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삼국지는 「진한은 보병전에 능하다(便步戰)」고 기록하고 있다. 기병도 있었겠지만 보병 위주의 편제였음을 알 수있다. 반면 기마족이었던 모용 선비는 기병전 체제를 채택하고 있었을 것이다. 기동력 등에서 보병은 기마병의 맞수가 되지 못한다.
특히 서기 300년 이후 선비족 등 기마족은 武士는 물론 말까지도 철갑으로 무장한 蓋馬武士(개마무사), 또는 鐵騎(철기)로 불리는 중장기병 체제를 도입하고 있었다. 辰韓의 보병들로서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적과 맞닥뜨린 셈이었다. 게다가 부족국가로 이뤄진 辰韓 연맹에서 일시에 대군을 동원했을 가능성도 많지 않다.그러므로 수천명으로 추산되는 모용 선비 기마군단이 보병전 단계의 辰韓연맹 소국들을 잇달아 정복하는 데는 그리 오랜 세월이 걸렸을 것 같지 않다.
화약무기가 등장하고 포병전술이 개발되기 이전까지 대초원 지대 유목민족의 기마전술은 사실상 무적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말을 타기 시작한 기마족의 기동력과 전투의지를 농경민족들이 도저히 따라잡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때문에 기마족은 비록 소수였지만 자신들보다 몇십 배 많은 인구를 지닌 농경국가를 언제나 정복해 지배할 수 있었다. 유라시아 역사의 한 측면은 기마족에 의한 농경족의 정복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양에서는 흉노, 선비, 돌궐, 유연, 거란, 몽골, 여진족 등이 백만 안팎의 종족으로 수천만의 漢族(한족)을 차례차례 지배했다.
중앙아시아로 눈을 돌려보면 14세기에 칭기즈칸의 후예 티무르가 소수의 정예군단을 이끌고 광대한 정착지대를 정복해 티무르 제국을 건설하고 있으며, 타타르, 우즈베키스탄 등도 소수의 기마족이 우세한 전투력으로 다수의 정착민을 정복해 이룬 나라들이다.
16세기에는 몽골족의 피를 이어받은 바부르가 지금의 우즈베키스탄에서 불과 수만의 군대를 이끌고 南征(남정)하기 시작, 수천만명이 살고 있던 인도 대륙을 정복해 무갈(Mughal·이란語로 몽골이란 뜻)제국을 세웠다.
흉노가 훈(Hun)이란 이름으로 동유럽을 정복한 사실도 잘 알려져 있지만 종족 자체는 소수였다. 이렇게 중국이나 인도, 유럽 등 많은 인구와 잘 정비된 통치체제를 갖추고 있었던 고도의 농경국가들도 기마족의 공격에 굴복하는 마당에 辰韓연맹과 같은 낮은 발전단계의 부족국가가 선비족 모용씨의 말발굽에 대항하기란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다.
4세기 당시 辰韓연맹에 비해 볼 때 모용씨 군단은 더 높은 단계의 국가운영 체제를 경험했던 만큼 기마족의 정복이 오히려 발전을 앞당긴 측면이 강하다. 내물왕 이후 신라가 고대국가로 급성장하는 배경도 상대적으로 선진적이었던 모용씨의 집권에서 찾을 수 있겠다.● [끝]
김춘추 아들 김인문의 비문에는 신라시조를 성한왕 투후로 기록하고 있고(모용선비 흉노족이지만, 김씨로 창씨개명한 후 오랜 세월이 흘렀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김일제를 조상으로 인식하고 기록했을 것이다.), 중국문헌에는 백제시조를 온조가 아닌 구태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4세기에 해당하는 무덤으로 경주에 초원민족의 무덤양식인 적석목곽분(쿠리간)을 남긴 주인은 4세기 고구려 정벌에 동원된 모용선비족의 용병 기마집단인 흉노족으로, 모용선비족에 흡수되면서 모씨로 성까지 바꾼 모용선비족의 귀족으로 편입된 집단이라 할 수 있다.
고구려 북부전선에서 대패한 후 동해안을 타고 경주까지 내려 온 모용선비 흉노기마집단은 사로국을 무너 뜨리고 신라왕조를 세운 후 성씨를 모씨에서 김일제가 한무제에게 하사받은 김씨로 바꾸고, 신라왕조혈통까지 박혁거세 왕족과 석탈해 왕족까지 계보를 잇는 혈통작업을 했다고 볼 수 있다. 그 시기가 거칠부에게 국사를 편찬하게 한 진흥왕 시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