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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기록으로 본 조선의 말(馬)

작성자손님입니다|작성시간16.02.23|조회수595 목록 댓글 1

조선 초중기에 이런 말이 담긴 시(詩)가 있었다고 한다. “고려시대에 그 많던 말(馬)들은 다 어디로 갔나?”

 

다시 말하면 고려시대에는 말(馬)들이 참 많이 있었는데, 지금 조선시대에는 그 많던 말(馬)들이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말(馬)에 관한 기록을 보면 조선 시대에 말(馬)은 참 귀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의 기본 법전인 경국대전을 보면 일반 백성들이 말(馬)을 타는 걸 금지하고 양반들만 말(馬)을 탈수 있었다고 한다.

 

이 말(馬)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말(馬)들만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노새와 나귀, 게다가 소까지 포함되었다.

 

즉 일반백성들은 노새와 나귀, 소를 타도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이러한 우마(牛馬)를 평민이 타고 다니다 걸리면 우마(牛馬)는 압수당하고 자신은 장 80대를 맞아야할 만큼 중범죄라고 한다.

 

말(馬)의 가격은 노비 3명의 몸값과 비슷하며, 말(馬)을 세 번 훔치면 사형을 당했다.

 

그만큼 말(馬)이 귀하다는 증거이며, 말(馬)뿐만 아니라 다른 가축 역시 귀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조선시대는 말(馬)에 대한 이러한 법이 있을 정도로 정말 말(馬)이 귀했던 것일까?


또 왜 이렇게 말(馬)이 귀했을까?


이러한 궁금증을 가지고 조선왕조 실록의 말(馬)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았고 재밌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실록의 기록을 보면 태조, 태종, 세종, 문종이라는 조선 초기 4 명의 군주가 집권하던 시기에 정말 많은 말(馬)들이 명나라로 간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대략적으로 훑어보기만 해도 5만 필(匹) 이상이다.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으며, 좀 더 정확하게 알기 위하여 조선 초기에 명나라로 보내진 말의 기록들을 자세하게 알아보자. 


참고로 말의 수는 각 군주별로 나누어 누적 계산하였고, 태조와 태종 사이 정종은 실록의 기록에서 명나라로 말을 보낸 기록이 나오지 않으므로 제외했다.

 

1. 태조실록(1392~1398)

 

1392년 11월 9일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이을수(李乙修)를 보내어, 말 1천 필을 맡아 요동(遼東)에 가서 교부(交付)하게 하였다.”

 

출처:http://sillok.history.go.kr/id/kaa_10111009_004


누적 1000필

 

 

1394년 4월 4일

 

흠차 내사가 말 1만필과 환관의 가족들을 보내라는 선유와 자문을 가지고 오다

 

흠차 내사(欽差內史) 최연(崔淵)·진한룡(陳漢龍)·김희유(金希裕)·김화(金禾) 등이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오므로,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선의문(宣義門) 밖에서 맞이하여 대궐에 이르니, 최연 등이 선유(宣諭)를 전하였다.

"말 1만 필과엄인(閹人) 050) 및 김완귀(金完貴)의 가족을 거느리고 오라 합니다."

임금이 꿇어앉아 이를 듣고 나서 머리를 조아리고 황제의 옥체(玉體)가 만복(萬福)하신가를 묻고는, 머리를 조아리면서 좌군 도독부(左軍都督府)의 자문(咨文)을 받았다. 그 자문은 이러하였다.

"홍무(洪武) 27년(1394) 2월 24일에 본부(本部)의 좌도독(左都督) 양문(楊文) 등 관원이 봉천문(奉天門)에서 성지(聖旨)를 받았는데, 칙지에, ‘근일 감포(澉浦) 등지에서 수어(守禦)하는 관군(官軍)이 절차(節次)에 의하여, 잡아 온 적인(賊人) 호덕(胡德) 등 5명이 공술(供述)하기를, 「고려의 수파관(守把官)이 파견하여 연해(沿海) 지방을 겁략(劫掠)하고 소식을 듣게 하였습니다.」 하므로, 이와 같이 좌군(左軍) 문서(文書) 속에 각인의 성명(姓名)을 써서 사람을 보내어 조선 국왕 아무에게 말하여 알게 하니, 이름을 대조하여 잡아 오게 하라.’ 하였으므로, 삼가 본부(本府)에서 지금 적인(賊人) 호덕(胡德) 등이 공술(供述)한 후항(後項)의 사람 수효를 낱낱이 써서 자문(咨文)을 보내니, 삼가 1명의 이름에 의거하여 잡아 온다면 당연히 적인(賊人) 25명을 취(取)하게 될 것입니다."

임금이 사신과 더불어 행례(行禮)를 마치고 난 후에 잔치를 베풀었다. 최연 등은 모두 우리 나라의엄인(閹人) 051) 이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4004_001

 

기록의 내용을 자세히 들여보면 말 1만 필(匹)과 엄인(閹人)을 보낼 것을 요구하고 있다. 엄인이란 고자를 나타내며 다시 말해 환관을 뜻한다.


그러니 말 1만 필과 환관, 그리고 김완귀의 가족을 거느리고 오라는 것이다. 일방적인 요구이며 조선 입장에서는 굴욕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내용이다.

      

 

1394년 8월 21일

 

사수감(司水監) 송희정(宋希靖)을 보내서 말 1천 필을 바치게 하였는데, 요동에 이르러 교부하고 돌아왔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8021_001

 

누적 2000필

 

1394년 9월 5일

 

전 공조 전서(工曹典書) 임수(任壽)를 명나라에 보내서 말[馬] 5백 필을 바치게 하였는데, 요동에 가서 교부하고 돌아왔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309005_001

 

누적 2500필

 

1395년 4월 22일

 

공조 전서(工曹典書) 양첨식(楊添植)을 〈명나라에〉 보내어 말 5백 필을 바쳤는데, 요동에 가서 교부하고 돌아왔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404022_002

 

누적 3000필

 

1395년 5월 11일

 

전 전농 정(典農正) 최자운(崔子雲)을 보내서 말 1천 필을 〈명나라에〉 바쳤는데, 요동에 가서 교부하고 돌아왔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405011_001

 

누적 4000필

 


1395년 8월 18일

 

전중 경(殿中卿) 곽경의(郭敬義)를 보내서, 말 1천 필을 압령(押領)하여 요동에 가서 교할(交割)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408018_001

 

누적 5000필

     

 교할(交割)은 물물교환을 뜻한다. 그러므로 단순히 말을 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다른 것과 바꿨다는 것이다. 앞서 기록에서는 모두 교부라고 하여 모두 그냥 줬다고 하지만 이 기록에서는 교할이라고 나온다.


갑자기 용어 선택을 교부에서 교할이라고 바꾼 것으로 보아 그 이전에는 말을 그냥 주기만 했고, 이번에는 그 때와 다르게 말을 수출한 것 같다.

  

  

1395년 9월 18일

 

판사농시사(判司農寺事) 옥산기(玉山奇)를 보내서 말 5백 필을 압령하여 요동(遼東)에 가서 교할(交割)하고 돌아오게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409018_002

 

누적 5500필

 

 

1396년 4월 26일

 

전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유양(柳楊)으로 말 5백 필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에 이르러교할(交割) 008) 하게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aa_10504026_001

 

누적 6000필


앞서 나온 1394년의 기록을 보면 명나라 황제가 말(馬) 1만 필을 보낼 것을 요구했는데, 태조 실록의 기록에는 말(馬) 1만필을 보낸 기록이 나오지 않으며, 실제 보내진 말(馬)에 대한 기록은 이것이 전부이다. 

 

 

 

2. 태종실록 (1400~1418)

 

1401년 2월 30일

 

통사(通事) 매원저(梅原渚)를 보내어 먼저 말 5백 필을 끌고 요동(遼東)에 갔다. 판삼군(判三軍) 조영무(趙英茂)·총제(摠制) 유용생(柳龍生)이 관마색 제조(官馬色提調)가 되었는데, 전라도·경상도에서 바친 말이 모두 좋았으므로, 친한 사람의 나쁜 말과 바꾸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102030_003

 

누적 500필

 

 

1401년 9월 1일

 

조선의 말 1만 필을 무역하고 싶다는 명 황제의 뜻이 담긴 병부의 자문

 

병부(兵部)의 자문(咨文)에는 이러하였다.

"건문(建文) 3년 6월 12일에 태복관(太僕官)이 문무 백관과 함께 봉천문(奉天門)에 일찍 조회하고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조선국에 마필(馬匹)이 많이 산출되어 전일에 국왕이 좋은 생각으로 말 3천 필을 바치었는데, 이미 요동 도사(遼東都司)에 명하여 관군에게 주어서 타게 하였다. 지금 다시 전쟁에 싸울 수 있는 약간의 말을 쓰려고 하여, 사람을 시켜 단필(段匹)·포초(布綃)·약재(藥材)를 운반하고, 태복시 소경 축맹헌(祝孟獻)과 예부 주사(禮部主事) 육옹(陸顒)을 시켜 좋은 말 1만 필을 바꾸게 하였으니, 너희 병부(兵部)는 문서를 보내어 국왕의 관사관(管事官)에게 일러서, 매양 관민(官民)의 말 있는 집에 알리게 하여, 그곳의 시가(時價)에 의하여 바꾸어 오되, 저들에게 결손이 없게 하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본부(本部)에서 이제 성지(聖旨)의 사의(事意)대로 갖추 일러 보내고 이자(移咨)하여 알리는 바이니, 준행(遵行)하여 시행하라. 말 1만필을 바꾸기 위한 단필(段匹) 등물(等物)과 각색(各色) 저사(苧絲)·생초(生綃)·면포(緜布)와 약재(藥材)로는 목향(木香)·정향(丁香)·황련(黃蓮)·단사(丹砂)·담반(澹礬)·천궁(川芎)·축사(縮砂)·육두구(肉豆蔲)·양강(良薑)·백화사(白花蛇)를 운반하여 보낸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109001_002


누적 3500

앞선 태조실록과 다르게 명나라의 태도가 다르다. 바치는 것이 아니라 무역을 하자고 하며, 그에 따라 자신들 역시 말(馬) 1만 필에 상응하는 물품들을 준비했다고 한다.


또한 위 글을 보면


  ‘조선국에 마필(馬匹)이 많이 산출되어 전일에 국왕이 좋은 생각으로 말 3천 필을 바치었는데, 이미 요동 도사(遼東都司)에 명하여 관군에게 주어서 타게 하였다.'

 

그러므로 이미 말 3천 필을 한 번 보낸 적이 있다는 것이며 건문 3년 6월 12이라고 하므로 6월 달 즈음에 보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좋은 생각으로 바쳤다는 것으로 보아 그것이 어쩔 수 없이 바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매양 관민(官民)의 말 있는 집에 알리게 하여, 그곳의 시가(時價)에 의하여 바꾸어 오되, 저들에게 결손이 없게 하라“라는 구절이다.

 

관민은 일반 백성과 관리들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관리뿐만 아니라 일반 백성들도 말이 있었으며, 시가에 따라 말을 구입하라는 것은 다시 말해 시세에 따라 말을 구입하라는 것이므로 일반 백성과 관리들로부터 국가에서 말을 구입하여 그것을 명나라로 보낸다는 것이다.

 

1401년 10월 16일

 

감생(監生) 유경(劉敬)이 이운마(二運馬) 1천 필을 압령하여 돌아갔다. 이 시권(詩卷)을 의정부에 청구하므로 의정부에서 임금에게 아뢰니, 예문관(藝文館) 응봉사(應奉司)에서 시산(時散) 문신에게 시(詩) 사운(四韻) 혹은 장편(長篇)을 짓게 하여 축(軸)을 만들어 주었다. 이 또 전별연(餞別宴)을 당하여 임금께 여쭙기를,

"기생으로 하여금 나를 따라 금교(金郊)까지라도 같이 가게 하였다가 돌아오게 하신다면, 뼈가 가루가 된들 어찌 잊겠습니까?"

하였다. 임금이 웃고 그대로 좇았다. 처음에 축맹헌(祝孟獻)이 접반사(接伴使)에게 이르기를,

"이 나라 형세를 보니 갑자기 만 필을 준비하기 어려우니, 내가 마땅히 황제께 아뢰겠다."

하였다. 임금께 사뢰니, 임금이 대답하기를,

"우리 나라는 본래 말이 많이 나지 않고, 또 삼면(三面)이 바다에 접하여 왜구(倭寇)가 왕래하므로, 반드시 기병(騎兵)으로 하여금 수어(守禦)하기 때문에, 만 필은 준비하기 어렵고, 5천 필은 판출(辦出)할 수 있다."

하고,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이 뜻을 자문(咨文)에 갖추 기록하게 하여 맹헌에게 주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110016_001

 

누적: 4500필

 

 전에 명에서 말한 말 1만 필은 준비하기 힘들며, 5천 필은 가능하다고 한다. 명과 조선이 동등한 입장이라면 조선 입장에서 명 황제가 말한 말 1만필 무역을 취소하거나 그냥 5천 필만 팔면 될 것인데, 그러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조선과 명의 힘의 차이를 나타낸다.


1401년 11월 11일

 

감생(監生) 상안(相安)이 사운마(四運馬) 1천 필을 압령하여 돌아갔다. 안이 임금이 준 말을 받지 않고 신행시(贐行詩)를 요구하므로, 하윤(河崙)·권근(權近) 등이 문사(文士)가 지은 시 사운 혹은 장편을 모아서 축(軸)을 만들어 주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111011_002

 

누적 5500필

 

1402년 5월 1일

 

감생(監生) 율견(栗堅)·장집(張緝) 등이 7운마(七運馬)를 압령하여 돌아갔다. 세 번째 가져온 말값이 단자(段子) 1천 5백 필, 견(絹) 1만 3천 필, 면포(緜布) 6천 5백 필인데, 바꾼 말의 숫자가 1천 6백 24필이다. 또 남겨놓은 단자 9백 28필, 견 5천 3백 80필, 면포 3백 8필로서 말 9백 9필을 바꾸어 추후로 들여보내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205001_003

 

누적 6409필

 

1403년 6월 3일

 

병조 전서(兵曹典書) 설미수(偰眉壽)가 무역하여 바꿀 말을 압령(押領)해 가지고 경사(京師)로 갔으니, 2천 5백 48필이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306003_002

 

누적 8957필

 

1403년 10월 20일

 

무역마의 수가 보낸 말값에 못 미친다는 중국 병부의 자문

 

설미수(偰眉壽)가 병부(兵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왔는데, 자문에 이러하였다.

"홍무(洪武) 34년 6월에 태복시 소경(太僕寺小卿) 축맹헌(祝孟獻) 등의 관원을 보내어 저사(紵絲)·포견(布絹) 등물을 가지고 조선국(朝鮮國)에 가서 말 1만 필을 바꾸었는데, 먼저 이미 사온 마필을 제외하고, 본국(本國)에 아직 남아 있는 말을 사지 않은 저사·포견 등물이 말 2천 1백 93필을 사기에 족하므로, 이미 갖추어 아뢰고, 본국에 자문(咨文)을 보내어, 말을 사서 요동 도사(遼東都司)로 보내 교부해서 군사에게 지급하여 타게 하였다. 지금 본국의 자문에 의하면, 잡색마(雜色馬) 2천 1백 41필을 사서 2 운(運)으로 나누어 관원을 시켜 압령(押領)하여 가지고 요동 도사에 보내어 교부하여 마치고, 책(冊)을 만들어 이자(移咨)하여 부(部)에 이르렀다. 이미 사서 요동에 이른 마필을 군사에게 지급하여 타게 한 외에, 원래 남아 있는 말 값을 조사하여 보면, 말 2천 1백 93필을 사야 할 터인데, 지금 이차(二次)로 말 2천 1백 41필만 사왔으니, 52필이 적다. 보내 온 배신(陪臣) 설미수(偰眉壽)의 말에 의거하면, 원래 남아 있는 물화(物貨) 수량 안에서 저사(紵絲) 9백 28필을, 말 한 필에 저사 3필로 계산하면, 말 3백 9필을 사야 할 것이다. 지금 바꾸어 온 2백 55필 내에 상마(上馬)가 1백 61필이니, 말 한 필에 저사 4필을 더 썼다. 이것으로 원래 액수에 비교하면 말 54필이 적고, 그 나머지 저사(紵絲)·견포(絹布)로 또 중마(中馬) 두 필을 샀으니, 실상은 말 52필이 적은 것이다. 온 자문(咨文)에 의거하면, 일찍이 전항의 사유를 설명하지 않았으므로 준신(准信)하기가 어려우니, 본관(本官)을 시켜 본국(本國)에 돌아가서 수(數)에 의하여 사서, 요동 도사로 보내어 교부하게 하여 군사에게 지급해 타게 해야 하겠으나, 마필을 바꾸는 일에 관계되므로, 영락(永樂) 원년 8월 26일 아침에 본부관(本部官)이 주본(奏本)을 갖추어 봉천문(奉天門)에 아뢰어 성지(聖旨)를 받들었는데, ‘이 적은 말은 면제하라.’ 하시었다. 이것을 흠준(欽遵)하는 외에, 은면(恩免)의 사리(事理)에 관계가 되므로, 본국(本國)에 자문(咨文)하여 알리는 바이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310020_003


원래 사기로 한 말(馬)은 1만 필인데 현재 남아 있는 물품의 값어치를 따지면 아직 2193필은 더 살 수 있으며, 그래서 이차로 말 2141필을 사왔으므로 52필이 적다고 한다.


그러므로 9948필은 이미 구입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록의 기록을 보니 명나라의 1만 필 요구 이후 조선이 명에 판 말(馬)은 5457필이므로 누락된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기록을 통하여 본다면 명의 1만 필 요구 이전에 판 500필과 명의 요구와 무관하게 명에게 넘긴 3000필을 포함하면 500+3000+9948이므로

 

누적 13448필

 

 

1407년 9월 10일

 

설미수(偰眉壽)가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가지고 명나라 서울[京師]에서 돌아왔는데, 자문은 이러하였다.

"1. 도망중에 있는 인구(人口)에 대한 일. 병부(兵部)의 자문(咨文)에 준(准)하면, 병과(兵科)에서 요동(遼東) 동녕위 천호(東寧衛千戶) 김성(金聲)이 상주(上奏)한 것을 초출(抄出)하였는데, 이르기를, ‘조선국에 가서 원래의 만산군여(漫散軍餘)와 그 가속(家屬) 전자수(全者遂) 등 4천 9백 49구(口)를 데려오기 위하여, 영락(永樂) 4년 12월 초2일에 본국(本國) 의주 만호부(義州萬戶府)에 이르니, 기군(旗軍) 이불래(李不來) 등이 고하기를, 「같이 온 유산성(劉山城) 등과 그 가속(家屬)이 풍해도(豊海道) 등지에 살고 있었는데, 본국에서 유산성 등 1천 7백 86구(口)와 원대위(原帶衛)·철령위(鐵嶺衛) 등과 북경부(北京府)·영평부(永平府) 등에 속한 남녀 2백 14구(口)를 취(取)해 데려다가, 세 운(運)으로 나누어 관군(官軍)을 차발(差撥)해서 요동 도사(遼東都司)로 압송해 교부하였다.」 하였고, 또 기군 이불래 등 43명의 공술(供述)에 의거하면, 「1천 4백 구(口)가 강계도(江界道) 등지에 살고 있는데, 아직 발송하지 아니하였고, 일찍이 취발(取發)하여 나누어 보내지 아니한 것을 제외하고, 현재 기군(旗軍) 유사경이(劉思京伊) 등 2백 10구(口)가 압록강에 머물러 살고 있는데, 본국에서 이들 각인(各人)을 홍무(洪武) 35년 이전에 도래(到來)한 향호(鄕戶)와 관사노복(官私奴僕)이라고 명색을 날조하고 있으며, 각처 주군(州郡)에도 또한 이런 등류의 인구가 있다.」고 하므로, 모두 각각 수감(收監)하고 사람을 보내어 갖추 주달(奏達)한다 하매 명령하기를, 「기다리라.」고 하여, 아직 출발시켜 발송(發送)하지 않았다. 이제 각인(各人)을 조회하니, 모두 홍무 연간(洪武年間)에 오정타(五丁垜)에 한결같이 부적(付籍)한 인수(人數)인데, 현재 요동 도사에 해송한 1천 7백 86구(口)와 이 앞서 통사(通事) 장홍수(張洪壽)를 파견하여 보내 온 숫자 내(內)에, 현재 남아있는 3백 17구(口)와 병고자(病故者) 12구(口)를 제한 이외에 2천 8백 29구(口)가 있는데, 아직 점고하여 발송하지 않으니, 이들을 일률적으로 오래 된 향호(鄕戶)와 노복(奴僕) 등이라고 명색을 날조하여 전과 같이 구주(具奏)할까 두렵다.

초출(抄出)한 것이 본부(本部)에 이르러 행이(行移)하려는 즈음에 또 본국(本國)의 자문(咨文)을 받았는데, 역시 이 일 때문이었다. 이를 참조(參照)하면, 위의 인구(人口)는 홍무 연간의 오정타(五丁垜)의 토군(土軍)들이므로, 응당 취(取)하여 돌려보내야 할 인수(人數)이니, 마땅히 본국(本國)에 행이(行移)하여, 원래 행이(行移)한 사리에 비추어서 기취(起取)해 시행토록 하라. 영락(永樂) 5년 7월 14일 아침에 병부(兵部)에서 갖추 주문(奏聞)하여 흠의(欽依)해서, 예부(禮部)로 하여금 문서(文書)를 행이(行移)하게 하는 것이니, 흠준(欽遵)하는 것 외에 자문(咨文)을 갖추어 본부(本部)에 보내는 바이다.’ 하였다. 이에 본국(本國)에 행이(行移)하니, 흠준하여 원래 행이(行移)한 사리에 비추어서, 아직 찾아내지 못한 인구를 찾아서 요동 도사로 발송하여 교부하도록 하고, 인하여 발송하여 보낸 인명(人名)과 구수(口數)를 회보(回報)하여 시행하기 바란다.

1. 마필(馬匹)에 대한 일. 병부(兵部)의 자문(咨文)에 준(准)하면, 영락(永樂) 5년 7월 15일 아침에 조선국(朝鮮國) 사신(使臣) 설미수(偰眉壽)가 서각문(西角門)에서 흠봉(欽奉)한 성지(聖旨)에, ‘너희 나라는 말[馬]이 산출되는 곳이다. 지금 중국 조정(朝廷)에서 말을 좀 쓸 데가 있으니, 네가 돌아가거든 국왕(國王)에게 말하여 알려서, 말 3천 필을 바꾸어 가지고 네가 장차 오면, 그 값은 호부(戶部)에 명하여 포견(布絹)을 운반해 요동(遼東)에 가지고 가서 네게 돌려주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예부(禮部)에서 이대로 흠준하는 외에 이문(移文)하여 본부(本部)에 보냈으므로, 본국(本國)에 자문(咨文)하니, 흠준하여 시행(施行)할 것이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709010_001

 

위 글에서 주목할 구절이다.

 

“너희 나라는 말[馬]이 산출되는 곳이다. 지금 중국 조정(朝廷)에서 말을 좀 쓸 데가 있으니, 네가 돌아가거든 국왕(國王)에게 말하여 알려서, 말 3천 필을 바꾸어 가지고 네가 장차 오면, 그 값은 호부(戶部)에 명하여 포견(布絹)을 운반해 요동(遼東)에 가지고 가서 네게 돌려주도록 하겠다.”

 

이제 영락제가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려는 모양인지 조선으로부터 말을 요구하는 모습이다. 그 중에서 “너희 나라는 말(馬)이 산출되는 곳이다.“ 라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1408년 2월 4일

 

사역원 부사(司譯院副使) 이자영(李子瑛)을 보내어 4운(運)의 무역(貿易)할 말[馬] 4백 30필을 압령(押領)해 요동(遼東)에 가게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802004_001

 

누적 13878필

 

1409년 10월 21일

 

내사 황엄이 말을 요구하는 황제의 칙서를 전하다

 

내사(內史) 황엄(黃儼)이 칙서(勅書)를 받들고 이르니,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청담복(靑淡服) 차림으로 모화루(慕華樓)에서 맞이하고, 창덕궁(昌德宮)에 이르러 칙서를 받았다. 칙서에 이르기를,

"왕의 곳[王處]에 말[馬]이 있으니, 형편에 따라 다소(多少)를 바쳐 국용(國用)에 보태도록 하라. 마땅히 값으로 갚겠다. 왕은 공경히 짐(朕)의 명령을 받으라. 지금 왕에게 기백(綺帛)을 하사(下賜)하니 이르거든 영수(領受)하라. 왕에게 저사(紵絲) 50필, 채단(綵段) 50필을, 왕비에게 저사(紵絲) 20필, 채견(綵絹) 20필을 준다."

하였다. 임금이 황제가 준 물건을 받고 나니, 황엄이 선유 성지(宣諭聖旨)를 전하기를,

"원제(元帝)의 자손(子孫)이 귀순(歸順)한 자도 있고 귀순하지 않은 자도 있는데, 귀순하지 않은 자는 짐이 평정하고자 한다. 조선의 말이 비록 체대는 작으나 쓸 만하니, 왕은 보내라."

하였다. 선유(宣諭)가 끝나니, 황엄이 곧 말을 바칠 수효를 물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감히 힘을 다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였다. 예(禮)가 끝나니 사신이 태평관(太平館)으로 갔다. 임금이 백관을 거느리고 따라가서 잔치를 베풀고, 안마(鞍馬)를 주었다. 반인(伴人)에게도 주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910021_001

 

위 기록은 말을 보냈다는 기록은 아니지만, 명나라가 조선에게 말을 많이 보내줄 것을 요구하는 글이다.

 

“원제(元帝)의 자손(子孫)이 귀순(歸順)한 자도 있고 귀순하지 않은 자도 있는데, 귀순하지 않은 자는 짐이 평정하고자 한다. 조선의 말이 비록 체대는 작으나 쓸 만하니, 왕은 보내라.“

 

원나라의 후손들 중 아직도 명나라에 항복하지 않은 자들이 있으니 평정하려고 하며, 그에 따라 말이 필요한데, 조선의 말은 체구는 작지만 그래도 쓸만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조선의 말의 체대가 작다는 것으로보아 한국의 말이 작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은 듯 하다.


 

1409년 10월 22일

 

공마 1만 필을 수 차례로 나누어 바치기로 하다

 

임금이 태평관(太平館)에 가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임금이 황엄(黃儼)에게 이르기를,

"황제의 은혜가 이미 중하니, 감히 말 1만 필을 바치겠습니다."

하니, 황엄이 말하기를,

"원제(元帝)의 자손(子孫)이 여거하(藜渠河)에 도망가 살고 있어 8대(代)를 전하고 있는데, 지금까지 내부(來附)하지 아니하여, 황제께서 내년 봄에 평정코자 하여 2월 초6일에 대군(大軍)을 움직이기로 기일을 정했으니, 마땅히 진헌 마필(進獻馬匹)을 운(運)을 나누어 시기에 도달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개주참(開州站)에서 교부(交付)하기를 청하니, 황엄이 말하였다.

"요동군(遼東軍)이 적으니 불가(不可)합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910022_001


명나라의 요구에 압박감을 느꼈는지 태종은 말 1 만필을 바치기로 한다.

 

1409년 11월 10일

 

진헌마 1만 필을 보낸다는 내용의 자문을 보내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서유(徐愈)와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 윤향(尹向)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게 하였으니, 채폐(綵幣)를 준 것에 사례(謝禮)하기 위함이었다. 또 아뢰[奏]기를,

"흠차 태감(欽差太監) 황엄(黃儼)이 칙서(勅書)를 싸 가지고 왔는데, 이르기를, ‘왕의 곳에 말이 있으니, 형편에 따라 다소(多少)를 바치라.’ 하였습니다. 여기에 의하여 신(臣)이 지금 잡색마(雜色馬) 1만 필을 바칩니다."

하였다. 또 요동 도사(遼東都司)에 자문(咨文)하기를,

"당직(當職)이 힘을 다해 말 1만 필을 판출(辦出)하여, 운(運)을 나누어 관원을 시켜 계속해서 해송(解送)하되, 혹은 1백 필, 혹은 2백 필씩 판비하여 형편대로 그때그때 해송하겠습니다. 만일 정류(停留)하게 된다면, 지금 하늘은 차고 땅은 얼고 초료(草料)의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여, 말이 쓰러져 손실(損失)되는 것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만일 해송하는 마필을 도착하는 대로 즉시 수취(收取)해, 각운(各運)의 자문(咨文) 안에 기록한 수목(數目)에 의하여 전달(轉達)해 시행하시면, 거의 편익(便益)하겠습니다."

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지금 상사(賞賜)에 대해 사례하는데, 황태자(皇太子)가 남경(南京)에 있으니 아울러 부사(副使)를 보내는 것은 부실(不實)한 것 같습니다. 청컨대, 황엄(黃儼)에게 물어본 연후에 결정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옳게 여겨 설미수(偰眉壽)·황희(黃喜)를 시켜 황엄에게 가서 물으니, 황엄이 말하기를,

"전례(前例)대로 하라."

고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911010_001

 

앞서 말한 1만 필을 바치기 위해 바쁜 조선의 모습이다. 위 글을 보면 한 번에 1만 필을 보내는 게 아니라 1백 필, 2백 필 씩 그 때 그 때 형편대로 보내겠다고 한다.

 

1409년 12월 14일

 

제주 자제의 자원 시위를 허락하고, 민간의 말 2천 필을 육지로 내오게 하다

제주(濟州)의 자제(子弟)들이 자원(自願)에 의하여 시위(侍衛)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제주(濟州)의 자제(子弟)로서 시위(侍衛)를 자원(自願)하는 자는 서울에 오는 것을 허락하고, 그 민간(民間)의 마필(馬匹)은 탈 만한 것을 가려서 2천 필을 한도로 하여 육지(陸地)로 내오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ca_10912014_003


목표로 삼는 조선이 명에 보낸 말(馬)과는 큰 상관이 없는 글이지만, 우리나라에서 말의 본고장이라고 하는 제주도에 관련된 기록이다. 2000필을 제주도로부터 가지고 온다고 하니, 이미 조선 초기 때부터 제주도에서 자라는 말이 상당히 많았음을 뜻하며, 1409년은 고려가 망한지 얼마 되지 않는 해이므로 다시 말해 고려시대부터 이미 제주도는 말로 유명한 듯 싶다.

 

1410년 10월 9일

 

말 1만 필을 보내 준 것을 사례하는 칙서와 말 값에 대한 예부의 자문

 

내사 태감(內史太監) 전가화(田嘉禾)·소감(少監) 해수(海壽)가 칙서(勅書)를 받들고 오니, 임금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맞이하여 경덕궁(敬德宮)에 이르렀다. 칙서는 이러하였다.

"오랑캐의 운수가 이미 끝나고, 천명(天命)이 이미 갔다. 짐(朕)의 황고(皇考)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가 천명(天命)을 받아 중화(中華)와 이적(夷狄)을 통일하였고, 짐(朕)이 상천(上天)의 권고(眷顧)를 입어 내난(內難)을 평정하고 대통(大統)을 이어받아, 사방 만국(萬國)이 신하로 순종하지 않음이 없는데, 오직 패잔(敗殘)한 오랑캐의 남은 무리만이 교화(敎化)를 거역하고 조회(朝會)하지 않아서, 신사(信使)를 구류하여 죽이고, 짐(朕)이 친히 육사(六師)149) 를 거느리고 가서 그 죄를 토벌하였다. 그대가 말 1만 필을 보내어 국용(國用)에 이바지하게 하였으니, 그대의 충성을 생각하여 매우 아름답게 여기고 포장(褒奬)하는 바이다. 이제 특별히 정사(正使) 태감(太監) 전가화(田嘉禾)·부사(副使) 소감(少監) 해수(海壽)를 보내어 채탕(彩帑)·은냥(銀兩)·마필(馬匹)을 그대에게 주노니, 그대는 짐(朕)의 지극한 뜻을 생각하라. 저사(苧絲) 2백 필, 선라(線羅) 2백 필, 채견(彩絹) 5백 필, 은(銀) 1천 냥, 말[馬] 8필이다."

임금이 준 것을 받고 사은(謝恩)하기를 다하매, 태평관(太平館)에 이르러 잔치를 베풀었다. 전가화(田嘉禾)가 또 예부(禮部)의 자문(咨文)을 보였는데, 자문은 이러하였다.

"성지(聖旨)를 받자오니, ‘조선 국왕(朝鮮國王)이 말 1만 필을 보냈으니, 너희 예부(禮部)·병부(兵部)에서는 곧 값을 정하여 운반해 보내되, 요동 도사(遼東都司)에서 이를 받아 두었다가 문서(文書)를 행하여 국왕에게 주어, 사람을 보내 와 영수하게 하라.’ 하시었다. 이리하여 말 매필에 견(絹) 3필, 면포(綿布) 2필을 주니, 모두 합하여 견(絹) 3만 필, 면포(綿布) 2만 필이다."

단자(段子)·나견(羅絹)을 종친(宗親)·의정부(議政府)·의흥부(義興府)·대언(代言)·대간(臺諫)과 근신(近臣)에게 차등 있게 나누어 주었다. 의정부에서 아뢰었다.

"말값이 장차 이르면, 청컨대, 사양하여 충심(忠心)을 보이소서."

임금이 말하였다.

"천자(天子)가 주는 것이 있으면 마땅히 받아야 하고, 뜻을 굽혀 정성을 나타낼 필요는 없다. 또 이것으로 전례를 삼으면 반드시 후일의 근심이 있을 것이다."

의논이 드디어 정지되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010009_002

 

누적 23878필


 

“ ‘조선 국왕(朝鮮國王)이 말 1만 필을 보냈으니, 너희 예부(禮部)·병부(兵部)에서는 곧 값을 정하여 운반해 보내되, 요동 도사(遼東都司)에서 이를 받아 두었다가 문서(文書)를 행하여 국왕에게 주어, 사람을 보내 와 영수하게 하라.’ 하시었다. 이리하여 말 매필에 견(絹) 3필, 면포(綿布) 2필을 주니, 모두 합하여 견(絹) 3만 필, 면포(綿布) 2만 필이다.“

 

앞서 나온 1년 전에 황제가 보낸 명대로 1만 필을 바쳤다는 기록이며, 그에 따라 명나라 역시 조선에 그 말 1만 필에 해당하는 물품을 보냈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누락된 기록이 존재하는 듯 싶다.

 

1412년 1월 18일

 

요동 사람에게 뇌물을 먹고 말 천여 필을 판 우박을 장 60대에 속받게 하다

 

의주 목사(義州牧使) 우박(禹博)을 순금사(巡禁司)에 가두고 장(杖) 60대를 속(贖)받았다. 처음에 병조 판서 황희(黃喜)가 경사(京師)010) 에서 돌아와서 상언(上言)하였다.

"본국 사람이 말을 저쪽 땅에 판 것이 수천 필입니다."

서북면 경차관(西北面敬差官) 조치(曺致)가 또 아뢰었다.

"요동 지휘(遼東指揮) 방준(方俊)이 일찍이 말을 사고자 하여, 먼저 우박에게 뇌물을 주었는데 우박이 받았고, 뒤에 요동 사람이 우리 지경에 들어와서 말을 천여필을 사가지고 돌아갔는데 우박이 짐짓 금하지 않았으니 죄주소서."

임금이,

"과연 그렇다면 우박이 죄를 사피할 수 없다."

하고, 순금사(巡禁司)를 시켜 우박을 국문하니,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순금사에서 우박이 한 지방을 전제(專制)하면서 그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 죄를 청하고, 정부에서 상언(上言)하기를,

"동북면(東北面)·서북면(西北面) 두 방면의 땅이 타국의 지경과 접하였으니, 민간의 마필(馬匹)을 모두 화인(火印)을 찍어서 사사로이 팔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출처 :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201018_001

 

이번에는 국가에서 명나라로 수출한 것이 아니라, 부패한 관료가 명나라의 요동 관리에게 말 1천 필을 팔아넘겼다는 내용이다.

 

누적 24878필

 

1413년 8월 23일

 

번식시킬 말 1백여필을 강화도 길상산에서 방목하다

번식시킬 말 1백여 필을 강화도(江華島)길상산(吉祥山)에 방목(放牧)하였다. 10필마다 1둔(屯)318) 을 만들어 목자(牧子) 2명을 정하고 주위에 담장을 둘러서 말이 흩어져 달아나는 것을 막았으니, 사복시(司僕寺)의 청을 따른 것이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ca_11308023_005

 

글의 주제와는 상관없는 기록이지만, 제주도 이외에 다른 곳에서도 말을 키우려고 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3. 세종실록 (1418~1450)

 

1421년 10월 2일

 

판사재감사(判司宰監事) 조현(曺顯)을 보내어 진헌(進獻)하는 첫 번째로 보낼 말[馬] 3백 필을 이끌고 요동에 가서, 요동 도사(遼東都司)에 자문(咨文)을 내어 이르기를,

"영락 19년 9월 21일에 흠차(欽差)한 소감(少監) 해수(海壽)가 칙서의 사단을 가지고 와서, 말 1만 필을 가려서 보내어 국용에 쓰게 하면, 마땅히 값을 쳐서 준다 하였기로, 이번에 앞서 판득한 잡색마(雜色馬) 3백 필을 첫 번째로 보내는데, 배신(陪臣) 판사재감 조현으로 거느리고 가서 요동 도사에 부치는 것이니, 그 실수를 조사하여 전달한 것으로 알며, 따라서 공문으로 수령하였다는 것을 회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10002_005

 

다음은 주목할 구절이다.

 

"영락 19년 9월 21일에 흠차(欽差)한 소감(少監) 해수(海壽)가 칙서의 사단을 가지고 와서, 말 1만 필을 가려서 보내어 국용에 쓰게 하면, 마땅히 값을 쳐서 준다 하였기로, 이번에 앞서 판득한 잡색마(雜色馬) 3백 필을 첫 번째로 보내는데....“

 

또 다시 명나라에서 말 1만 필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누적 300필

 

1421년 10월 7일

 

판사역원사(判司譯院事) 정교(鄭喬)를 보내어 두 번째로 보내는 말[馬] 5백 필을 영솔하고 요동으로 갔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10007_002

 

누적 800필

 

1421년 10월 10일

판예빈시사 설내를 보내 말 5백 필을 요동에 4번째로 보내다

판예빈시사(判禮賓寺事) 설내(偰耐)를 보내어 네 번째 보내는 말 5백 필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갔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10010_003

 

두 번째와 네 번째 사이인 세 번째 기록은 찾지 못했다. 그러나 요동에 보내는 말의 수로 미루어 보아 500필일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누적 1800필

 

1421년 10월 11일

대호군 김을현을 보내어 말 5백 필을 5번째로 요동으로 보내다

대호군(大護軍) 김을현(金乙玄)을 보내어, 다섯 번째 보내는 말 5백 필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갔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10011_002

 

누적 2300필

 

1421년 10월 12일

판전농시사 장홍수를 보내어 여섯번째로 말 5백 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판전농시사(判典農寺事) 장홍수(張洪壽)를 보내어 여섯 번째로 보내는 말 5백 필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갔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10012_002

 

누적 2800필

 

1421년 10월 14일

지사역원 임종의를 보내어 일곱 번째의 말 5백 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지사역원사(知司譯院事) 임종의(任從義)를 보내어 일곱 번째로 보내는 말 7백 필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갔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10014_006

 

누적 3500필

 

첨지사역원사 김희복을 보내어 여덟 번째로 보내는 말 7백 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첨지사역원사(僉知司譯院事) 김희복(金希福)을 보내어 여덟 번째로 보내는 말 7백 필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갔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10017_003

 

누적 4200필

 

1421년 10월 19일

내섬 소윤 이연을 시켜 아홉 번째로 말 7백 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내섬 소윤(內贍少尹) 이연(李燕)을 보내어 아홉 번째로 보내는 말 7백 필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누적 4900필

 

1421년 10월 20일

사역원 판관 허원상을 시켜 열 번째로 말 7백 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사역원 판관(司譯院判官) 허원상(許原祥)을 보내어 열 번째로 보내는 말 6백 필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갔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10020_005

 

누적 5600필

 

1421년 10월 22일

사역원 판관 구경부를 시켜 열한 번째로 말 6백 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사역원 판관(司譯院判官) 구경부(仇敬夫)를 보내어 열 한 번째 보내는 말 6백 필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갔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10022_004

 

누적 6200필

 

1421년 10월 24일

좌사직 안득상을 시켜 열두 번째로 말 6백 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좌사직(左司直) 안득상(安得祥)을 보내어 열 두 번째로 보내는 말[馬] 6백 필을 거느리고 요동으로 갔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10024_005

 

누적 6800필

 

1421년 10월 25일

사역원 주부 애검을 시켜 열세 번째로 말 6백 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사역원 주부(司譯院注簿) 애검(艾儉)을 보내어 열 세 번째로 보내는 말 6백 필을 거느리고 요동에 갔다.

 

누적 7400필

 

1421년 10월 27일

사역원 주부 사주경을 시켜 열네 번째로 말 6백 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사역원 주부(司譯院主簿) 사주경(史周卿)을 보내어 열네 번째 보내는 말 6백 필을 거느리고 요동(遼東)에 갔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10027_005

 

누적 8000필

 

1421년 10월 29일

사역원 주부 김척을 시켜 열다섯 번째로 말 6백 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사역원 주부(司譯院主簿) 김척(金陟)을 보내어 열 다섯 번째 보내는 말 6백 필을 거느리고 요동에 갔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10029_005

 

누적 8600필

 

1421년 11월 1일

사역원 판관 유흥준을 시켜 열여섯 번째로 말 6백 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사역원 판관(司譯院判官) 유흥준(兪興俊)을 보내어 열여섯 번째로 말 6백 필을 감독하여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11001_002

 

누적 9200필

 

1421년 11월 12일

사역원 주부 당몽현을 시켜 열일곱 번째로 말 5백 필을 요동에 보내다

사역원 주부(司譯院注簿) 당몽현(唐夢賢)을 보내어 열 일곱 번째로 말 5백 필을 감독하여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누적 9700필

 

1421년 11월 28일

내섬시 주부 김중제를 시켜 열여덟 번째로 말 3백 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내섬시 주부(內贍寺注簿) 김중제(金仲諸)를 보내어 여덟 번째로 말 3백 필을 감독해 가지고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11028_003

 

누적 10000

    

신기하게도 정확히 1만 필이다. 

 

1421년 12월 29일

제주도의 추위가 심하여 말이 얼어죽다

제주도(濟州島)에서 기르는 말이 많기가 1만 여필이나 되었다. 이보다 먼저 이 섬에서는 기후가 온난하여 겨울에 쌓인 눈이 없었는데, 이 해에는 추위가 심하여 눈이 5, 6척이나 쌓였으니, 말이 많이 얼어 죽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312029_002

 

이 기록은 전체 주제와는 상관없는 글이지만 제주도에 말이 얼마나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글이다. 이미 명나라에 그렇게 많은 말을 보냈음에도 아직도 1만 필이나 있다.

 

1422년 1월 4일

지사역원사 임밀을 보내어 말들을 감독하여 요동으로 가게 하다

지사역원사(知司譯院事) 임밀(林密)을 보내어 수효를 보충하는 말 2백 41필을 감독하여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보내는 말이 요동에 이를 때마다 도사(都司)가 문득 점검하여 물리친 까닭으로, 그 수효를 추가 보충한 것이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401004_003

 

누적 1만 241필

 

1423년 8월 1일

통사 김언용 등이 북경에서 돌아와 달달 정복차 말 1만필 빌린다는 내용을 아뢰다

통사(通事) 김언용(金彦容) 등 3인이 북경(北京)에서 돌아와서 계하기를,

"사신이 오는 일은 세자(世子)의 책봉하는 일 때문이고, 또 말 1만 필을 청구하려는 것이니, 장차 달달(達達)을 정벌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황제께서 금년 4, 5월에 병환이 나서 6월 보름 후에 회복되었으나, 정사를 보는 것은 태자가 보살피게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그들에게〉 각기 의복 한 벌을 내렸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08001_003

 

또 다시 전쟁을 이유로 명나라에서 말 1만필을 보내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1423년 8월 2일

병조 판서 조말생이 중국측이 요구한 말 1만필을 5천필로 줄이도록 건의하다

정사를 보았다. 여러 재상(宰相)들이 모두 나갔으나, 이조 판서 허조(許稠)·병조 판서 조말생은 그대로 남았다. 허조가 아뢰기를,

"양목탑올(楊木塔兀)은 얼굴은 사람이나 마음은 짐승과 다름이 없으며, 사납고 용맹스러움이 비할 데가 없으니, 한번 격노(激怒)하면 이를 제어하기가 심히 어려울 것입니다. 하물며 우리 나라에서는 흉년이 겹쳐서 창고가 텅 비었으니, 혹시 뜻밖의 변이 있으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서는, 지금의 안전을 위해서는 잠정적으로 주보(奏報)를 정지하고 운반에 관한 일은 견제(牽制)하여 봄이 옳겠사오며, 비록 주문(奏聞)하지 않더라도 우리 편에는 실수가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다. 지금 이 주문(奏聞)은 늦출 수 없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허조는 또 아뢰기를,

"중국에서 지난해에 말을 1만 필을 청구하고 지금 또 1만 필을 청구하니, 본국(本國)의 말은 예전에 비하여 감소되고, 또 강장(强壯)하지도 못합니다. 지난날에는 사대부(士大夫)집에는 말이 두서너 필 이상이 있었고, 서민(庶民)들도 모두 충실한 말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인(士人)의 집에도 한 필에 지나지 못하고, 또한 모두 피약(疲弱)한데, 하물며 서민(庶民)이겠습니까. 군정(軍政)은 말보다 급한 것이 없는데, 충실한 말 2만필을 골라 바치게 되면, 이는 2만의 기병(騎兵)을 감소시키는 결과가 됩니다. 이 일 때문에 신은 밤중에도 자지 않고 걱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태조께서, 고황제(高皇帝) 때에 말을 3, 4천 필을 바친 적이 없었으니, 신은 반을 감하기를 주청(奏淸)하여, 다만 5천 필만 바치는 것이 편할 것입니다. 부득이하여 다 바치게 된다면, 내년을 기다려 바치는 것이 옳겠습니다. 지금 황제의 모든 하는 일이 도리가 아닌 일이 많사온데, 북적(北狄)이 크게 소란하여, 전쟁이 그치지 않게 되면, 편소한 우리 나라로서 어떻게 그 한정 없는 요구에 응하겠습니까. 만일에 천명이 이미 다하여, 이 무리[北狄]들이 뜻대로 된다면, 끝까지 〈명나라에게〉 신하의 절개를 지킬 수 없사오니, 이를 계승한 나라도 반드시 이 수효로써 청구하기를 마지 않을 것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서는, 지금 주청(奏請)하여 감하지 않으면 만세의 걱정이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말생도 또한 이 뜻으로써 아뢰었다. 〈이들이〉 이미 나가자, 임금이 육대언(六代言)과 더불어 이를 의논하니, 모두 아뢰기를,

"허조의 말은 깊이 생각하고 먼 앞일을 헤아린 계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전일에 말을 바칠 때에 의주(義州)가 피곤했었는데, 지금 또 흉년이 들어 사료 콩이 모자랄 형편이므로, 평안도 한 도가 폐해를 받음이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전하께서 왕위에 오른 지 오래 되지 않았는데, 황제의 총은(寵恩)이 이미 지극하니 〈그 명령에〉 따르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08002_001

 

위 기록 중 주목할 구절이다.

 

“중국에서 지난해에 말을 1만 필을 청구하고 지금 또 1만 필을 청구하니, 본국(本國)의 말은 예전에 비하여 감소되고, 또 강장(强壯)하지도 못합니다. 지난날에는 사대부(士大夫)집에는 말이 두서너 필 이상이 있었고, 서민(庶民)들도 모두 충실한 말이 있었으나, 지금은 사인(士人)의 집에도 한 필에 지나지 못하고, 또한 모두 피약(疲弱)한데, 하물며 서민(庶民)이겠습니까.”

 

이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사대부는 모두 집에 2~3마리의 말이 있었으며, 서민 역시 충분한 말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무리하게 명에 말을 보냄으로써 사대부와 서민들의 말이 상당히 줄었다는 것이다.

 

1423년 8월 4일

중국에 보낼 말을 도별로 정하다

중국에 보낼 말[馬]을 나누어 정했으니, 서울에서 2천 50필, 유후사(留後司)에서 2백 50필, 경기(京畿)에서 6백 50필, 경상도에서 2천 2백 필, 전라도에서 1천 3백 50필, 충청도에서 1천 2백 필, 강원도에서 8백 필, 황해도에서 8백 필, 함길도에서 5백 필, 평안도에서 6백 필, 합계 1만 4백 필이다. 자원해서 말을 바치겠다는 자도 또한 이를 허락했으니, 신축년의 예(例)를 모방한 것이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08004_003

 

각 도에서 모아 명나라로 보낼 말이 도대체 몇 마리인지 상세하게 나온다. 그 합이 1만 400필이라고 하니 정말 많은 숫자이다.

 

도별로 보자면 경상이 2200으로 제일 많고, 그 다음에 서울 2050, 전라 1350 순이다.

 

1423년 8월 14일

호조에서 중국에 보낼 말에게 공급할 콩을 의주로 운반토록 아뢰다

호조에서 평안도 감사의 관문(關文)에 의하여 계하기를,

"지금 중국에 말 1만 필을 보내는데, 길 가는 도중(途中)에 의주(義州)에 머무르면 동팔참(東八站)에서 먹일 사료(飼料) 콩을 주기로 하였으나, 지나온 길가의 각 고을과 의주(義州) 창고에 저장된 것을 계산하면 지급(支給)하는데 넉넉하지 못하오니, 청컨대, 참(站)에 가까운 각 고을의 묵은 콩 1만 1천 석을 각 참(站)과 의주(義州)로 운반하여 지급(支給)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08014_004

 

누적 20,241필

 

말 1만 필을 보내는 것도 고생이지만 말 1만 필이 먹을 콩 1만 1천 석도 필요하다고 하니, 국가의 부담이 상당하다.

 

 

그런데 이것으로도 말이 부족했는지 또 말을 보내달라고 한다.

 

1423년 8월 20일

통사 김을현으로 하여금 초운으로 잡색마 7백필을 맡아 요동으로 가게 하다

통사(通事) 김을현(金乙玄)을 보내어 초운(初運)으로 잡색마(雜色馬) 7백 필을 맡아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그 자문(咨文)에,

"영락 21년 8월 18일에 흠차 소감(欽差小監) 해수(海壽)가 가지고 온 칙유(勅諭) 절목(節目)에, ‘왕은 곧 말 1만 필을 골라 보내어 국용(國用)을 도우라. ’고 하였으므로, 당직(當職)은 삼가 온 나라의 신민(臣民)들과 더불어 힘을 다하여 조판(措辦)하고, 운(運)을 나누어 관원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보내겠습니다. 절후가 점점 차지므로, 혹시 정류(停留)하게 되면 초료(草料)의 접응(接應)이 넉넉지 못하여, 말이 여위게 될까 두려우니, 보낸 말은 도착되는 대로 곧 거두어 각운(各運)의 자문(咨文) 안의 수목(數目)에 조회(照會)하여, 뒤따라 곧 전달(轉達)하여 서로 응하게 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출처 :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08020_005

  

 

기록을 보면 영락 21년 8월 18일에 또 황제가 1만 필을 보내달라고 한다. 여기서 영락 21년은 1423년을 말한다. 앞서 말 1만 필을 보낸 것이 8월 14일 이므로 불과 4일 만에 또 보내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한 번에 1만 필을 보내는 것은 불가능하니 보낼 수 있는 대로 계속해서 보내겠다고 한다.

 

1423년 8월 26일

판사역원사 임밀에게 말 1천필을 맡아 요동으로 가게 하다

판사역원사(判司譯院事) 임밀(林密)을 보내어 두 번째 운(運)으로 말 1천 필을 감독하여 요동(遼東)으로 가게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08026_004

  

 

1423년 9월 2일

통사 설내로 하여금 말 1천필을 요동으로 보내게 하다

통사 설내(偰耐)를 시켜 세 번째 운(運)으로 말 1천 필을 감독하여 요동으로 보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09002_006

 

1423년 9월 8일

판사역원사(判司譯院事) 강방우(康邦祐)를 보내어 네 번째 운(運)으로 말 1천 필을 감독하여 요동(遼東)으로 가게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09008_003

 

1423년 9월 14일

통사 유흥준으로 하여금 말 1천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통사(通事) 유흥준(兪興俊)을 보내어 다섯 번째 운(運)으로 말 1천 필을 감독하여 요동(遼東)으로 가게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09014_001

 

1423년 9월 23일

좌군 사직으로 하여금 말 1천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좌군 사직(左軍司直) 고기충(高奇忠)을 보내어 여섯 번째의 운(運)으로 말 1천 필을 감독하여 요동(遼東)으로 가게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09023_001

 

1423년 9월 26일

첨지사역원사 강유경으로 하여금 말 1천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첨지사역원사(僉知司譯院事) 강유경(姜庾卿)을 보내어 일곱 번째 운(運)으로 말 1천 필을 감독하여 요동(遼東)으로 가게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09026_003

 

1423년 10월 3일

사역원 판관 오의로 하여금 말 1천필을 요동으로 내다

사역원 판관(司譯院判官) 오의(吳義)를 보내어 팔운마(八運馬) 1천 필을 주관하여 이끌고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10003_006

 

1423년 10월 15일

사역원 주부 이사로 하여금 말 1천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사역원 주부(司驛院注簿) 이사(李舍)를 보내어 열 번째 운(運)으로 말 1천 필을 압령하고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510015_004

 

10번 째 운이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누락된 기록도 있다. 한 번 보낼 때 마다 1000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누적 30241필

 

1424년 1월 28일

퇴박맞은 마필을 보충하여 말 5백 필을 요동으로 보내다

사역원 판관(司譯院判官) 하도(河圖)를 보내어 퇴박맞아 돌아온 마필을 보충하는 사운마(四運馬) 5백 필을 영솔하고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누적 30741필

 

 

 

1427년 2월 19일

정조사 참판 한상덕이 북경에서 돌아와 말 5천 필을 진헌하라는 성지를 전하다

정조사(正朝使) 참판 한상덕(韓尙德)이 북경(北京)으로부터 돌아와서 계하기를,

"내관(內官) 윤봉(尹鳳)성지(聖旨)011) 를 전하기를, ‘말 5천 필을 금년 8, 9월에 이 곳에 도착하도록 하고, 칙서는 뒤에 그곳에 도착할 것이니, 이를 먼저 말하노니 그리 알라. ’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02019_005

 

이번에는 저번처럼 말 1만 필을 받는 것은 힘들다고 느꼈는지 절반으로 줄어든 5천 필을 요구하고 있다.

 

1427년 5월 11일

판사역원사 김을현을 보내 잡색마 6백 필을 영솔하고 요동 도사에 가게 하다

판사역원사 김을현(金乙賢)을 보내어 초운(初運)으로 무역할 잡색마(雜色馬) 6백 필을 영솔하고 요동 도사(遼東都司)에 가게 하였다. 그 자문(咨文)에 이르기를,

"선덕(宣德) 2년 4월 21일에 흠차 태감(欽差太監) 창성(昌盛)·윤봉(尹鳳) 등 관원이 칙유(勅諭)를 받들고 우리 나라에 왔을 때, ‘왕은 말 5천 필을 곧 골라 보내어 국용(國用)에 충당하게 하라.’ 하였기에, 이제 이미 먼저 판출(辦出)된 잡색마 6백 필을 우선 초운(初運)으로 하여, 배신(陪臣) 김을현(金乙賢)을 시켜서 영솔하고 요동 도사에 나아가 한 차례 끊어주는 동시에 공문 이첩을 하는 데에도 합의해서 하게 하노니, 살펴 검사하여 상달 시행하기를 청하며, 아울러 받았다고 공문으로 회시하여 주기를 바란다."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05011_004

 

 

1427년 5월 26일

전 지사역원사 김희복을 보내 말 6백 필을 영솔하고 요동으로 가게 하다

지사역원사(知司譯院事) 김희복(金希福)을 보내어 제오운(第五運)으로 무역할 말 6백 필을 영솔하고 요동에 가게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05026_003

 

 

1427년 5월 30일

첨지사역원사 허원상을 시켜 말 6백 필을 영솔하고 요동에 가게 하다

첨지사역원사(僉知司譯院事) 허원상(許原祥)을 시켜 제육운(第六運)으로 무역할 말 6백 필을 영솔하고 요동에 가게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05030_002

 

1427년 6월 4일

첨지사역원사 구경부에게 말 6백 필을 영솔하고 요동으로 가게 하다

첨지 사역원 사 구경부(仇敬夫)를 시켜 제칠운(第七運)으로 무역할 말 6백 필 및 피로되었던 중국 사람양아적(楊阿赤)을 영솔하고 요동으로 가게 하였다. 양아적에게는 의복·갓·신·저마포(苧麻布)를 주었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0906004_004

 

1427년 6월 8일

사역원 판관 하도를 시켜 말 6백 필을 영솔하고 요동에 가게 하다

사역원 판관(司譯院判官) 하도(河圖)를 시켜 제팔운(第八運)으로 무역할 말 6백 필을 영솔하고 요동(遼東)에 가게 하였다.

 

1427년 6월 16일

사역원 주부 당몽현을 시켜 말 2백 49필을 영솔하고 요동에 가게 하다

사역원(司譯院) 주부(注簿) 당몽현(唐夢賢)을 시켜 제구운(第九運)으로 무역할 말 2백 필과 먼젓번에 보낸 각 운(運) 중에서 퇴맞아 돌아온 수를 채우기 위한 말 49필을 영솔하고 요동에 가도록 하였다.

 

누적 33990

 

보내기로 한 것은 5000필인데 기록상에는 3249필을 보낸 것만 나온다.

 

1449년 12월 22일

등극의 조칙을 맞이하는 일에 대해 의논하다

통사 고용지(高用智)가 경사(京師)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사은사(謝恩使) 김하(金何)조병(調兵)089) 과 말 2, 3만 필의 진헌을 면제한다는 칙서를 싸 가지고 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사신 예겸(倪謙)사마순(司馬恂)이 등극의 조칙(詔勅)을 받들고 옵니다."

하니, 이에 공조 판서 윤형(尹炯)으로 원접사(遠接使)를 삼고, 또 선위사(宣慰使)를 안주(安州)·평양(平壤)·황주(黃州)·개성부(開城府)에 보내게 하였다. 그 사목(事目)에 이르기를,

"사신이 만일 전하께서 친히 조칙을 맞이하느냐의 여부를 물으면, 대답하기를, ‘평소에 풍질(風疾)을 앓으시고 기거(起居)가 불편하여 친영하실 수 없는데, 왕세자께서도 등에 종기가 나서 온 나라 사람이 근심하던 중 근일에야 나아지셨지만, 그러나, 아직 평복(平復)되지 못하여 또한 조칙을 맞이할 수 없으니, 왕자(王子)로 하여금 백관을 거느리고 대행시키고자 한다. ’고 하라."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12022_001

 

기록을 보면 말 2~3만 필의 진헌을 면제한다고 하니,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명나라가 그래도 양심은 있었나보다. 한 가지 더 알게 된 사실은 단순히 군수물자로 말(馬)만 보낸 것이 아니라 조병이라고 하여 훈련된 병사를 명나라에도 보냈었나보다.

 

그런데 이렇게 명나라에 말을 바치는 것이 끝나는가 싶었으나...

 

 

1449년 12월 22일

중국에 진헌할 말의 숫자에 대해 의논하다

하연(河演)·황보인(皇甫仁)·박종우(朴從愚)·정분(鄭苯)·정갑손(鄭甲孫)·정인지(鄭麟趾)·허후(許詡)를 불러 진헌할 마필의 숫자를 의논하니, 모두가 말하기를,

"우리 나라는 사면으로 적(敵)을 받아 말[馬]을 쓰는 것이 매우 긴요하니 어찌 그 정한 액수를 채우겠습니까. 1만 필을 바침이 옳으오나, 또한 힘이 자라지 못하오니, 5천 필을 지나지 아니함이 편하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중국에는 호인놈[胡寇]들이 변경을 침법하여 인마(人馬)를 사로잡아 죽이니, 광녕(廣寧) 등의 위(衛)에서는 마필이 거의 다하였다. 예전에 당(唐)나라현종(玄宗)이 파천했었지만, 그 조짐이 먼저 보이는데, 이제 중국의 변은 뜻하지 않은 데서 나왔고, 그 피폐함을 보게 되면 지금보다 심한 적이 아직 없는 것이다. 지금 만일 칙서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진마(進馬)하는 숫자를 채우지 못한다면 반드시 우리 나라가 중국의 약함과 호인놈들의 성함을 보고 장차 두 마음을 가지리라 여길 것이다. 자고 이래 조선은 예의(禮義)의 나라라고 일컬어 정성껏 사대(事大)하였다. 예를 들면, 송나라가 남천(南遷)하여 중국이 다 호인(胡人)의 소유가 되었어도 오히려 예를 잃어버리지 않고 바다를 건너서 조하(朝賀)를 갔고, 현종(玄宗)이 난리를 피하여 촉(蜀)으로 갔는데도 신라(新羅)에서는 양자강[沂江]을 거슬러 조하 들어 간 것과 같은 것이다. 현종은 이를 가상하게 여겨서 지금도 이 사실은 간책(簡策)에 빛났는데, 오늘날의 일은 명교(名敎)에 관계가 있는 것이다. 황제께서는 변방이 고립되고 약함을 염려하여, 말을 얻어서 변방을 채우고자 하는 뜻이 매우 간절하니, 공경하여 받들지 않을 수 없는 것인데, 경 등은 5천 필이면 가하다고 하나, 내 뜻은 1만 필로 채우고자 한다. 그러나, 또한 허명(虛名)을 사모하여 설치의 해를 받는 일도 있을 터인즉, 갑자기 1만 필로 한정함도 불가한 것이니, 고 황제(高皇帝)·태종 황제(太宗皇帝)·선덕 황제(宣德皇帝)께서도 다 일찍이 말을 징발하여 갔으니, 정액(定額)을 참고하여 아뢰게 하라."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112022_002#

 

앞선 기록과 같은 날짜인 것으로 보아 동시에 논의된 것으로 보인다.

 

위 기록을 보면 신하들은 1만 필을 보내는 것은 무리이니 5천 필을 보내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말하는데, 오히려 임금이 1만 필을 보내는 게 신하된 도리로써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반론을 펴고 있다. 실록의 기록을 명나라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명나라를 위한 일종의 립 서비스라고 볼 수 있으며, 그게 아니라면 명에 대한 사대라고 이해할 수 있다.

 

1450년 1월 11일

관마색을 설치하고 각품으로 하여금 말 5천 필을 차등있게 내개 하다

관마색(官馬色)을 설치하고 중외(中外)의 각품(各品)으로 하여금 말[馬]을 차등 있게 내게 하되 5천 필을 한정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1011_001

 

그러나 결국에는 5천 필로 결정이 났나보다.

 

1450년 1월 13일

진헌할 마필을 각 관직과 지역에 따라 배정케 하다

의정부에서 병조의 정문(呈文)에 의거하여 아뢰기를,

"명나라에 무역하여 바꿀 말은 이미 5천 필로써 결정하였사오니, 삼가 정미년(丁未年)의 예(例)를 상고하여 분정(分定)하기를, 정·종(正從) 1품은 두 사람이 아울러서 중마(中馬) 1필과 각각 소마(小馬) 1필씩, 정·종 2품은 중마 1필씩, 정3품은 두 사람이 아울러서 중마 1필씩, 종3품은 두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정·종 4품은 네 사람이 아울러서 중마 1필씩, 정·종 5품은 네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정·종 6품은 여섯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정·종 7품은 여덟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정·종 8품은 열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정·종 9품은 열 두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권무(權務)는 열 여덟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으로서, 이상은 모두 직사(職事)에 종사하는 자이고, 전함은 정·종 1품은 중마(中馬) 1필씩이고, 이하는 모두 산관(散官)도 같습니다. 정·종 2품은 두 사람이 아울러서 중마 1필씩이며, 밭을 받은 전함[受田前銜]으로 네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종3품은 여섯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정·종 4품은 여덟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정·종 5품은 열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정·종 6품은 열 두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정·종 7품은 열 여섯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정·종 8품은 열 여덟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정·종 9품과 권무(權務)는 스무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학생(學生)은 스물 두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이고, 밭을 받지 않은 전함[無受田前銜]은 정·종 3품은 여덟 사람이 아울러서 중마 1필씩, 정·종 4품은 열 두 사람이 아울러서 중마 1필씩, 정·종 5품은 열 네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정·종 6품은 열 여섯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정·종 7, 8품은 스무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정·종 9품과 권무(權務)는 스물 여섯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이고, 검교(檢校) 각품과 직책이 없이 산관(散官)을 받은 자로서 밭을 받지 못한 자는 한결같이 밭을 받은 것이 없는 전함(前銜)의 예(例)에 따르고, 노인으로서 산관(散官)을 받은 자는 예외(例外)로 하며, 각 도의 감사(監司)·도절제사(都節制使)·처치사(處置使)·수령관(首領官)은 모두 본품(本品)에 따라 말을 서울에 바치게 하고, 각 고을 수령·군사(郡事) 이상과 각포(各浦) 도만호(都萬戶)는 각각 중마 1필씩, 현령(縣令) 이하 및 각포(各浦) 만호(萬戶)는 각각 소마 1필씩, 교관(敎官)·교유(敎諭)·검률(檢律)·찰방(察訪)·역승(驛丞)은 아울러 산관(散官)과 같이 하되, 경중(京中)의 각품의 예(例)에 따라 모두 그 도(道)의 도회소(都會所)에 말을 바치게 하고, 국무당(國巫堂)은 중마 1필씩, 전(前)의 국무당은 두 사람이 아울러서 중마 1필씩, 사부 무당(斜付巫堂)은 여섯 사람이 아울러서 중마 1필씩, 송악(松嶽)과 덕적(德積)의 두 무당(巫堂)이 아울러서 중마 1필씩, 내승 무당(內乘巫堂)은 소마 1필씩, 감악 무당(紺嶽巫堂)은 중마 1필씩, 삼성 무당(三聖巫堂)은 소마 1필씩, 건무당(件巫堂) 상등(上等)은 네 사람이 아울러서 중마 1필씩, 중등(中等)은 여섯 사람이 아울러서 중마 1필씩, 하등(下等)은 열 사람이 아울러서 중마 1필씩이고, 상경사(上經士)·부경사(副經士) 모두 중마 1필씩이고, 전 상경사(上經士)는 두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 건경사(件經士)는 여덟 사람이 아울러서 소마 1필씩이며, 함길도·평안도 양계(兩界)는 수령(守令)·교관(敎官)·만호(萬戶)·검률(檢律)·교유(敎諭)·찰방(察訪)·역승(驛丞)을 제(除)한 외에서 말을 바치지 말게 하여, 대략 서울에서 말 1천 1백 필, 경기(京畿)에서 3백 필, 개성부(開城府)에서 1백 필, 강원도에서 1백 필, 황해도에서 2백 필, 충청도에서 7백 필, 전라도에서 1천 필, 경상도에서 1천 4백 필이온데, 상항(上項)의 경기(京畿)에 배정한 마필의 수효가 부족하게 되오면 전례(前例)에 따라 잘 사는 사람과 공장이·장사꾼·염색집[染家]에 나누어 배정케 하고, 각 도에 배정한 마필의 수효가 부족하게 되오면 도내(道內)의 군민 인호(軍民人戶)에 분정(分定)케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1013_002

 

진헌할 말은 5천 필로 결정이 났으며, 관직과 지역에 따라 진상할 말의 개수를 정하고 있다.

 

재밌는 것은 국가의 관료들만 말을 바치는 것이 아니라, 국무당이라고 하여 국가에서 일하는 무당들도 말을 바치는 것이 나온다. 이 기록을 보면 전과 달리 일반 백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없는 것으로 보아 이제 더 이상 일반 백성들로부터 말을 구입하거나 강제로 가져오는 것은 힘든 것으로 보인다.

 

도별로 배정받은 말의 수를 보면 경상 1400, 서울 1100, 전라 1000 순으로 앞서 1만 필을 바칠 때와 똑같은 지역 순서이며 다만 전체적으로 바치는 수가 줄었다.

 

1450년 1월 17일

진헌할 마필을 운을 나누어서 올려 보내게 하다

예조 판서(禮曹判書) 허후(許詡)가 아뢰기를,

"중국에서 말 2, 3만 필을 요구하옵는데, 우리 나라에서 그 수량대로 바칠 수 없습니다. 먼저 말이 없다고 아뢰면 반드시 우리가 핑계하여 늦추려는 것이라고 여길 것이오니, 신은 청하옵건대, 먼저 살찌고 건장한 말 1백 필을 가려 주문사(奏聞使)에게 압경(押領)하여 보내게 하고, 인하여 ‘말이 없어서 수효대로 바칠 수 없다.’ 하고, 또 말하기를, ‘이로부터 운(運)을 나누어 계속하여 바치겠다. ’고 하오면, 명나라에서 우리 나라가 진력(盡力)하여 조판(措辦)하는 뜻을 알게 될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생각도 역시 그러하다. 어찌 1백 필 뿐이겠는가. 5백 필을 가져다 먼저 바치도록 하라."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1017_001

 

저번 기록에는 중국에서 5천 필을 요구해서 5천 필을 바치기로 했다는데 이번에는 중국에서 2, 3만 필을 요구한다고 한다. 어쩌면 기록에는 나오지 않으나 명나라에서 요구한 5천 필은 이미 보냈으며, 그 후 또 4일만에 명나라에서 2,3만 필을 요구하는 것일 수도 있으며, 아니면 명나라에서 말을 바꾼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아니므로 보류하기로 한다.


기록의 내용을 더 들여다보면 중국에서 요구한 2,3만 필을 보내는 것은 무리이므로 미리 겉치례로 500 필을 보내 성의라도 보여야 한다고 신하가 말하고 있으며, 이에 세종은 100 필로는 부족하고 500필은 보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1450년 1월 21일

공조 참의 남우량을 보내 북경에 가서 말 5백 필을 바치게 하다

공조 참의(工曹參議) 남우량(南祐良)을 보내어 북경에 가서 말 5백 필을 바치고 아뢰기를,

"배신(倍臣) 김하(金何)가 칙유(勅諭)를 받들고 왔사온데, 당해 절목에 ‘말 2,3만 필을 사람을 보내어 북경까지 보내 오도록 하라.’ 하셨습니다. 신(臣)이 칙서(勅書)를 받들고 돌아오매 몹시 마음속에 간절하옵니다. 또 신의 조부(祖父) 때부터 신의 몸에 이르도록 대대로 열성(列聖)의 은택(恩澤)을 입음이 지극히 깊고 지극히 후(厚)하였사온데, 하물며 이제 성상(聖上)께서 변비(邊備)에 진려(軫慮)하시오니, 감히 마음을 다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공경하여 따라서 조금이라도 보답하려 하오나, 그윽이 생각하옵건대, 폐방(弊邦)도 자주 이웃 도적이 흔단(釁端)을 일으켜서 변경(邊警)이 끊이지 않는 것은 실로 조정에서도 자세히 아는 바로서 16, 7년간에 방어하는 데 가장 긴요한 수수마필(戍守馬匹)이 험조(險阻)한 관문(關門) 사이를 타고 다니며 짐을 싣고 다니다가 넘어져 죽고 모손(耗損)된 것이 10에 6, 7이나 되어 소로 실어 나르기에 이르렀사온데, 소도 또한 손실이 많아서 사람이 몸소 지고 다니고 있사옵니다. 사경(四境)의 방비가 엉성한 데가 많고, 곧 눈으로 보기에도 짐승이 얼마 없사오니, 물력(物力)을 헤아리건대, 비록 중외(中外)의 대소 군민(大小軍民) 가운데 말을 가진 집에서 모두 거두어 모을지라도 수효대로 채워서 판비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신은 간절히 5천 필을 조판(措辦)하여 바치려고 하오니, 혹시라도 여력(餘力)이 있어 할 수 있사오면 어찌 감히 꾸며 말하여 성총(聖聰)을 속이겠습니까. 복망(伏望)하옵건대, 성자(聖慈)께서 어여삐 살피소서."

하였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da_13201021_001

 

누적 34490필

 

앞서 나온 기록을 토대로 본다면, 보내는 척 하는 성의는 세종의 말대로 500필로 결정이 난 듯 하며, 2,3만 필은 무리이이며 5천 필은보낼 수 있다고 한다.


 이것으로 세종 실록의 기록이 끝난다.

 

 

4. 문종실록(1450~1452)

 

1450년 3월 25일

의정부에서 중국에 발송한 말 5백 필의 대가를 의논하여 아뢰다

의정부에서 아뢰기를,

"지금 중국에 진헌(進獻)하는 마필(馬匹)을 진헌하지 말라고 칙령(勅令)하였는데, 전일에 발송한 말 5백 필은 이미 의주(義州)까지 이르렀으니 돌려오게 되면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청컨대 그 도(道)의 말이 없는 군사에게 주고, 그 말의 대가(代價)는 제주(濟州)의 흠이 있는 말과 각 목장(牧場)의 아마(兒馬)198) 로써 주도록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출처: http://sillok.history.go.kr/id/kea_10003025_004

 

누적 500

 

이것으로 명나라로 보낸진 말의 기록이 끝난다.

 

종합하면 기록상에 보이는 것은 태조6000 필, 태종 24878필, 세종 34490필, 문종 500필

 

총합 65868필


그런데 실제 실록의 기록을 보면 명나라로 보내진 모든 말들의 기록이 적혀 있는 것이 아니므로, 명나라 황제가 요구한대로 명나라에 말을 보냈다고 할 경우


태조 10000필, 태종 24930 ,세종 40000필, 문종 500필

 

총합 75430필

 

어찌 되었든 결국 6만 5천필 이상이므로 굉장히 많은 숫자이다.


 


이를 통해 본다면 조선 초중기에 “그 많던 고려의 말(馬)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시구가 있었다는 것은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니다.

 

말(馬)은 굉장히 중요한 운송수단이다. 현대로 따진다면 자동차에 비유할 수 있다. 그런데 위 실록의 기록들을 살펴보면 일반 백성들도 모두 충분한 말(馬)이 있었으며, 사대부들은 2~3필의 말이 있었다고 하니 현재 한국이 대부분 한 가구당 한 대의 차가 있는 것처럼 조선 역시 비슷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가 배운 조선의 역사를 살펴보면 드라마를 보더라도 가마를 이고 가는 가마꾼들이 나오고, 그 가마를 타고 가는 여인들이 먼저 떠오른다. 또한 조선은 보부상이라고 하여 괴나리봇짐을 지고, 짚신을 신고 걸어 다니며 전국을 떠도는 한심한 시대였으니,  위 기록 상에 나타난 말(馬)의 숫자와 상당한 괴리가 있다.

 

결국 조선 초기에는 말(馬) 기록에서도 나타나다시피 많이 있었지만 그 많던 말(馬)들이 모두 명나라로 보내지면서 그 여파가 조선이 끝날 무렵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많은 조선의 말(馬)들은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위 기록이 모두 조선 초기 즉 조선이 태어난지 60년 안에 일어난 기록들이며 그 중에서도 3만 필이 보내진 것은 조선이 만들어진지 30년도 안되서이므로 그 기반은 결국 고려시대로 거슬러 올라갈 수밖에 없다.    


즉, 고려 시대에 존재했던 많은 말(馬)들이 조선시대로 이어진 것이며, 그 조선시대의 말(馬)은 결국 명나라로 모두 넘어간 것이다.


말(馬)은 자동차일 뿐만 아니라 탱크와 같은 무기이기도 하다. 그러한 점에서 본다면 조선이 이렇게 많은 말(馬)들을 명나라로 보낸 것은 자주 국방을 포기한 것이다.


만일 조선이 명나라의 압박에 못이겨 어쩔 수 없는 사대로 인해 상당한 말(馬)을 보낼 수밖에 없다고 한다면, 앞으로도 많은 말(馬)을 생산할 수 있도록 그 기반이 되는 말(馬)의 수는 남겨둬야 했다.


그런데 위 실록의 기록에서도 나타나지만 초기에 서민들도 모두 충만한 말(馬)이 있으며, 사대부는 2~3필의 말(馬)이 있던 것이 나중에 가서는 사대부나 말(馬) 1필이 있을 정도라고 하니 굉장한 양의 말(馬)이 줄어든 것이다.


또한 처음 서두에 말한 경국대전 법이나 여러 기록들을 통하여 조선의 말(馬)이 상당히 귀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운송 수단으로 말(馬)이 아닌 사람의 걸음이 대중적이었던 것을 본다면 결국 말(馬) 생산의 기반이 무너진 것이다.


결국 기마민족이기도 했던 우리 민족에게 말(馬)이라는 것이 생소하게 된 계기는 조선인 것이다.

 


어쩌면 조선은 본인의 국방은 모두 명나라에 맡기고, 말(馬)을 보유함으로써 필요한 유지비용을 고려하여, 말(馬)을 모두 팔아버리고 말(馬)을 판 비용으로 다른 것들을 해내는 것이 나았을 지 모른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그 순간만의 이익을 따진 것으로 말(馬)이라는 것이 있음으로 해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모두 포기한 것이다.


국방에 있어서도 조선은 말(馬)이 부족했기 때문에 명나라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국방이 힘든 처지에 놓여있었으며 이러한 현실은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이 그토록 무력하게 일본에 밀린 것과 무관하지 않다.


또한 결국 이러한 처지는 명나라가 무너진다면 조선은 또 다른 힘 있는 국가에 자신의 국방을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결국 명이 무너지자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이 된다.


본인이 섬기는 국가만 바뀔 뿐 항상 어떤 국가를 섬긴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출처: http://cafe.daum.net/khankorea/63Ky/3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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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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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波奈留之國 | 작성시간 16.02.24 똑, 지같이 생긴
    글 쓰고 있네요!

    님도 조선이
    반도에만 국한되었다
    생각하는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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