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고대사의 시작은 왕검조선이다.
<삼국유사> 기이편과 후조선 초기 편찬된 <동국통감>에 인용된 <고기>의 왕검조선이 우리민족의 최초국가로 보아야 하며 북애노인이 저술한 <규원사화> 단군기의 지리비정이 가장 사실에 근접한 사서라 본다.
참고도 - 왕검조선 강역과 도읍지 추정도
<동국통감>에서는 개국시조 단군왕검의 조선 역년을 1048 년이라 하였고 <규원사화>는 47 대 역년 1205 년이라 하였으며 <환단고기>에 실린 이암의 <단군세기>에는 47 대 역년 1997 년으로 기록되어 있고 그 이전에 단국 1565 년 역사가 있었음을 기록하였다.
그런데 한국사학계가 우리의 고대 기록을 제대로 검토.분석.정립하지 못하고 왜종아이들이 창안한 소위 식민사관을 맹종하여 화국 한 유철이 5 만 병사를 보내 만.우거가 도둑질하고 차지한 조선 땅에 4 군을 설치한 시기 즈음부터 한국사가 시작되었다고 아주 바보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런 때문인지 역사관심가들이 <삼국유사>에 기록된 환인.환웅의 신화를 환국 또는 배달국 등이라 하며 <단군세기>의 단국 1565 년 기록도 불분명한 상황에서 더 소급하여 서기전 7199 년에 개국하였다느니 서기전 3301 년에 개국하였다며 근거 없는 환타지 소설류에 심취되어 있다.
어쩌자는 것인가? 그것이 학문적일 수가 있다고 보는가?
서기전 2333년 개국하였다는 왕검조선마저도 제대로 모르는 이들이 그 이전의 역사를 어찌 그리 쉽게 말하는가? 그 이전에 대한 사실을 파악하기에는 현실적으로 한계가 있음을 자각하고 하루빨리 꿈에서 깨어 현실감을 가져야 할 것이다. 왕검조선 이전은 문명 시기로 분류하여 고고학적 측면의 이해 방법이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고기> <삼국유사> <단군세기> <동국통감> <규원사화> 등 신뢰할 만한 우리 고대 사서에 기록된 우리 역사의 시작은 서기전 2333 년 왕검이 단군 제위에 오르고 조선을 건국하여 1048 년 지속되었고 초도지는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 들에 세운 임검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라 본다.
후조선 숙종 시기 <규원사화>를 저술한 북애는 임검성을 후조선 시기의 청국 봉천성 요양에서 북쪽으로 600 리 떨어진 길림성 속말강 남쪽의 소밀성이라 하였는데 화국의 25 번째 정사인 <청사고/지리지>에는 길림성 치소인 길림부에서 서쪽으로 195 리 떨어진 쌍양현 치소가 소알연蘇斡延이라 하였으며 현 남쪽에는 황영皇營이 있고 이통주의 북쪽이라고 설명되어 있다.
소알연은 소밀성, 소머리 곧 우수와 같은 음, 같은 뜻의 단어들일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으며 <청/지>의 봉천.길림성 기록을 샅샅히 뒤져도 황영과 비견될 만한 지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북애의 지명비정이나 <규원사화>의 기록 중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또한 정확하다는 것이 증명되는 곳이다.
또한 북애는 단군 왕검께서 임검성에서 10 년을 지내 보니 기후가 차가워 농사에 적합치 않고 물길이 북쪽으로 흘러 남쪽과의 교통이 불편하여 백산 남쪽 패수 북쪽으로 천도하였다고 하며 이 두번째 도읍 위치를 <신당서/열전> <요사/지리지> <일통지> 등의 기록을 검토하여 고구려의 국내.환도성지역이고 진국의 서경 압록부 신주지역이라고 설명하였다.
또 백산 남쪽인 신주에 정착한지 20 여년이 지나서 큰 홍수를 만나 남쪽으로 옮긴 곳이 아사달 아래 당장唐莊의 들이며 후조선 시기의 문화 구월산 아래 장평莊坪 땅이라 비정하였고 이로부터 900 여년 후 34 세 단군 오루문 시기에 낙랑홀로 도읍을 옮겼다고 하며 총 47 대 단군이 재위하였고 그 역년은 1205 년이라 하였다. <동국통감>의 1048 년과는 차이가 있는 부분이다.
한편 일연이 기이편에서 제목으로 왕검조선 앞에 기록한 고조선은 왕검조선과 같다는 뜻으로 병기한 것이 아니라 환웅의 통치기를 왕검조선보다 오래 되었다하여 옛 古를 첨언한 것이라 추정한다. 어떤 이들은 왕검조선이 위만조선에 비해 오래되었기 때문에 왕검조선을 고조선으로 병칭한 것이라 했다고 해석하지만 내 상식으로는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다고 본다.
본 글에 국호를 조선이라 했다고 하면서 무엇때문에 글 제목을 `고조선왕검조선`이라 하겠는가?
환웅의 통치기 국호가 전해지지 않았으니 단군왕검의 국호인 조선보다 옛되었다 하여 고조선이라 한 것이 아니겠는가?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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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신석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2.26 타임로드
정말 단순하게 사는군.
정사를 누가 다 읽냐구!
몇 사람이 달려들어 편찬하는 정사이고 한 사람이 쓰는 것이라 할지라도 부분적으로 오인한 것이 당연히 있는 것인데, 기록되었다고 모두 사실을 적시한 것인줄 아는 모양이지?
에효,
다들 뭔 생각으로 살지?
그냥 역사 자체를 해석하고 비판해보라구.
한과 조선이 같은 장소에서 시기를 달리한 것인지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 보라구.
<명사>를 편찬한 여진인들이 설명하는 1500 년 전의 정황 기록을 뭐하러 보는가?
보더라도 사료가 정확한지 살펴야 할 것 아닌가?
에효.
기본적으로 아는 것이 있어야 비판을 하지.
꼴을 보니, 정사라니 어련히 알아서 썻으라고 하며 꼬랑지 내리는 거여? -
답댓글 작성자타임로드 작성시간 16.02.27 신석재 정사를 다 읽어보는게 단순하다고??ㅎ
어처구니가 없네...ㅎ
그래서 지리지의 거리를 일자로 그었나?ㅎ
내가 처음부터 님에게 한말...기억하고,
'손님입니다' 같은 사사로운 해석은 집에서 혼자 하길 바람.
그리고 역사서는 후대에 각종 명분에 의해 확장, 왜곡 해석은 할 수 있을 지언정
그 기본은 전거에 의한다는 역사서에 대한 최소한의 이해도 없으면서 무슨 역사 연구를 한다고...ㅉ
그러니 조금만 자신의 입맛에 어긋나도..
본인의 주장 근거라며 따온 책에 다른 단락의 것조차도 엉터리라며 딴소리지.
그리고 언제부터 말을 놓는 건지.. 대체 날 언제 봤다구...ㅎ
머리가 굳은 것은 알겠는데..
욕구불만의 해소는 딴데서 하길. -
답댓글 작성자신석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2.27 타임로드
참 돌이 따로 없네.
내가 얘기하는 것은 지리인데 뭔 뚱딴지같이 사건 얘기를 하나?
사건 내용에 대한 기록은 왜곡된 부분이 있을 수 있으니 감안해야겠지.
하지만 지리 기록은 왕조가 바뀌어 주.부.군.현 등의 명칭이 개칭은 되었을지라도 그 지형지세에 대한 기록은 일관성을 유지하기 때문에 조금만 살피면 기록자나 화사의 실수.오기 등을 바로 잡을 수가 있어.
왜일까?
각 시기마다 고지도도 숱하게 많을 뿐더러 가장 중요한 것은 측량에 의한 방향.축척이 정확한 현대지도가 있기 때문이야.
이제까지 잘못 이해한 부분을 뜯어고치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방향이나 제대로 잡고 댓글을 달아야 인정을 해주지. 안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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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삼분지계 작성시간 16.02.25 님이 말하지 않았던가요? 최소한의 공부를 위해서 찾는 노력이라도 하시라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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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신석재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6.02.26
<명사/조선전>에서 1500 년 전의 정황을 기록한 것은 읽을 필요도 없다.
차라리 <후한서/동이전>을 읽으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