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문단의 거목 전상국 소설가가 열 번째 중단편소설 전집 ‘남이섬’을 출간했다. 이번 소설집은 오랜 경륜에서 우러나온 작가의 깊이 있는 시선과 세상에 대한 성찰이 돋보이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작가는 한국전쟁이라는 역사적 비극부터 현대 사회의 불통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원인으로 ‘마음의 감기’를 앓고 있는 이들에게 치유와 소통의 메시지를 건넨다.
이번 소설집을 관통하는 주요한 정서 중 하나는 전쟁과 분단이 남긴 상처, 그리고 이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수록작 ‘드라마 게임’은 전쟁의 트라우마가 어떻게 한 가족을 파괴하고 또 지탱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또 다른 수록작 ‘지뢰밭’은 전쟁이 끝난 지 반세기가 지나도 여전히 계속되는 마음속의 전쟁을 다룬다. 북쪽 유격대 출신이지만 남쪽에서 새로운 삶을 일군 노인 용우성은 실종자와 전사자들의 명단을 찾아 나선다. 이는 그를 괴롭히는 기억의 지뢰를 제거하려는 실존적 몸부림이다. 소설은 용우성을 바라보는 화자 장 선생을 통해, 우리 내면에 뿌리박힌 반공 이데올로기라는 ‘금기와 억압의 지뢰밭’을 되돌아보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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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0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나 춘천고,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동행」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바람난 마을』 『하늘 아래 그 자리』 『아베의 가족』 『우상의 눈물』 『우리들의 날개』 『외등』 『형벌의 집』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 『사이코』 『온 생애의 한순간』 『남이섬』 『굿』, 장편소설로 『늪에서는 바람이』 『불타는 산』 『길』 『유정의 사랑』이 있다.
그 밖의 저서로 『김유정』 『당신도 소설을 쓸 수 있다(소설창작강좌)』 『우리가 보는 마지막 풍경』 『물은 스스로 길을 낸다』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 『춘천山 이야기』 『춘천 사는 이야기』 『작가의 뜰』 등과 콩트집 『식인의 나라』 『장난 전화 거는 남자를 골려준 남자』 『우리 시대의 온달』 등이 있다.
현대문학상(1977), 한국문학작가상(1979), 대한민국문학상(1980), 동인문학상(1980), 윤동주문학상(1988), 김유정문학상(1990), 한국문학상(1996), 후광문학상(2000), 이상문학상 특별상(2003), 현대불교문학상(2004), 경희문학상(2014), 이병주국제문학상(2015), 강원도문화상(1990), 동곡상(2013), 서울문화투데이문화대상(2024)을 수상했고, 황조근정훈장(2005), 보관문화훈장(2018)을 수훈했다.
현재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강원대학교 명예교수.
전상국 중단편소설 전집 10권
『남이섬』에 수록된 작품들은 심원한 은빛 상상력으로 빛난다. 한국전쟁과 같은 역사적 동인에 의한 상처이든, 사회적 맥락에서 불통의 현실에 의한 상처이든, 실존적인 죽음으로 인한 상처이든, 상처 받아 ‘마음의 감기’를 앓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섬세하고 너그러운 손길과 말길을 작가는 사려 깊게 보여준다. 그러면서 상처 받은 상징적인 감기 환자들에게 치유와 소통의 감기(感起)를 부여하기 위한 넉넉한 상상의 도정을 펼친다. 그 과정에서 오랜 경륜을 바탕으로 살림살이와 세상과 자연에 대한 전면적 성찰의 감각과 깊이로 풀무질한 ‘은빛 상상력’이 돌올하게 부각된다. 한국문학이 더 이상 청년 문학에만 집중할 수 없음을 작가 전상국은 조용하면서도 뜨거운 상징으로 웅변하고 있는 셈이다.
목차
꾀꼬리 편지 7
춘심이 발동하야 39
드라마 게임 71
지뢰밭 107
남이섬 197
해설 마음의 감기와 은빛 상상력 | 우찬제(문학평론가·서강대 교수) 256
작가의 말 279
작가 연보 281
책 속으로
“「꾀꼬리 편지」 「춘심이 발동하야」 「드라마 게임」 등 세 편의 단편소설은 정년, 그쯤 나이에 바라보는 저녁노을 그런 감성 무드로 석별의 그리움이나 세상살이의 덧없음 또는 온 생을 고행으로 자초한 인생에 대한 연민의 서사와 디테일에 한껏 공들인 작품들이다.
중편 「지뢰밭」은 분단의 비극 그 언저리를 즐겨 다룬 작가로서 상상력의 발원 또는 그 진원이라고 할 수 있는 열 살 내 유년의 각인된 기억, 혹은 그 기억의 굴절 현상을 통해 그 세대가 숙명처럼 끌어안고 산 금기의 벽에 구멍 하나 뚫자는 작심을 드러내는 일로 신명을 낸 작품이다.
「남이섬」은 북한강 한가운데 떠 있는 하중도(강섬) 남이섬의 오늘 여기, 이 눈부신 땅의 어제, 그 아픈 역사의 원형을 뒤적이며 오늘을 걷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당시 그 지역에 실제로 있었던 일들을 실루엣으로 띄워 읽는 이들에게 현장감을 주고자 많이 힘들인 작품이다.” _‘작가의 말’에서
출판사 서평
「아베의 가족」의 비극을 겨레와 더불어 앓았던 작가답게 전쟁과 분단으로 인해 받아야 했던 상처의 이야기와, 그 상처의 고통을 함께 나누며 치유하려는 서사 기획은 언제나 전상국에게 진행형인 것 같다. 「드라마 게임」에서 허정임은 만약 전쟁을 겪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살다 죽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녀의 동생 허선구 역시 그렇게 하염없이 땅굴만 파는 두더지 인생에 머물지 않았을 터이다. 허정임의 장례식이 치러지는 현재 시간에 과거의 고통스러운 파편들이 마치 색 바랜 흑백사진처럼 끊어질 듯 이어진다. 그 단속적인 흑백사진들이 그녀의 비극적 과거를 짜맞춘다. 부모가 폭격으로 인해 죽은 것이 누나 때문이라고 생각한 동생 허선구는, 땅굴 파기에 집착하는 것으로 누나를 “겨냥한 트라우마 게임”을 벌인다. 그러나 허정임은 동생으로부터 증오를 받아가면서도 동생을 보살핀다. 전쟁 후에도 두 차례의 결혼 실패를 겪지만, 그 상처를 뒤로하고 친정에서 동생과 그 가족들 뒷바라지하는 일에 전념한다. 그렇게 혹독한 전쟁의 상처로 몸과 마음 모두 고통으로 얼룩져야 했던 누이는 그럼에도 자기 마음의 감기(感氣)를 앓기보다는 남의 마음(동생 허선구와 그 가족)의 감기를 헤아리는 감기를 보이며 “세상과 맞서 싸우는” 삶의 양상을 보였다.
「남이섬」에도 한국전쟁 당시의 죽임과 죽음의 상처가 인상적으로 각인되어 있거니와, 그 상처에 대한 살아남은 자들의 윤리를 인상적으로 강조한 작품이 「지뢰밭」이다. 「지뢰밭」의 초점자 용우성(홍천 용씨)은 전쟁 때 북쪽 유격대로 참전했다가 붙잡혀 꼼짝없이 죽을 처지였으나 가까스로 살아나 남쪽에서 용케 생업을 일군 일흔다섯의 노인이다. 서술자인 ‘나’는 열 살 때 그 현장에서 도망가는 용씨를 본 적이 있는 인물로, 열일곱이던 그의 형 또한 육이오 때 실종되어 그 생사를 알지 못한다. 용우성은 자기를 살려준 용재두가 자식도 없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의 아들로 이름도 바꾸고 해마다 그의 묘를 벌초하며 의리 있게 산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지 50년이 넘도록 전쟁터에서 죽어갔거나 실종된 사람들에 대한 상처와 기억이 지뢰밭처럼 그를 괴롭힌다. 하여 그는 개인적으로 그 지뢰를 제거하기로 작정하고 실천에 옮긴다. 이제까지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실종자들이나 전사자들의 명단을 찾아내 밝히는 작업이 바로 그것이다. 그가 서술자인 장 선생을 찾아온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때 동오골에서 북쪽 유격대원들을 심사할 때, 장 선생의 선친이 그 인적 사항을 꼼꼼하게 기록했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그 기록을 확보할 수 없겠느냐며, 장 선생을 찾아온 것이다. 교직자로 정년을 마친 장 선생 역시 용씨의 사업에 공감을 하면서도 자기 마음속의 지뢰밭을 먼저 보게 된다. 오랜 반공 이데올로기로 인해 금기와 억압의 지뢰밭이 마음속에 많았기 때문이다.
「남이섬」은 겹의 이야기이다. 한국전쟁 당시 남이섬을 무대로 한 격동 속에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진 두 인물이 있다. 섬의 서북쪽 가평 사람인 김덕만과 동쪽 춘천 방하리 사람 이상호가 그들이다. 이 둘은 애면글면 ‘나미’라는 여성을 잊지 않고 살다가 죽어간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미는 이야기의 중핵에 자리한다. 두 인물의 전쟁 체험기의 밖에는 그 둘의 이야기를 통해 나미를 추적하는 잡지 기자 출신 ‘나’의 이야기가 있다. 서술을 담당하는 ‘나’는 시간적으로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데, 그런 ‘나’의 이야기의 바깥에는 또 그 후배와 카페 여성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서술자 ‘나’의 관심은 물론 독자들의 관심도 최종적으로는 이야기 동심원의 중핵에 위치한 나미와 동심원의 바깥을 휘감고 도는 여성의 관련 맥락을 찾는 일이 된다. 이 소설에서 서술자는 물론 독자들도 시종 이야기 동심원의 중핵을 차지하는 ‘나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던지지만, 그 답은 소설이 끝날 때까지 거듭 차연되기만 한다. 그들의 주장대로 여인인가. 아슴아슴한 인어인가. 아니라면 잉어였던가. 혹은 괴물? 또는 귀신? 그 어떤 것도 확실치 않다. 어쨌든 한국전쟁 당시 죽음의 위기에서 목숨을 살린 어떤 것을 지시하는 떠도는 기표이다. 불가항력적으로 생명을 구한 어떤 것이기에 두 사람의 입장에서는 한없는 그리움의 대상 그 이상이다.
「춘심이 발동하야」는 「남이섬」과는 분위기가 아주 다른 소설이지만, 진실의 떠도는 기표라는 맥락에서 보면 같이 읽어도 좋다. 이 소설에서 문제적인 것은 진실이 소통되지 않는 인간관계가 편만화되어 있음을 환기하는 대목이다. 안병신과 전처 성춘양은 물론, 안병신과 친구들, 안병신과 정신과 의사, 이혼 이후 안병신과 관계를 맺었던 몇몇 여성들의 관계가 대부분 공허하기 짝이 없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것도 진실의 소통과는 무관한 관계이다. 그러니 안병신이라는 인물의 실종을 다룬 이 소설은 차라리 진실의 실종담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안병신은 단순히 진실의 떠도는 기표가 아니다. 진실의 자리 혹은 진실이 거부된 자리를 환기하는 떠도는 기표라고 하는 것이 조금 더 정확할 것이다. 소통의 소망마저 독하게 감기 든 것 같은 상태에서, 마음에 커다란 감격을 느끼고 분발하여 일어난다는 의미에서의 감기(感起), 다시 말해 진실한 소통의 감기(感起)를 작가는 그토록 열망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남이섬」에서 강섬 카페 여자가 이미 두 사랑을 보낸 것으로 얘기되거니와, 「꾀꼬리 편지」에서도 주인공은 자신이 그토록 열망해 마지않았던 두 남자를 차례로 보낸다. 예순을 앞둔 쉰아홉의 주인공은 유아기의 어느 날 제재소 앞에서 버림받고 대책 없이 오래 서서 울며 기다려야 했던 트라우마를 지닌 인물이다. 그때부터 그녀는 기다림의 생을 살게 된다. 그녀는 우목을 열정적으로 욕망했으되 윤리적으로 억제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서는 우목 또한 사정이 비슷했다. 그의 유족들이 우목의 유지를 좇아 유골함을 그녀에게 온전히 맡기고 떠난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유골을 자기와 함께 교감을 나누었던 장소에 뿌리면서 그녀는 그리움의 죽음을 체감하고 “바람으로 물로 사라지는 이 투명한 비움”의 경지를 절감한다. 전상국의 노년 인물을 대상으로 한 은빛 상상력은 그윽하고 깊은 심연에서 우러난다. 정성스레 우려낸 녹차의 향기를 낸다. 그렇다는 것은 이러한 노년의 은빛 그리움과 투명한 비움의 정조를 그리는 과정에서 보인 정신의 품격과도 관련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