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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 소식

"전상국 문학의 뜰" 소개~ 글 스승님이신 전상국 소설가, 생전에 자비로 만드신 문학관

작성자김시흔|작성시간26.01.11|조회수10 목록 댓글 0

전상국 선생님 문학관인 "전상국 문학의 뜰"( 춘천 김유정 생가 맞은편에 건평 165평 2층 규모)

문학관 대표이신 김옥자 사모님께서 절약해 모은 자금으로만 만드시고 직접 운영하시는 작가 생전에 만든 기념비적인 문학관, 부창부수~ 두 분이 존경스럽습니다

 

"전상국 문학의 뜰"은 작은 규모가 아니다. 알찬 공간과 더불어 미적인 형태를 갖고 있다.

"전상국 문학의 뜰 이야기를 담다"라는 책자 4~5쪽에 있는 건물 전체 사진

소설가 전상국 

1940.3.12 홍천 출생 / 춘천고, 경희대, 경희대학원 석사

1963년 《동행》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 등단
강원대 교수 역임, 강원대 명예교수, 김유정문학촌 설립자, 김유정기념사업회 명예이사장

2018년 대한민국예술원 문학 분과 소설 분야 회원으로 선출, 보관문화훈장 수훈

한국 문학에서 최초로 초성체를 사용했다. 

그것도 첫 데뷔작 1963년 '동행' 의 마지막 장면에서 'ㅎㅎㅎㅎㅎㅎㅎ….'라는 구절이 나온다

 

현대문학상(1977) 한국문학작가상(1979) 대한민국문학상(1980) 동인문학상(1980) 윤동주문학상(1988)
김유정문학상(1990) 한국문학상(1996) 후광문학상(2000) 제27회 이상문학상 특별상(2003)
현대불교문학상(2004) 황조근정훈장(2005) 제27회 경희문학상(2014) 제8회 이병주국제문학상(2015)
보관문화훈장(2018)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2024)

출처 https://www.naa.go.kr/member/dashboard

 

2021. 12. 26 문학 스승이신 전상국 선생님이 만드시고 6월에 여셨다는 춘천 김유정문학촌 위 금병산예술촌에 있는 "전상국 문학의 뜰"을 다녀왔습니다. 그동안 모아두셨던 저자들 서명이 있는 2만 여권 책이 빙둘러 있는 책 곳간, 그 밑으로 내려가면 전상국 선생님의 모든 자료를 체계적으로 분류해 놓으신 작가의 전시공간이 있습니다. 다양한 현대식 자료 검색, 자료 제공도 있는 멋진 문학 전시관입니다. 선생님께서 안내하시면서 에피소드도 곁들여 상세한 설명을 해주셨습니다.

선생님께서 생전에 스스로 만들어 놓으신 어마어마한 규모인데 더 의미 있는 것은 이 큰 문학 전시관을 오로지 사모님(전상국 문학의 뜰 대표 김옥자 님)이 절약하고 모은 돈으로 남의 도움 없이 직접 지으신 것입니다. 게다가 입장료도 무료입니다.

전시관 운영을 돕는 여직원 1명 인건비도 직접 부담하시고 김옥자 전상국 문학의 뜰 대표님이 매일 청소를 하신답니다. 그래서인지 작가 전시관에는 그동안 대표님이 쓰신 수십 권의 가계부가 높다랗게 쌓여 있습니다. 김옥자 대표님은 여태껏 당신을 위해 쓴 돈은 없다고 하십니다. 작가 문학관. 기념관은 작가 생전에 만들어야 한다고 김옥자 대표님이 주장해서 건립되었고 그동안 문학관을 건립하는데 몸 일도 많이 하셔서 대표님은 지문이 없으시답니다 (출입문 지문 인식기 사용 불가)

 

그러니 "전상국 문학의 뜰"은 고등학교 시절부터 최근까지 자료를 빈틈없이 준비하신 전상국 선생님도 대단하시지만 알뜰한 살림살이로 건립 비용을 마련하셨던 사모님이신 김옥자 전상국 문학의 뜰 대표님의 현명하신 준비 덕분인 듯합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 그런 두 분이 존경스럽습니다!

제가 준비해 간 작품 액자를 전상국 선생님께서 1층 책 곳간 입구 벽에 직접 걸어주셨습니다. 부담 드리지 않게 하려고 작은 크기로 해간 것이 너무 작아 보여서 더 크게 다시 만들어 걸기로 했습니다. 졸작을 흔쾌히 걸어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2024.7.26 전상국 선생님 자택 "동행"에서 찍어 드린 선생님과 김옥자 대표님 부부 사진 ©김시흔

"전상국 문학의 뜰"

강원도 춘천시 신동면 풍류1길 84-6 / 무료 관람. 매일 10시~오후 5시 (매주 월. 화 휴관)

http://map.naver.com/p/entry/place/1811507074?placePath=%252Fhome%253Fentry%253Dplt&searchType=place&lng=127.7235850&lat=37.8154240&c=15.00,0,0,0,dh

 

 

 

전상국 문학의뜰 홈페이지

"전상국 문학의 뜰"

http://jsgmuseum.kr/

1층에 있는 "책 곳간"이다.

문인들의 자필 서명이 들어 있는 문학 저서들이 저자 이름순으로 가득 꽂혀 있다. 모두 저자들이 전상국 선생님께 보낸 책들이다. 선생님 사후에는 모두 버려질 책들인데 그럴 수는 없어서 미리 기증하려고 해도 이 책을 모두 받아주겠다는 곳이 없어서 이런 멋진 서가를 만드셨다고 한다

지하층에 있는 전상국 선생님 작가 전시장

작가 생애별, 작품별로 체계적으로 잘 분류해 놓으셨다. 선생님을 작가의 길로 인도하신 스승 황순원과의 옛일을 말씀해주셨다.

나의 학교 선배이기도 하면서 전상국 선생님과 대학, 대학원을 같이 다니셨던 김용성 소설가과 나의 인연을 말씀드렸다.

김용성 소설가는 만나면 전상국 선생님이 "학교 동기다. 절친이다"라고 하셨었다. 그분은 지병으로 2011년 71세로 일찍 별세하셨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니 전상국-김용성-김시흔 역시 인연은 인연이다.

 

“전상국 문학의 뜰” 1층 “큰 빛으로 가는 迷路(미로)” 김시흔 작, 프린트 크기 1104 x 1015 mm

2022.1.8 큰 액자로 다시 설치했는데 옆에 사시는

도예가 김윤석 작가님이 감사하게도 큰 도움을 주셨다.

재설치 이전 작은 크기의 김시흔 사진 작품
전상국 선생님 부인이신 김옥자
전상국 문학의 뜰 대표님께서 직접 작품을 보면서 상세한 설명을 듣고 싶다고 하셨다. 기념관 운영을 하시는데 물어보는 분들이 있어 알고 있어야 하신다고... 다행스럽게도 내 작품을 좋아하셨고 이런 모양이 어떻게 만들어졌으며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를 꼼꼼하게 물어보셨다. 이미 있던 못 자리에 작품을 걸어서 매우 높게 걸려 있다. 더 크게 작품을 만들어 걸 때 높이를 아래로 내려 걸려고 한다. 이 작은 크기의 사진 작품은 2층 사무실 벽에 옮겨져 걸려 있다.

전상국 문학의 뜰 1층 벽에 걸려 있는 김시흔 작품 "큰 빛으로 가는 迷路(미로)"

캔버스 인화지. 나무들 연작 중 2021 ( 프린트 크기 1104 x 1015 mm)

작가가 찾아가는 문학의 길은 쉽지 않은 迷路(미로)이다. 그런 의미로 설명 드렸고 걸었다

전상국 선생님과의 짧은 동행(同行)

"전상국 문학의 뜰"에서 선생님의 집필실이면서 서재 건물인 "아베의 가족"으로 전상국 선생님과 함께 가고 있다.

전상국 선생님께서 춘천중학교 국어교사로 재직하실 때  필자인 김시흔이 1학년초(1966년)부터 백일장 출전하는 글짓기 선수(?)였는데 3년간 문학지도와 백일장 인솔해주셨다. 영광스럽게도 졸업 교지 끝에 짧은 소설을 쓰라고 지명하셨다. 결혼 주례도 해주셨다. 평생의 글 스승님이시다.

그날, 전상국 선생님이 서명해 주신 책들

"전상국 중단편 소설 전집"은 이전에 발행되었던 소설들을 다시 인쇄 파일로 만들어 새롭게 출간하고 있는데 현재 3권 발행되었다. 앞으로도 계속 만들어 나올 예정이라고 하신다.

 

전상국 선생님 출생일은 1940.3.12(양력)이시고 (호적에는 3월 24일) 그림 스승이신 인천 노희정 선생님(인천)은 1940.3.10(양력)이시다.

평생의 스승으로 모시고 있는 두 분의 출생 일자가 년도와 월이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두 분 모두 우연한 일은 아닌듯하다 하셨다.

그러는 나 역시도 3월 출생이다.

참고 자료

신문 기사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수상자 전상국 소설가 “소설이란 순도 높은 거짓말…글쓰기란 신명”

  •  김연신 기자·이은영 발행인
  •  승인 2024.10.11

기록하고 기억하는 공간, ‘전상국 문학의 뜰’
“문학은 상상하는 즐거움, 시치미 떼는 즐거움”
우리 역사, 문학, 사람들 잊지 않고 기록하고자
작가의 입장에서 한국전쟁의 비극은 현재 진행형
김유정문학촌 건립・운영 도맡아...김유정 문학정신 기리는 데 혼신

<이전 기사에 이어>

 

- 지난 1월, 본지 서울문화투데이 창간 15주년 서울문화투데이 문화대상 문학 부문 문화대상을 수상했다. 시상식 당일 “평소 아껴두며 걸어온 오솔길에 들어온 것 같다”라며, “오늘과 같은 풍경을 더 보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고 살게 됐다”라는 소감을 밝혔다. 상의 의미와 이후의 근황을 듣고 싶다.

 

현장에서 마음이 아주 따뜻해졌다. 무언가 정신없이 큰 길을 달려오다가, 차를 세우고 오솔길에 들어간 느낌이었다. 잃어버린 나를 찾은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그날 받은 상이 그동안 글 쓰는 신명, 즐거움으로 살아온 것에 대한 하나의 가치매김과 같이 느껴졌다. 

그날 분위기가 참 좋았다. 이 시대에 이런 종이 신문을 만드는 것도 신명인데, 문화 예술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가슴에 와닿는 것이 많았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갔다가 큰 걸 얻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앞으로도 글 쓰는 신명을 이렇게 찾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15회 서울문화투데이 문학부문 문화대상을 수상한 전상국 작가.

 

- 수상 소감 중 “소설이라는 순도 높은 거짓말”이라는 표현이 인상 깊었다. 작가에게 소설이란 무엇인가.
소설은 작가의 장인으로서의 예술 정신과 감성, 그리고 감성을 발휘하는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나에게 소설은 ‘상상하는 즐거움’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막말로 ‘거짓말하는 즐거움’인데, 이러한 거짓말은 무언가를 믿게 해준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즐거움도 있지만 소설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을 순도 높게 전달하고자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 

 

이 세계의 답답한 현실을 다른 세계로 보여주는 것이 소설이다. 소설은 상상의 산물이고, 상상은 체험의 한계를 극복해낸다. 체험을 확장시키는 상상들을 시치미와 능청을 통해 아름답게 보여주는 미적 가치를 찾아내는 데 모든 것을 쏟는 것이다. 

누군가 내게 왜 쓰냐고 물으면 즐거워서 쓴다고 답한다. 또 무엇이 즐겁냐고 물으면, 남들이 아직까지 보지 못한 걸 보고, 남들이 아직 찾지 못한 가치를 찾고, 거기에 모든 걸 쏟는 게 즐겁다고 이야기한다. 남들이 보지 않은 각도로 사물을 바라보는 것, 남들이 이야기하지 않는 방향으로 이야기하는 것, 남들이 아직 만지지 못한 것을 만졌다는 느낌을 전하는 것.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이 너무도 즐겁다. 남들이 문학이 어렵고 힘들다고 말하지만, 나는 문학이 주는 그 고통까지 즐겼다. 힘들기보다는 참 즐거웠기 때문에 항상 글 쓰는 신명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신명이 무엇이냐 하면 상상하는 즐거움이고, 상상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보다 나은 세계를 보여주기 위한 능청 떨고 시치미를 떼는 즐거움이다. 글은 언어를 다루는 즐거움이고,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낱말 하나를 고르고 발견하는 것도 신명이 난다. 이 즐거움 때문에 글을 썼고, 글 쓰는 게 참 즐거웠다.

▲전상국 소설가

 

- 작가의 소설은 언뜻 보면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것 같지만, 본질은 ‘질문을 던지는 것’에 있다고 느껴진다.

무언가를 이해하기 위해 소설을 쓰기보다는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힘을 많이 기울인다. ‘무엇을 쓸까’가 아닌 ‘어떻게 표현할까’에 집중하고 있다. 글을 쓸 때는 메시지를 전혀 염두에 두지 않는다. 작품에서 무엇을 읽을지는 독자들의 몫이기 때문이다. ‘무엇을 쓸까’를 생각하며 쓰는 게 아니라, 쓰고 나서 그 안에서 그 ‘무엇’을 찾고자 한다. 

‘and then’ 구조보다는 ‘why’ 의 구조를 지향한다. 다음 사건의 전개가 궁금해지는 작품이 아닌지 왜인지 의문을 던지는 작품으로 상상하는 즐거움과 독자의 몫을 남겨두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 독자들은 내 소설이 탐정소설, 추리소설과 같이 느껴진다고도 한다. (ㅎㅎ)

 

- 상상을 작품으로 펼쳐내는 과정이 궁금해진다.

나의 상상은 현실에 뿌리를 둔다. 무협소설이나 판타지소설과는 다르다. 개연성 있는 상상을 한다. 

중편 소설 『아베의 가족』의 주인공은 백치다. 그 저능아를 아베라고 불렀다. 아베, 백치가 입으로 낼 수 있는 유일한 소리, 덧붙여 백치가 힘껏 소리 내어 부르는 아베, 아버지의 방언이다. 부권 상실 시대, 제대로 된 아버지가 없어서 생긴 비극을 에둘러 얘기하고 싶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의미의 아베, 비극의 씨앗이 아닌, 마땅히 찬미 받아야 할 성스러운 존재라는 뜻의 아베 마리아의 그 아베. 이쯤에서야 비로소 작가는 ‘아베는 누구인가’, ‘아베는 지금 어디 있는가’라는 물음을 독자에게 던질 수 있다. 

전형적이지 않은 아베라는 인물을 만들고, 그 인물에게서 이 세 가지 의미를 찾은 후에서야 상상력을 더해 의미를 중첩시키며 소설의 줄거리를 만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작가가 팻말을 직접 돌려보고 있다.

- 소설 속 인물과 상황들이 전부 살아있는 것처럼 생생하다. 화자가 여성인 글은 여성 작가가 쓴 글처럼 느껴질 정도다.

젊은 여자를 화자로 삼았으면, 그에 맞는 감각을 찾기 위해 애를 쓴다. 작가는 짧은 소설을 쓸 때도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최대한 능청스럽게 시치미를 떼는 것이다. 그래야 독자가 전문성에 속아서 소설이라는 거짓말을 믿게 된다. 「플라나리아」를 쓸 때, 그러한 전문성을 보여주기 위해 관련 서적을 여럿 읽고, 생물학과 교수를 찾아가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독자는 전문성에 압도당해 소설을 신뢰하게 되는 것이다. 

 

- 작년 6월, 2011년 출간한 『남이섬』 이후 12년 만에 소설집 『굿』이 발간됐다. 표제작인 중편소설 ‘굿’은 “작가로서 분단문제에 대한 처방을 제시”했다고 밝힌 바 있는데, 전쟁과 분단문제는 작가에게 오랜 아픔이자 숙원이었던 것 같다. 등단작부터 ‘굿’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호명해온 주제인데, 작품을 통해 이루고자 했던 목표에 도달했다고 느끼는지.

 

분단 문제는 동어반복을 하듯이 「동행」, 「아베의 가족」 등에 걸쳐 쭉 써왔다. 「굿」에서는 오늘의 시점에서 바라보는 분단의 문제를 쓰고자 했다. 

분단은 과거의 문제가 아니고,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작가의 입장에서 보자면 한국전쟁의 비극은 현재진행형이다. 오물 풍선, 내부 싸움 등 전쟁의 양상의 일부다. 

대부분이 전쟁으로 입은 피해만 생각하지만, 우리는 전쟁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기도 하다. 전쟁은 이데올로기로 인한 가해와 피해의 악순환이고, 결과적으로는 전부가 피해자다. 한국전쟁이 특히나 그렇다. 

그동안 이러한 이야기를 소설 속에서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꾹 참고 늘 독자들의 몫으로 남겨뒀다. 그러나 「굿」에서는 무언가 한 마디라도 하고 싶었다. 분단 문제는 우리 모두가 함께 생각하고, 국가에서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문제라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하고자 했다.

▲그동안 발간된 단행본들에 대해 설명하는 전상국 작가.

 

- 2021년에는 김유정 생가 맞은편에 ‘전상국 문학의 뜰’이 개관했다. 개관 이후 약 4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어떻게 운영되고 있는지. 

문학의 뜰의 중심은 ‘책 곳간’이다. 이 공간을 만든 것은 가치 있는 것을 ‘책 곳간’에 전시하는 보람이지, 특정 작가나 나를 알리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우리 문학사에서 가치 있는 책들을 한 공간에 정리해두었다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다. 

현재 운영은 집사람이 맡고 있는데, 사실상 그저 열어두고 사람들이 자유롭게 와서 보도록 하는 식이다. 문학관을 알리려면 행사를 적극적으로 열어야 하기에 김유정문학관을 운영할 때는 프로그램을 통해 문학관과 김유정의 작품을 알리고자 했는데,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지금은 따로 행사를 열고 싶은 마음은 없다.

내가 죽은 다음에야 나를 기리는 행사가 열릴 수도 있겠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그저 내가 가지고 있는 책들을 정리해두고 알리는 역할 외에는 하고 싶지 않다. 그냥 책을 두고, 그 가치를 알고 읽어줬으면 하는 바람 말고는 없다. 

 

- 설립과 운영이 모두 사비로 이루어졌다고 들었다. 비용이 만만찮았을텐데, 지자체나 국가의 지원은 왜 받지 않았나.

지자체의 지원으로 건립된 문학관들은 목적이 한 작가를 기리는 공간을 통해 지역의 문화 정체성을 찾고, 관광자원화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문학의 뜰 설립의 목적은 단순히 한 작가가 가지고 있는 작품들을 전시·보관하는 것이기 때문에 지원을 받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간혹 운영 경비를 걱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내가 가진 모든 걸 털어서 운영하고 있기에 직원도 한 명만 두고 운영하고 있다. (웃음)

▲전상국 문학의 뜰 1층에 위치한 책곳간 가운데 전상국 작가가 서있다.

 

- 책곳간 입구에는 “독서는 습관이고, 문학은 인격이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독서하는 즐거움을 중학교 때 알았다. 열등한 아이가 혼자 할 수 있는 게 독서밖에 없었다. 추리소설로 시작해서, 책을 많이 읽었다. 가장 복 받은 게 책 읽는 즐거움이다. 책은 습관이 되어야한다. 책은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다.

 

- 김유정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 각별하다. 김유정을 이토록 각별하게 추앙하는 이유는?

말 그대로 김유정에 미쳐 살았다. 김유정문학촌은 한 작가를 알리는 데 모든 걸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운영했다. 내 작품보다 선배 작가를 알리고자 하는 하나의 소명의식을 가지고, 몇십 년 간 돈을 한 푼도 받지 않고 대신 돈을 쓰면서 일했다. 명예에도 관심이 없었고, 그냥 좋아서 했다. 강의를 가도 내 작품이 아닌 김유정 얘기만 했다. 글 쓰는 것도 좋지만 이렇게 좋은 작가를 알리는 즐거움 역시 신명이 났다.

김유정이 춘천 출신이라는 것은 고등학교를 다닐 때도 몰랐다. 80년대 대학원에 들어간 후 석사 논문을 쓰는데, 황순원 선생님이 뭘 쓸건지 물었다. 그 과정에서 김유정의 작품을 써보라고 추천하셨다. 마흔 살에 대학원을 다니며 김유정을 처음 알게 된 것이다. 그렇게 30편 가량의 작품을 읽었는데 작품에 묻어나는 그의 천재성, 소설의 즐거움, 향토성 등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우리 문학에서 강원도 사투리를 처음 쓴 작가가 김유정이다. 강원도 사람들의 삶과 감정을 잘 담아냈으며, 사투리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소설 작가로서 소설에서 제일 중요한 건 인물인데, 김유정은 그 시대의 인물을 너무나 잘 구상해 이 시대의 해학을 보여준다. 

▲'아베의 가족' 이름을 붙인 서재에서 인터뷰를 진행 중인 작가의 모습이다.

 

남들이 하지 못하는 것을 하는 천재성이 있는 작가들을 좋아하는데, 김유정은 다른 어느 작가도 흉내내지 못할 문장을 쓴다. 이광수, 염상섭의 작품들 전부 좋은 문장이지만, 김유정의 소설은 창의적인 문장이 탁탁 트이며 생동성, 역동성, 리드미컬함을 갖추고 시골 정서를 살리는데 적격이다. 가난을 해학으로 여기고 본인의 이야기를 희화화하는 것 역시 놀라웠다. 

글쓰는 사람으로서 그가 다루는 언어, 인물들이 좋은 걸 어떡하나. 이런 작가를 알리는 것이 이 시대 작가로서의 소명이라고 생각했다. 여기 오는 사람들한테도 내 문학이 아닌 김유정 얘기만 하다 보니, 마을 사람들이 내가 소설가인 것도 몰랐다. (ㅎㅎ) 그러나 작가로서 김유정에 미쳐서 산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 소설가로서, 선생으로서, 문학인으로서 그간 많은 업적을 남겼다. 지난 시간을 회고해보면 가장 기억에 남고 보람찬 일은 무엇이었나.

두 길을 걸어왔다. 하나는 교실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고, 하나는 글 쓰는 일이다. 

어떤 것이 전업이냐 물으면 나는 두 길을 다 전업으로 생각했다. 가르치는 것 역시 나의 ‘오솔길’이라고 생각한다. 한때는 학교를 그만둘까 했지만, 전업 작가가 되면 안 되겠더라. 전업 작가가 되면 글을 더 이상 엄숙하게 쓰지 못할 것 같고, 먹고 살기 위해 글을 쓴다는 것은 끔찍하게 느껴졌다.

가르치는 일이 힘들 때는 회의를 느끼면서 글 쓰는 일에 몰두하고 싶고, 글 쓰는 일이 힘들면 또 가르치는 일이 신난다. 결국은 둘 다 즐겁게 하려고 했다. 

▲전상국 작가가 작품들을 돌아보며 미소짓고 있다.

 

지금껏 약 100여 편의 소설과 300여 편의 꽁트를 썼는데, 매번 ‘마지막 작품이다’, ‘최고의 작품이다’라고 생각하면서 썼기 때문에 한 작품을 꼽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친화적인 삶을 강조하며 살아왔기에, 나무를 많이 심었다는 사실 역시 떠오른다. 내가 심은 나무가 내가 쓴 작품 수보다 많다. 내가 이 세상에 없어도 나무는 남아있을 것이다. (웃음)

 

- 작품을 통해 독자들이 무엇을 느꼈으면 하는가.

거짓말하는 즐거움의 정체를, 내가 왜 이 글쓰기가 즐거웠는지 독자들이 소설을 통해 찾았으면 좋겠다. 이 신명을 독자들도 느꼈으면, 같이 즐겼으면 한다. 작품이 내 손을 떠난 이상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 다음부터는 독자의 몫으로 돌아가 독자의 작품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 어떤 작가로 기억되고 싶은가.

소설을 쓰는 장인으로서, 장인 정신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으면 한다. 내 글이 좋은 문장, 젊은 문장으로 읽혔으면 한다. 

 

http://www.sc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43812

 

원로 문인과의 차 한 잔 ② 소설가 전상국“내게 소설 쓰기는 놀이… 문법 파괴도 놀이였지”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김유정 생가 맞은편에 건평 165평 2층 규모로 ‘전상국 문학의 뜰’ 건립

⊙ 은사(黃順元) 권유로 김유정과 만나… 김유정문학촌장, 김유정기념사업회 이사장
⊙ “넌 어휘력과 문장이 젬병이다”… 고교 문예반 선생님 한마디가 소설가 길 열어
⊙ 괴롭던 서울살이(중랑구 상봉동)… 《영자의 전성시대》 쓴 趙善作 만나 다시 팬 들어
⊙ 단편 〈동행〉 이후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동족상잔 비극을 소설로

全商國
1940년생. 경희대 국문과, 同 대학원 졸업 / 강원대 명예 교수 /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동행〉이 당선되어 등단. 작품집으로 《바람난 마을》 《하늘 아래 그 자리》 《아베의 가족》 《우상의 눈물》 등과 장편소설 《늪에서는 바람이》 《불타는 산》 《길》 《유정의 사랑》 등이 있다. /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 동인문학상, 윤동주문학상, 김유정문학상, 한국문학상, 후광문학상, 이상문학특별상, 현대불교문학상 등을 받았다.

 강원도의 힘을 느끼게 하는 소설가 전상국 선생.

 

  소설가 김유정(金裕貞·1908~1937)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있다. 소설가 전상국(全商國·81)이다.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자 강원대 명예교수인 그는 김유정을 알리기 위해 평생을 살았다. 아니, 미쳐 살았다고 해야 한다.
 
  그리고 찬찬히 들여다보면 전상국, 그만의 문학적 성과가 “여울목 차돌들”(황순원 소설가)처럼 반짝인다. 각각의 중·단편 소설로 이뤄진 매끄러운 살결들이 때로는 가슴 시리게 때로는 따스한 훈기를 사람들에게 던졌다.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동행〉이 당선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으로 《바람난 마을》 《하늘 아래 그 자리》 《아베의 가족》 《우상의 눈물》 등과 장편소설 《늪에서는 바람이》 《불타는 산》 《길》 《유정의 사랑》 등이 있다.
 
  그의 소설에는 늘 ‘괴물’이 등장하는데 6·25전쟁의 폭력성과 그로 인한 상처를 증언하는 인물이다. 그 폭력과 상처는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 권력과 일그러진 자아(自我)의 문제와 닿아 있다.
 
  조만간 평생의 문학적 흔적을 담은 ‘전상국 문학의 뜰’이 세워진다. 김유정 생가(춘천시 신동면 증리) 맞은편에 건평 165평(545m2)으로 이뤄져 있다. 1층은 전시관, 2층은 책 곳간(庫間)으로 채워진다. 곳간에는 지금까지 모은 소설과 시집 1만5000권이 전시된다.
 
  지난 3월 4일 강원도 춘천의 김유정문학촌에서 전상국 교수를 만났다.
 
  “내가 평생 즐겨 쓴 소설은 물론 이 시대 우리나라 작가·시인들이 남긴 소설과 시들을 가볍게 만날 수 있는 그런 공간을 생각한 겁니다. 책은 안 팔리지만 신명(身命)을 다해 글을 쓴, 한국 문학에 이런 작가·시인들이 있다는 걸 알리는 데 목적이 있어요.”
 
  “작가·시인들의 사인이 든 책들이어서 방문객들이 책을 펴는 순간의 느낌이 남다를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전상국 문학의 뜰’
 
  ― 1층에는 소설가 전상국의 모든 것이 전시되겠네요.
 
  “어느 날 김유정에 미쳐 사는 내게 아내(김옥자 여사)가 말했어요. ‘김유정 작가는 좋겠다. 젊어서 죽었는데 당신 같은 자식이 있어서’라고. 김유정 작품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조상 기일(忌日)마저 까마득히 잊고 있는 내가 얼마나 한심해 보였겠어요.”
 
  그래서 ‘문학의 뜰’을 구상하게 됐단다. “죽은 뒤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살아 있을 때 부족한 대로 정리하고 매기는 자기 검증, 자기 인증의 본때로 삼으면 어떠냐는 아내의 뜻이 간곡했다”는 것이다. 그는 “내가 내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는데 누가 내 것을 좋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도 했다.
 
  전상국과 김유정은 강원도 출신이란 공통점 외에 《조선일보》 신춘문예(각각 1935년, 1963년)를 통해 등단한 이력도 같다. 전상국은 또 1990년 제1회 김유정문학상을 받았다는 인연도 있다.
 
  김유정은 강원도 춘천군 신남면(현 춘천시 신동면) 증리 실레마을 태생이다. 휘문고보를 졸업하고 연희전문에 입학해 현대식 교육을 받다 제적당해 귀향했을 때가 스물두 살(1930년)이었다. 연상의 기생 박록주(朴綠珠·1906~1979)를 향한 연정(戀情)을 이루지 못한 한(恨)에다 몇천 석 집안의 몰락까지 겹친 상황에서의 낙향이었다.
 
  김유정은 고향의 자연 속에서 일제강점기 똥구멍 찢어지게 가난한 이들의 생활을 담 너머로 넌지시 바라보는 일로 위안을 삼았다. 그네들 이야기가 소설 〈동백꽃〉 〈봄·봄〉이 되었다.
 
  전상국은 경희대 대학원 시절, 은사인 황순원(黃順元·1915~2000)의 권유로 동향의 김유정과 만났다. 그것이 김유정과의 첫 인연, 평생 함께할 필연이 되었다.
 
 
  “새로운 어휘를 찾는 즐거움”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소설 〈동행〉으로 등단할 당시의 전상국.

  전상국 소설가의 말이다.
 
  “김유정이 강원도 출신 작가라는 걸 잘 몰랐어요. 그 작가에 대해 관심이 없었어. 석사논문을 준비하면서 그제야 가치를 알게 되었지. 와! 이런 매력 있는 문장, 매력 있는 작가가 있다니…. 이런 작가를 내가 연구하다니…. 그의 소설에 미치게 되더라고. 작지만, 작은 것이 문학에서 갖는 가치, 그것을 알게 되면서 김유정에게 미치게 되더라고….”
 
  ― 뭐가 보이던가요.
 
  “작가로서의 천재성 같은 거지. 어눌해 보이는 천재성. 내가 하지 못하는 것들을 앞서 했던 것…. 나는 우리 문학에 있어 의성어(擬聲語)·의태어(擬態語)를 제대로 활용한 작가가 김유정이 아닌가 싶어요. 새소리, 물소리 같은 의성·의태어를 묘사한 문장을 읽으며 나도 의성·의태어의 묘사에 미쳐 갔거든.
 
  국어사전에 나온 의성·의태어는 안 썼어요. 내가 만들어 썼지. 내가 듣는 대로, 느끼는 대로 만들어 썼어요. 또 초성으로 된 문장을 내가 처음 썼잖아요.”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동행〉의 마지막 단락은 이렇다.
 
  〈그러면서 그는 느닷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ㅎㅎㅎㅎㅎㅎㅎ
 
  눈 덮인 산속, 아직 눈 조용히 비껴 내리고 있는 밤이었다.〉
 
  지금은 소셜미디어에서 흔히 볼 수 있지만, 당시로선 파격이자 해체였다.
 
  “헤헤, 후후, 흐흐, 쿡쿡 등과 다른 다소 자학적인 음울한 이미지의 웃음소리 ㅎㅎㅎ을 발상한 것이지요.
 
  내 문학의 즐거움은 관행적인 것들, 문법을 파괴하는 것인지 모르겠어. 그것(관행, 문법)을 지켜선 다른 사람을 넘어서지 못하겠더라고.
 
  내게 소설 쓰기는 놀이야. 문법 파괴도 놀이로 생각하며 형식 실험을 즐거움으로 삼았어요. 내가 만든 재미, 이를테면 새로운 문장을 쓰는 즐거움, 어휘를 찾는 즐거움이 내 문학의 중요한 요소가 된 것이죠.
 
  1970~80년대 당시 소설이 메시지 중심일 때 나는 디테일을 전달하는 방식, 예컨대 문장이라든가 어휘에 초점을 뒀는데… 그건 내가 문장력이 취약했으니까….”
 
 
  ‘넌 어휘력과 문장이 젬병이다’
 
  ― 그럴 리가요! ‘탄탄한 문장력’ 하면 ‘전상국’ 아닌가요.
 
  시골 책방에 꽂힌 탐정소설 몇 권을 읽었을 뿐 문학이 무엇인지 전혀 알지 못하던 소년 전상국이 고교(춘천고 32회) 2학년 때 문예반에 들어갔다. 1학년 담임이자 시인인 이희철 선생님(작고)의 영향 때문이었다.
 
  “문예반에 들어가니 큰 벽이 있어. 딱 한 번 참가한 백일장에 입상조차 못 했을 뿐 아니라 며칠 뒤 문예반 선생님이 날 교무실로 호출하더군. 선생님 왈(曰),
 
  ‘넌 어휘력과 문장이 젬병이다’.
 
  젬병이 문학가를 꿈꾸다니…. 선생님이 내민 작문 원고를 제대로 받지 못해 묶음이 풀린 원고지가 교무실 바닥에 흩어졌죠. 흩어진 원고를 주워 들고 교실로 돌아올 때의 기분이 어떠했는가는 전혀 기억에 없어요.”
 
  며칠 뒤 학교 본관 현관 앞, 백일장에 나갈 문예반 학생들이 자신들을 백일장에 데리고 갈 문예반 선생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휘력과 문장이 형편없다는, 며칠 전 그 선생님의 그 ‘젬병’ 판단을 받은 전상국도 그 대열에 끼어 있었다.
 
  그러나 매정하게도 선생님이 이렇게 말했다.
 
  “느덜은(너희는) 백일장에 나갈 자격이 없다.”
 
  열외로 밀려난 몇몇 학생은 서로 눈길도 한 번 안 맞춘 채 뿔뿔이 흩어졌다. 한 녀석이 개구멍을 통해 학교를 빠져나가자 다른 녀석들도 사이를 두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전상국 역시 개구멍으로 빠져나와 소양강 강둑까지 걸어갔다.
 
  “소양강의 4월, 봄빛 속에 반짝이며 흘러가는 강물이 뭐 그리도 아름답던지.
 
  미루나무에 등을 기대고 앉기가 무섭게 끄억끄억 울음이 터졌어. 더럽게 서러웠어요.”
 
  울면서 무심히 훔쳐본 소양강 강물은 여전히 뻔뻔스레 아름다웠다고 한다. 실컷 울고 난 뒤 열없는 마음으로 경춘선 철길을 따라 걷다 보니 공지천의 뱀산 앞에 다다랐다. 뱀산 절벽에 진달래꽃이 만발했다. 제기랄, 그 진달래꽃이 왜 또 그렇게 아름답던지, 철길에 주저앉아 또 울었다.
 
  전상국 교수의 말이다.
 
  “그때 그 장면을 보게 된 거야. 철길 아래 움막에서 한센인 부자(父子)를 봤어요. 예닐곱 살 된 남자아이가 손가락이 뭉그러지고 눈썹도 없는 나환자 아버지의 얼굴에 무슨 약인가를 바르고 있는 장면이었어. ‘아! 저런 사람도 있구나’. 열외로 밀린 밑바닥 그 절망에서 새로운 세상을 본 것입니다.”
 
  며칠 후 그는 공지천 그 철길 위에서 내려다본 움막 속 한센인 아이를 서술자로 하여 이야기 하나를 꾸며냈다. 거짓말 이야기를 꾸며내는 일이 되게 재미있다고 느껴졌다.
 
 
  〈산에 오른 아이〉
 
  “어휘력이 없고 문장이 형편없다는, 문예반 선생님의 그 말씀. 어쩌랴. 불편하면 편하게 하기. 못난 것을 감추다 보면 도리어 잘 아는 척 뽐내게 되잖아요. 열등감 극복의 방법, 최선의 길이 바로 거기 있었어요.”
 
  그때부터 국어사전을 뒤졌다. 한 단어에 많은 유의어가 있음을 발견한다. 낱말들을 알아가는 즐거움이 컸다. 낯선 낱말들, 문장들에 밑줄을 치고 노트에 옮겨적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낱말이 되더란다.
 
  또 “여러 개의 낱말을 써놓고 그중에서 그럴듯한 문장 하나를 만들기 위해 주술 관계를 바꿔보는 등 나름의 노력을 하다 보니 어느새 글 쓰는 일을 즐기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한다.
 
  “소설은 언어의 특수한 구조잖아요. 내가 꾸며내는 이야기 내용에 걸맞은 괜찮은 낱말, 그럴듯한 문장을 만드는 노력을 즐기죠. 글 내용도 중요하지만, 그걸 담는 그릇 만드는 일에서 글쓰기의 진짜 즐거움을 알게 된 것입니다.”
 
  원고지 60장 남짓한 한센인 부자의 이야기를 쓴 〈산에 오른 아이〉는 당대 중·고교생의 문예 등용문이었던 제6회 학원문학상(1959년) 고등부 소설 부문 응모작 350여 편 중에서 3등으로 입상했다. 그해 조해일, 양문길, 황석영 등이 함께 입상했다고 한다.
 
  “작가가 안 됐으면 창피해서 자랑을 못 하겠지만 부족함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인식의 힘이 아니겠어요? 극복한 것, 극복하는 즐거움이 내 문학의 길입니다.”
 
 

처녀작 〈동행〉

《조선일보》 1963년 1월1일자에 실린 전상국의 당선작 〈동행〉.

  1963년 신춘문예 당선작인 〈동행〉은 전상국 교수의 처녀작이다. 작품 구상은 경희대 1학년 겨울방학 때 했다. 그해 서울에 처음으로 상경한 촌놈 대학생으로 난생처음 새 구두 하나를 사 신었고 그 새 구두를 신고 4·19혁명의 현장인 신설동에서 광화문까지 주로 뒷골목으로 잽싸게 뛰어다니다 발뒤꿈치가 움푹 파일 정도의 상처를 입었다고 한다.
 
  그 구두를 신고 그해 겨울방학 고향에 내려갔고 고등학교 때 문학 서클을 함께하던 친구들을 만났다. 술김에 선배가 사는 춘천 근교의 장학리라는 시골 마을을 찾아가는데 폭설이 내린 그 밤, 길을 잃어버려 생눈길을 헤매야 했다. 야산 눈길을 엎치락뒤치락 넘던 그 즐거움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뭔가 그 눈길을 배경으로 그럴싸한 얘기를 하나 만들어보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다분히 감상적인 톤을 갖게 될 것이고 좀 더 서구적인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는 이야기면 더 좋았어요.”
 
  당시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그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6·25 전후의 상황을 통해 자신의 머리에 각인된 몇 개의 사건이었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과정의 어른들 눈에 서렸던 그 살기(殺氣)를 본 사건들이었다.
 
  “그래, 동족상잔의 그 비인간적 싸움을 모티브로 하되 6·25 이야기 그 이상의 어떤 인생 문제를 다루는 것으로 하자!”
 
  전상국의 수필집 《우리가 보는 마지막 풍경》(2010)에는 〈동행〉을 구상한 이야기가 담담히 실려 있다. 인용하면 이렇다.
 
  〈… 좀 더 극적이고 긴장감 있는 이야기면 더 좋겠지. 춘천에서 살인사건이 생기고 그 살인범이 눈 내리는 밤, 자기 고향을 찾아간다. 그는 6·25 때 부역자로 10년 징역을 마치고 나온 날 범행을 한 것이다. 그 범인을 잡기 위해 폐병 3기인 형사가 역시 그 눈길에 나서고 두 사람은 드디어 동행하게 된다.
 
  길을 함께 가고 있기도 하지만 살인범은 아버지 무덤에서 자신의 기구한 삶을 마감하러 가는 것이고 그 형사 역시 자신의 목숨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마지막 길을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두 사람의 동행이 인간적 화해로 결말을 맺는 그런 감동적 이야기….〉(239쪽)
 
  여기까지 생각에 이르자 흥분하기 시작했다. 원고지 70장 정도의 작품을 써서 은사인 황순원 선생님한테 불쑥 내밀었다. 대학 2학년 2학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그렇게 해서 나온 〈동행〉은 이후 내 작품이 만들어지는 하나의 등식이 되어버렸어요. 주인공이 고향을 찾아가는 귀소(歸巢) 의지라든가 6·25 얘기를 다루되 반드시 오늘의 현실과 혹은 인생의 어떤 문제와 결부시키자는 작가의 의도 같은 것이지.
 
  어떻든 〈동행〉은 내 출세작이고 처녀작입니다. 또 아직도 내 작품의 중심 모티브이며, 내 소설 구성의 등식으로 작용하고 있어요. 지금도 소설을 구상하기 위해 눈을 감으면 〈동행〉 속 그 밤 눈길을 걸어가는 두 사내의 발 소리가 들립니다.”
 
 
  趙善作과의 운명적 만남

춘천고 시절 문예반 동기들과 함께. 앞줄 오른쪽이 전상국. 뒷줄 가운데가 시인 이승훈.

  〈동행〉 이후 단 두 편의 단편을 발표한 것을 끝으로 전상국은 귀향했다. 원주 육민관고등학교의 국어 교사로 시작한 교직 생활은 강원도교육청 교원 임용고시를 통해 춘천의 공립학교 선생으로 이어졌다. 내리 7년을 3학년 담임을 맡았다고 한다.
 
  ― 1963년작 〈동행〉 이후 소설을 단 두 편 쓰곤 안 쓰셨더군요.
 
  “그 시절 단 한 편의 작품도 쓰지 못했는데 문학이 나를 떠났기 때문이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과서적인 삶이 그것이었어.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에 보람을 느꼈거든.”
 
  그때 쓴 단 두 편이 〈광망〉(《현대문학》 1964년 2월호), 〈해바라기 시계〉(《문학춘추》 1966년 1월호)였다. 그러다 1972년 봄 은사 조병화(趙炳華·1921~2003) 선생의 주선으로 직장을 서울로 옮겼다. 경희고 국어 교사가 된 것이다.
 
  “원치 않게 서울로 이사를 오면서 ‘문학 동네’ 사람들과 만나는 일이 잦아졌어요. 가뜩이나 서울 생활에 적응을 못 해 괴로운 판에 만나는 사람마다 ‘왜 소설을 쓰지 않느냐’고 해 한없이 왜소해졌어요.”
 
  신경성 위장병과 속 쓰림을 앓게 되었고 이에 ‘노루모산’ 같은 위장약이 주식이 되었다. 체중이 58kg(키 178cm)까지 빠지면서 마음은 고향으로 도망칠 궁리만 하게 되었다. “그 무렵, 수돗물도 안 나오는 산동네 셋방에서 내가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어림한 아내가 무리를 해 중랑구 망우리고개 밑에 작은 집 하나를 마련했다”고 한다.
 
  서울 중랑구 상봉동 105-37번지. 그런데 운명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의 집에 방이 3개였는데 방 2개는 세를 놓았다. 어느 날 퇴근을 해 집에 들어서는데 방 2개를 세 내 사는 인근의 초등학교 선생님이 인사를 청했다. 이제까지 단 한 번도 가져보지 못한 ‘자기 방’을 당당히 쓰고 있는 그 초등학교 선생님이 얼마나 부러웠던가.
 
  “그 선생님 왈, ‘문패를 보니 혹시 오래전 단편 〈동행〉으로 당선한 그 전상국이 아니냐’는 것이었어요. 자신이 대전사범을 나와 입대했을 때 신문에서 그 소설을 감명 깊게 읽었다는 겁니다.”
 
  그가 바로 장편소설 《영자의 전성시대》를 쓴 조선작(趙善作) 작가였다.
 
  “당대 산업사회의 뒤안길 그 밑바닥 사람들의 이야기를 리얼하게 그려낸 《영자의 전성시대》가 바로 우리 집 방 한 칸에서 연재되고 있었던 겁니다. 당시 조선작 작가는 조해일, 최인호 등과 함께 신문 연재를 도맡아 하는 1970년대 작가 사단의 대표 작가 중 한 분이었어요.
 
  이런 경우를 외나무다리에서 만났다고 하던가. 치명적이었어요. ‘그동안 왜 소설 안 쓰신 겁니까’ 하며 조 선생이 내게 소설 쓰기를 권유했어요.”
 

〈아베의 가족〉
 

1993년 잡지 《현상공모》 커버를 장식한 소설가 전상국.

  몇 달 뒤 조선작 작가가 자기 집을 짓고 이사를 갔다. 그가 쓰던 사랑방을 전상국이 차지하게 됐다. 그의 인생 최초로 ‘내 방’이 생긴 것이다.
 
  “그 방에서 등단한 지 10년 만에 처음으로 소설을 썼어요. 원고지 앞에 앉을 수 있는 주말이 기다려졌어요. 원고지를 메우기 시작하면서 입에 달고 살던 소화제도 찾지 않았지.”
 
  조선작을 만난 뒤 쓴 첫 작품이 〈전야〉(《창작과비평》 1974년 가을호)였다.
 
  이후 수많은 작품이 발표되었는데 1977년 단편 〈사형〉과 〈껍데기 벗기〉로 제22회 현대문학상을 받았다. 첫 작품집 《바람난 마을》(창작문화사)도 그 무렵 나왔다.
 
  1979년에 나온 중편 〈아베의 가족〉은 지금의 전상국을 상징하는 작품이다. 〈아베의 가족〉으로 제6회 한국문학작가상, 대한민국문학상(자유문학 부문)을 받았다. 또 1980년 〈우리들의 날개〉로 제14회 동인문학상을 받았다.
 
  전상국 교수의 작품은 6·25 참상이 낳은 고향 상실의 분단문학을 지향해왔다. 아버지의 권위 추락과 분단 상황 인식이 병진하는데 어린 시절 자신이 겪은 전쟁 체험이 문학적 인식의 밑그림이 되었다. 〈하늘 아래 그 자리〉 〈산울림〉 〈동행〉 〈안개의 눈〉 〈외등〉 〈고려장〉 〈여름의 껍질〉 〈아베의 가족〉 등에서 6·25 참상의 모습이 다양하게 변주돼 나타난다. 전 교수의 말이다.
 
  “우리의 전쟁이, 특히 내가 어린 시절 겪은 분단이 그랬어요. 시골서 태어나고 자란, 그 고향의 상실, 아름다웠던 파괴, 우리의 전통적 미덕의 무너짐, 뒤집힌 질서, 이런 것들을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정치꾼들의 몰염치…, 이런 모든 것의 현재진행형이 나의 현실 인식의 단초가 됐던 거지.”
 
 
  ‘빨갱이’에 대한 기억들

경희대 국문과 재학 시절 전상국(왼쪽). 가운데가 시인 이성부다.

  어린 시절 전상국이 ‘빨갱이’를 인식한 계기는 이렇다.
 
  “여덟 살 때 홍천경찰서 앞이 우리 집이었는데 빨갱이들이 경찰서에 잡혀왔다고 해 그 사람들은 얼굴이 빨간 줄 알고 구경을 갔다가 정말 놀랐어. 그 빨갱이 중에 내 옆집 아저씨도 있었던 거지. 빨갱이 얼굴도 모두 우리와 똑같고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그땐 정말 충격이었어요.
 
  한번은 인민군들이 집에 왔는데 열여섯, 열일곱이야. 우리 집 대청에 앉아서 이야기하는데 할머니가 ‘어이구, 이 녀석아!’ 하고 말하니, 울기도 하고… 애들이야, 애들. 자기 키만 한 장총을 잘못 다뤄 총소리가 나자 울고 그랬어요.
 
  어릴 때 본 인민군 모습이 깨지지 않는 거야. 적(敵)이라는 개념보다 무언가 다른… 하여튼 다 희생자로 생각되는 거야. 가해와 피해의 악순환이란 인식이 생긴 거지. 그럼 뭐야? 결국 다 피해자다.”
 
  ― 평생 분단문학을 하셨지만 지금 우리 사회도 여전히 분단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가 무서워지는 게 편 가르기입니다. 내 편, 니(네) 편. 편의 힘… 점점 심화되고 있어요. 결국 적이에요. 그전에는 전쟁이 났어도 증오라든가 불신이 덜했어요. 지금은 편 가르는 게 바로 불신과 증오야.
 
  내 소설 모티브가 불신과 증오입니다. 남북이 나뉠 때 이데올로기로 나뉘는데, 한 가정이 갈라지는 것과 똑같더라고. 그 ‘엄마’는 갈라진 ‘아비’를 죽일 놈으로 만드는 거야. 북쪽, 남쪽 어디에서도 사람이 아닌 거야. 자기 체제를 위해 불신과 증오를 심어준…. 그 아이들이 점점 물들어가는 것이고. 이게 참 무섭더라고. 잘못 쓰이는 힘, 그 힘을 교활하게 쓰는 어른들이 바로 정치꾼이야.
 
  내가 연작 〈사이코〉(1990년 중편 〈사이코 시대〉로 제1회 김유정문학상과 강원도 문화상 수상. 1996년 작품집 《사이코》로 출간됐다)를 썼는데, 나는 지금도 정치가에 대한 기대가 있어요. 그런데 정치꾼만 있는 거야. 오직 편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김유정과 다시 만나다

평생의 문학 스승 황순원(가운데), 조병화 선생과 함께.

  상경하여 새로이 시작한 작품 활동을 10여 년 동안 보통 이상으로 꽤 즐긴다 싶던 어느 날, 그의 안에 다시 바람이 일었다. “어딘가로 훌쩍 떠나고 싶은 충동 내지 반란”이 일어난 것이다.
 
  “새로운 것, 낯선 세계에 대한 선망, 이것이 아닌 저것으로, 모든 것이 지리멸렬하고 하는 짓이 모두 진부했다”고 한다. 방황, 주말마다 청량리역 광장에서 출발하는 산악회를 따라 산행에 나서는 일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그러나 가끔 산에 오르는 일은 자연에 대한 갈증만 키울 뿐 돌아오면 다시 더 큰 허망이 생겼다.
 
  다음은 2020년에 펴낸 산문집 《작가의 뜰》에 나오는 한 구절이다.
 
  〈… 신명을 잃으면 버리기,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기, 그것이 내 주특기였다. 어쩌면 그것은 전업 작가가 되고 싶은 유혹, 출구 찾기, 그 욕구가 얼굴을 내민 것일 수도 있었다. (중략) 교직과 글쓰기, 내가 걷는 그 두 길 모두에서 매너리즘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나 자신을 본 것이다. 보지 않아야 할 것을 본 것이 문제였다. 모든 것이 다 뻔하고, 사사건건 낡고 데데했다. 창의의 실종, ‘나’를 잃어버렸다고 생각하는 순간 죽을 것만 같았다.…〉(59쪽)
 
  그 위기의 순간, 1985년 봄, 기회가 왔다. 대학 학부는 물론 대학원도 함께 다닌 작가 김용성이 국립 강원대 교수 채용에 넣었던 원서를 도로 찾아오면서 뜻하지 않게 그에게 길이 열린 것이다. 결국 강원대 인문대학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되었다. 서울을 떠나며 탔던 경춘선 성북역 앞에 커다란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강원도에 가면 당신도 자연이 된다.’
 
  12년 만에 서울 탈출, 고향, 자연으로 돌아온 것이었다.
 
  서울살이를 정리하고 춘천으로 돌아온 것은 1985년. 그때 등산로도 없던 652m 금병산을 내려오다가 노란 동백꽃의 알싸한 그 향기를 맡았다. 만 스물아홉 살에 요절한, 그래서 영원한 청년인 김유정의 소설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김유정 소설에 빠지면서 김유정을 기리는 일에 미치기 시작했어. 사실은 글쓰기의 즐거움보다 김유정 뒤에 숨어 사는 일을 더 즐겼다는 말이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지요.
 
  숨었든 미쳤든 그 값을 치러야 했어요. 김유정 기리는 일을 하기 위해 ‘전상국 소설가’라는 직함을 내려놓아야 했으니….”
 
 
  김유정역이 생기게 된 사연
 

김유정 흔적이 있는 춘천 금병산 수리봉을 등반한 전상국과 아내 김옥자씨.

  “김유정문학촌장, 김유정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작가 전상국’보다 훨씬 명예로운 자리”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 그 눈높이에 맞추었다.
 
  “그 나이에 사경(私耕) 한 푼 안 받고 김유정네 머슴이 웬일이냐”고 비아냥거리는 동료 교수도, “작품을 쓰지 않고 이런 일에 시간을 뺏기는 게 안타깝다”는 문단 동료들도 많았지만, 그는 미친 짓을 멈출 수가 없었다.
 
  “어딜 가서 이야기할 때도 내 문학 이야기는 5분 정도만 하고 나머지는 다 김유정 이야기만 했어요. 여기(김유정문학촌) 온 사람들에게 내가 작가라고 이야기한 적도 없는데, 남들이 들으면 쉬운 것 같지만, 쉽지 않거든. 내가 작가라는 것을 철저히 내려놓았어. 내 문학 이야기는 여기서 절대 안 했어요. 이곳 마을 사람 누구도 내가 작가라는 걸 아는 사람이 없어.
 
  이 지역 문화예술인들도 내가 작가보다 촌장, 이사장 자리가 대단해서 모든 걸 쏟았다고 생각하고, 시기하고, 왜 (직함을) 내려놓지 않느냐 말하는 사람도 있어요.”
 
  ― ‘김유정역’이 된 유래가 복잡하다고 들었어요. 마을 주민들에게 무릎 꿇고 설득했다고 하던데….
 
  “원래 역 이름이 ‘신남역’인데 주소는 춘천시 신동면 증리입니다. 동료 교수 한 분이 신남역 근처에서 살았는데 어느 날 술 먹고 택시 기사에게 ‘신남 갑시다’ 했더니, 인제군 남면 신남리로 가더란 거야.
 
  그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어요. 여기(신남역)는 신동면이고, 인제군에 신남리란 지명이 있어 택시 기사가 헷갈린 거죠. 인제에 군부대가 있어 잘못 알고 오는 사람도 많았어.
 
  그래서 문헌을 뒤져봤더니 1939년 신남역이 개통될 당시 신남면이었어. 이후 면 이름이 계속 바뀌어 이듬해 남부 이장면이 되었더라고.
 
  내가 그걸 알고 마을 사람을 설득했지. 신남역이란 역명의 정체성(正體性)이 없다고. 한번은 춘천시장을 만나 ‘김유정역으로 만들자’고 하니 시장이 ‘김유정이 누군지 모르는데 되겠습니까’ 하고 반문해요. 그래서 ‘이 시대는 할 수 있다’고 설득했어. 시장이 얼마 후 서울 철도공사를 찾아갔나 봐.
 
  시장에게 전화가 왔어요. ‘김유정역으로 하기로 했다’고. 그러고는 춘천시 관보에 발표해버린 거야. 근데 문제가 생겼어요. 마을 사람 동의 없이 발표부터 한 거야.”
 
 
  “코로나19가 끝나면 다시 많이들 올 거예요”
 

최근 펴낸 전상국 소설가의 책들. 전상국 중단편소설 전집 12권이 차례로 출판될 예정이다. 먼저 《동행》 《하늘 아래 그 자리》가 지난해 9월 간행됐다. 왼쪽은 수필집 《작가의 뜰》.

  마을 사람들이 청와대에 민원을 넣었다고 한다. “장가도 못 가고, 폐병으로 죽은 김유정을 역명으로 할 수 없다”고. 강경하게 반대했다. 결국 춘천시는 김유정역을 포기하고 말았다.
 
  “안 되겠다 싶어 내가 주민들을 불러 설명했지요. 그분들 말씀을 들으니 ‘폐병쟁이, 단명한 사람을 역명으로 붙이는 게 좋지 않다는 의견도 있지만, 지자체가 마을을 위해 해준 게 없다’는 섭섭함이 컸던 겁니다. 게다가 멋대로 역명까지 바꾸니 화난 것이죠. 그래서 역명을 바꾸면 좋은 점을 설명해 어렵게 동의를 구했어요.
 
  그런데 청와대에 민원을 넣었던 노인과 어른들은 그 자리에 안 온 거야. 노인정에 다시 가서 무릎 꿇고 ‘허락해주십시오. 바꾸면 정말 좋다’고 말씀드리니 ‘그럼 한번 해보슈’ 해서 바꾸게 된 겁니다.”
 
  ― 김유정역 이후 다른 지자체들이 덩달아 역명 변경을 추진했지만 제동이 걸렸다고 하더군요.
 
  “한용운 선생의 고향에서 만해역(충남 홍성)으로, 경주 근처 간이역을 김동리역과 박목월역으로 만들자며 우후죽순처럼 요구하니까 안 됐던 거지요.
 
  고(故) 김윤식 선생이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듣고 ‘전(상국) 선생이 김유정역을 만든 사람이야. 그거 보통 문제가 아니거든’ 하며 칭찬하셨어요. 덕분에 일제 때 지은 옛 역사(驛舍)가 그대로 보존됐어요. 경춘선 전체로 볼 때 김유정역이 유일해요.”
 
  ― 김유정면으로 바꾸는 지명 변경은 실패했다고….
 
  “내가 신문 칼럼에다 지금의 신동면을 ‘김유정면’으로 바꿔야 한다고 썼는데 마을 사람이 반대해서 안 됐어요.”
 
  ― 언제든 바뀔 개연성도 있겠네요.
 
  “돼야지요. 됐으면 좋겠어요. 한 작가를, 내가 좋아하는 매력 있는 작가를 널리 알리기 위해 ‘김유정면’을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걸 넘어서 지역 정체성과 관광자원화 모두를 이룰 수 있어요. 이어령(李御寧) 선생이 문화부 장관 시절에 평창 이효석문학관을 처음으로 만들었잖아요. 지금 연 200만명이 찾고 있어요. 그 일을 이어령 선생이 한 거라고. 김유정문학촌에도 연 100만명 이상이 오거든. 대단한 거예요.
 
  작가 이효석이 봉평에 메밀꽃을 피운 뒤 그것을 가꾸고 수확을 하는 일에 봉평 주민들이 앞장섰듯, 작가 김유정이 피운 동백꽃 가꾸기에 이곳 실레마을 주민들도 앞장서고 있어요. 코로나19가 끝나면 다시 많이들 올 거예요.”⊙

 

https://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E&nNewsNumb=202104100053

 

한국문학

전상국

[ 全商國 ]

요약 전상국 문학의 중심 소재는 분단문제, 교육문제로 현실사회를 비판하였다.

1940년 3월 12일 강원도 홍천 태생. 춘천고를 거쳐 경희대 국문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강원대 국문학과 교수로 취임, 현재는 강원대학교 명예교수이다.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동인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윤동주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196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동행」이 당선되어 등단했으나 이후 10여 년간 작품 발표를 하지 않았다. 1974년 『창작과비평』에 「전야」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시작하였다. 전상국 문학의 중심소재는 분단문제이다. 등단작인 「동행」에서 「아베의 가족」(1979), 「길」(1985) 연작에 이르는 그의 분단소설들은 전쟁의 폭력성과 그로 인한 상처들을 증언하며 동시에 그 상처의 치유가 우리 모두의 몫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전상국은 인간의 속성, 또는 삶의 원체험 혹은 원형을 탐구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는데, 이 점이 다른 분단소설 작가들과 구별되는 특성이다. 또 하나의 주요소재는 교육문제이다. 「돼지새끼들의 울음」(1975), 「우상의 눈물」(1980) 등의 소설에서는 교육현실의 황폐성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전상국의 교육문제에 대한 소설들은 교육문제에만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우리 사회 전체의 문제 또는 권력 문제 등 인간 사회의 일반적인 문제들을 탐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소설집으로 『바람난 마을』(1977), 『하늘 아래 그 자리』(1979), 『늪에서 바람이』(1980), 『길』(1985), 『불타는 산』(1984), 『아베의 가족』(1980), 『외등』(1980), 『우상의 눈물』(1980), 『식인의 나라』(1981), 『우리들의 날개』(1981), 『늪에서는 바람이』(1986), 『외딴길』(1993), 『유정의 사랑』(1993), 『투석』(1995), 『참 예쁘다』(1996), 『사이코』(1996), 『우리 때는』(1997), 『온 생애의 한순간』(2005) 등이 있다.


학력사항

춘천고등학교

경희대학교 - 국어국문학 학사

경희대학교 대학원

경력사항

강원대학교 국어국문학 교수

수상내역

1963년 작품명 '동행' -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동행」이 당선

현대문학상

한국문학작가상

동인문학상

대한민국 문학상

윤동주문학상

김유정문학상

작품목록

광망

해바라기 시계

유언

전야

할아버지 묻힌 날

돼지새끼들의 울음

악동시절

껍데기 벗기

사형

여름 손님

바람난 마을

바다 재우기

바람난 마을

침묵의 눈

물걸리 패사(稗史)

산울림

고려장

안개와 눈

하늘 아래 그 자리

아베의 가족

초혼

수렁 속의 꽃불

암코양이의 식성

잊고 사는 세월

진화설

겨울의 출구

실반지

외등

하늘 아래 그 자리

공터 사람들

달평씨의 두번째 죽음

어떤 이별

우상의 눈물

소설 과외지대

여름의 껍질

추억의 눈

늪에서 바람이

아베의 가족

외등

우상의 눈물

외딴길

식인의 나라

우리들의 날개

좁은 길

술래 눈뜨다

이산

출향

이류 속에서

허허벌판

산너머 강

관심

불타는 산

그늘 무늬

술법의 손

음지의 눈

먹이 그물

늪에서는 바람이

썩지 아니할 씨

밀정

퇴장

외등

형벌의 길

잃어버린 잠

투석

사이코

지빠귀 둥지 속의 뻐꾸기

거울의 알리바이

유정의 사랑

외딴길

유정의 사랑

투석

개거미들의 화음

시인의 겨울

사이코

참 예쁘다

너브내 아라리

우리 때는

실종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33866&cid=41708&categoryId=4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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