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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산책

5.18 광주민주화운동 (바위섬)

작성자사랑해~~~!!(전남 곡성)|작성시간23.05.18|조회수41 목록 댓글 0

43년 전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신
민주투사 분들을
잊지 않겠습니다.


5_18민주화운동 희생자 추모탑, 국립 5·18 민주묘지

5.18 광주민주화운동 (바위섬) 바위섬 배창희사,곡 김원중노래 파도가 부서지는 바위섬 인적없던 이 곳에 세상 사람들 하나 둘 모여 들더니 어느 밤 폭풍우에 휘말려 모두 사라지고 남은 것은 바위섬과 흰 파도라네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아무도 없지만 나는 이 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 이제는 갈매기도 떠나고 아무도 없지만 나는 이 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나는 이 곳 바위섬에 살고 싶어라. 사진은 변산 채석강
오늘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일입니다. 광주민주화운동의 상징적인 노래중 한곡인 '바위섬'을 소개합니다. 80년 5월의 광주를 상징하는 '바위섬'은 당시 조선대 재학중인 배창희가 당시의 광주를 외로운 섬으로 생각하며 만들었다고 전해집니다. 1985년 '바위섬'으로 대뷔한 김원중은 가수생활을 뒤로하고 광주로 돌아와 생명과 자유가 위협받는 사회 현실에 대해 그의 신념을 담아 노래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름다운 바다 한가운데 외로이 있는 바위섬의 풍경을 그린 가사와 서정적인 선율, 김원중의 맑은 음색으로 큰 사랑을 받은 '바위섬'. 김원중은 "저는 사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아픔에 대해서 표현하고 싶었다"고 아픈 이야기를 합니다. 김원중씨는 대학 1학년 때 5·18을 겪었습니다. 그 후 군대에 가서 복무를 마치고 다시 전남대학교 농업경제학과에 복학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후 그는 ‘바위섬’이라고 하는 노래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게 됩니다. “나는 노래를 좋아해 당시 광주에서 음악하는 선배들과 자주 어울렸지만 가수가 되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그걸 목표로 준비를 한 적도 없습니다.” 김씨는 전공과는 다소 거리가 멀어 보이는 사시(司試)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오로지 사시 준비에 매달려 있다가 주말이면 예전 광주KBS가 있던 사직공원 쪽으로 가게되는데, KBS로 오르는 언덕배기에는 노부부가 운영하는 자그마한 호프집이 있었고 그곳에 가면 박문옥, 김정식, 신상균, 김종률 등 음악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가운데 김종률은 MBC대학가요제에서 ‘강진과 영랑’이라는 노래로 은상, 전일가요제에서 ‘소나기’로 대상을 받았으며, ‘님을 위한 행진곡’을 탄생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이들은 1984년, ‘예향의 젊은 선율’이라는 타이틀로 음반을 내게 됩니다. 이 음반에는 가수 김원중의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리게 된 노래 ‘바위섬’도 들어 있습니다. 바위섬은 당시 조선대학교에 재학 중이던 배창희씨가 작사 작곡을 한 노래입니다. “바위섬이 나왔을때 항간에 이 노래는 80년 5월의 광주를 상징한다는 말이 떠돌았는데 그게 사실입니다. 배창희씨는 당시의 광주를 외로운 섬으로 생각하며 노래를 만들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위섬이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겁니다. 저 역시 자고 났더니 유명한 가수가 되어 있더군요. 그때부터 87년까지 방송, 행사 등 바쁜 일정에 쫓기면서 그야말로 정신없이 가수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김씨는 직업적인 가수(또는 연예인)로 승승장구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럴 만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매니저 쪽에서 볼 때는 돈이 안 되는 가수였습니다. 예를 들어 나이트클럽 디제이를 하면 손쉽게 거액을 벌 수 있는데 김원중은 가수생활을 못했으면 못했지 그런 짓은 못하겠다고 거절한 겁니다. 일반적인 대중가수처럼 활동하지 않겠다는 자기 나름의 신념을 갖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를테면 노래에 순정을 바쳤다고나 할까요.” 광주로 내려온 그는 1987년 가수 김원중이라는 이름으로 첫 번째 독집음반을 냅니다. 이 음반 안에는 문병란 시인의 시에 박문옥씨가 곡을 붙인 ‘직녀에게’가 들어 있습니다. 직녀에게는 분단의 아픔을 담은 노래죠. 이어서 2집 독집음반을 내는데 이 음반은 사장(死藏)되어 버리고 맙니다. 매니저와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 때문이었읍니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1989년, 김씨는 ‘그대 오르는 언덕’이라는 노래를 발표합니다. 이 노래는 노태우 정권시절 당국의 허가를 받지 않고 방북한 문익환 목사에게 헌정(獻呈)한 노래죠. 이렇듯 시대적 아픔을 담은 노래를 잇따라 발표하면서 김씨의 노래 부르는 공간에 변화가 옵니다. 바위섬을 휘황찬란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불렀다면, 직녀에게와 그대 오르는 언덕은 자유와 민주화의 열망이 뜨거운 집회현장에서 불렀습니다. 그러면서 김씨에게는 ‘민중가수’라는 수식이 붙습니다. “민중가수라는 장르가 있나 모르겠습니다. 처음엔 거북스럽게 들렸지만 이제는 진실되게 살고, 정의로운 마음으로 살고, 옳은 신념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나에게 준 과분한 훈장이라고 생각합니다.” 대한민국 국어사전에도 ‘민중가수’라는 낱말은 안 나와 있죠.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 할지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민중가수 김원중’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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