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시조를 퇴계 이황이 지은 줄만 알았다. 그런데 이것이 실린 <청구영언>은 이름 없는 자의 작품이라고 한다. 어쨌든 의미는, 백구가 설마 떠들썩하게 소문내겠느냐마는 못 믿을 게 도화꽃, 도화꽃이 져 떠내려가면 어부들이 알고 찾아올까 걱정이라는 뜻이다. 이 무릉도원을 나 혼자만 알고 즐겨야 하는데….
퇴계의 작품이 정설인 듯 전해 내려온 까닭은 청량산을 ‘우리 집안 산(吾家山)’이라 했던 퇴계가 조선 성리학의 종주였기 때문일 수 있다. 성리학의 창시자 주희가 은거했던 무이산(武夷山) 육육봉을 청량산으로 빌어왔으니 그가 아니면 누가 이런 글을 썼겠느냐는 추론의 결과다. 하지만 무이산 육육봉은 6×6=36봉이고 청량산 12봉을 육육봉이라고 한 것은 퇴계의 풍기군수 전임자 주세붕이었다. 게다가 퇴계는 청량산 관련 시는 51편이나 썼지만 유산기를 지은 일은 없었으며 신재 주세붕의 <유(遊)청량산록>에 발문을 썼을 따름이었다. 1495년생의 주세붕은 중종 17년(1522년) 별시문과에 을과(4~10등)로 급제했다. 성적 우수자라 승문원 정자, 홍문관 수찬, 사간원 헌납 등 청요직(淸要職)을 돌았는데 때는 기묘사화(1519년) 뒤끝 훈구파의 권토중래 시점. 권신 김안로의 눈에 나 파직되었다가 복직, 1541년에 풍기군수가 되었고 3년 뒤 청량산 유람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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