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이대기 이문열의 불멸 (74)
조 흥 제
하지만 그러면서 안중근이 얻은 것도 많았다. 그동안 다동 김달하의 집에 머물면서, 그리고 안창호와 박은식, 신채호가 있는 대한매일신보를 드나들면서 그는 당시의 가장 치열하고 진보적인 의식으로 자신을 가다듬었고, 헤이그 밀사사건과 고종 퇴위, 정미칠조약과 군대해산 같은 역사의 거센 소용돌이를 바로 그 현장에서 목도하고 체험하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부산으로 내려가 간도에 이르기까지 험하고 힘든 여정도 그의 몸과 마음을 한번 더 담금질했다.
勳(훈)春(춘)이 북간도의 남단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만추라 12월의 추위는 매서웠다. 敬信(경신)鄕(향) 金(금)塘(당)村(촌)의 아침은 더했다. 볼이 에는 듯한 삭풍이 쓸어 가는 땅 위로 허옇게 서릿발이 돋아 있는데 다시 흐른 하늘에서는 점점이 눈발이 비치기 시작하고 있었다.
“오늘은 아이 되겠소. 하루 더 쉬었다 눈 그치면 가기요.”
금당촌에서 여러 날 숙식을 돌봐 준 윤영감네 아낙이 그렇게 안중근을 잡으며 정을 썼다. 윤 영감은 조부 안인수 때부터 안씨 가문에 몸 붙어 살아왔는데 그들이 해주에서 청계동으로 옮겨 앉을 때는 거기까지 따라 갔던 忠僕(충복)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안태훈이 죽고 안중근 형제도 삼화항으로 떠나 한 때 인근의 관아까지 호령했던 청계동이 다시 무너지자 그도 새로 얻은 할멈과 함께 아들이 살고 있는 만주로 떠났다고 들었다. 그런데 몇 달 간도를 헤매던 안중근은 그곳 금당촌에 들어서자 어디선가 뛰쳐나와 눈물로 맞는 바람에 한 동안 그 집에서 신세를 지게 되었다.
“아닙니다. 오늘은 떠나야 합니다. 여기서 너무 오래 묵었습니다. 자칫하면 여기서 해를 넘기게 될 지 모릅니다.”
“노령으로 넘어가는 재가 꽤나 높다던데요. 연추까지는 길도 몇 백리가 되고, 눈이라도 쏟아지면 큰 낭패를 당하게 되십니다.”
말수가 적은 윤 영감도 그렇게 아낙을 편들고 나샀다. 그 열흘 신세진 것이 안중근이 생각한 것보다는 그들에게 큰 짐이 되지 않은 듯했다. 안중근이 거기서 잠깐 주저했으나 이내 개털 모자를 눌러 쓰며 스스로 다잡듯 말했다.
“두 분 정은 가슴깊이 새기겠소만 아무래도 이만 떠나는 게 좋겠소. 큰일을 앞두고 너무 오래 여기서 머뭇거렸소. 뒷날 다시 이곳을 지나면 들러겠소.”
그리고는 결연히 윤 영감네 사립문을 나섰다. 그 때 낯을 익힌 동네 사람들 몇이그렇게 떠나는 안중근에게 알은 체를 했다. 다행히도 눈발은 이내 그쳤다. 안중근은 그것도 하나의 큰 격려로 삼아 더욱 마음을 다잡고 발길을 재촉했다. 마을을 떠나 한 식경이나 걸었을까? 금당촌 사람에게 들은대로 두 갈래 길이 나왔다. 동쪽으로 산마루를 넘어 연추로 가는 길과 남쪽으로 가다 두만강을 만나 다리만 건너면 慶(경)興(흥)으로 들게 되는 길이었다.
안중근이 먼저 서쪽으로 뻗은 길을 바라보았다. 마차 바퀴자국이 난 널찍한 길이었는데 멀리 널찍한 산마루를 끼고 사라졌다. 그 산마루 너머가 연추이고 거기서 다시 동쪽으로 가면 이제 그가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는 해삼위가 있었다. ‘동쪽을 바라 본다’는 뜻의 블라디보스토크란 러시아 이름의 땅, 수 천의 동포들이 마을을 이루고 산다는 항구의 도시, 여러 유력한 지사들이 멀리 한반도를 내려다보며 국권 회복의 웅지를 키우고 있다는 곳, 하지만 그쪽 하늘을 바라보는 안중근의 가슴은 왠지 예전처럼 뛰고 있지 않았다.
이어 안중근은 남쪽으로 난 길로 눈길을 돌렸다. 벌판에 뻗어 있던 길은 오래잖아 작은 구릉 사이로 사라지지만 그 끝에 두만강이 있고 그리운 사람들이 사는 고국 땅이 이어져 있다는 데 갑작스레 안중근의 코허리를 시큰하게 했다.
‘저리로 가면 대한으로 들어간다. 정다운 겨레붙이들이 왜놈의 압제에 신음하는 조국 땅이 거기 있다. 여기서 이만 돌아가 함께 쓸어안고 뒹굴며 살아가는 것은 또 어떨까. 함께 괴로워하고 함께 울며 왜적에 맞서다가 함께 죽어가는 것은.’
안중근은 때 아닌 감상에 젖어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이 무슨 나약한 소리냐. 북간도에서의 석달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하지만 여기서 주저앉아서는 안 된다. 나는 대한으로 돌아가겠지만 결코 그런 모습이어서는 안 된다.”
다시 그렇게 결연히 소리치며 서쪽으로 난 길로 접어들었다.
안중근에게 처음 간도 망명을 권유한 김 진사나 그 권유를 받아들여 끝내 망명을 감행한 안중근의 마음속에 있던 간도는 1906년 이전의 간도였다. 특히 1901년 대한제국 조정이 회령에 邊界(변계)警務(경무)署(서)를 설치하여 간도를 행정적으로 다스릴 태세를 갖추고 李範允(이범윤)을 간도시찰원에 임명한 때부터 1906년 참정대신 박제순이 통감부에 간도 거주 조선인 보호를 요청할 때까지가 좋은 시절이었다.
그때 대한제국은 간도와 심지어는 연해주까지 우리 땅임을 확신하고 적극적인 간도 관할 정책을 펴 나갔다. 시찰원 이범윤의 요청을 받은 의정부 참정 김규홍은 간도에 주민 보호관 파견을 건의하였다. 이에 정부는 이범윤을 북변간도관리사로 임명하고 간도에 사는 조선인들에게 관할권을 행사하게 했다.
그 몇 년간 시찰원으로 간도에 와 있으면서 간도의 사정을 잘 알게 된 이범윤은 간도주민을 보호하려면 무엇보다도 무력이 필요함을 절실하게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제국의 군대가 출동하면 청나라와 국제분쟁을 일으키게 될 우려가 있어 私兵(사병)을 모아 간도 주민 보호를 위한 무력으로 썼다. 이범윤은 연발총으로 무장한 사포대를 조직해 모아산, 마안산 등지에 병영을 세우고 한인을 보호하는 한편 청나라에 조세 징세를 거절하였다. 또 러일전쟁 때는 500여 명의 부대를 이끌고 러시아를 도와 일본군과 싸웠다.
김 진사나 안중근이 착안한 것은 아마도 이범윤이 활용한 그와 같이 독특한 간도의 위치였을 것이다. 곧 이범윤은 대한제국의 군대가 아니면서 청나라의 관할 주장에 맞서는 무력을 길렀을 뿐만 아니라 일본군과도 당당히 맞서 싸울 수 있는 기지를 만든 셈인데 간도는 그게 가능한 땅이었다.
그런데 안중근이 간도에 이른 1907년은 이미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간도 관리사 이범윤는 청나라의 강력한 항의로 본국의 소환을 받게 되자 이미 이태 전에 휘하부대를 이끌고 러시아령 연추로 옮겨가 버린 뒤였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는 엉뚱하게도 조선 통감부 간도파출소가 설치되어 한반도에서와 다름없는 위세로 간도를 억누르고 있었다.
회령에서 종성을 돌아 화룡현에 이른 안중근은 먼저 그곳에 터 잡고 사는 동포들 가운데 유력한 이들부터 찾아보았다. 안중근은 그들을 찾아보고 설득하였다.
“비유컨대 한 집안에서 어떤 사람이 부모와 동생들을 작별하고 떠나와 다른 곳에서 산 지 100여 년인데 그 동안의 그 사람의 가산이 넉넉해지고 처자가 방안에 가득하며 벗들과 서로 친하여 걱정없이 살게 되면 반드시 고향의 부모형제를 잊어버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고향집 형제 가운데 한 사람이 와서 급히 말하기를 ‘방금 집에 큰 화재가 생겼소. 다른 곳에서 강도가 와서 부모를 내쫓고 집을 빼앗아 살며 형제들을 죽이고 재산을 약탈하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속히 집으로 돌아가 위급한 것을 구해 주시오.’라고 간청하는데 그 사람 대답이 ‘이제 내가 여기서 살며 걱정 없이 편안한데 고향집 부모형제가 내게 무슨 상관이냐’고 한다면 그를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짐승이라 하겠습니까.”
더구나 곁에서 보는 이들도 ‘저 사람은 고향 집과 부모형제도 모르는 처지이니 어찌 친구를 알 수 있을 것인가? 하며 반드시 배척을 하여 친구의 의도 끊어지고 말 것입니다. 친척도 배척하고 친구의 의리도 끊어진 사람이 무슨 면목으로 세상에 살 수 있겠습니까? 동포들이여, 내 말을 자세히 들어보시오. 내 말을 듣고 위급에 빠진 고향집과 부모형제를 위해 일어나시오….”
안중근은 그렇게 목청을 높였으나 그때는 아직 정치적 망명보다는 생계를 위한 이주가 더 많았던 시절이라 안중근의 설득은 그리 큰 성과를 얻지 못했다.
그때 간도성 네 현(화룡, 연길, 왕청, 훈춘)에 흩어져 살던 조선인들은 거의가 30년 전 큰 흉년 때 함경북도에서 넘어간 饑民(기민)들을 중심으로 한 생계형 이주민들이었다. 고생 끝에 황무지를 개간하고 여러 가지 산업에 손 대 살만하게 된 이들이 더러 있었으나 안중근이 말하는 독립군 기지 건설이나 독립군 창군에 대하여 선뜻 동의할만한 지사적인 의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웠다. 거기다가 처음 遊說(유세)를 시작한 화룡현은 이렇다 할 큰 정착촌 없이 흩어져 사는 곳이라 안중근의 대의를 받들어 줄만한 유력자를 찾아보는 일도 쉽지 않았다. 이에 한달 가까이나 골짜기와 들판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을 찾아 헤매던 안중근은 별 소득 없이 연길현으로 넘어갔다.
연길현에서 안중근이 찾은 곳은 당연히 가장 조선인이 많은 龍(용)井(정)村(촌) 이었다. 하지만 용정촌도 모여 사는 조선 사람이 더 많고 거리가 더 흥청거리는 것 말고는 화룡현이나 다름없었다. 아직 정치적 망명보다는 생계를 찾아 이주한 조선 유민들이 찾은 곳이라 안중근의 대의가 크게 호응 받기를 기대할 수는 없었다. 몇몇 유력한 이들을 찾아보고 독립전쟁의 대의를 설파해 보았으나 팔 걷고 나서는 지사를 만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안중근을 암담하게 만든 것은 연길에 자리잡고 있는 일본통감부의 간도파출소였다. 그 전해 참정대신 박제순이 露(노)領(령)으로 망명해 버린 간도 관리사 이범윤을 대신해 간도에 거주하는 조선인을 보호할 관서를 요청하자 설치된 것인데 그 간도파출소를 따라 일본군과 경찰이 그곳까지 따라와 있었다.
처음 간도파출소를 설치할 때 일본 통감부는 간도와 연해주까지 영토라고 믿고 있는 대한제국의 입장을 그대로 견지하였다. 따라서 두만강 가에 있던 수색대를 불러들여 간도지역의 경비를 강화하였고, 나중에 영사 경찰로 전환된 경찰도 그때 이미 용정촌을 중심으로 거미줄 같은 수사망을 짜 나가고 있었다. 그것도 얼마나 견고하고 치밀한지 그 전 몇 달 서울에서 일본 군대와 경찰의 매운 맛을 볼 만큼 보고 온 안중근에게는 간도에서의 독립군 창설이 불가능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 바람에 맥이 빠진 안중근은 제대로 유세를 펼쳐 보지도 못하고 총총히 짐을 싸 용정촌을 떠났다. 그 뒤로도 마찬가지였다. 안중근은 다시 달포나 왕청현과 훈춘현을 돌며 인근에 흩어져 사는 동포들을 찾아보았으나 여전히 독립군 창설이나 독립군 기지 건설을 지원해 줄 사람도, 알맞은 땅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눈길을 돌리게 된 게 노령인 연해주 땅이었다.
안중근도 일찍부터 노령인 연해주와 그 곳의 몇몇 도시들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간도와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관리들이 대한의 영토로 확신했던 그 땅도 일찍부터 적지 않은 동포들이 흘러들어 가 살고 있었으며, 특히 海蔘(해삼)威(위)(블라디보스토크)란 항구도시에는 조선인들로만 이루어진 거리가 있다는 말까지 들었다. 안중근도 처음 간도로 떠나올 때 두만강을 따라 국경을 지키고 있는 일본 수비대를 피하기 위해 해삼위로 길을 돌리려고 마음먹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