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중근 의사 일대기 이문열의 불멸 (78) 조 흥 제 그런 말로 슬며시 물러나려 했다. 안중근이 분연히 소리쳤다. “조국의 흥망이 조석에 달렸는데 다만 팔짱 끼고 앉아 기다리기만 하면 재정과 군기가 어디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겠습니까? 또 하늘에 순응하고 사람의 뜻에 따르기만 한다면 거기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이제 각하께서 의병을 일으키실 결심만 하신다면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誠力(성력)을 다해 만에 하나라도 힘이 되어드리겠습니다.” 노령에 와서 어떤 일이 있었던지 그래도 이범윤은 안중근의 말을 받아들여 주지 않았다. “답답하기는 나뿐이 아니라 간도에서 나를 따라 와 이제는 농투성이가 다 되어가는 우리 부대원 5백 명도 마찬가지 일세. 내가 그들을 연추에 버려두고 여기 해삼위를 헤매는 것도 모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조국으로 진군하는 날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네. 여기 최봉준의 사무실에 나와 본 것도 요사이 그 사람이 큰 재력을 들여 무언가 대한을 위해 일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지. 그런데 오늘 들어보니 기껏 몇 천원 내어 언문 신문이나 내고자 이 수선이라고 하네. 우리 부대의 재정과 군기를 얻기는 틀린 것 같아 이만 연추로 돌아가려는 참에 자네를 만난 것일세.” 그런 말로 머뭇거리며 속 시원한 결단을 보여 주지 않았다. 안중근이 연추의병활동 세력의 두 갈래 계파 중에 최재형 계파로 분류된 것이나 뒷날 죽음을 앞두고 쓴 자전적 기록에서조차 이범윤을 우유부단한 인물로 그리게 된 것은 모두 그 날의 첫 인상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치원의 집으로 돌아간 안중근은 뜻밖에도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그날 무슨 일인가로 출타했던 이치권이 저물어서야 돌아와 안중근의 방으로 건너왔다. 최도현(최재형)이 보낸 사람이라, 그 말을 허투루 들을 수 없어 내 알아 보았지비. 몇 군데 연통을 놓고 한인촌을 더듬어 보았더니 정말로 안응칠이가 말한 이 아무개란 사람이 왔더구먼.“ 이치권이 그렇게 생색부터 내고 말을 이었다. “이강이라 했던가? 그 사람은 여기 온 지 며칠 안 되는데 저쪽 동양학원 뒤편에 있는 까레잇스까야 슬로보뜨까(한인 거류지: 한인들을 개척자라고 부를 당시 블라디보스토크에 7개 가량 있었다고 함)에 거처를 정했다고 하더구먼. 아무래도 추위에 왕래가 적은 때라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던 모양이라. 그리고 성이 유씨는 아니지만 강원도에서 온 사람도 하나 알아냈소.” “유인석 선생이 아니라면 누구겠습니까?” 안중근이 반가운 가운데서도 뭔가 이상해 그렇게 물어 보았다. 이치권이 블라디보스토크 일이라면 내 손안에 있다는 투로 말했다. “金(김)斗(두)星(성)이라고 하는 건장한 청년이었소. 이제 스물일곱 살이라고 하던가. 강원도 원주에서 왔다고 하는데 해산 당한 조선군대 사관 같다고 수군거립디다. 요즘 연추나 地(지)新(신)墟(허) 쪽으로 해산한 한국군이 떼 지어 몰려든다는 말을 들었는데 이 사람은 웬 늙은이 하나와 함께 벌써 지난 가을에 여기 와 자리를 잡았다는 거웨다.” 그 말에 안중근은 퍼뜩 떠오른 게 있어 물었다. “그 나이 드신 분에 대해서는 들은 말이 없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 늙은이도 꽤나 별난 모양이라. 여기가 어디라고 도포에 儒巾(유건)까지 받쳐 쓰고 왔다는 거요. 그 젊은이와는 달리 나들이가 적어 눈에 띄지 않아 그렇지, 이웃끼리는 그 늙은이를 두고 이리저리 말이 많다고 그러두만.” 거기까지 듣자 안중근은 늙은이가 유인석 선생일지도 모른다는 짐작으로 가슴이 뛰었다. 마음 같아서는 그 자리에서 달려 가 확인하고 싶었지만, 졸라봤자 이치권이 들어줄 것 같지 않은데다 하룻밤에도 수십 구의 얼어 죽은 시체를 낸다는 해삼위의 1월 밤도 깊어가고 있었다. 다음날 안중근이 먼저 찾은 것은 김두성이라는 청년 쪽이었다. 그가 강원도에서 왔다는 것도 그렇지만 그와 함께 왔다는 도포 차림에 유건까지 쓴 늙은이도 야릇한 궁금증을 자아냈다. 김두성의 거처는 변두리의 야트막한 둔덕에 기대 자리 잡은 한인거류지에 있었다. 그 곳에 있는 한인 가옥의 아래채를 빌려 살고 있었는데 안중근이 찾아 갔을 때는 마침 두 사람 모두 집에 있었다. 김두성은 한눈에 보기에도 武(무)骨(골)이 드러나 보이는 체격이었는데 러시아 군복 같은 윗도리를 걸치고 있어 더욱 군인 같은 느낌을 주었다. 안중근이 집 주인을 불러 그들을 찾자 김두성이 듣고 먼저 방을 나와 안중근을 맞았다. “제가 김두성입니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김두성이 그렇게 물어오자 안중근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그러나 이내 마음을 가다듬어 궁금했던 것부터 털어 놓았다. “저는 황해도 신천에서 온 안응칠이라고 합니다. 귀하께서 강원도에서 오셨다 하고 또 연로하신 어른을 모시고 있다고 하는데 그 어른이 혹 제가 찾는 분이 아닌가 싶어 왔습니다.” 그 말에 김두성이 경계하는 눈빛을 띠었으나 말투는 아직 공손하였다. “어떤 어르신을 찾으시는지요?” “의암 유인석 선생이십니다. 제가 떠날 때 들은 바로는 여기 오실 때가 되었는데 아직 자취를 찾지 못해서.” 그러자 김두성의 눈길이 알아보게 경계를 드러냈다. 그렇게 들어서 그런지 되묻는 목소리도 차갑기 그지없었다. “잘못 알고 오신 듯합니다. 제가 모시고 온 분은 연 전 이리로 이주해 온 뒤로 소식이 없는 재종형을 찾아 오신 당숙이십니다.” 그때 아래채 방안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왔다. “김 부위, 그 사람을 들여보내 게. 아는 사람일세.” 예닐곱 달 지나기는 하였지만 의암 유인석의 목소리에 틀림없었다. 그러자 김무성이 두말없이 안중근을 아래 채 부엌방으로 안내했다. 문을 열자 어느새 두루마기까지 받쳐 입은 유인석이 단정하게 앉아 안중근을 맞아들였다. 전날 밤 이치권에게서 처음 들은 둘의 얘기를 들을 때부터 이상하게 마음이 짚여 오던 대로였다. “자네는 북간도로 떠났다고 들었는데 여기는 웬일인가?” 안중근이 절을 올리자 유인석이 낮지만 쩌렁쩌렁한 울림이 남은 목소리로 물었다. 안중근이 수천 리 이국 땅에서 한때 조선천하를 떨쳐 울린 관동의진의 의병장을 만난 감격을 억누르며 지난 더섯 달의 행적을 요약한 뒤에 물었다. “선생님께서 해삼위로 떠나시려 한다는 말은 저도 서울에 있을 때 이미 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오신지 벌써 여러 달 되신다면서 어찌 이렇듯 자취를 감추고 계십니까? 오히려 함께 계신 이 젊은 분이 이곳 동포들에게 더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자 유인석이 가만히 웃으며 말했다. “그럴 테지. 내가 뜻한 바네. 우선 인사부터 나누게.” 그러면서 아직도 윗목에 서 있는 김두성에게도 안중근을 처음 보는 예를 갖추게 했다. 이어 김두성에게 안중근을 소개한 뒤 다시 안중근을 보며 말했다. “여기 이 김 副尉(부위)는 내가 이미 書案(서안)을 박차고 세상에 나온 뒤에 만난 터라 門下(문하)라 이룰 수는 없네만 그래도 하마 십년 넘게 내 집을 드나 든 문객일세. 일찍이 무과에 뜻을 두었으나 갑오 년 이후 무과가 폐지되자 무관학교를 졸업하고 원주 鎭衛隊(진위대)에 장교로 있었네. 작년 군대 해산 때는 진위대 부위로서 閔肯鎬(민긍호)를 도와 왜적의 간담을 서늘케 한 뒤 나와 함께 망명케 되었는데 여러 가지로 이 사람과 함께 하는 게 이만저만 든든한 게 아니라네.” 유인석은 그렇게 소상히 김두성을 소개하는 게 왠지 마음먹고 하는 일 같아 안중근이 물었다. “제가 듣기로 선생님께서 이 해삼위로 오신 까닭은 여기서 다시 13도 의병을 結陣(결진)하여 대한으로 진공하기 위함이라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여기 이르신지 여러 달이 되도록 이렇듯 소리 소문 없이 잠행하고 계시는지요. 아무리 수소문해도 겨우 저 분 김두성 부위만 알 뿐,아무도 선생님께서 오신 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復讎(복수)保(보)形(형) (抗日(항일)守舊(수구))의 기치를 내 걸고 關東(관동)倡義(창의)를 이끌었던 선생님의 크신 명망을 드러내지 않고도 여기 동포들의 열의를 일깨워 국내로 진공할 義(의)陣(진)을 불러 모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자 유인석이 가볍게 수염을 쓸며 말했다. “내가 동포들이 더 많은 간도를 두고 이리로 온 것은 아직도 일본에 대적할 수 있는 아라사의 힘을 믿어서였네. 청국과 달리 아라사는 일본과 강화를 맺었을 뿐 항복을 한 게 아니라고 들었네. 배상 한 푼 물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의 기득권 대부분을 지켜 낸 것만 보아도 일본이 떠벌리는 승전의 진상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런데 여기 와서 보니 구라파 쪽에서 난 혁명 때문인지 아라사는 이미 내가 믿던 아라사가 아니었네. 민족보다는 사상을 앞세운 반란의 칼날이 등을 노리고 있으니 그러잖아도 버거운 일본이 더 강대하게 보이는 듯하이. 특히 이 해삼위는 밀려드는 일본의 위세에 잔뜩 움츠러들어 그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하네. 거기다가 간악한 왜놈들이 밀정을 풀고 조선인 매국노들을 매수하여 동포들을 감시하니 이곳도 간도와 다름없이 되어 가네. 이런 때에 실속도 없이 요란하기만 한 유 아무개란 이름을 내 세워 그것들의 경계만 키울 까닭이 없지 않은가. 자칫 수풀을 설 건드려 독사를 노라게 하는 꼴이 날까 은인자중하는 걸세.” “그렇다고 이렇듯 적막하게 숨어 계시기만 한다면 수천리 이국 땅으로 망명해 오신 보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노구를 숨기고 있을 뿐 아무 일도 않고 세월만 축내는 것은 아닐세. 허왕산, 이강윤 등이 무망하게 흩어버린 13도 의진을 여기서 다시 살려 내기 위해 저기 김 부위를 내 세워 여러 갈래로 동포들과 접촉을 하고 있다네. 아직 석 달 밖에 안 되지만 멀리 하발포(하바롭스크)로부터 소왕령(우수리스크)추풍(수이푼)까지 동포들이 많이 사는 곳은 대강 돌아보았고, 자네가 우선 거처를 잡았다는 연추에도 여러 날 머문 적이 있네. 특히 연추에 근거를 두고 있는 倡義(창의)會(회)와 同義(동의)會(회)의 반목은 걱정거리여서 여기서도 얼굴만 마주하면 이범윤과 최재형을 달래고 있네.” 그 말에 안중근이 놀라 물었다. “제가 만나보니 관리사 어른이나 최도헌 모두 용모와 기상이 서린 분들이었습니다. 모두 동포를 위해 크게 힘쓸 분들인데 반목하다니요?” “재작년 이범윤이 처음 연추로 넘어왔을 때만 해도 둘은 결의형제를 맺어 조선의 광복을 위해 힘쓰려고 맹세할 만큼 가까웠다고 하네. 5백 명 가까운 이범윤 부대가 연추에 정착할 수 있었던 것도 연봉 3천원(루불)을 받는 연연추 남도소 도헌이요, 이 일대에서 가장 유력한 갑부인 최재형의 도움이 컸던 듯하네. 그러나 의병을 모아 가는 과정에서 의 상할 일이 있었던 모양인데 그런 일이 거듭하여 이제 연추는 이범윤의 창의회와 최재형의 동우회로 쪼개져 있다는 말이 나돌 지경일세. 연추로 돌아가면 자네도 그 어느 편에 서게 되겠지만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반목을 골을 깊게 해서는 안되네. 그 둘이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화합하는 날이 연해주에 13도 의군의 깃발이 올려지게 되는 날이 올 것이네.” 그렇게 말하는 유인석의 눈길에는 에순일곱의 나이 같지 않은 기력과 의지가 내비쳤다. 안중근은 전날 밤 이치권에게서 처음 유인석의 얘기를 들었을 때 느꼈던 묘하게 암담했던 느낌을 씻어내며 이강 얘기를 꺼냈다. 그러나 유인석은 이강의 이름조차 잘 모르고 있었다. “그런 사람이 있다면 언제 내게도 한 번 보내 주게.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고 하지 않나. 총칼로 싸우는 것만이 왜적과 싸우는 것만은 아닐 것이네.” 그런 말로 안중근을 보내 주었다. 배가 표트르만으로 나오자 쇄빙선에 깨어진 얼음조각조차 떠 있지 않은 온전한 바다가 되었다. 찬 바람 때문인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포씨에트로 가는 작은 여객선 갑판에는 아무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러나 갑판에 올라 온 안중근은 새로 장만한 개털방한모에 귀 가리개를 오히려 걷어 올렸다. 찬 바람과 함께 화끈거리던 귓불이 조금 시원해졌다. 다행히 소리는 들렸지만 귓속이 탈이 나도 단단히 난 듯했다. 안중근이 이강을 만난 것은 의암 유인석 선생을 만난 다음날이었다. 그가 최봉준이 새로 연 사무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가서 만나보니 이틀 전 이범윤을 만나던 날 지나친 적이 있는 얼굴이었다. 안중근이 먼저 인사를 청하자 이강도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안창호 동지에게서 공의 이름은 익히 들었소만 서울에서는 뵙지 못하고 여기서 만나게 되는구려. 그래 간도로 간다고 들었는데 여기는 어쩐 일이오?” 그렇게 묻는 말에 안중근이 그동안의 역정을 들려주자 이강도 안중근이 궁금하게 여기던 자신의 이력을 짧게 들려주었다. 이강은 평안도 용강 사람으로 나이는 안창호와 같아 안중근보다는 한 살 위였다. 스물다섯 나던 1902년에 미주개발회사가 모집한 이민단에 들어 하와이로 건너갔다. 하와이 영어학교에서 일 년간 영어를 배운 뒤 신문학을 배우기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건너갔으나 안창호를 만나 학업을 단념하고 민족운동에 투신하였다. 이듬해 공립협회를 설립하고, 다시 그 이듬해에는 그 기관지인 共立(공립)新聞(신문)을 창간하였으며 1907년 안창호를 따라 귀국하여 신민회 조직에 참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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