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중근 의사 일대기 이문열의 불멸 (83)
조 흥 제
유인석이 김두성을 내 세운 일종의 借名(차명)은 그 뒤 독립전쟁에서 심심치 않게 활용된다. 뒷날 동북항일연군 제1師(사)長(장)으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젊은 나이로 전사한 李(이)紅(홍)光(광)도 30년대 초 東(동)興(흥)邑(읍)을 점령했을 때 열여덟 살 되는 예쁜 처녀 아이를 백마에 태워 동흥읍을 돌게 하며 자기 이름을 쓰게 한 적이 있었다. 무시무시한 유격대장 이홍광이 열여덟의 예쁜 아가씨로 알려지자 조선일보는 속보를 내어 ‘미녀 두목 李(이)司令(사령)’을 출신과 이전 행적까지 들춰 가며 대서특필하고 있는데 이홍광을 뒤쫓는 일본군에게는 적지 아니 혼란을 주었을 것이다. 전해들은 조선 사람들에게도 그 일은 신비감과 崇慕(숭모)의 정으로 오래 기억되었다고 한다.
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유인석의 제안을 듣고 있던 이범윤과 쵀재형이 고개를 끄덕이며 유인석의 뜻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유인석이 환한 얼굴로 다시 논의를 이끌었다.
“두 분께서 이 늙은이의 뜻을 받아 주시니 기꺼우면서도 두렵소이다. 자, 이제 연해주 의진을 총독할 사람은 정해졌소. 그 다음 국내로 진공할 의병부대들을 통괄하여 싸움을 지휘할 대장은 두 분 가운데 어느 분이 맡아 주시겠소?”
“저는 이미 러시아에 귀화하여 조선으로 봐서는 타국인입니다. 조선으로 진공하는 의병대의 총대장에 타국인이 당키나 하겠습니까? 게다가 저도 이제는 나이를 먹어 총을 들고 앞장 설 처지도 못됩니다. 대장은 아무래도 여러 번 모진 싸움을 겪은 李(이)관리사가 맡는 게 옳을 듯합니다. 저는 다만 동의회 총재로서 이제껏 해왔듯이 뒤에 남아 군수의 재정 일이나 돌보겠습니다.”
이번에는 최재형이 먼저 나서 사양을 했다. 말을 듣고 보니 그냥 해보는 소리 같지 않았다. 하지만 이범윤도 최재형과 마찬가지로 완강히 사양했다.
“저 또한 황제 폐하의 소환에 불응하고 무단히 남의 나라로 피신한 망명객 처지입니다. 거기다가 두 분 보다야 젊지만 총을 들고 항오에 설 수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젊고 유능한 이를 대장으로 세워 장구한 앞날을 도모하시는 개 나을 것입니다.”
이범윤이 그렇게 사양하자 유인석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좌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예부터 過恭(과공)은 非禮(비례)라 하였거니와 나라와 동포를 위한 큰일을 당해서는 과공이 불의와 불충이 될 수도 있소. 오늘 우리 의진은 일시의 權道(권도)로 젊은 김두성을 총독으로 세웠지만 여러 부대장을 믿고 따를만한 대장을 따로 세우지 않고는 결코 아무런 공을 이룰 수 없을 것이오. 그런데 마땅히 나서 주셔야 할 두 분이 이리 사양하시니 실로 막막하구려. 여러분은 어찌했으면 좋겠소?”
그러자 그 자리에 모여 있던 여러 부대장 가운데 儒生(유생) 출신인 듯한 의병장 하나가 나서서 받았다.
“두 분 모두를 세우면 어떻겠습니까? 최 도헌께서는 동우회 뿐만 아니라 창의회까지 아우른 연해주 의진의 총재로서 후방을 맡고, 이범윤 대장께서는 연해주 의진의 총대장이 되어 전선의 병사를 맡으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우리 의진은 뒤로 蕭(소)河(하) 를 두고 앞으로 韓信(한신)을 세우는 격이 될 것입니다.”
고리타분한 한나라 초기의 고사를 내세우고 있기는 하나 그럴듯한 절충이었다. 이에 모두가 좋다고 찬동하자 김두성 총독에 이범윤을 대장으로 내 세운 연해주 의진이 갖춰졌다. 각 부대를 이끌고 있던 사람은 모두 그들의 이름을 붙인 부대의 대장이 되고, 안중근을 비롯해 영장으로 있던 사람들에게 는 참모중장이란 직함이 주어졌다. 근대적 군대 용어가 뜻하는 직책이라기 보다는 ‘지휘부에 속하는 중급 장교’ 정도의 뜻을 가진 구식 직함이었다.
나중에 김두성부대로 불리게 된 연해주 의병부대가 연추를 떠난 것은 그해 6월 초순, 양력으로는 7월5일이었다. 밤중에 가만히 木花(목화)村(촌)으로 집결한 부대들은 거기서 기선을 타고 장고봉 부근 바닷가에 내렸다. 그리고 장고봉에 이르러 날이 밝자 그 높은 구릉 아애 몸을 숨긴 채 다시 움직여도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밤이 오기를 가다렸다.
그때 연해주 의병부대는 국내 진공이라고 하지만 실은 일종의 遠征軍(원정군)이라, 총과 탄약 외에도 몇 가지 병참을 갖추어야 했다. 군복과 군장은 갖추지 못해도 행군과 이전에 불편하지 않을 옷과 신발이어야 했고, 신식 군용 장막까지는 못돼도 밤이슬을 면할 담요는 있어야 했다. 여러 날 걸리는 원정이라 군량도 거기 맞게 말린 것, 절인 것까지 모두 마련되어야 했다.
하지만 거둬들인 군자금이 넉넉지 못해 총과 탄약을 마련하는데도 빡빡한 지경이라 의병들이 먹고 입고 자는 일에 쓸 수 있는 게 많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덮을 것도 부실해 하루 밤낮의 행군과 이동에 벌써 불평들이 쌓여 갔다. 거기다가 연추까지 침투해 온 일진회 패거리와 일본 밀정들이 퍼뜨린 거짓 소문이 더해 의병들의 사기까지 떨어뜨렸다. 곧 의병 수뇌부가 군자금을 저희 멋대로 갖다 써서 부족해졌다는 일종의 이간책이었다.
싸움도 해 보기 전에 불만과 상하가 분열되고 사기까지 떨어지는 걸 보고 안중근이 참지 못했다. 그날 낮 후미진 구릉 사이에서 각 부대의 대장들과 장교들이 모여 그날 밤에 있을 국내 진공을 논의하는 자리가 되자 대장들이 청하지도 않은 데 나와 연설을 시작했다.
안중근은 먼저 군자금 유용에 관해 떠도는 소문이 일본군의 이간책임을 밝히고 단합을 호소했다. 그러나 듣고 있는 부대장들과 장교들의 표정은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軍中(군중)에 떠돌던 의심과 불만을 한마디로 부인하고, 안중근의 호소를 주제넘은 걱정으로 여기는 눈치였다. 그리고 오히려 허세 가득한 어조로 국내 진공을 서두를 뿐이었다.
“그런 건 걱정 마시오. 두만강만 건너면 살기 위해서라도 모두 뭉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 그보다는 어서 빨리 대한 땅으로 쳐들어가 외적을 하나라도 더 많이 때려잡을 궁리나 합시다.”
창우회 소속 부대의 한 대장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안중근의 말을 가로 막았다. 그게 다시 안중근의 열변을 이끌어 냈다.
“지금 우리는 기껏 몇 백 명의 병력으로 수천, 수만의 적과 싸우려 하니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므로 적을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병법에 이르기를 ‘비록 백가지 바쁜 가운데도 반드시 만전의 방책을 세운 연후라야만 큰 일을 꾀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우리들의 의거가 한 번으로 성공할 수 없음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그러므로 단번에 뜻을 이루지 못한다고 물러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첫 번에 안 되면 두 번, 세 번, 되풀이 일어나고 열 번 꺾여도 굴함이 없어야 합니다. 금년에 못 이루면 내년에 다시 도모하고, 때에 따라서는 십년 백년을 가도 좋다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합니다. 만일 우리 대에 이루지 못하면 아들 대, 손자 대에 가서라도 반드시 우리 대한의 독립권을 회복한 다음에라야 그만 둘 각오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먼저 할 일과 나중에 할 일, 급히 나갈 것과 더디게 나갈 것을 맞게 정하며 앞일을 헤아려 미리 준비하고 뒷일의 대비함에도 소홀함이 없으면 반드시 우리가 목적하는 바를 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하면 설령 오늘 나온 군사들이 병약하고 늙었다 하더라도 걱정할 게 없습니다. 우리 뒤에 남은 청년들이 사회를 조직하고 민심을 단합시키며 아이들을 교육하여 앞날을 준비하고 뒷일에 대비하는 한편, 여러 가지 실업에 힘쓰며 실력을 양성해 가면 못 이룰 일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비방과 야유가 쏟아졌다. 함경도 포수 출신의 한 장교는 아예 욕설로 안중근의 입을 들어 막다시피 했다.
“이보라우, 개소리 집어 치우라야, 박 터지게 생긴 싸움만 앞두고 이거 무스기 사람 맥 빠지게 하는 소리가? 당최 낙태한 고양이 쌍판을 하고스리.”
안중근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거기 모인 부대장들이나 장교들에게는 아니꼬울 뿐이었다. 모두 의병으로 모이기는 해도 여러 해 국외를 고생스레 떠돌면서 그들 대부분의 성품은 사납고 거칠어져 있었다. 조국 독립을 바라는 열의를 빼면 비뚤어질 대로 비뚫어진 주먹패들이나 다름없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이 높이 치는 것은 권력이 있거나 재산이 많거나 주먹이 세거나 관직이 높은 사람들과 나이 든 어른이었다. 그런데 그 어디에도 들지 않는 안중근이 그들 앞에 나서 떠드니 그 말이 바로 들릴 리 없었다.
격렬하게 喜悲(희비)를 드러내는 데는 안중근도 그들 못지 않았다. 부당하게 무시당했다 싶자 모든 걸 팽개치고 빠져 나오고 싶었으나 이미 내친 걸음이라 그럴 수도 없었다.
이어 벌어진 그 날의 논의에서 연해주 의진은 러시아령 장고봉의 서북쪽 방천 나루터에서 두만강을 건너기로 하였다. 방천나루는 두만강 하유를 따라 좁게 이어진 청나라 땅으로 훈춘현 경신진에 속해 있다. 장고봉을 등지고 러시아령인 臥(와)峰(봉) 마을과 이웃해 있는 그 나루터는 겨울이면 두껍게 얼어붙지만 여름이면 깊이 대여섯 길에 강폭이 넓은 두만강이 되너 배가 없이는 건널 수 없는 국경이 되었다. 청나라와 러시아, 조선 세 나라의 땅이 맞닿은 국경이었다.
“알아 본 바로 방천 나루터에는 曲(곡)씨 성을 쓰는 漢人(한인)이 제법 큰 모선을 가지고 여름 한 철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른다고 합니다. 거기다가 청나라 관부도 멀고 강 건너에는 일본 수비대도 없어 국경을 건너 오가는 데 별 어려움이 없다 하니 그리로 건너면 좋을 듯합니다.”
두만강 건너 경흥 출신인 한 장교 하나가 아는 대로 지리를 말하고 그렇게 제안하자 김두성을 비롯한 모든 부대장이 모두 따르기로 했다. 날이 저물자 의병부대는 모두 방천 나루로 옮겼다.
연해주 의병부대들이 방천 나루터에서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한 것은 7월 초순의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초경부터였다. 곡씨 성을 쓰는 한인뱃사공에게 낮에 미리 정한 선임을 내고 5백 명에 가까운 의병들이 큰 나루로 두만강을 건너기 시작했다. 고물에 작은 등불을 하나 건 배에 스무 명씩 타고 두만강을 건너면 곧 경계에 들어가 방천 나루로 돌아간 배가 다시 의병들을 태우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식인데 그렇게 스무 번을 넘게 오 가 모든 병력이 도강을 마쳤을 때는 날이 희끄므레 밝아오고 있었다.
“자, 이제부터는 소규모 부대로 흩어져 유격전으로 함경도를 혼란케 하면서 홍범도 장군과 연결을 꾀합시다. 듣기로 홍범도 장군은 지금 茂(무)山(산)郡(군) 삼사면 서두수 상류지대에 진영을 차리고 있다 하오. 모두 싸우면서 그리로 집결하시오. 거기서 우리 의진을 다시 한번 확대개편한 뒤 왜적과 대규모 접전을 벌여 봅시다.”
이범윤이 거기까지 따라오지 않아 겉으로 내세운 총재가 아니라 실제 전선에서의 대장노릇까지 하게 된 김두성이 각 부대의 대장과 참모중장들을 불러 놓고 그 사이 몸에 붙은 우두머리 티를 내며 그렇게 말했다. 여기저기서 모아들인 정보를 근거로 연추에서 유인석, 이범윤 등과 함께 이미 정하고 온 방향대로였다.
김무성이 무거운 짐을 벗듯 자기 부대만 이끌고 떠나자 그들 쪽에서 봐서는 애숭이에 지나지 않는 김두성 아래서 싸우는 걸 탐탁치 않게 생각하던 다른 부대장들은 아무런 이의 없이 흩어져 갔다. 김두성 부대는 서북쪽으로, 홍범도 부대가 있다는 무산 쪽으로 바로 떠났고, 투지가 굳고 실전 경험이 많은 창의호 소속 부대는 서남쪽으로 길을 돌아 싸우면서 홍범도 부대와 합류하기로 했다.
안중근이 참모중장으로서 포병 左營(좌영)將(장)을 맡고 있는 동의회 쪽 전제익 부대는 남쪽으로 내려가 함경도 구석구석을 휘쓴 두에 북상하여 무산으로 가기로 했다. 전제익 부대는 총원이 150 명으로 전제익이 직접 이끄는 본부와 소총부대인 포병대 좌우영으로 되어 있었다. 우영장은 안중근의 의형인 엄인섭이 맡고 있었고 그 아래로는 안중근의 義弟(의제)인 김기룡과 우덕순 백규삼 이경화 강창두 최천호 등이 장교로서 각기 소대 병력을 지휘했다.
날 새기 전에 증산동을 떠나 해뜰 무렵 九(구)龍(룡)坪(평)에 이른 전제익부대는 벌판 끄트머리 야산에 숨어 아침밥을 지어 먹고 다시 어둡기를 기다렸다. 모두가 골짜기와 나무 그늘에 숨어 간밤에 설친 잠을 낮잠으로 채우고 있는데 서수리 출신의 의병 하나가 자원하고 나서며 말했다.
“내레 오랜만에 고향에 와서 기런디 통 잠이 오지 않누만. 고향 산천도 돌아보고 왜놈 수비대가 어드메 있는지 정찰이라도 가볼까 하는데 뉘기 따라 갈 사람 없음메?”
그러면서 엄인섭과 고향이 같은 경흥면 출신의 의병 하나를 데리고 나가더니 한낮이 되어 돌아와 여럿을 깨우며 말했다.
“노서면 상리에 왜놈 수비대 하나가 있는데 니거 저물때까지 기다릴 것도 없어야. 원래 소대 병력이 있었디만 어젯밤 몰래 차를 내어 북쪽으로 실어가고 남은 게 대여섯 뿐이라는 거 아이겠소? 저물 때를 기다릴 것 없이 후딱 가서 해 치웁시다래.”
그 말에 장교들이 모두 찬동하고 엄인섭과 안중근까지 따르자 전제익도 굳이 마다하지 않았다.
“좋소이다. 어젯밤 떠난 적의 병력이 어디로 집결했는지 모르지만 하번 해 봅시다. 설령 적이 증원하여 돌아온다 해도 이곳은 국경 東邊(동변) 남쪽 끄트머리라 그리 큰 병력은 되지 못할 것이오. 우리가 먼저 기습하여 적의 진지를 점령하고 기다리면 우리부대만으로도 충분히 격퇴할 수 있으니 조금도 두려울 것 없소.”
그러면서 출동을 허락했다. 이에 전제익 부대는 아직 훤한 대낮에 구룡평을 가로질러 상리로 밀고 들어갔다.
서수라 출신의 의병이 살아 온 대로 원래 노서면 상리에 주둔한 일보군 수비대는 기관총 부대가 달린 1개 소대 병력이었다. 그러나 연해주 의병의 국내 진공 움직임이 일본군의 정보망에 걸려 회령으로 국경수비대 병력을 집결하는 바람에 상리 수비대도 기관총 분대를 비롯한 주력은 회령으로 가고 없었다. 나이 든 兵(병)曺(조)長(장) 하나가 겨우 졸병 다섯 명을 데리고 남아 조선인 보조원 몇과 함께 수비대 진지를 기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