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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들의소설

불멸 (87)

작성자조흥제|작성시간26.06.20|조회수24 목록 댓글 0

                                 안중근 의사 일대기 이문열의 불멸 (87)

 

                                                                                                              조 흥 제

 

   그때까지 지니고 있던 총과 탄약은 부근 숲 속에 숨겨 두고 온 터라 세 사람은 그렇게 장사꾼을 위장하며 불려 나온 집 주인에게 먹을 것을 빌었다. 세 사람의 몰골만 보아도 금세 알아들을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중년의 그 집 주인은 아무 말 없이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조밥 한 바가지를 퍼 내왔다.

“당신들은 여기서 머뭇거리지 말고 어서 가시오. 이걸 가지고 한 걸음이라도 빨리 여기서 멀어지는 게 피차가 모두를 살리는 길이 될 것이오. 어제 이 아랫마을에 일본 병정들이 몰려 와서 죄 없는 양민을 다섯이나 묶어서 끌고 가더니 의병들에게 밥을 주었다는 구실로 그 모두를 쏴 죽여 버렸소. 이곳도 때때로 와서 뒤지니 공연히 지체해서는 아니되오. 이리밖에 대접하지 못하는 나를 원망하지 말고 어서 가시오. 나는 당신들을 보지 못했소.”

좁쌀 밥이 든 바가지를 내밀면서 그렇게 말하는 집 주인의 얼굴은 겁에 질려 시퍼랬다. 그걸 본 안중근 일행은 더 말을 붙여 볼 엄두를 못 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밥 바가지만 받아들고 산속으로 되돌아가 세 사람이 똑같이 나눠 먹었다. 소금 한 톨 없이 계곡 무로 목을 축이며 먹는 조밥이었지만 그처럼 맛있는 음식은 세상에 다시 없을 것 같았다.

“아마도 이 음식은 하늘나라 신선들이 드나드는 식당의 요리일 것이오. 이 세상 어디에 이보다 더 맛난 음식이 있겠소!”

안중근은 그런 감탄까지 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이때는 이미 밥을 굶은 지 엿새가 지나 있었다. 거기다가 지난번 마지막 식사도 이들이나 굶은 뒤 얻어먹은 보리밥 한 그릇 뿐이었다.

집 주인에게 고맙다는 인사 말고는 만 한마디 못 붙이고 떠나는 바람에 길을 물을 틈이 없어 안중근 일행은 다시 어디가 어딘지 모를 산속을 헤매게 되었다. 북쪽이라 여겨지는 곳으로 산이 가로막으면 산을 넘고 물을 만나면 물을 건가는 데 언제나 낮에는 순 속에 엎드려 있다가 밤이 되면 걸었다. 어느 만큼은 장마가 끝날 때도 되었건만 난마다 비가 그치지 않고 퍼 부어 고생은 더욱 심했다.

낮에는 빗속에 떨며 숲속에 웅크리고 있다가 밤이 되면 굶주림에 뒤틀린 속을 냇물로 달래며 걷기를 며칠, 다시 안중근을 비롯한 세 사람은 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때 다시 숲 속에서 인가 한 채를 만나자 이번에는 안중근도 혼자 나서 죽기를 무릅쓰고 그 집 문을 두드렸다. 마침 집 사람이 조선 사람이었으나 심성은 앞서 만났던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행색을 보니 이번에 노서아에서 떼를 지어 두만강을 건너왔다는 그 의병패거리구나. 더구나 너는 틀림없이 노서아에 入籍(입적)(귀화)한 자일 것인데 한번 러시아 놈이 되었으면 거기서 구구로 머리 박고 살 것이지 의병질은 무슨 의병질이냐? 노서아 앞잡이가 되어 국경을 어지럽히고 동족들을 못살게 구니 차라리 너를 잡아 일본 군대에게 넘겨주겠다.”

안중근을 보자마자 그렇게 소리치더니 미리 준비하고 있던 몽둥이를 둘러 메며 집안에 대고 소리쳤다.

“이보라우, 날레 나오기요. 여기 노서아에서 왔다는 그 종간나새끼 하나가 밥 빌러 왔슴메. 후딱 묶어다 일본군한테 넘기고 설라무니, 어제 죄 없이 잡혀 간 양지 뜸 순동이나 풀어달라 합세.”

그 말에 방 안에 있던 서넛이 우르르 문을 열고 달려 나왔다. 그때는 이미 세 사람 모두 총을 탄약조차 제대로 챙기고 있지 못했다. 겨우 한 자루 남기 연발총과 탄알 몇 발이 있었으나 그나마 숲 속에 남은 두 사람이 가지고 있었다. 빈손인 안중근으로서는 어둠 속으로 달아나는 수밖에 없었다.

밥은 얻지 못하고 몽둥이 찜질만 당한 안중근이 허둥지둥 달아나 두 사람에게 돌아가니 두 사람도 놀라 안중근을 따라 나섰다. 추위나 굶주림보다는 코앞에 닥친 화를 피하는 게 급해 다시 어디가 어딘지 모를 밤길을 가는데 갑자기 어둠 속에서 일본말로 무어라 웨치는 소리가 들렸다. 갑자기 좁아지는 산길로 그 길목 보초막을 지키던 일본군이 誰何(수하)를 묻는 소리 같았다.

안중근은 퍼뜩 앞을 살피니 여남은 발자국 앞에 총검이 번쩍이는 총을 메고 있던 시커먼 그림자가 소총을 벗어들고 있었다.

안중근이 얼른 몸을 수그리며 뒤따라오는 두 사람에게 나직하게 소리쳤다.

“오른 쪽으로 피하도록! 그 쪽으로 첫 봉우리에서 만납시다.”

그때 요란한 총소리가 나며 총알 몇 개가 안중근이 구르고 있는 부근 풀숲을 스쳐갔다. 다른 두 사람도 재빨리 대처해 다행히도 세 사람 모두 다치지 않고 일본군의 사거리를 벗어날 수가 있었다. 일본군 보초도 어두운 밤에 구태어 추격하고 싶지는 않은지 제자리에서 총질만 해 댈 뿐 뒤따라오는 기색은 없었다.

다시 깊은 산속으로 몸을 피한 세 사람은 그날부터 산길 가운데도 큰길 쪽으로 나가지 않고 외지고 험한 풀숲 길로만 헤매고 다녔다. 그러는 사이 너댓새가 지났다. 밥을 먹지 못하고 내달은 지 이레에 가까워지자 배고픔은 이제 더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다가는 그냥 죽을 수도 있겠구나.”

안중근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며 갑작스러운 경건함으로 삶과 죽음을 아울러 돌아 보았다. 이내 천주와 성모가 떠오르고 야소 기독의 사랑과 언약이 떠오르며 암울하고 참담했던 심사가 천천히 밝아왔다. 어느 새 안중근의 신앙은 죽음에 다가들수록 공고해지는 그 무엇이 되어 있었다.

천주를 믿고 따른 날부터 결코 그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는 자부심도 안중근이 떳떳하게 죽음을 바라볼 수 있게 했다. 그러나 그를 뒤따르는 두 사람은 달랐다. 새삼 실감나게 다가오는 죽음에 압도된 것인지 둘 다 이미 죽어가고 있는 형상이었다. 안중근은 절망과 비탄으로 뒤틀리고 일그러진 그들의 얼굴을 보자 그냥 있을 수 없었다.

“두 형은 들으시오. 사람이 만일 천지간의 큰 임금이요, 큰 아버지이신 천주님을 믿고 섬기지 아니하면 이는 들짐승 날짐승보다 나를 게 없을 것이오. 더구나 오늘 우리는 죽을 지경을 면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니 속히 천주 야소의 진리를 믿어 영혼을 구제받아 영생을 얻는 것이 어떻겠소? 공자의 가르침에도 아침에 도를 얻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 하였소. 형들도 속히 지난날의 허물을 회개하고 천주님을 믿어 구원과 영생을 얻으면 그 아니 좋겠소.”

안중근이 그렇게 말하자 처음 두 사람은 암담해 하는 가운데에도 두 눈을 들어 멀거니 안중근을 바라 보았다. 천주교의 교리가 생판 낯설어서가 아니라 그 마당에도 그런 한가한 소리를 하고 있는 안중근이 어이없다는 듯한 눈길이었다.

하지만 그런 눈치에 기죽을 안중근이 아니었다. 그 특유의 열정과 간곡함으로 천주가 만물을 창조해 만든 이치와 지극히 공변되고 지극히 외로운 도리와 선악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분별의 엄정함을 낱낱이 알려 주었다. 또 야소 기독이 사람의 몸을 받고 이 세상에 내려 와 모든 인간을 救贖(구속)한 일과 영생의 언약을 전하며 그 두 사람에게도 천주 믿기를 성심껏 권하였다.

안중근의 믿음과 열정이 전해진 것인지, 아니면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천중에 의지해 보려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듣고 난 두 사람은 그날로 천주교에 귀의할 것을 약속했다. 이에 안중근은 풀숲에서 두 사람에게 代洗(대세)(사제를 대신하여 세례를 베푸는 일)를 주었다.

“성부와 성자와 성모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푸노라.”

안중근이 계곡물을 두 사람의 이마에 바르고 그렇게 읊조리며 세례를 대신해 영세를 주자 순교한 성인들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받은 두 사람은 새로운 교인으로 거듭났다.

“수데반(스테판)과 요왕(요한) 두 형은 이제 나와 의병 동지일 뿐 아니라 믿음의 벗이 되었소. 힘을 내시오. 이제 우리 앞길은 천주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오.”

안중근은 그렇게 두 사람을 북돋우며 다시 길을 나섰다. 그리고 셋 모두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 짜 먹을 것을 얻을 수 있는 안가를 찾았다.

안중근의 말대로 천주께서 세 마리 길 잃은 양을 특히 보살핀 것인지 오래지 않아 인가 한 채를 찾을 수 있었다. 워낙 산이 깊고 외진 곳이라 일본 군을 겁내지 않고 그 집 문을 두드리니 한 후덕해 뵈는 늙은이가 나왔다. 그 늙은이는 안중근 일행을 보고 놀라거나 겁먹기는커녕 오히려 따뜻이 집안으로 맞아들였다.

“목숨이 경각에 달려 염치불구하고 청합니다. 무엇이든 집안에 먹을 것이 있으면 좀 나눠 주십시오.”

서로 인사를 마치기 바쁘게 안중근이 그 늙은이에게 먹을 것부터 빌었다. 늙은이가 더 듣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부엌에 대고 소리쳐 음식을 내오게 했다. 엿새나 굶은 세 사람에게도 금방이가 싶을만큼 빨리 사내아이 하나가 먹을 것이 가득한 두레상을 들고 나왔다. 사발 대접 할 것 없이 수북하게 담은 것은 잡곡밥에 산나물에 철 이른 山果(산과)들이었다.

“어서들 드시오. 드시고 난 다음에 얘기 합시다..”

집 주인 늙은이가 측은히 여기는 눈빛으로 그렇게 말했다. 안중근 일행은 대답할 겨를 도 없이 상머리에 붙어 허겁지겁 그릇을 비워댔다. 그렇게 한바탕 배부르게 먹은 뒤에 정신을 가다듬어 돌이켜 보니 무려 열이틀 동안에 겨우 두 기만 먹고 목숨을 부지해 거기까지 간 셈이었다.

“정말 잘 먹었습니다. 일후 다시는 오늘 여기처럼 달게 먹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안중근이 그렇게 고마움을 나타내고 이어 그동안에 겪었던 고초를 간략하게 털어 놓았다. 듣고 난 집 주인 늙은이가 안중근의 손을 따뜻이 잡아주며 말했다.

“이렇게 나라가 위급할 때를 만나 그와 같은 괴로움과 어려움을 겪는 것은 백성된 이들이 마땅히 져야 할 짐이외다. 더구나 기쁨이 다하면 슬픔이 오고 고생이 끝나면 즐거움이 온다는 말도 있지 않소. 지금 일본이 기쁨을 누리고 있다면 우리는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이니 언젠가는 뒤바뀔 날도 올 것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다만 지금은 일본 병사들이 곳곳에 풀려 구석구석 뒤지고 있으니 참으로 길 가기가 어려울 것이오. 이제부터는 꼭 내가 일러주는 대로 따르도록 하시오. 그리하면 큰 탈 없이 온 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외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어 어디로 해서 어디로 가면 길을 지를 수 있으며 어느 골짜기와 어느 모퉁이를 돌아야 일본군의 주둔지나 초소를 피할 수 있고, 불행히도 일본군과 정면으로 부딪쳤을 때는 어디로 빠져야 살길이 나는지를 자세히 일러 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간곡하게 타이르듯 보탰다.

“다행히 두만강이 여기서 멀지 않으니 운이 나쁘지 않으면 며칠 안돼 건널 수 있을 것이오. 일단 그렇게 국경 밖으로 빠져 나가 안전한 곳에 이른 뒤에 힘을 기르다가 뒷날 좋은 때가 오면 다시 돌아와 큰일을 꾀해 보시오.”

그 말에 먼 길 떠나는 자식 보낼 때와 같이 정감이 어려 있을 뿐만 아니라 여느 산골 늙은이 같지 않은 식견이 느껴져 안중근이 물었다.

“어르신의 말씀에는 어째 여느 산골 노인의 타이름 같지 않은 품격이 있습니다. 존함은 어찌 되오며 이같이 깊은 산골에 숨어 지내시는지요?”

그러자 늙은이가 미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깊이 물을 것 없소. 남은 길이 험하고 머니 어서 길이나 재촉하시오.”

이에 세 사람은 두 번 세 번 머리 숙여 그 늙은이에게 감사를 드린 뒤 길을 떠넜다.

늙은이가 일러 준 길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이 세 사람은 나흘만에 회령 서쪽 7,8십리 되는 곳의 인적이 드물 두만강 줄기와 만날 수 있었다. 한달 내리 퍼 부은 장마에 강물이 많이 불어나 있었으나 세 사람이 건너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어렵게 떼를 지어 건너고 보니 청나라 훈춘 땅이었다. 악착같은 일본군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할뿐더러 이미 東(동)間(간)島(도)라 불릴 만큼 동포들이 많이 흩어져 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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