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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님들의소설

불멸 (90)

작성자조흥제|작성시간26.06.23|조회수7 목록 댓글 0

                                       안중근 의사 일대기 이문열의 불멸 (90)

 

                                                                                                                      조 흥 제

 

  잠에서 깨어난 안중근은 기이한 느낌이 드는 가운데도 그 꿈이 그저 南柯一夢(남가일몽)이려니 하였다. 그러자 자리를 털고 일어난 뒤에도 눈앞에서 영 지워지지 않는 게 아무래도 예사롭지가 않았다.

‘성모께서 놀라지 말라 하셨다. 또 염려해서는 아니 된다고 하셨다. 어쩌면 어젯밤의 꿈은 남가일몽이 아닐지도 모른다. 성모께서 지금의 나를 내려다보시고 내가 앞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헤아리시어 내려주신 말씀일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일진회의 습격은 안중근을 놀라게 하고 또 자리를 털고 일어난 뒤까지도 그 어느 때보다 어두운 눈길로 항일투쟁의 앞날을 바라보게 한 사건이었다. 의병을 일으키려 한다고 동포의 손에서 죽을 고비를 넘기고 풀려나온 일을 돌이켜 볼때마다 안중근은 열이틀만에 두 끼를 먹으며 일본군에게 쫓길 때보다는 몇배나 참담한 심정이 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당부는 아마도 그를 가리키는 듯하다. 낙망한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고 함이다.’

이윽고 생각이 그리 돌아가자 안중근은 정대호네 집에 더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아직 온전하게 낫지 못한 자신을 걱정해 간곡히 잡는 정대호의 손길을 뿌리치고 연추로 돌아왔다.

연추는 석 달 전 떠날 때보다 더 나빠져 있었다. 최재형과 이범윤은 때가 무르익기를 기다린다는 핑계로 출병을 미루면서도 의진의 주도권을 놓고 쓸데없는 기세 싸움만 벌였다. 그 바람의 연추의 동포들은 그 두 사람이 이끄는 同意(동의)會(회)와 倡義(창의)會(회)의 눈치만 보며 우왕좌왕했다. 거기다다 지난번 국내 진공 때에도 한 덩이가 되어 움직이던 해삼위의 항일계몽파도 해조신문을 이어 창간한 대동일보를 중심으로 새로운 세력이 되어 연해주 항일 세력을 갈라놓고 있었다.

안중근은 그렇게 분열된 사이를 오락가락하며 협동과 단결을 역설하는 한편 그들 주력과는 상관없이 독립특파부대로 움직일 수 있는 요원들을 확보하려고 애썼다. 다행히도 안중근이 겪은 그 몇 달의 신고가 연추에도 전해져 회령 싸움 이후 안중근이 받던 의심과 비난은 많이 잦아들어 있었다. 거기다가 새로 불붙은 안중근의 信心(신심)과 열정에 감동한 것인지 오래잖아 안중근과 뜻을 함께 하겠다는 동지 열한 명을 모을 수 있었다. 겨우 마음을 푼 의형 엄인섭과 의제 김기룡을 비롯해 지난 번 진공전 때 소대장을 지낸 백규심, 이범윤의 산포대 출신이지만 동의회 소속 부대에서 싸웠던 황병길 등 주로 동의회 계열의 의병부대 출신이었다.

이듬해 설을 쇤 지 며칠 안 되는 어느 날 안증근은 연추의 하리에서 그들 열 하나와 모임을 가졌다. 하리는 연추에서 훈춘으로 빠지는 길목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그 네댓집 가운데서 가장 외져 獨(독)家(가)촌이나 다름 없는 황병길의 집에서 안중근은 그들을 모은 취지를 밝혔다.

“오늘 내가 여러 동지를 모신 것은 시급히 서둘러야 할 일이 있기 때문이오. 우리는 그동안 대한의 자주독립을 위해 이리저리 뛰어 다녔으나 소리만 요란할 뿐, 앞뒤로 아무 일도 이룬 바 없으니 남의 비웃음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오. 하지만 우리가 다시 무엇을 꾀하고 해도 특별한 단체가 없으면 그 목적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외다. 이에 오늘 동지들에게 먼저 그 단체부터 만들 것을 제안하오 . 우리 모두 손가락을 끊어 하늘에 맹세하고 그 뜻을 적은 다음, 한 마음으로 단체를 만들어 한 목숨 나라에 바칠 각오로 기어이 그 목적들 달성하도록 하는 게 어떻겠소?”

그러자 모인 사람 모두가 안중근의 말에 따라 주었다. 열두 사람 모두 자기 왼손 藥指(약지)를 끊어 그 피를 사발에 모은 다음 미리 준비한 태극기에 大韓(대한)獨立(독립) 넉자를 크게 써 넣었다. 이어 그 단체의 이름을 同義(동의)斷指(단지)會(회) 라 부르기로 하고 안중근이 취지문을 읽었다.

“오늘날 우리 한국 인종은 국가가 위급에 처하고 生民(생민)이 멸망할 지경에 당하여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더러는 다시 좋은 때가 오면 모든 게 잘 풀릴 것이라고 하고, 더러는 외국이 도와주면 된다고 말하기도 하나, 이는 다 쓸데없는 소리이니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은 다만 놀기를 좋아하고 남에게 의뢰하기만 좋아하는 까닭입니다. 우리 이천만 동포가 한 마음으로 뭉쳐 죽고 사는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싸운 뒤라야 국권을 회복하고 동포의 생명을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동포는 말로만 애국이니 一心(일심)單體(단체)니 할 뿐 실로 뜨거운 마음과 간절한 단결심이 없으므로 특별히 한 會(회)를 조직하니 그 이름은 동의단지회입니다. 우리 일반 회우가 손가락을 하나씩 끊음은 비록 조그마한 일이나 첫째는 나라를 위하여 몸을 바치겠다는 憑據(빙거)요, 둘째로는 한 마음으로 뭉치겠다는 표식입니다. 오늘 우리가 청천백일 아래 맹세하노니 지금부터 시작하여 아무쪼록 지난날의 허물을 고치고 한마음으로 뭉쳐 변하지 말고 목적을 이룬 뒤에 太平(태평)同樂(동락)을 길이길이 누리도록 합시다.”

뒷날 안중근이 여순 형무소에서 남긴 자전적 기록에는 그날 그런 취지서 낭독이 있은 다음 그들 열둘은 목소리를 합쳐 대한독립만세를 세 번 부른 뒤에 하늘과 땅에 맹세하고 흩어진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달리는 誓(서)川(천)同盟(동맹)이라고도 불리는 그 결사의식에서 실제로는 구체적인 목표까지 있었다. 이를테면 침략의 원흉과 을사오적의 제거로, 특히 안중근은 엄인섭과 함께 이등박문을 죽이기로 되어 있었다. 그것도 3년 안에 이등박문을 죽이지 못하면 자결하여 무능을 속죄하기로 약속할 만큼 엄중한 서약이었다.

하지만 동의단지회를 결성해도 당장은 그들 열둘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다. 여기저기 오가며 계몽과 교육에 힘쓰고 민의를 모으며 때를 기다리는 게 고작이었다. 그렇게 되자 안중근에게 시급해진 것은 국내 진공전으로 뿌리 뽑히고 황폐해진 연해주에서의 일상을 회복하는 일이 되었다. 안중근이 삼화항을 떠날 때 본가에서 마련해 혼 여비와 다동 김달하의 집에 모이는 지사들이 염출해 준 자금은 지난번 출병을 전후해서 바닥난 뒤였다. 거기다가 연추에 올 때부터 뒤를 봐주던 최재형마저 냉담해져 그 무렵 안중근은 주거와 숙식마저 정처가 없었다.

이에 안중근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나가 대동공보에서 편집장을 하고 있던 이강을 찾아보고 장구한 계획을 찾아 보리로 했다. 안중근이 동의단지회의 결성을 알리고 연해주에서의 생계유지를 위한 고심을 털어놓자 이강은 대동공보의 사장을 맡고 있는 유진률을 설득해 안중근의 뒤를 봐 주었다. 곧 안중근을 대동공보 연추지국장 겸 통신원으로 삼아 그럭저럭 숙식은 해결할 수 있게 만들어 준 일이 그랬다.

‘그런데 그 때문에 며칠 대동공보를 들락거리는 사이에 안중근은 뜻밖에도 반가운 사람 하나를 만났다. 지난번 회룡 싸움에서 없어진 뒤로 여섯 달이나 보지 못한 우덕순이었다.

그해 2월 블르디보스토크로 돌아온 우덕순은 대동공보의 집금책(수금원)일을 하고 있었다. 그가 죽은 줄만 알았던 안중근이 목이 메어 지난 일을 묻자 우덕순 또한 목이 메어 대답했다.

"그날 밤 전투 중에 홀로 떨어져 산속을 헤매다가 일본군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소. 꼼짝없이 죽었구나 싶었는데 거기도 안 참모중장 같은 장교가 있어 총살을 면하고 재판에 넘겨지더구먼. 그래서 재판을 받고 회령 감옥에 갇혔다가 석달만에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돌아올 수 있었소이다.“

하지만 다시 만난 감격도 잠시. 둘 다 당장은 발행부수 2천부도 안 되는 대동공보의 더부살이로 막연히 때를 기다라는 신세가 되었다. 그 바람에 울적하기 그지 없는 그 해 봄이 지나갔다. 그러다가 다시 그해 5월 이등박문이 통감직을 사임하고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이 날아들어 안중근을 더욱 막막하게 했다.

안중근은 이등박문이 조선총감으로 隆熙(융희)皇帝(황제)(순종)를 모시고 巡狩(순수)란 명목 아래 함경도를 돌아볼 때 저격할 계획을 세워 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때는 황제께서 이등박문의 지척에 계시어 함부로 손을 쓸수가 없을 듯해서 실행하지 못했다. 또 이등박문이 일본으로 돌아간다는 소문을 들은 뒤에는 가만히 국내로 들어가 정세를 살피고 달리 국권 회복의 방안을 마련해 보려 했으나 활동자금이 없어 그마저 뜻대로 되지 않았다.

거기다가 7월에는 그때껏 움직이지 않고 있던 이범윤이 창의회 계열의 부대원을 이끌고 국내로 진공해 거기 따라가지 못한 안중근을 울적하게 했다. 이범윤부대는 이번에도 경흥 쪽으로 들어가 일본 수비대를 한바탕 휘저어 놓고 돌아왔다. 빛나는 전과는 없었으나 지난번의 참패에 비하면 발전한 진공작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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