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답할손 X선생 / 김용준
※ 맞춤법은 현재의 표기법과 다소 다릅니다. 원문의 옛맛을 살리기 위해 책에 실린 그대로 옮겼습니다.
X선생은 철학을 공부하는 이면서도 매화를 끔찍이 사랑하는 것이 이상하다.
육칠 년 전이었던가, 강원도 어느 산골에 좋은 매화를 기르는 집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초봄 감기로 나흘이나 앓던 사람이 한식(寒食)철을 놓치지 않고 매화 접을 붙이겠다고 부랴부랴 노비냥(路費兩)이나 마련을 해가지고 우정 그 먼 곳을 찾아가서 매화 가지를 얻어다가 접을 붙이고, 또 그 이듬해 봄에는 몇 놈을 등분(登盆)을 해가지고 그중 한 분(盆)을 X선생께 보냈던 것이, 그 뒤로 내게 있던 매화는 게으른 주인을 만난 탓으로 고스란히 다 죽어 버리고 말았는데, X선생만은 얼마나 정성을 들여 가꾸었는지 작금(昨今) 양년(兩年)에는 제법 탐스러운 꽃이 아단스럽게 핀다고 곧간 꼭 한 번 놀러 와서 상매(賞梅)를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날은 일부러 좋은 막걸리 한 병을 구해서 둘러메고 X선생을 방문하였더니, 아니나 다를까 방문을 들어서자마자 은은한 매향이 비색증(鼻塞症) 있는 내 코에도 완연히 흘러온다.
X선생과 나는 이날 밤에 꽤 유쾌하게 매화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말(末)판에는 X선생 독특한, 내게는 그 골치 아픈 철학 이야기로 화제가 돌아가기로, 그만 밥도 이윽고 하였으니 또 만나자고 작별을 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예나 이제나 공부라고 한다는 사람들은 모조리 그렇게 빈복(貧福)을 타고났는지, X선생도 몇날 며칠이나 군불 맛을 못 봤는지 사뭇 냉돌에 이불 한 채 없이 병정 녀석들이 쓰던 담요쪽 하나를 깔고 올올 떨고 앉았으면서 그래도 입만은 살아서 칸트가 어쩌니 헤겔이 어쩌니 하고 떠들고 있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하루는 잡지사에 있는 장(張) 군이 X선생께 긴탁(緊託)이 있는데 꼭 날더러만 소개를 시켜 달라고 왔기에 그럼 어디 같이 가보자고 동숭동에 있는 X선생 댁을 찾아 나섰다.
이날도 X선생은 그 좋아하는 파이프를 비뚜름히 문 채 지저분하게 원고지 뭉텅이를 책상 옆에 흐트러놓고 저술하기에 여념이 없는지 우리가 들어선 줄도 모르고 혼자서 무엇이라 중얼거리기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선생” 하고 소리를 치니까 그는 아무런 표정도 없이 한참 만에 고개를 든다.
“이 친구가 선생을 꼭 만나 뵈야겠다는군요.” 하고 소개를 하는데 장 군도 곧 그의 명함을 X선생 책상 위에 놓으면서, “저는 장지환(張之煥)이라 합니다.” 하고 자기 소개를 하였다.
X선생은 아무런 대답이 없이 명함을 한식경이나 뚫어져라고 들여다보더니 별안간 무릎을 탁 치면서,
“원 요렇게도 꼭같은 이름이 있담.” 하고서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인사의 대꾸는 할 생각도 아니하고,
“금방 여기 둔 헤겔이 어디 갔느냐”고 책을 찾기에 분주하다. 장 군은 나를 보고 웃고, 나는 장 군을 보고 웃을 수밖에 더 도리가 없었다. 장 군이 용건을 마치고 나서 X선생과 작별을 하고 일어서는데 선생의 테이블 밑에 그가 끔찍이 사랑하는 매화에다 두루뭉수리처럼 웬 이불 한 채를 돌돌 감아 붙인 것을 발견하고 나는 분반(噴飯)할 지경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억지로 참으면서,
“도대체 매화에다 저게 웬일이요?” 하고 물었더니 X선생은 의연 무표정한 얼굴로,
“엊그제 어느 친구가 이불 한 채를 보냈습니다. 덕분에 어제 같은 추위에도 매화를 따뜻하게 해줄 수 있었소.” 하면서 연신 추워서 삼십 초가 멀다 하고 두 손을 호호 불고 있는 것이다.
X선생과 이야기할 때마다 나는 흔히 선생의 태도를 아래위로 훑어보는 것이 버릇이 되다시피 했지만, 제일 보기에 딱한 것은 X선생은 곧잘 바지 단추를 끼울 것을 잊어버리는데, 또 그 사이로 여름 속옷이 앙상하게 내다보이는 것은 정말 민망해 견딜 수 없다.
• 『근원수필』, 「답답할손 X선생」(47쪽)
『근원수필』 김용준 지음 / 김태형 펴냄 / 청색종이 / 2022. 05. 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