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26대 고종의 홍릉(洪陵) (Ⅲ)
○ 건축물
㉮ 침전
홍릉은 고종과 명성황후를 합장한 능으로, 능침은 서북향 하고 있다. 침전도 봉등의 축에 맞추어 서북향으로 배치되었다.
홍릉의 침전은 대한제국기 선포 이후 조성된 능에 건립된 산릉의례용 건물로, 오례의의 5칸 정자각 제도를 따라 건립한 후 배위청을 그 내부로 들인 건물이다. 전체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구체적인 간잡이는 정면 가운데 칸이 4,320mm, 좌우협칸 모두 각 3,090mm다. 측면 주칸거리는 4칸 모두 정면의 협칸과 동일하게 간잡이 한 3,390mm다.
월대의 전면과 좌우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는데, 전면에 3개소, 좌우면에 각 2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계단의 용도를 정자각에 경주면 좌측에 설치된 계단을 향로계와 어로계로 볼 수 있지만, 대한제국기 산릉의례의 절차를 알 수 없는 상태에서는 각 계단의 역할과 명칭을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다만 전면 가운데 계단, 좌우측의 전면 계단은 구름문양 새겨 넣은 소맷돌이 있어서 상대적으로 위계가 있는 계단으로 추정할 수 있다. 구름모양을 새겨 넣은 운제는 모두 5단으로 조각도 동일하다.
침전 후면의 신교는 일반 정자각과 동일하게 침전 월대와 능상의 지형이 끝나는 곳의 계체석에 걸쳐 만들었는데, 길이 1280mm, 폭 940mm의 장대석 1매를 사용했다.
㉯ 비각
홍릉의 비각은 침전의 좌측에 위치해 있다. 정면 3캄, 측면 3칸이며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용마루와 내림마루에 양상도회하고, 용마루의 좌우에는 용두를 내림마루에는 용두와 잡상 4개씩을 설치했다.
비각 내부 천장의 우물반지에는 6판 연화문을 넣고 반지틀의 종다라니초는 주화문으로 하였다.
㉰ 수복방·수라간
침전의 좌측에 건립된 수복방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 반으로, 간잡이는 정면 주칸이 좌측으로부터 2500mm, 2490mm, 2470mm고, 측면 주칸은 2460mm에 툇간이 1230mm다. 기단은 장대석을 외벌대로 놓아 구성했고 방형초석에 각기둥을 얹어 5량가를 구성하고 맞배지붕을 얹었다. 공간은 전면에 툇마루를 둔 온돌방 2칸, 부엌 1칸 반으로 구성되어 있다.
침전의 우측에 건립된 수라간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간잡이는 정면 주칸이 좌측으로부터 2480mm, 2460mm, 2480mm고, 측면 주칸은 3,780mm다. 비교적 높은 지형에 설치되어 2단의 기단을 설치한 후 방형초석에 각기둥을 얹어 5량가를 구성하고 맞배지붕을 얹었다.
㉱ 예감
홍릉의 예감은 일반적인 능제에 따라 침전의 우측 뒷면에 자리한다. 왕릉의 예감이 장대석을 다듬어 방형으로 만든 것과는 달리, 통돌의 가운데를 90mm 정도 파내어 만들었다. 크기는 1050*910mm에 지면위로 노출된 부분의 높이가 360mm다.
㉲ 산신석
산신석은 산릉을 지키는 산신에게 예를 올리는 상석이다. 홍릉의 산신석은 일반적인 능제에 따라 침전 뒤편 예감과 대칭되는 위치에 설치되어 있다. 모양은 장방형으로 그 크기는 1420*1040mm고, 지면위로 노출된 높이는 470mm다. 산신석의 모서리는 사선으로 갈아 마감하였다.
㉳ 제정(祭井)
홍릉의 비각 뒤편에는 제정이 설치되어 있다. 제정의 갓변에 24개의 사다리꼴 석재를 배치해 원형을 만들고 어정의 윗면은 4개의 장대석을 얹어 덮었다. 둘레에는 화강석과 발전을 이용해 사고석 담장을 쌓고 기와를 얹었다. 정면에는 살문을 두어 출입을 제한하도록 하고 있다.
㉴ 홍살문·판위·향어로·거석
홍릉의 홍살문은 능침 및 침전의 축에 맞추어 건립되었다. 현재 홍살문의 위치는 침전 월대로부터 약 60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홍살문의 구조는 두 개의 기둥을 5700mm 간격으로 배치하고 그 위에 높이 5340mm 정도 되는 기둥을 원형 초석 위에 세웠다.
기둥상부에는 두 개의 횡목을 관통하여 걸고, 14개의 살을 등간격으로 세우고 중앙에 삼태극 문양을 두었다. 홍릉의 홍살문은 다른 능에 비해 기둥사이가 넓어 2개의 살을 더 설치했다.
홍릉의 판위는 이전과는 달리 홍살문의 서편에 자리하고 있지만, 바같쪽으로만 다듬어진 장대석으로 사방틀을 만들고 안쪽에 방전을 깔아 마감하는 것은 동일하다. 판위의 크기는 길이가 2497mm, 폭이 2489mm로 거의 정방형이다.
홍살문의 가운데 부분에서 시작하는 향어로는 다른 능과 달리 3중로로 구성되어 있는데, 철종의 예릉으로부터 보이는 사례다. 대한제국기 산릉의례의 절차가 정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3중로의 동서로 중 어느 쪽이 어로인지 알 수는 없다. 그러나 판위가 설치된 위치나 서로의 폭, 또 침전 서계의 넓이가 동로, 동계보다 넓은 것으로 보아 서로가 어로일 것으로 생각된다.
홍릉에는 이전의 능에서는 보이지 않던 방형 석재가 향어로 좌우에서 확인된다. 크기는 620*620mm고 지면으로 노출된 높이는 40mm다. 상설도에 해당하는 석재에 거석이라고 적혀 있다. 한자 의미대로라면 횃불을 거치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 재실
홍릉의 재실로는 내재실·어재실·예재실 등이 홍릉지에 기록되어 있다. 이중 홍릉 영역에 있는 것은 내재실로 침전의 서편에 있다. 내재실은 재실을 중심으로 뒤편에 전사청, 전면에 대문이 있는 행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 여행 후기
왕의 아버지를 일컫는 말 대원군.
조선에는 3명의 대원군이 있었다.
그중 아들이 임금일 때 살아있었던 대원군, 흥선대원군.
그는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 철종이 죽자 자신의 차남을 왕으로 앉히고 10년 동안 섭정을 한다.
대내적으로는 왕권을 강화하고, 대외적으로는 척화비를 세워 통상수교를 거부한다. 그리하여 서원을 철폐하고, 경복궁을 중건하며, 당백전을 발행하고, 병인양요와 신미양요가 일어난다.
그의 이런 정책은 세도정치로 약해진 왕권을 부활시켰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이나, 무리하게 경복궁을 조성한 점과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처하지 못하고 통상외교를 거부해 우리나라의 근대화를 지연시킨 점은 한계라 할 것이다.
그리고 대원군의 섭정이 끝나고 조선의 무능한 임금 중 하나인 고종이 33년간 친정을 하지만, 나라는 바람 앞에 등불처럼 위험한 상황에서도, 대신들이란 작자들은 수구파와 개화파로 갈라져서 자기 이권만 챙기는 가운데 마침내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나라의 실질적인 주권을 잃게 된다.
이때 을사늑약에 찬성하신 위대한 5분을 우리는 을사오적이라 부르니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부대신 권중현이다. 이에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으로 울분을 토로하고, 민영환과 조병세는 자결한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에서 역사 시간에 이 조약을 ‘을사보호조약’이라고 배웠다. 국사편찬위원들 반성해야 한다.
(고종 홍릉 3부 끝)
<출처 : 2015 조선왕릉 종합학술보고서 [Ⅸ], 고종 홍릉, 국립문화재연구소>
2019. 12. 21.
고종의 홍릉을 다녀와서
사빈 하 창 락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