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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길흉

[스크랩] 일본33 - 임오군란과 갑신 정변에서 개화파와 일본!

작성자황룡|작성시간26.06.12|조회수2 목록 댓글 0

 

일본 33 - 임오군란과 그후 갑신 정변에서 개화파와 일본의 역할!

 

 

1868년 존왕양이파인 조슈번과 사쓰마번에 히젠번과 도사번 5천명이 교토로 올라가 황거를 장악하자 에도

막부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15천으로 출진해 교토 동남쪽 후시미에서 전투가 벌어지니 무진전쟁으로

일왕(천황) 을 등에 업은 반란군이 승리해서 메이지 유신으로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국가로 나아갑니다.

 

 

이 과정에서 폐번치현을 단행하니 그간 목숨 걸고 싸운 사족(사무라이) 들은 직장과 연봉을 잃는 토사구팽

당하자 불만이 하늘을 찌르니..... 무진전쟁의 1등 공신인 사쓰마번의 사이고 다카모리는

불만도 달래고 조선이 서양 식민지가 되기 전에 먼저 손에 넣어야 한다며 정한론을 주장하다가 실각됩니다.

 

 

정한론자들은 조선이 서양의 식민지가 되면 조선인을 동원해 일본을 침략한다고 보았는데 이는 스페인이

아메리카를 침략할때 아즈텍의 속국들인 현지 군대와 함께 아즈텍 제국을 공격했고 그후 영국과

프랑스등은 인도를 공격할때도 먼저 점령한 나라들의 물자와 사람들을 징집해 무굴제국을를 침략합니다.

 

 

원나라는 고려를 손에 넣은후 고려인들에게서 식량을 공출받고 말을 길러 바치게 하며 또 고려인

들을 채찍질해 900척의 배를 건조시킨후..... 1274년 음력 10월 3일에 홀돈의 원나라군

25,000명에 김방경의 고려군 8,000명, 사공 7,000명 등 도합 4만 대군으로 일본을 침공했습니다.

 

 

1281년에도 동로군은 고려· 원 연합군으로 편성되어 총병력 4만명에 함선 9백척이니 그중에 원나라

병력은 3만명 고려가 1만명이었으며, 함선 900척은 역시 고려의 부담 이었고 중국 강남 지역

에서 차출된 강남군은 총병력이  10만명에 함선은 3,500척 이었으니..... 조선 다음에는 일본이라는?

 

 

한편 조선에서는 여섯 차례에 걸쳐 천주교도들을 박해하니 서양인 신부 16명과 만수천명의 조선인

천주교도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하자.... 분노한 프랑스는 1866년에 함대를 파견해

병인양요가 일어나는데... 프랑스는 식민지 베트남에서 반란이 일어나니 약탈만 하고는 철수 합니다.

 

 

그 1866년에 미국 상선 제너럴 셔먼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강압적으로 통상을 요구하다가 평안

감사 박규수에게 배가 화공을 당해 침몰하니..... 미국은 1871년에 군대를 보내 강화도를

점령했지만 소수의 병사로는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한 서울로 진격할수는 없는지라.... 철수하게 됩니다. 

 

 

정한론이 거부되자 사이고 다카모리는 2만명 사무라이로 반란을 일으키니 서남전쟁으로 4만명이

모였지만... 임진왜란때 조선에서 끌려온 울산 사람들이 쌓은 구마모토성을 함락하지 못하고

패하니 한숨 돌린 신정부는 조선 개항에 나서는데, 오쿠보 도시미치와 이토 히로부미는 1875

당시 일본은 청나라와 싸울 군사력이 안되는지라 "조선 침공을 시기상조" 로 보고 거부한 것 입니다.

 

 

메이지유신 이후 조선에 보내온 국서 (서계) 의 발신자가 쇼군에서 천황으로 바뀌었고 일본이 서구식

외교 관행을 따르기로 하면서, 주변국과의 외교 관계를 재정립하게 되니, 청나라의 경우에는

한창 서양 열강들과 아편전쟁을 겪으며 차차 개항을 해 나간 덕에..... 서양과 직접적으로

근대적 외교 관례에 맞춘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에, 일본과 큰 외교적 마찰을 겪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통상 수교를 거부하던 흥선대원군 집권기 조선이었으니, 부산에 있는 왜관에서 조선과 교역하던 쓰시마

도주를 통해 메이지 정부의 서계를 받아본 조선정부는 예전에 조선이 준 도서 (圖署) 가 아닌 새 도장

사용한 점과 천황, 황조등 중국이나 사용할수 있는 용어를 쓴 것에 불쾌해 하며 국서 접수 자체를 거부합니다.

 

1868년 일어난 사건은 국서 거부사건 (서계 거부사건) 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이후 일본은 다시 조약을 맺자고

제의했지만 흥선대원군은 거부했으니, 1872년 골이 깊어지다가 소요사태까지 일어나니 국교가 단절되기

까지 했으며 그전에  조선 통신사가 50년간 교류가 없었다는 점에서 근세 조일관계가 유명무실화 되었습니다.

 

 

또 당시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철저한 쇄국 정책으로 청 () 이외에 서양권 국가들과의 교류 및 개방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고 그 범위에는 일본도 포함되어 있으며, 이미 그 전에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를 겪은 양란 (洋亂) 이 일어난 이후, 흥선대원군을 필두로 쇄국 정책이 시행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서양에 문호 개방을 한 일본에게도 적개심과 불편함을 드러내었으니, 조선의 반응에 격분한

일본 내에서 정한론 (征韓論) 이 일시적으로 힘을 얻었으나, 1873

척화파인 흥선대원군과 정한론 강경파 (사이고 다카모리) 가 양국에서 비슷한 시기에 실각합니다.

 

 

흥선대원군의 실각 이후 메이지 정부는 다시 조선과의 외교를 재개할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품었으나 여전히

1875년 부산에서 열린 회담은 결렬되었으니, 조선 위정척사파들이 일본과 통상 협정을 극렬히 반대했으며

동래 부사는 일본 사신이 대례복 (메이지 정부의 공식 관복) 을 입고 성문 안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기도 합니다.

 

결국 무력으로 외교를 재개할수 밖에 없다고 판단한 일본 내부의 강경파들은 일부 각료들의 동의를

얻어 18759월 운요호 사건을 일으켰는데, 일본의 역사가들은 노구교 사건 처럼 해군 내부의

일부 강경파가 독단적으로 저지른 사건으로 보는 반면에......  한국의 학자들 중에는 행간의

맥락을 추정해 메이지 정부의 고위 각료들이 주도면밀하게 계획한 사건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운요호 사건은 정한론 논쟁으로 정한파가 실각한지 2년만에 벌어졌기에 운요호 사건 이전에 메이지 정부 내부

여론은 당연히 정한론에 반대하는 쪽이었지만 일본에는 운요호 사건의 전말이 "조선이 국제법을 준수하고

  있았던 운요호를 의도적으로 먼저 공격했다" 고 왜곡되어 전해지면서.... 일본 내에 강경론이 득세하게 됩니다.

 

뿐만 아니라 정한론에 반대하던 온건파들도 조선 진출은 지금 당장이 아니라 국력을 더 신장시킨

다음에 하자면서도 일단 조선 출병 자체는 동조하고 있었기에, 온건파들도 운요호 사건을

이용해 조선을 개항시키기로 결정했으니..... 이후 조일 관계는 돌이킬수 없는 선을 건너 버립니다.

 

 

1866년 프랑스 군함 7척이 강화도를 침범해  육전대 1천으로 강화읍성을 함락하고  1871년에는

미국의  군함 5척이 침범해 해병대 12백이 광성보를 점령했는데도 조선이 버틴건

페리제독때 도쿄나 왜구때 개성과는 달리 한양은 함대가 들어올수 없는 "내륙" 이었기 때문입니다!

 

단지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올라오는 세견선 길목이 막히게 되자 물가가 천정부지로 뛰어

고통받기는 했는데.... 그후 1875년 일본 운양호가 초지진과 영종진을 함락했을 때는

수도인 한양 까지 함대가 올라올수는 없지만, 대원군이 물러난 후라 개항 을 받아들입니다.

 

 

조선이 수교를 거부하자 일본은 결국 운양호를 보내는 데.... 1875821일 대포

2문을 장착하고  65명이 탄 250톤 운양호는 무단으로 조선 경계로 들어온지라

초지진에서 구식 대포를 발사하니...... 운양호는 포격으로 초지진 포대를 파괴합니다.

 

그후 북상한 운양호는 이번에는 조선군 이민덕등 400여명이 수비하는 영종진에 포격을 가한

후에 보트 2척으로 22명의 수병을 상륙시켜 뻘밭을 지나 산성으로 진격하니,

조선군은 전사자 35명에 포로 16명을 내고... 대포 35문과 화승총 130정을 뺏기고 도주합니다.

 

 

견고하고 험한 산성을 기어올라 성을 점령한 일본군 피해는 전사자나 중상자는 한명도 없고 경상자도 "해안에

상륙할때 뻘에서 발이 삐인 경상자 2" 이니.... 대포 35문에 화승총 200여자루로 견고한 성에서 수비한

조선군 400명이 일본군 단 한명에게도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으니 "군인" 이라고 불러도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포로 16 명을 남긴채 조선군 350명이 전투를 하는둥 마는둥 모두 도주한 가운데, 영종도에 상륙한 20여명

일본군은 민가까지 약탈과 강감을 자행한후 철수했지만 다음해 다시 나타나니.... 전쟁이 자신없는

조선 조정은 굴복해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체결 되는데 일본이 서양에 개항한지 20년 되는 해 입니다.

 

 

운양호 함장은 사쓰마(가고시마) 출신 해군소좌 이노우에 요시카 (井上良馨) 인데 공로를 인정받아 승승장구

하여 훗날 원수로 승진하며, 1876년 강화도조약 일본 대표는 사쓰마 출신 구로다 기요타카로 제1조에

조선은 자주독립국 이다이니, 그럼 조선은  더 이상 청나라 속국이 아니므로 누구든지 취할수 있다는 뜻이라?

 

 

조선 조정에서도 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해온 병인양요나 또는 1871년 미국이

역시 강화도를 침략해온 신미양요 때 일본의 로쥬(수상) 이이 나오스케

처럼..... 전쟁 대신에 개항과 개국을 주장한 인물이 있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역사에서 가정이란 없다지만 만약 1866년 그때 대원군이 완고하고 고지식한 유교 주자학에 찌든 우물안

개구리 같은 상태에서 돌연히 벗어나..... 국제 정세를 이해하는 개화된 인물이었다면 어찌되었을까요?

 

 

그리하여 대원군이 전쟁 대신에 서양등 신부 16명의 처형과 천주교도 1만여명의 사형에 사죄 및 배상

하고 서양과 수교한후 유교와 과거제를 과감히 버리고 천주교를 수용하며 또 청년 100명을

프랑스와 미국에 유학보내 서양문물을 받아들여 개혁과 부국강병을 했으면 망국을 피할수 있었을까요?

 

강화도 조약 (江華島條約) 1876227일 조선과 일본 제국 사이에 체결된 조약이니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조약으로 일본 측은 조약의 내용보다 조약 체결 자체를 우선하여 반정부 세력이 '정한론'

을 매개로 결집하는걸 막으려 했는데, 수호조약을 체결한 우호 국가를 징벌하자고 주장할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조약은 개항과 관련해 강제적이거나 일방적으로 불평등하지는 않지만 상호 평등한 조약이라고 하기도

어려우니, 난징조약과 같이 최혜국 대우, 협정 관세, 영사 재판권이 모두 포함된 불평등 조약

은  아니었으나.... 영사 재판권과 무관세는 규정했기 때문에 불완전한 불평등 조약이라 할수 있습니다.

 

일본은 운요호 사건을 핑계로 1876130일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보내 협상을 강요하는데,

일본에서는 정한론자도 조선 개혁론자도 모두 있었으니 운요호 사건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죄와 조선 영해의 자유항행, 강화 부근 지점의 개항 등을 조건으로 조선을 개국시키기로 결정 합니다.

 

 

1876년에 하코다테 전투에서 막부군의 항복을 받았던 구로다 기요타카를 전권대사, 이노우에 가오루를

부사 (副使) 로 보내나 일진 (日進맹춘(孟春) 3척의 군함으로 18761월 부산에

입항해 교섭이 안되면 전쟁을 예상하여 육군을 증가해서 보낼 것을 본국에 요청한 뒤에 강화도로 향합니다.

 

이에 조선 정부는 매우 긴장하여 시원임대신회의 (時原任大臣會議) 를  개최하고

대책을 토의한 뒤에  신헌 (申櫶) 을 접견대관, 윤자승 (尹滋承) 을 부관으로

임명하여 교섭에 대처하게 하여, 강화도를 회담 장소로 결정하고 정식 회담을 열었다.

 

 

쇄국정책과 조공무역등 사대주의에 찌든 조선은 근대무역 (통상) 에 대해 장님이었는데, 일본은 조선을

"자주 국가" 라고 명시하였으나 조청상민 수륙무역장정에서 청은 조선을 "속방 (屬邦)"

이라고 명시했고 조미수호통상조약 관세권이 설정되면서 일본도 더 이상 무관세를 고집할수 없었습니다.

 

187712월 공사 교환에 소극적이던 조선의 자세를 누그러뜨리기 위해 하나부사 요시모토가만국공법

성호지장 (星軺指掌)을 조선측에 기증하면서 공사 교환이 서구 조약체제 하에서

상식적으로 이루어지는 일임을 설명하였고 흥선대원군 일파와 유생들의 반대에도 박규수·

오경석 등의 주장과 청나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권고, 고종의 적극적인 개항 의사에 따라 개국을 결정합니다.

 

 

조선은 세계 대세로 볼때 개국을 해야만 할 객관적 조건이었으며, 일본 정부의 무력시위가 국내의

척화론 (斥和論) 보다 강력했고..... 쇄국을 하게 되면 민씨파의 실각과 흥선대원군의

득세를 초래하며, 청나라가 개국을 찬성한데다가 고종이 개항에 적극적이었던 점 때문이었습니다.

 

1관 조선국은 "자주 국가"  로서 일본국과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양국은 동등한 예의로

대해야  하고, 상대방의 권리를 침범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2관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뒤에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조선국

경성 (京城) 에 가서 직접 예조 판서 (禮曹判書) 를 만나 교제 사무를 토의하며 조선도 그리한다.

 

 

4관 조선국 부산 (釜山) 초량항 (草梁項) 에는 오래전에 일본 공관 (公館) 이 세워져 있어 두나라 백성의

통상 지구가 되었다. 종전의 관례와 세견선 (歲遣船) 등은 혁파하여 없애고 새로 세운 조관에 준하여

무역 사무를 처리한다또 부산과 원산 항구를 개항하여 일본국 인민이 오가면서 통상하도록 허가한다.

 

 

대원군이 실각한 9년 후인 1882년 임오군란 (壬午軍亂) 이 일어나는데, 훈련도감에서 해고된 구식 군인들의

13개월 동안 체불된 임금을 불과 1개월치만 주면서 그것도 민씨 정권의 선헤청 당상 민겸호가

절반은 착복하고 썩은 쌀에 모래와 겨를 섞어 주니 불만이 폭발하자 대원군이 이를 조종해 폭동으로 번집니다.

그날 저녁 대원군의 수하들과 병졸들이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니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등은

제물포항으로 도피했고 공사관은 불탔으며, 민씨 척족의 사병 신식군대 별기군과 충돌해 제압하고 별기군

병영 하도감 (下都監) 에서 일본인 교관 호리모토 레이조 (堀本禮造) 공병 소위등 일본인 열세명을 살해합니다.

 

 

민왕비는 궁녀복 차림으로 궐 뒷문으로 나가... 무예별감 홍계훈 등에 업혀 충주 장호원 (長湖院)

충주목사 민응식의 집으로 피신하는데 성공했는데, 반란군도 남녀가 유별한 시대에 남자 등에

업힌 여자를 홍계훈이 누이라고 말하니 설마 왕비 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해 통과시킨 것 입니다.

 

이때 난 중에 선혜청 당상 민겸호와 경기도 관찰사 김보현이 궁궐에서 발각돼 살해되자 조정은 놀라

수습책으로 죽은 민겸호등을 파직하고 대원군의 장자 이재면을 무위대장에 임명했으며

개화당이자 별기군 윤웅렬이 일본공사에게 정변을 알렸으나..... 이미 제물포로 피한 이후였습니다.

 

 

조정을 장악한 대원군은 고종에게 자책교지 (自責敎旨) 를 반포시켜 군란을 정당화하고,  5영의

복구와 통리기무아문의 폐지, 삼군부 설치를 발표하고 중앙 부서와 지방 관찰사 등 민씨

척족들을 파직하고 척화파를 임명했으며 도주한 민씨 중전을 사망했다며 국모 상() 을 공포합니다.

 

민왕비의 시신이 발견되지는 않았으니.... 관 안에 왕비가 입던 옷에다가 소지품과 흘린 머리카락 등을

넣어 장사를 지냈는데, 대원군은 이렇게 까지 한 이상 며느리인 민왕비가 다시 낯을 들고

나타나지는 못할거라 생각했지만, 민씨의 권력욕과 보복하겠다는 분노는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민씨와 민씨 일족은 청나라에 체류중이던 김윤식, 어윤중 등에게 급보를 보내 청에 원조를 요청하니, 주일

청국 공사 여서창이 '일본 병선이 조선으로 가니 중국 병선을 앞서 파견해야 한다' 는 내용을

본국에 타전함에 따라 북양대신 이홍장의 직무대리 장수성이 북양함대 제독 정여창에게 출동을 명령합니다.

 

장수성은 오장경에게 덩저우의 회군 3천명을 조선에 파병토록 지시했고 정여창이 북양함대

3(초용,위용, 양위) 에 병력 500명과 이홍장의 사신 마건충을 싣고 1차로

제물포에 도착했으며, 같은날 일본군 군함 4착과 대대 병력 300명이 제물포에 상륙했습니다.

 

 

청나라의 신속한 군사행동과 10배에 달하는 병력 차이로 인해 300명에 불과한 일본은 적극적

으로 자국민 보호나 난 진압 과정에 제 역할을 못했으니, 일본의 이노우에 가오루

외무경은 대원군의 쿠데타 정권을 인정하는 비밀 훈령을 작성해 하나부사 공사에게 보냅니다.

 

회군 대장 오장경이 정여창의 배를 타고 영선사 김윤식을 대동해 회군 3천명으로 남양만에 상륙해  한양에

입성한후 흥선 대원군을 붙잡아 톈진으로 보냈고, 왕십리와 이태원에 주둔하던 난 가담자들은 청국군의

공격을 받아 170여명이 체포되고 11명이 사형되니 이후 조선 정부와 일본 제국은 제물포조약을 체결합니다.

 

 

임오군란이 청군에 의해 진압되면서 대원군의 세력인 척화파가 물러나고 외척인 온건개화파

(사대당, 수구당) 가 정권을 잡아 청나라 양무운동 모델 근대화를 추진하게

됐으며...... 여기에 소수의 급진개화파 (개화당) 들이 근대화에 채찍을 가하는 형태가 됩니다.

 

결국 2년후 급진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으로 이어졌지만 3일 천하로 끝나니.... 정변 실패후

민씨 척족들이 조정을 완전히 장악해 궁궐은 사대당 일색이 되고 죽은

민겸호의 아들 민영환등 민씨 외척들은 1884년 해방영 (海防營) 을 통해 군권을 장악합니다.

 

 

청과 결탁한 민씨 정권이 정권 유지를 위해 청에 의존하면서 내정 간섭이 심화됐으니 원세개 군대가 상주하고

군사 고문을 보내 조선 군대를 감시하며, 마젠창 (馬建常) 과 묄렌도르프를 내정 및 재정 고문으로 파견해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며 청국 상인의 특권 및, 북양 대신과 조선왕을 동격으로 놓는등 종주권을 명문화 합니다.

 

임오군란 진압을 축하하는 과거에서 이완용과 서재필등이 급제했으며 청나라 와는, 조선공사는

주재국에 도착하면 청국공사를 찾아와 그의 안내로 외무성에 간다. 회의나 연회석상에서

조선 공사는 청국 공사의 밑에 자리한다. 조선공사는 사건이 있을때 반드시 청국공사와  미리

협의한다. 한마디로 "조선은 청나라의 식민지" 가 된 것인데, 일본과는 제물포조약을 체결합니다.

 

 

김홍집, 어윤중, 박정양, 김윤식, 이상재, 민양익 온건 개화파는 부국강병을 위해 문호를 개방하고 개혁정책을

실현하되, 위정척사파를 상대하기 위해 민씨 정권과 타협하고, 청나라에 사대외교를 계속하면서

청나라 양무운동 (洋務運動) 을 본따 점진적인 방법으로 힘을 키운뒤 청나라와 관계를 끊자는 입장이었습니다.

 

 

반면에 김옥균, 서재필, 홍영식,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 서광범, 윤웅렬등 급진 개화파는 청나라에 사대관계를

청산하고, 임오군란을 유발한 민씨 정권도 타도의 대상으로 규정하면서, 일본 메이지 유신을 본따 급속한

개혁을 주장했으니 수구파와 척신 처리 방법 및 청나라에 대한 사대교린을 언제 끝내느냐를 놓고 대립했습니다.

 

그 한해 전인 1881년 조선은 일본의 서구개화 문명을 배우겠다며 젊은 관료들이 참여한 신사유람단을 파견

하자 후쿠자와 유기치의 관심을 끌었으니 후쿠자와는 김옥균, 서재필, 윤치호, 유길준등 방일 조선

청년들에게 부국강병론과 신분제도와 문벌특권층의 타파를 역설하며 "조선을 개혁할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김옥균등이 후쿠자와 유기치를 찾아간 것은 그 전에 이미 후쿠자와가 쓴 문명의 개략책이

조선에 입수되면서 문명 개화론은 조선의 1880년대 개화사상에 큰영향을

끼쳤으니.... 그가 일본 문명개화의 주역이라는 것을 알고 찾아가 가르침을 받게 된 것입니다.

 

1882년 수신사 박영효는 도일하는 배에서 일본 주재 영국 영사가 국기가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또

본인 선장으로 부터 조언을 받아 8괘중 4괘를 생략한 태극기를 고안해 고베 여관 지붕에 게양합니다.

 

 

함경남도 병마절도사 윤웅렬의 부탁으로 후쿠자와는 윤치호를 도진샤로 진학하도록

주선했으며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유길준, 윤치호등은

후쿠자와 유기치를 만나면서... 높은 식견에 탄복하고 그의 사상에 매료되어 버립니다.

 

 

일본 화폐 만엔권에 나오는 후쿠자와는 이들의 개혁정신을 높이 평가하고는 조선은 일본의 메이지유신

직전의 상황과 흡사하니 지금 무력으로 조선에서 개혁을 실시한다면 자유주의적인 영세 중립국

으로 발돋움할수 있다고 보아 조선 개혁파 청년들을 지원하였으니.... "갑신정변의 실제 설계자" 입니다!

 

 

 

1884124일 우정국(郵政局) 개국 축하연회에서 민영익이 서재창 휘하 병사에게 얼굴과 목이 칼에 찔리니

묄렌도르프가 부축해서 달아났고 김옥균을 비롯 개화파는 창덕궁으로 들어갔는데 대궐에서 화약이 터지자

청군이 쳐들어왔다고 거짓 보고하면서 고종을 경우궁(景祐宮) 으로 피신시키고 일본공사에 보호를 요청합니다.

 

 

김옥균은 고종에 "일본공사는 와서 나를 호위하라" (日本公使來護我) 고 쓴 친서를 요구하니 고종은 흰 헝겊에

써서 전달했고, 일본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 (竹添進一郞) 가 이끄는 일본영사관 1개 중대와 일본경찰

1개 중대 200명이 출동하였는데 한규직, 이조연, 민태호, 민영목, 조영하, 유재현등 수구파 인물들이 살해당합니다.

 

 

창덕궁에는 급진 개화파가 동원한 군사 50명과 외곽에 일본군 200명이 수비하는

가운데 126일  민씨 왕비의 요청을 받은 원세개의 청군 1,500명과

조선군 100명등 1,600명은 돈화문과 선인문을 공격하면서 일본군과 전투가 벌어집니다.

 

외곽에는 박영효가 불러온 조선군 친군영과 전후영 수백명은 청군의 공격으로 수십명의

사상자가 나자 겁에 질려 모두 도주해버렸으며, 5백명을 약속했던 함경남도

병마사 윤웅렬 역시 1백 명도 안되는 남병영 군사를 이끌고 왔으나 밀리자 후퇴합니다.

 

 

청나라군이 궁궐로 진입하자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군대를 철수해 버렸으니 이제 청나라 군

1,500명과 싸울 개화파의 군사는 개화당 50명 장사와 서재필의 사관생도

100명등 150명에 불과한지라 전투 의욕을 잃고 패퇴하니 개화파 정권은 3일천하로 끝납니다.

 

홍영식과 박영교는 고종을 호위하다가 죽었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정난교,

신응희 유혁로, 이규완은 창덕궁 북문으로 빠져나가 변복하고

인천주재 일본 영사관 직원 고바야시의 주선으로 제일은행 지점장 기노시타의 집에 은신합니다.

 

 

묄렌도르프가 추격대를 이끌고 오자, 기노시타는 이를 알렸고 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변수

등은 일본 옷으로 갈아입고 인천 제물포항에 정박중이던 일본 선박 지도세마루호에 잠입합니다.

 

추격한 묄렌도르프는 승선하려던 일본 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에게 숨은 자들을 내놓으라고 하자 다케조에는

김옥균 일행에 배에서 내릴 것을 독촉하니, 분노한 지도세마루 (千歲丸) 호 일본인 선장 쓰지 가쓰자부로

(辻勝三郞) 는 비난하면서 내줄수 없음을 천명하고 묄렌도르프에게는 그런 사람들은 온 적이 없다고 말합니다.

 

묄렌도르프 역시 조선의 외교고문이므로 일본 선박은 함부로 수색할수 없어 퇴각했으니 이로서 김옥균,

박영효 외 7인은 쓰지 선장의 기지와 용단 탓에 기적적으로 목숨을 구해서 일본으로 망명했습니다.

 

 

조선은 서재창·이희정·김봉균·신중모·이창규·이윤상·오창모·차홍식·남흥철·고흥종·최영식을 처형했고 개화파는

민비 척신 세력에 의해 색출되어 수십명이 피살되는데, 김옥균의 처와 딸에 서재필의 아버지 서광효 내외와

형은 음독 자결했으며 박영효 어머니는 사형당했고 아버지 박원양은 감옥에서 굶어죽는등 6백명이 죽었습니다.

 

1884년 우정국 낙성식장 갑신정변의 실패는 정변 기획자인 후쿠자와 유기치의 기대를 저버렸으니

그는 낙담하게 되지만, 1884년 갑신정변 실패후 주역들을 일본으로 탈출시키고

거처를 제공했으며 심지어 김옥균의 딸을 낳은 일본 여인 마츠노 나카도 그의 하녀였다고 합니다.

 

갑신정변때 후쿠자와 유기치는 프랑스 공사 함대에 일본 자유당의 민병대를 보내 김옥균 일파를 지원하려

했지만 이토 히로부미의 반대로 무산되었으며, 후일 독립신문 을 발간하게 되는 윤치호와에게 언론

경영에 대한 조언해 주었고, 유길준 에게는문자지교라는 그의 저술을 국한문 혼용으로 번역하게 합니다.

 

 

독립신문 은 18964월 미국에서 귀국한 서재필이 발간했으나 수구파의 미움을 받아....

2년후 18985월 미국으로 돌아가자 윤치호가 이어받아 일간으로 승격시킨 것입니다.

 

윤치호는 미국 에모리 대학교에서 보관중인 애국가 원본에서 보듯이 1907년에 애국가를 작사하고

다음해  번역한 찬미가 14장에도 애국가를 실었는데.... 하지만 1930년대 이후는

최남선, 이광수등 조선의 지식인들과 더불어 친일파로 변절했으니 이를 어쩌랴!

19193.1 기미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중 최소한 과반수 이상은 변절했으니 시대의 아픔일런지?

 

후쿠자와는 1884년 갑신정변이 실패후 개화파 인사들에 대한 혹독한 형벌과 연좌제를 보고 비분강개해

당일은 식음을 전폐하였다고 하며, 그는 아까운 인재들을 잃었다며 대성통곡하였고 조선독립당

의  처형이라는 글을 신문에 발표하는 한편 조선의 야만적인 형벌을 비인도적이라며 규탄하였습니다.

 

 

1885316일 후쿠자와는 갑신정변에 가담한 일부 인사들과 그 유가족의 비참한 처우를

전해듣고 분개해서는 시사신보에 탈아론을 발표하였으며..... 8월에는 "조선 인민을

위하여 조선 왕국의 멸망을 기원한다“  며 조선의 수구파 정부를 심하게 규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민의 생명과 재산도 지켜주지 못하고 독립국가의 자존심도 지켜주지 않는 그런 나라는

오히려 망해 버리는 것이 인민을 구제하는 길이다." 라며.... 조선 정부를 강력 비판

하였으며 나중에 조선이 내부 부패로 멸망하게 되자, 그는 조선의 멸망 은 그 나라의 인민을

위해서 축하할 일이다 ( 朝鮮人民のために 其国滅亡) 라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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