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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길흉

[스크랩] 시마바라 3 - 시마바라에 도착해 시마바라성을 구경하다!

작성자황룡|작성시간26.06.14|조회수0 목록 댓글 0

 

시마바라 3 - 운젠 온천에서 시마바라에 도착해서 시마바라성을 구경하다!

 

 

2025128일 아마쿠사 오니이케항 (Onike Port 鬼池港) 에서 페리를 타고 바다 건너 나가사키현

시마바라반도 구치노쓰항 (口之津港) 에 상륙해 버스를 타고 오바마쵸 (小濱町) 마을에 도착합니다.

 

 

온천 마을을 구경하고는 버스를 타고 산을 올라가 운젠 온센 ( 雲仙 溫泉 ) 에 도착해 호텔 운젠

후쿠다야 雲仙福田屋 / 山照別邸에 체크인후 대중탕에서 온천욕을 하고는 잡니다.

 

 

2025129일 아침에 대중탕을 찾아 온천욕을 한후 야외에 있는 노천탕까지 구경하고는 체크아웃

후에 언덕을 올라 소지옥 산책로에서 젠지고쿠 (地獄 巡禮 지옥 순례) 를 걷고 오바마에서 출발한

버스를 타니 운젠온천에 선후 산을 내려가 구마모토로 가는 시마바라항을 지나 시마바라역에 도착합니다.

 

 

구마모토에서 시마바라로 오자면 산코버스 (産交 バス : 2번이나 서 7, 49030) 를 타고

구마모토항 (熊本港) 에 도착해 오션애로우 1,500(30) 1110(6)

또는 규쇼페리 九商 プェリ- 1,18010, 11(1시간, 10) 를 타면 시마바라에 도착합니다.

 

 

기차역 코인라카에 배낭을 넣고는 나가사키로 가는 기차 시간표를 살펴 보는데.... 역 안의 사무실에 있던

젊은 남자 직원이 메모지와 볼펜을 들고 달려 나와서는 도와 주겠다며 어디로 가려느냐고 묻습니다.

 

 

조금 당황스럽지만 일본에서는 흔한 경우라, 우린 나가사키로 가려고 하는데 그 전에 시마바라성

을 보아야 하니 두시간 후에나 출발하겠다고 말하니 그럼 그때 자기에게

문의해 달라고 신신 부탁을 하는데..... 여긴 작은 사철 역이라 이코카 패스는 사용할수 없나 봅니다.

 

 

그러고는 역을 등지고 도로를 걸어서 시마바라 성으로 가는데, 여긴 상상 이상으로 엄청 큰 성이라 쉽게

도착했지만 문제는 입구가 반대편이라 한참 걸어야 하는데.... 1학년으로 남녀 고교생들

수십명이 이 겨울철에 반바지와 러닝 차림으로 성 주변을 힘겹게 달리는데 아마도 체육시간인가 봅니다?

 

 

여기 시마바라 성이 어마어마하게 큰지라 이걸 한바퀴만 돌려고 해도 30분 이상은 달려야

하지 싶은데..... 일본은 우리 한국과는 달리 "생활체육" 이라 모두들 체육

활동을 열심히 하고 또 엄마들은 한겨울에도 아이에게 반바지를 입히는등 강하게 키웁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중 농구부가 23개 학교에 선수는 184명인데 비해 일본은 여중 농구부가 5,649

학교이고 등록 선수는 무려 75,423명 이며, 고등학교  야구부는 한국이 100개가

안되는데 비해...... 일본은 4,030개 이고축구는 한국 145개에 비해 일본은 4,174개 에 달합니다.

 

 

한국은 소위 "엘리트 체육" 이니 한 학교에 운동부는 하나 아니면 2개에 불과하지만

일본은 한 학교에 운동부가 서른개 가까이 되니.... 오후 330분에

수업이 끝나면,  일부 학생들은 하교해서 영어등 여러 학원에 가거나 집으로 갑니다.

 

 

하지만 70% 넘는 학생들은 학교에서 3시 반 부터 두세시간 방과후 활동을 하니 음악

이나 미술에 다도와 꽃꽂이등 여러 종류가  있지만...... 전체의 60~ 70%

정도는 서른개 가까운 운동부에서 연습을 하니 그럼 전교생의 절반은 선수들인 것입니다.

 

 

한국에서 내가 다닌 고교는 축구부와 야구부 2개가 있었는데,  3월 달에는 1교시 까지 수업을

하고 교실을 나가버리더니..... 4월달 들어 시합이 있으면 담임선생님과

아침 조례 정도만 하고 나가니 그럼 수업을 전폐하고 운동에만 올인하는 "운동기계" 였습니다.

 

 

그러니 고교 시절에 벌써 프로 선수나 다름없이 수업은 안듣고 운동에만 몰두한 한국 대표 고교팀이,

오후 3시 반 까지 수업을 하고 방과후 활동으로 2~3시간 정도 연습한 아마추어인 일본 고교팀에

이기면.... 대한민국 국민들이 열렬히 환호하며 쪽바리 왜놈들을 꺾었다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했습니다!

 

 

그러니 한국 선수들이 비행기를 타고 외국에 나갈 때 입국신고서도 작성하지 못하니 기자들이 대신해줄

정도였는데.... 십수년 전 부터는 한국 학생들도 오전 수업 정도는 한다지만 수업을 100% 하는

일본 학생들과는 다르며, 일본 학생들이 체육시간에 땀을 흘릴 때 한국에서는 대학 입시준비에 바쁩니다?

 

 

그러고는 거대한 해자를 따라 반바퀴를 돌아서 드디어 1624년에 완공되었다는 눈 처럼 흰 시마바라조

島原城(도원성) 로 들어가서는..... 텐슈가쿠 (천수각) 로 입장하니 입장료는 700엔을 받습니다.

중국은 60세는 반액이고 65세 이상은 무료이며, 유럽도 시니어 할인이 있지만 일본은 그런게 없습니다. 

 

 

시마바라조 島原城(도원성) 의 성주 아리마 나오즈미는 아버지인 아리마 하루노부가 키리시탄 및 서양 세력과

얽혀 처형된 이후 영지 대부분을 차지한 키리시탄 영민, 가신들에 대한 악감정이 컸으니 예수회

사료에 1613년 나오즈미가 세례명을 받은 자신의 두 이복동생들을 8세와 6세일때 살해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후 1637년 말의 시마바라의 난에서 아리마 나오즈미는 토벌군으로 참전해 과거 자신의 영민과 가신

이었던 반군들을 마음껏 죽이고 다니게 되는데..... 그 전에 아리마씨가 스스로

원해 전봉된후 새로 시마바라 영주로 들어온 마츠쿠라 가문의 마츠쿠라 시게마사가 축성을 지시합니다.

 

 

1618년에 짓기 시작하여 1624년에 완공되니 기존의 히노에성이 작다는 이유였지만 영지 규모와 생산력

수준에  맞지 않는 엄청난 거성을 지어 버렸는데..... 지역 장악과 과시욕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시마바라 반도 남부 히노에성과 하라성을 버리고 북부로 옮겨가버린 결과 시마바라의 난 당시 남부 주민들이

적극적으로 반란에 가담했고..... 인접 아마쿠사섬의 반군까지 합세해 하라성에서 농성을 벌이게 됩니다.

 

 

당시 시마바라 번의 고쿠다카는 4만 석이었는데 이것 조차도 현실적인 수확량 보다 과하게

책정됐다고  하는데..... 그런데 시마바라 성의 규모와 징수 정도는 최소 10만석,

오죽하면 안내 페이지에서 조차 4만석 다이묘에게는 과분한 성 이었다고 적혀 있습니다.

 

 

이를 보여주는 것이 33M 높이의 부흥 천수로, 일본의 현존하는 천수각 중에 오사카성과 나고야성에 이어

세번째로..... 구마모토성과 히메지성 보다 높으니 동서 360m, 남북 1,260m 에 성벽은 3,900m

였는데, 도저히 변방 군소 영지의 성이라고 볼수 없으니 52만석 가토 기요마사의 구마모토성과 비슷합니다.

 

 

2대 영주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영민을 가혹하게 착취하고 고문해 기독교 탄압과 함께

시마바라의 난의 주 원인이 되었는데.... 무리한 축성으로 많은 돈이 소모되면서

수탈이 더욱 심해졌으며, 키리시탄 탄압 과정에서 운젠 지옥 고문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카츠이에는 기존의 고문에다가 미노오도리 라는 도롱이 옷을 입게 한뒤 불을 지르는 고문을  추가했으니,

일본 역사소설가 시바 료타로는 이들의 행태를 두고 '일본사에서 마츠쿠라 카츠이에 만큼 꺼려야 할

사람은 적다.' 라고 평했습니다. (원문: 日本史松倉重政という人物ほどむべき存在ない)

 

 

시마바라의 난 당시에는 영주군의 주둔지였고 이후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잘못된 통치로 반란의

원인을 제공했다는 이유로 에도 막부에 의해 가이에키 당하고는..... 에도로

끌려가 참수당했으며 메이지 유신 전까지 도쿠가와의 방계인 마츠다이라 가문에 통치를 맡깁니다.

 

 

카츠이에는 도쿠가와 막부시대에 참수된 유일한 다이묘로, 에도 시대의 다이묘는 죽을 죄를 저지르더라도

명예를 고려해 할복 명령이 내려졌으니.... 막부는 카츠이에에게 매우 무거운 형벌을

내린 것인데, 보신 전쟁 전까지 최대 규모의 반란이었고 원인이 상상 이상의 폭정과 비리 때문이었습니다.

 

 

똑같이 반란이 일어난 곳이지만 아마쿠사의 영주는 석고만 깎였는데 그는 폭정을 저지르지 않았고

키리시탄 박해는 이전부터도 행해 온 일이라 문제될건 없었기 때문이며, 그럼에도 석고가

깎인건 시마바라의 난이 수만 단위의 대규모 반란이라 책임을 지우지 않을수 없었기 때문으로 봅니다.

 

 

1874년의 폐성령으로 철거되고 학교와 논밭 등이 들어섰다가 1960년대부터 단계적으로 복원

되었는데 대부분의 복원한 성이 그렇듯 과거와 비교하면 규모나 건물 수에서 꽤 차이가

많으니, 다만 규모가 줄어들었어도 원본이 워낙 컸던데다가 시골이다 보니 실물은 압도적 입니다.

 

 

시마바라 철도선의 시마바라역을 통해 갈수 있는데 역 밖으로 나오면 성이 보이지만 입구는 반대편에

있기 때문에 둘러 가야 하며, 해자는 나무, , 이끼 등이 무성하게 자라있고 일부

구간에는 물이 고여 있는데, 성 주변에는 무가 저택 거리와 수로가 형성되어 있어 둘러보면 좋습니다.

 

 

현재는 성 1층에 기독교, 카쿠레키리시탄의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한국어가

안내판이나  전시물에 쓰여 있어 비교적 쉽게 내용을 파악할 수 있는데.....

여기뿐만 아니라 시마바라 반도에 전반적으로 한국어 표기가 많이 쓰여 있는 편입니다.

 

 

나가사키현의 둘뿐인 일본 100명성이며..... 다른 하나는 히라도시의 히라도성인데, 100명성 중 대다수가

국가 사적, 하다못해 현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마바라성은 시 사적에 불과하며

히라도성은 그조차도 해당되지 않는데..... 오늘 보니 드디어 사적으로 지정되었다는 현수막이 보입니다!

 

 

일본의 100명성 중에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지 않은 곳과 시 사적인 곳은 각각 6곳에 불

과하였으니..... 때문에 성의 규모, 역사적 중요도, 인지도 등을

고려하면 다소 의문인 부분이었는데, 12월에서 1월 시미바라 환타지아 축제가 열립니다.

 

 

시 남부에 수무천 (水無川) 이라는 하천이 있으니 물이 흐르지 않는 특징이 있는데, 이는 1990년대의

운젠 분화 이후 분화 재발시 화쇄류, 토석류 등에 대비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형성된

곳이기 때문이며 산에서부터 아리아케해까지 이어지는 큰 규모를 자랑하며 마을을 갈라 놓았습니다.

 

 

시마바라성을 중심으로 무사 저택, 시마바라 용수관, 시메이소가 유명하고 물의 도시라는

별명이 있는데....... 곳곳에 크고 작은 수로와 족욕탕이 형성되어

있으며 깨끗한 수질을 자랑하고 잉어를 풀어놓아 헤엄치는 모습을 쉽게 구경할수 있습니다.

 

 

혼코지 절 안에 마치다이라 가문의 묘지와 16 나한굴이 있는데 특히 시마바라성에서 이축된 도키와고텐

(常般御展) 은 도키와 자료관으로 이용되고 잇으며 문헌과 유물을 전시하고 있으며,

남부에는 운젠 재해기념관이 있는데..... 운젠 분화 당시 화산재에 매몰된 지역 일부를 보존해 놓았습니다.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음식으로는 건더기 (장어, 어묵, 연근 등) 가 풍성하게 들어간 일본식 찹쌀 떡국

'구조니' 가 있으니.... 기원은 시마바라의 난 당시 농성하던 반군 쪽이 만들어 먹은 것이라고 합니다.

 

 

일본식 전통 떡국인 조니와 흡사하나 건더기의 구성에 차이가 있는데, 시내에 식당이라 할 곳도 그닥 없어

성 근처의 구조니 가게에서 다들 모이게 되어 있으며 그 밖에 유명한 건 시마바라 소면이 있습니다.

 

 

이 글을 올리기 며칠 전에 동아일보 도쿄 특파원 황인찬 기자는 동아일보에

“ ‘위안부 사죄 담화고노 광방장고한 별세 라는 기사를 올렸습니다.

 

 

19938월 일제강점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과한 고노 담화’ 

발표했던 고노 요헤이 (河野洋平) 당시 관방장관 겸

중의원(하원) 의장이 8일 별세했다고 아사히신문 등이 10일 보도했다. 향년 89.

 

 

고노 담화는 위안부 모집과 운용에 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는 점을 인정한 일본 정부의 첫 담화다.

고노  전 장관은 당시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의 이송에 관해서 옛 일본군이 직접 또는 간접적

으로 관여했다 (위안부의) 이송, 관리 등도 감언, 강압에 의하는등 대체로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행해졌다

 

 

일본군의 개입과 강제성을 인정했다. 특히 종군위안부로서 많은 고통을 겪고 몸과 마음에 치유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모든 분에 대해 마음으로부터 사과와 반성의 뜻을 밝힌다”  고 강조했다.

 

 

2년 후인 1995년 무라야마 도미이치 (村山富市당시 일본 총리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식민 지배와 주변국 침략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담은  무라야마 담화

를 총리 명의로 발표했다. 고노 담화가 무라야마 담화의 발표에도 기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고노 전 장관은 담화 발표 때 미야자와 기이치 (宮澤内閣) 당시 총리가 아닌 본인이 발표해 담화

무게감이 떨어진다는 일각의 지적을 일축했다. 그는 2023년 공개된 구술 기록

에서  정부 대변인인 관방장관이 공식 기자회견에서 발언했다면 그것은 분명한  내각의

이라고 강조했다.  ‘미야자와 전 총리의 승낙이 있었느냐’  는 질문에도 그렇다”  고 답했다.

 

 

고노 전 장관은 2009년 아사히신문 인터뷰에서도 “(과거 일본이) 큰 전쟁을 치르며 국내외에서

수많은 인명을 앗아갔고, 식민지 지배로 굴욕을 안겼으니, 이 문제를 마무리 짓고

아시아의 신뢰를 얻는 게 일본의 국익에 부합한다며 일본의 진정성 있는 과거사 사과를 촉구했다.

 

 

고노 전 장관은 1937년 도쿄 인근 가나가와현의 정치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부친 고노

이치로 (河野一郞) 는 농림상, 건설상, 중의원 등을 지냈다.

1967년 중의원 선거에서 부친의 지역구를 물려 받아 첫 당선됐고, 14선을 했다.

 

 

2003~2009년 중의원 의장을 지낸 후 은퇴했다. 최근에는 일본의 대 () 중국 경제·

무역 교류를 지원하는 민간 단체인   일본국제무역촉진협회

회장을 맡으며 경색된 중일 관계 해결의 실마리를 찾기 위한 방중을 타진하기도 했다.

 

 

고노 전 장관의 장남 고노 다로 (河野太郎) 중의원 의원은 외상, 방위상디지털 담당상 등을

지낸 11선의 정치인이다. 일본의 초당파 의원 모임 일한의원연맹에 소속된 지한파 인사다.

 

 

다카이치 사나에 (高市早苗) 총리는 10X 역사 문제를 진지하게 마주하며

대화와 이해를 중시한 자세는, 우리나라 평화 외교의 초석으로 기억

되어야 할 것이라며 고인을 애도했다.  나의홈페이지 : cafe.daum.net/baik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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