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5 - 다리우스 1세 그리스를 침공하여 마라톤 전투에서 패하다!
페르시아 경제가 빠르게 성장할수 있었던 요인들 중 하나에는 "왕의 길" 이라고 불리는
교역로가 있었으니.... 육상에는 왕의 길이 있었다면 해상에는
그리스의 폴리스들에 맞서 당시 지중해 무역을 주름잡던 페니키아 상인들이 있었습니다.
페르시아가 세워지기 이전 부터 지중해 무역을 주름잡던 노련한 상인들이었던지라 페니키아 대상단
들이 활동했는데, 팔레스타인의 특산품은 렌틸콩, 머스타드 같은 주식이었고 바빌로니아는
밀, 참깨, 사과, 꿀, 대추야자 등을 재배했으며... 시리아나 아르메니아는 포도주가 특산품이었습니다.
다리우스 1세는 세수를 20구역으로 나누니 1구역은 이오니아, 2구역은 리디아, 3구역은 트라키아와 아나톨리아
북서부, 4구역은 킬리키아, 5구역은 아시리아, 6구역은 이집트, 7구역은 간다라, 8구역은 수사, 9구역은
바빌로니아를 포함 메소포타미아, 10구역은 엑바타나와 메디아, 11구역은 코카서스, 12구역은 박트리아 입니다.
13구역은 아르메니아, 14구역은 이란 서부의 사르가티아 지방, 15구역은 사카에와 카스피 해 지역, 16구역은
파르티아, 17구역은 발루치스탄, 18구역은 이란 북부, 19구역은 히타이트등 지중해, 20구역은 인더스강
유역이었는데, 페르시아인의 수도 파르스 지방은 세금을 걷는 곳이 아니라 거둬들인 세금이 모이는 곳 입니다.
이렇게 총 20개 지방에서 막대한 세금을 걷어들였지만 가장 부유한 지방은 인더스 강
유역이었으니.... 다리우스 1세가 정복하면서 페르시아에 편입된 영토로,
인더스에서 거둔 세금이 제국 전체 세수의 32 % 에 달할 정도로 압도적 이었습니다?
제국에서 두번째로 부유한 구역이 바빌론을 포함한 메소포타미인데 여기 세금은 전체 세수의 9 % 정도니
인더스강 유역에서 거두는 세금의 3분의 1도 안 됐다는 소리로.... 새삼 인도의 부가 놀랍습니다?
인더스에서 거둔 세금은 1년에 총 360 에우보이아 달란트의 금가루로, 1 에우보이아 달란트가
26kg 이니 매년 9,360kg 에 달하는 금을 인도에서 쓸어갔다는 이야기인데....
이외에도 은과 귀중한 보석들, 거기에 지역의 특산물들 까지 걷으면서 엄청난 수입을 올렸습니다.
다리우스 1세 시대에 페르시아는 처음으로 '다릭' 이라는 금화와 은화를 발행했는데, 금화는
오직 황제만이 발행할 수 있었고 은화는 총독과 장군들도 발행이 가능했는데, 화폐가
도입되면서 페르시아 경제는 이전보다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으니 초기적인
형태의 은행들이 등장했고 직물, 카펫, 금은보화등 수많은 물품들이 제국 곳곳으로 쏟아졌습니다.
다릭 금화의 도입은 세금을 걷는걸 더 쉽게 만들어주기도 했고 종교적으로 보면 조로아스터교를
중심으로 한 관용정책을 폈는데..... 다리우스 1세는 독실한 아후라 마즈다의 신자였고
죽을 때 까지 조로아스터교 최고 대신관직을 유지했지만 타 종교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특히 유대인들의 예루살렘 성전 보수작업에 재정 지원을 계속하기도 했고, 엘람의 신관들을 황궁
으로 초청하거나 이집트의 신 아문에게 바치는 신전들을 짓기도 했으니 그의 노력으로
이후의 샤한샤들은 풍족하고 안정된 제국을 물려받아.... 별 노력 없이도 태평성대를 유지했습니다.
다리우스 1세가 감행한 수많은 원정들 중에 가장 잘 알려졌고 역사적인 의미도 큰 원정이
그리스 침공인데..... 이미 페르시아는 기원전 513년에 다뉴브강을 건너 동유럽
일대까지 진출했고, 트라키아 지방까지도 진출하는 등 유럽에 손길을 뻗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의 폴리스들과 국경을 접하게 되면서 충돌은 피할수 없는 수순이었으니.... 직접적인 전쟁
의 계기는 페르시아에 속해있던 이오니아 지방의 반란이었는데, 당시 소아시아의
해안가인 이오니아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은 키루스 2세 대왕 시절에 이미
페르시아에 복속되었는데, 이 도시들이 반란을 일으킬때 아테네가 뒤에서 지원해줬기 때문입니다.
이오니아 반란의 발단은 철학가 탈레스의 고향이기도 한 밀레투스에서 일어났으니, 당시 밀레투스는 이오니아
지방의 사트라프 아르타페르네스와 그리스인 참주 아리스타고라스가 함께 다스리고 있었는데 불화가
일어났고.... 아리스타고라스가 참주에서 퇴위한후 민주정을 선포해 버리면서 페르시아에 반기를 든 것입니다.
아리스타고라스는 페르시아 진압군을 두려워 해서 그리스 본토에 구원군을 요청하는데,
도망간 전 참주 히피아스를 페르시아가 받아준후, 페르시아가 히피아스의 복위와
민주정 철폐를 요구하면서...... 아테테는 이미 페르시아의 적으로 돌아선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던 와중에 아리스타고라스가 페르시아의 압제를 끊고 민주정을 선포하겠다고
하니 얼씨구나 한 아테네 시민들이 밀레투스에 대한 지원을 결의한
것이며 그 외에도 상인 도시 에레트리아가 아테네와 함께 밀레투스를 도왔습니다.
아테네는 30척 함대를 파견해 페르시아를 공격해 사르디스 일부를 불태우는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얼마 못가 페르시아 기병대의 압도적인 물량에 쫒겨났고,
기원전 494년 라데 전투에서 이오니아 함대가 대패하며 반란은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결과적으로 아테네의 밀레투스 지원은 완벽한 패착이었으니 당시 최강대국 페르시아에 완전히 눈 밖에
나버렸으며 성과도 제대로 거두지 못했는데..... 순순히 복속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던
그리스 폴리스들을 눈엣가시로 여기던 다리우스 1세는 이를 빌미삼아 그리스를 침공하기로 결심합니다.
이오니아 반란이 진압된 2년후 기원전 492년 다리우스 1세는 양자 마르도니우스를 시켜 아테네와 에레트리아
를 단죄하도록 시켰으니, 마르도니우스는 대함대를 이끌고 킬리키아에서 출발해 이오니아해를 따라
올라가면서 반란을 일으켰던 이오니아 식민 도시들에 민주정을 구성하도록 허락해주며 민심을 추슬렀습니다.
준비를 끝마친 마르도니우스는 알렉산드로스 1세가 다스리던 마케도니아 왕국을 봉신국으로 삼는데도
성공했는데, 순조로웠던 것도 잠시 테살로니키 인근에 정박하던 도중 아토스산에서 폭풍을 맞아
해군이 궤멸당했고, 트라키아인들에게 기습당하면서 총사령관 마르도니우스도 상처를 입고 후퇴했습니다.
시험삼아 보낸 마르도니우스가 대패하자 다리우스 1세는 외교적 해결법을 찾으려 시도했으니 그는 모든
그리스 폴리스들에 사신을 보내 '흙과 물' 을 충성의 맹세로 바치라고 요구했는데, 조로아스터
신앙에서 흙과 물은 모든 것의 원천이었기 때문에...... 이는 페르시아인에 완벽한 복종을 의미 했습니다.
대부분의 도시들은 막강한 페르시아에 겁먹고 흙과 물을 바쳤지만 오직 아테네와 스파르타만은
예외였으니, 사절을 물리친 방법도 도시의 특성이 드러났는데, 아테네는 민주정의
근본 답게 페르시아 사절을 재판에 세워 죽였고 스파르타는 사절을 우물 속에 처넣어버렸습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공동으로 페르시아에 맞서 싸울 것을 다짐했으나 스파르타는 내분으로 클레오메네스
왕이 감옥에 갇히는등 전쟁을 준비할 형편이 못됐으니 다리우스는 이때다 싶어 바로 대군을 일으켰고,
결국 아테네는 내분이 일어난 스파르타의 도움도 못받은 채 홀로 페르시아의 분노를 감당할 처지에 놓입니다.
다리우스는 기원전 490년에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를 응징하기 위해 대군을 파병했으니
군사령관은 메디아 출신의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가 맡았는데,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함대가 거느린 삼단 노선 트리에레스의 수만 무려 600여척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후대의 플루타르크는 30만명, 플라톤은 50만명까지도 추정했지만 현대 학계에서는 대략
2만 5천명 정도로 보고 있는데, 어쨌든 몇 천명만 됐어도 상당한 군사력이었던
고대 세계에서...... 당시 페르시아 원정군이 엄청난 대군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습니다.
페르시아 군사력의 핵심이던 기병은 1,000명에서 3,000명 정도 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 원정군이 수많은 민족들로 이루어진 혼성 군대라고 썼으니,
온갖 지방에서 사람들을 끌어모아 왔으니.... 군장은 물론이요 군복도 통일되지 않았습니다.
페르시아 대군은 수도 수사에 모인후 남부 해안가로 향했고 킬리키아에서 출항한 페르시아 군대는 로도스,
사모스, 낙소스 섬 등을 거치면서 그리스계 주민들을 노예로 삼으며 거침없이 전진했으며 또한
그리스인들의 성지였던 델로스 섬에도 들러 아폴로 신전에 300 달란트의 향유를 태워 승리를 기원했습니다.
그리스 본토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의 첫 목적지는 아테네와 함께 최대 적국들 중 하나인
에레트리아 였으니 급작스런 대군에 놀라 우왕좌왕하다가 상륙을 저지하지
못하고는 공성을 당했고, 결국 몇달 후 내부에서 배신자가 나오면서 맥없이 함락당합니다.
에레트리아를 점령한 페르시아 군대는 신전과 도시를 약탈한 다음 도시를 깔끔하게 불태웠는데
에레트리아가 떨어지자....... 이제 페르시아 군대의 남은 목표는 바로 아테네 였습니다.
에레트리아 약탈을 마친 페르시아 함대는 남쪽 아티카 해변으로 내려가 아테네에서 25km 떨어진
마라톤만에 상륙했으니, 아테네는 전령 페이디피데스를 보내 스파르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스파르타는 카르네이아 제전과 반란 진압으로 사정이 바빠 도와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아테네는 인근 도시 플라타이아이의 도움만을 받아 페르시아 대군과의 일전을 준비했고, 결국 기원전
490년 9월 12일 마라톤 평원에서 대격돌했는데, 그리스군은 막강한 팔랑크스 전술을 이용해 가볍게
무장한 페르시아군 우익을 돌파하며 승기를 잡자 페르시아 군대는 어쩔수 없이 후퇴해 함대로 돌아갔습니다.
페르시아군이 함선을 타고 돌아가 아테네 본토를 때릴걸 우려한 그리스군은 군대 전체가 3시간
만에 무려 30km 를 주파해 아테네로 돌아갔으니, 우리가 알고있는 마라톤의 시작은
아마 이 일화에서 비롯됐을 가능성이 크며, 다리우스 1세는 마라톤 전투 패배와 이집트
에서 반란이 겹치자 군대를 철수했고.... 이렇게 1차 그리스 침공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올림픽 마라톤의 기원에 대해 우리가 알기로는 마라톤 전투후 전령꾼인 페이디피데스가 몇시간을 달려서
아테네에 승전보를 전하고 탈진해서 죽었다지만..... 사실은 페이피데스는 스파르타에
구원군을 구하려 달려간 것이고 죽지도 않았으며 그리스군이 황급히 아테네로 달려온게 와전된 듯 싶습니다.
다리우스 1세 시절 부터는 화폐 디자인을 따로 만들기 시작했으니 '다릭 금화' 인데, '금빛' 을 의미하는 고대
페르시아어 '다루이야카' 에서 파생된 단어로 처음에는 은으로만 주조되다가 나중에 금으로 만들었습니다.
리디아식 금화는 양면에 모두 문양을 찍어 훨씬 만드는게 까다로웠다면 새로 만든 다릭은 한쪽 면에만
문양을 찍어 주조법을 간단하게 개조했으며 그리고 기존의 사자와 황소 무늬를
없애고 대신 황제가 활을 쏘는 모습을 새겨넣었으며 은화도 따로 만들었는데 '시글로스' 라고 불렀습니다.
세금도 다릭과 시글로스로 거두는 만큼 다릭과 시글로스 유통을 제대로 제어하지 못하면 국가경제가
망할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에 다리우스 1세와 후계자들은 다릭과 시글로스의 제조
만큼은 심혈을 기울여서 다뤘고 샤한샤가 관리하는 만큼 화폐 위조범은 반역죄에 준해 처벌했습니다.
다릭과 시글로스는 사르디스를 포함 페니키아와 아나톨리아 일대등 제국의 서부 지방에서만 쓰였으니
초기 단계 화폐의 한계라 볼수도 있는데, 물물교환을 없애고 완벽한 거래 수단으로는 자리
잡지 못했으며, 특히 수도 페르세폴리스가 있는 제국 동부에서는 화폐 보다는 물물교환을 선호했습니다.
다릭이 워낙 품질이 좋았던 덕에 지중해 세계에서는 달러화 처럼 썼는데, 문제는 이 다릭과
시글로스의 양이 많지 않았다는 것이었으니...... 그나마 다릭 같은 금화는 페르시아를
빼면 주조할 경제력이 되는 국가가 없었기 때문에 지중해권 국가들이 모두 이것을 썼습니다.
반면에 다른 나라에서도 찍어낼수 있는 은화 시글로스는 아나톨리아 지방에서만 유통되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에서 찍어낸 은화를 썼는데, 페르시아는 그리스 화폐의 국내 유통을 썩 달갑지
않게 여겼지만 그냥 썼다고 하며 일부 사트라프들은 그리스 화폐를 모방해 은화를 찍어내기도 했습니다.
다리우스 1세가 기원전 500년대에 발표한 환율에 의하면 1 다릭이 20 시글로스였는데, 1다릭의
중량은 이전 리디아 금화 보다 약간 가벼운 8.10~ 8.50g 정도였고 순도는
무려 98~ 99% 에 달했으니 후대의 웬만한 금화들 보다도 압도적일 정도로 순도가 높았습니다.
워낙에 순도가 높고 보증인이 확실했기 때문에 지중해인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다릭을 폭넓게 사용했으니,
그리스 경제의 중심지 아테네의 드라크마의 경우의 환율은 1다릭 = 25드라크마 였는데 25드라크마
는 숙련된 정예병의 한달 월급 정도로 여겨지며, 은화 시글로스의 경우 중량이 5.40~ .60g 정도 였습니다.
순도는 처음에는 다릭과 같은 98~ 99% 에 달했지만 날이 갈수록 순도가 떨어져 94~ 95% 까지도
떨어지는데, 그럼에도 타국 화폐와 비교하면 순도가 워낙 높았던 만큼 시글로스와 다릭은
아케메네스 왕조가 망한 이후에도 셀레우코스 왕조, 파르티아, 사산 제국 때까지도 유통이 계속됩니다.
페르시아 해군은 기원전 525년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원정하러 가면서 처음으로 창설되었고 다리우스
1세 시기 급격히 강화됐으니 당시 페르시아 해군은 살라미스에서의 졸전은 상상도 하기 힘들
정도로 강했는데, 기원전 517년에는 사모스섬을 그리고 트라키아와 스키타이 지방을 공략하기도 했습니다.
기원전 494년 라데 전투에서 아나톨리아 지방의 그리스 식민도시들이 일으킨 반란을 대파하며
지중해 해상무역을 좌지우지했지만.... 페르시아 전쟁을 거치며 함선들도 다 잃어
버렸고, 기원전 468년 에우리메돈 전투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함대마저 무느지면서 사라집니다.
페르시아 주 해군 기지는 킬리키아와 포카이아 해안에 있었으며 그외 해상 무역이 발달했던
페니키아의 항구 도시인 시돈, 아코, 트리폴리스 등에도 해군
진지들이 하나씩 있었고, 키프로스나 할리카르나소스 등지에도 해군 기지가 있었습니다.
페르시아는 처음으로 삼중선 트리에레스를 대량으로 찍어낸 국가로 크세르크세스 1세 시절
트리에레스 1,207척과 보조 함천 3천척을 운용했으니, 이집트 함대와 사모스 지방의
함대를 합쳐봐야 300여척도 안됐던걸 생각해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대함대 였습니다.
페르시아의 트리에레스는 길이 40m, 높이 6m 로 한 척당 병사 300명을 태울수 있었는데 디자인은 페니키아
것을 베꼈지만 대신 3층을 더 높여 크기가 컸으니,노잡이 170명은 위쪽 줄에 62명, 중간줄과 아래줄에
54명씩 꽉꽉 채워넣었는데 매일정박해 식량과 물을 보충했으며 훈풍을 타면 시속 22km 까지 달렸다고 합니다.
아케메네스 왕조의 국교는 조로아스터교로 '페르시아 밀교' 라고도 불리는데.... 가장
인기있던 신은 창조신 아후라 마즈다가 아니라 미트라였으니 대부분의
신전과 축제들은 미트라에 봉헌된 것이었고 사람 이름도 미트라의 칭호에서 따왔습니다.
아후라 마즈다가 최초로 등장하는건 다리우스 1세 시절로 베히스툰 비문의 "아후라 마즈다와
다른 신들" 이란 표현이 있으며 아르타크세르크세스 2세 시기에는 아나히타 신앙이
부흥하여 신전들이 많이 지어졌으며, 아후라마즈다, 미트라, 아나히타 셋이 함께 숭배되었습니다.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숭배하는 듯한 독특한 면모 때문에 '배화교' 라고도 불리지만 아케메네스 시대의
조로아스터교는 불을 숭배하는 관습이 존재하지 않았으니,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인들은
신상도 없고 신의 제단도 없다. 그들은 그리스인들 처럼 인간의 형상을 가진 신을 믿지 않는다' 고 썼습니다.
또 '그들은 제단을 세우지도 않고 불을 지피지도, 기름을 붓지도 않는다' 고 썼는데, 현재의 조로아스터교 사원
에서는 중앙 제단에 꺼지지 않는 불을 지피고 숭배하지만, 고대 페르시아에서는 불을 숭배하는
의식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로 불을 숭배하기 시작한 것은 5세기경 아케메네스 왕조가 망한 이후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