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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길흉

[스크랩] 오사카41 - 모즈(백설조) 에서 일본과 한국의 전방후원분!

작성자황룡|작성시간26.06.17|조회수1 목록 댓글 0

 

오사카 41 - 모즈(백설조) 고분군에서 일본과 한국의 전방후원분을 비교하다!

 

 

오사카 텐노지역에서 기차로  남쪽 사카이시 (界市) JR 모즈에키 (百舌鳥駅), 백설조역) 역에 도착해

다이센공원 (大仙公園) 을 찾아 닌토쿠 덴노 (仁徳天皇) 의 무덤으로 알려진 다이센 고분

(大仙陵古墳) 을 보는데... 길이 486 m (해자 포함 840 m), 높이 34.8 m 에 달하는 대형 고분 입니다.

 

 

이 고분은 일본에서 가장 크며, 크기로 보면 기자의 대피라미드, 진시황릉과 함께 세계

3고분이라고 부르는데..... 여기 모즈 (百舌鳥 백설조) 고분군인 앞쪽은

제사 지내는 용도로 네모(방형) 이고, 뒤쪽은 둥근 전방후원묘 ( 前方後圓墓 ) 입니다.

 

 

전방후원묘를 보면서 한반도 영산강 나주와 고흥, 해남등  전방후원분의 주인은 누구인가?

생각하는..... BC 3세기 부터 AD 3세기 까지 한반도 남부 사람들은 벼농사와

청동기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원주민인 신석기시대의 "조몬인" 을 쫓아내거나

흡수해서 혼혈이 되었고, 이후 군장국가 왜국들을 세우니 저들이 "왜인" 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럴드 다이아몬드는 퓰리처상 수상작  ",,증보판에  "일본인은 어디서 왔는가

수록했으니  2000년전 야요이시대에 벼농사등 선진 농업기술을 가지고 이주한 한국인

일본인의 조상이며..... 고고학, 분자생물학, 인류학과 언어학 연구를 통해 한국인과

일본인은  유전자 DNA”  가 거의 같으니 성장기를 함께 보낸  쌍둥이”  같다고 말했습니다.

 

 

오사카대 고하마 모토쓰구 교수는 1949년 부터 수만명의 유골을 조사했으니 일본 원주민 조몬인과 한반도

도래인의 비율이 “1 :  8.6” 이라고 밝혔으니..... 일본인 중에 원주민인 조몬인의 비율은 10%” 라는

얘기인데,  조몬인들이 신석기 문화로 벼농사를 모르니 생산력이  낮은지라 인구가 매우 적었기 때문 입니다.

 

 

닌토쿠 왕릉 (仁徳天皇陵) 에서 보듯 일본의 고유 묘제인 전방후원분 (前方後圓墳) 이 한반도 전라남도

의 나주 반남면과, 광주등 영산강 유역에 16기 그리고 고흥과 해남, 담양, 영광, 함평, 고창

서부 경남 도서 지방에서도 여러 기가 발견됐으니.... 무덤 주인들의 정체에 대해 의견들이 난무합니다.

 

 

전방후원묘 (前方後圓墓) 는 일본의 무덤 양식으로 3세기 부터 7세기 까지 조성되었는데 하니와등 많은

부장품들이 묻혀있는 수백미터 크기의 거대 무덤으로.... 앞부분이 네모 혹은 사다리꼴로 생겼고

(前方), 뒷부분은 원형(後圓) 인데 뒷부분에 사람을 매장하고 앞부분에서 제사를 지낸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보다 앞선 주구묘 (周溝墓) 는 매장 주체부를 중심으로 둘레에 도랑을 굴착한 형태로 전방 후원분의 초기

양식으로 추정되는 무덤 양식인데, 무덤이 장구 모습을 하고 있지는 않으며 주변에 해자 형태의

홈만 있는데... 1991년에 전방후원분이 전라남도 영산강일대에서 발견되면서 한일사학계가 발칵 뒤집힙니다.

 

 

영산강 일대 장고묘 (전방후원분고분은 5 ~ 6세기경 분묘로 연대가  일본 보다  늦고

임나일본부설의 시기와 일치해 큰 논란이 되었으니.... 일본인들은 무덤 양식이

주구묘 전방후원분 남한 전파설을 주장했는데 주인이 왜인인지 논란이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후 전라도에서 기원전 3세기경 대형 주구묘들이 발굴되면서 전라도 남부지역에서 발굴된 독자적인

금관과 영산강 유역의 옹관 문화 및 돌방무덤등 "백제와는 다른 유물" 이 발견되었으니 이들이 왜인

인지 마한 잔존 세력인지 논란이 있으니 주구묘 무덤들은 장구형무덤 (전방후원묘) 으로 발전된 것으로 봅니다.

 

*** 이하 나주 반남면 신촌리와 광주 월계동 장고분 및 해남 장고분 등 입니다 ***

 

목포대학교 최성락 교수는 영산강 유역에서 전방후원형고분 (前方後園形 古墳) 이 처음 발견된건 1980년대

중반이라며 알려진 12기 중에서 6기가 발굴되었는데, 고분 주인공이 재지세력 (在地勢力) 인지 아니면

() 와 관련 인물인지 백제 관료인지 논란에 대해 "재지세력(마한)" 들에 의해 만들어진 고분이라 말합니다.

 

 

영산강 지역의 수장층이 백제의 영향력을 벗어나 세력을 독자적으로 나타내기 위하여일본 규슈(九州) 지역의

전방후원분을 받아들였던 것이며, 지역 토착세력들이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노력이라 보는데

나주 신촌리 고분과 복암리 고분, 고흥 안동고분에서 금동관 금동신발, 환두대도에 팔찌등 유물들이 나왔습니다.

 

 

반면에 박천수 경북대 교수는 한반도 남부 일본식 무덤인 왜계 (倭系고분의 주인을 5세기에 백제를 돕기

위해 파견된 왜인 용병들의 무덤으로 보는데.... “규두대도등 일본제 출토 유물과 삼국사기, 일본서기

각종 문헌 분석 결과 무덤 주인은 일본 지배층이 아닌 중하급 전사로 보는게 타당하다”  라고 주장합니다.

 

 

일본 전사들이 한반도로 넘어온 최초의 기록은 405년경이니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일본에 인질로 머물던

백제 태자 전지왕이 아버지 아신왕이 죽자 왜병 100인의 호위를 받으며 귀국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광개토대왕릉비에 왜가 배로 공격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들이 백제· 고구려 전쟁에 참가했을 개연성이 큽니다.

 

 

박교수는 “5세기전반 전남 고흥군 안동고분과 야막고분은 분구 (墳丘) 표면에 돌을 깔아 마무리하는 즙석 (葺石)

시설이고 일본식 대도와 갑옷등 유물이 나와 무덤 주인이 일본인 임을 드러냈다해양 군사 요충지에

위치했고 왕실에서 하사한 것으로 보이는 금동관이 출토돼 백제 용병으로 활약했을 가능성이 크다”  고 말합니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동성왕도 전지왕 처럼 삼근왕이 암살되자 479년에 유랴쿠왕(천황) 12살 동성을

궁궐로 불러 머리를 쓰담으며 격려하고는 왜군 500인의 호위를 받아 귀국해 백제 왕위에 올랐는데,

이들 500명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6세기 전반 무덤은 주로 영산강 유역에서 발견되니 일본

규슈지역 횡혈묘 (橫穴墓) 와 닮았는데.... 출토 유물은 백제 왕실용품인 금박유리 등이 함께 나왔습니다.

 

***  금동관은 나주 신촌리고분, 복암리 고분, 해남, 고흥 안동고분 출토물입니다 ***

 

일본 학자들은 고분들을 근거로 임나 일본부설을 주장했지만..... 박 교수는 무덤 형태가

일정한 계통 없이 56세기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졌다왜계 고분의 주인들이

한반도에서 지배 세력이 아니라 일시적 활동한 전사 계급으로 볼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일본서기에 신공왕후의 삼한  기록의 주어를 왜에서 백제로 바꾼다면 369년 백제의 목라근자(木羅斤資)

왜인 용병 아라다노와케 (荒田別 황전별) 및 가가노와케 (鹿我別 녹아별) 와 함께 가라국(고령), 비자벌(창녕),

탁순국(창원), 안라국(함안), 남가라(김해) 등 가야 연맹 7개 소국을 정벌하고 서쪽으로 고해진(강진)에 이릅니다.

 

 

고해진에서 침미다례국(제주?) 을 쳐부수고 전라도 비리국, 벽중국, 포미지국, 반고국 4개국만을 취한후 나머지

"영산강 일대 소국들에게는 자치를 허용" 했는데... 근초고왕은 아들 근구수 태자와 함께 전쟁에 참여했을뿐

아니라 왜국 사신을 궁성으로 초대해 보물 창고를 열어 진기한 것들을 보여주며 백제의 부강함을 과시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475년 개로왕이 장수왕에게 패해 죽고 남쪽 웅진으로 남하해 도읍지로 삼으니, 일본

에서 태어나 자란 동성왕과 역시 일본에서 태어난 무령왕은 상실된 영토를 보충해야 하는지라

백제는 당시 완전히 병합되지 않았던 전라남도와 제주도를 복속시키기로 하는데, 이때 일본

열도의 왜병을 끌어들여 전남의 마한 소국들을 정벌하니 그 왜병의 무덤이란게 박교수의 주장입니다.

 

*** 나주 복암리 고분박물관 ***

 

백제 동성왕과 무령왕은 두사람 모두 일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자랐으니..... 당시 케이타이(계체) 일왕(천황)

관계 또한 매우 밀접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박교수는 일본에서 군사력을 지원받아 잔존하던

전남의 마한 소국들을 정복했을 가능성이 충분하고 이런 결과물이 일본색이 밴 장구형 무덤 이라는 것입니다.

 

*** 광주 월계동 장고분 ***

 

박교수 주장대로라면 왜군 병사들의 무덤이 왕릉급 (해남 장고봉 무덤은 봉분 길이 82m, 높이 9m

황남대총 신라 경주 왕릉보다 크다! ) 대형 고분으로 거대한 이유를 전혀 납득할수 없으며,

500명  동성왕의 호위 무사 왜군들이라면 수도 공주 근방에 무덤이 조성되어야지 먼 영산강

일대에 흩어져 있는 것 또한 이해하기가 어려우며... 최교수의 마한 재지세력 또한 설득력이 약합니다.

 

그렇다면 저 영산강 일대에 전방후원분을 세운 사람들이 바로 일본으로 건너간 야요이인과

같은 민족으로 옛날 부터 전라남도 지방과 또 경남 도서지방에 거주했던 왜인은

아닐까요? 가야인의 별종인 왜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391년경 다시 바다를 건너

신라를  침략해 393년과 399년에 서라벌을 포위했으니 이들을 왜군이라 부른 것은 아닐까요?

 

 

() 자를 파자하면 + + 이니 벼농사와 관련이 있는 본디 순하다는 뜻인데 왜소하다는 뜻의 왜 ()

와 음이 같은데다가, 남방 말레이인을 조상으로하는 일본 원주민 "조몬인" 들과 혼혈도 있고 하여 키가

작은 것이 사실이고..... 이후 왜구의 침입을 수없이 당하면서 미운 마음에 지금 처럼 굳어진 것이라고 봅니다?

 

3세기에 편찬된 중국의 삼국지 위지 (魏志) 동이전에 마한은 남쪽으로 왜와 국경을 접한다

라고 되어 있는데.... 동이전 (馬韓 마한) 조에 “'()' 은 동쪽과 서쪽으로 바다를

한계 (東西以海爲限) 로 하며남쪽은 '' 와 접해 (南與<>있으니”  라고  나옵니다.

 

 

() 이란 글자는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 육지에서 경계를 나눈다는 뜻이며

(弁辰 변진) 조에 “ '독노국' '' 와 접해 (<瀆盧國> <> 接界) 있다독로국은

거제도나 부산 동래 (복천동 고분, 거칠산국) 로 보는데 역시 () 와 접 ()한다는 글자가 보입니다?

 

위지동이전에 이어 그 전의 후한서 에도 마한 (馬韓) 은  54국이 있는데,  북으로 낙랑군과

남으로는 왜 ()와 맞붙어 있으며... 사마천의 사기 (史記) 에도 마한 54국이 나오는데

충남 14, 경기 12, 전북이 11국인데 비해 "전남은 6국" 에 불과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마한과 왜인들 지역은 일부 섞인 것으로도 보이는데 전남지역 마한으로는 확실하지는 않지만

벽비리국 [壁卑離國보성, 구사오단국 [臼斯烏旦國] 장성, 불미국 [不彌國] 나주, 초산도

비리국 [楚山塗卑離國] 진도, 고해국 [古奚國] 강진, 초리국 [楚離國] 고흥 등으로 생각됩니다.

 

전라남도에서 마한 6국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인 영산강 일대는 왜인으로 생각할수도 있으니... ()

중국 삼국지 위지 (魏志) 왜인전에 처음 나오는데, 한사군 (漢四郡) 의 대방 (황해도) 으로 부터 한반도

해안 지방을 거쳐 대마도, 일기도를 지나서 큐슈 중부의  야마대국 (邪馬臺國) 에 이르는 노정이 나옵니다.

 

 

이보다 이른 시기에 경남에서는 금관가야 거등왕 때인 서기 2107월 포상팔국 (浦上八國)

공모해  가라 (加羅 김해) 를 침범하자 가라는 왕자를 신라에 보내어 구원을 요청하니....

신라 나해왕 (奈解王) 태자 석우로 (昔于老)” 와 이벌찬 이음 (利音) 물계자 등을

보내 가야인 포로 8천명을 되찾아 가라를 구원하는데 포상팔국은 변진 12국과는 다른 나라 입니다.

 

구원군의 대장인 석우로는 내해 이사금의 태자이지만 230년 내해가 사망하자 왕위는 사위 조분 이사금에게

돌아갔는데, 내해는 벌휴 이사금의 두 아들중 이매계니, 골정계로 벌휴 이사금의 적장손인 조분과의 왕위

다툼에서 패한 것인데, 우로는 대장군에 서불한이 되고 조분 이사금의 딸 명원과 혼인해 왕위계승 1순위 입니다.

 

 

하지만 조분 이사금이 죽은후 왕위는 조분의 동생인 첨해가 차지하는데 그럼에도  231

7월 석우로는 김천의 감문국을 정벌하고 233년에는 동해 바다를 건너온 왜군을

영덕군 사도성에서 화공을 사용해 왜군의 전함을 불태우니..... 적이 물에 빠져 죽어

전멸에 이르는 피해를 입은 왜군은 한동안 신라를 직접 침공하지 못하고 외교 교섭에 나섭니다.

 

253년에 왜국 사신 갈나고가 방문하자 접대를 맡은 우로는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만들고

왕비를 밥짓는 여자로 삼겠다.”  고 하자 왜왕이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 (于道朱君)

보내 신라를 치니, 놀란 첨해왕은 우유촌 (于柚村 울진) 으로 도주하는데..... 석우로는 책임을

지겠다며 왜인앞에 출두해 변명하자 왜군은 장작더미 위에 얹어놓고 불태워 죽인후에 철수합니다?

 

 

포상팔국은 신라의 방해에 대한 보복으로 서기 2128국중 골포 (骨浦 마산칠포(柒浦 칠 원고사포

(古史浦 고성) 3국이 신라의 갈화성 (竭火城, 울산) 을 공략하다가 패했는데 가야는 보답으로 신라에

왕자를 볼모로 보냈다니 포상 8국도 영산강 일대 전방후원분을 만든 사람들 처럼 왜인이 아닌가 싶습니다?

 

삼국사기에는 왜인들이 신라를 침략해온 기사가 스무차례가 넘는데 그중 벌휴 이사금때인

서기 193년 왜인 천여명이 흉작으로 기근이 들어 걸식하러 왔다는 기사가 있으니.....

이는 일본에서 바다를 건너 왔다기 보다는 경상남도 남부에 거주하는 왜인이 아닌가 합니다.

 

 

첨해(249) 유례(295), 내물(393) 실성(408) 때의 대규모 침공과 399년에 수도 서라벌이

포위되어 고구려가 5만 원군을 내려보낸 기사를 보면 큐슈에서 건너온 왜군이

주축을 이루었다고 보여지지만.... 조분(232), 걸해(346), 눌지(444) 때는 왜군이

불시에 나타났고 선박을 이용했다는 기록이 없으니  경상도 남부 왜인들이 아닌가 합니다?

 

한반도에서 전남 나주의 반남면에 왕릉 규모의 전방후원묘 14기를 비롯해 고흥, 완도, 해남에

경남 고성군 송학동 고분군 1호분에서도 발견되는데.... 광주 월계동  장고분’   에 대해

전남대 임영진 교수는 일본에서 야마토 (大和) 정권과 이와이 (磐井) 세력이  각축을

벌이던 과정에서 북규슈 일대를 장악하던 세력이 떠밀려 한반도로 망명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영산강 일대 전방후원묘를 두고 임나일본부설, 재지 마한세력, 왜인 용병, 왜인 망명설이 있지만....

저는 이런 묘제를 사용하던 왜인들이 볍씨와 청동기 (후기에는 철기) 를 가지고

일본열도로 건너가 야요이 문화를 열었으며, 잔존 왜인들은 일본으로 이주한 왜인들을

불러 신라를 공격하기도 했으나, 백제와 신라세력이 커지면서 일본으로 이주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니까 근초고왕때 하남 위례성의 백제 국경선은 충청남도선 정도 였는데, 왕은 남진해 전라북도

지방의 마한 소국들을 손에 넣은후 전라남도 까지 세력을 뻗치게 되는지라..... 근초고왕은

서기 369년에야 근구수 왕자와 함께 점령하는 것이니 백제 건국후 무려 400년이나 지난 후 입니다.

 

 

이 때 백제군은 내친김에 하동까지 진격하고 별동대를 탁순국(경남 창원)에 보내는데...

1145년 한국의 삼국사기 보다 무려 433년이나 앞선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 366년 조에 보면 탁순국이 백제와 왜국과의 교류의 중개지 였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2년후 근초고왕은 고구려를 쳐서 평양에서 고국원왕을 전사시키고 황해도를 얻은후 중국 동진에 조공해 진동

장군 영낙랑태수를 제수받는 것이지요! 이후 자치를 허용했던 전라남도 남부지방 소국들을 완전히 백제국

영토로 넣는 것은 웅진과 사비로 천도한후, 일본에서 태어나 자라 건너온 동성왕때인 480년대라고 보여집니다.

 

 

한겨레신문 노형석씨의 시사문화재란에 실린 해남 장고봉 고분 둘러싸고 고고학계가 술렁이고 있으니....

일본 고분 전방후원분과 닮은 얼개· 일본식 제사 흔적 논란, 추가 발굴 뒤 일반 공개 예정이라 말하며

다시 묻어, 무덤 주인은 백제 통제를 받은 왜인?, 일본 우익 임나일본부설근거 삼을라 우려기사 입니다.

 

 

20211월  한반도에서 가장 큰 고대  무덤인  해남군 북일면 방산리에 전방  후원분인

장고봉 고분을 발굴하니.... 현문을 지나 납작한 판석 여러개를 놓은 바닥과 깬돌을

정연하게 쌓은 돌방의 벽체가 나타나는데,  도굴당해 내부 유물들은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고고학자들은 5~6세기 일본 고분 전방후원분과 판에 박은 듯한 무덤 얼개에 놀라워 했고, 갑자기 발굴을 중단

하고  다시 묻어버리니 허탈해 했는데, 더욱 무덤 발굴과 뒤이은 복토 소식은 언론에 공개되지 않았지만

국내 고고학계를 술렁이게 했으며.... 우리 정부가 쉬쉬 하는 가운데 한겨례신문에 의해 뒤늦게 보도됐습니다.

 

 

해남 장고봉 고분은 6세기 전반으로 추정되는데 봉분과 돌방(석실) 내부가 202010월 부터 20212월까지

마한문화연구원의 발굴조사를 통해 1,500여년만에 드러났으니, 돌방은 일본 규슈 해안과 아리아케해에

5~6세기 조성된 왜인 귀족 석실 무덤과 구조는 물론 무덤방 입구를 막기전 지낸 제사 흔적까지 거의 같았습니다.

 

 

후면 봉토를 파고 무덤방과 통하는 널길(연도) 로 들어가니 바닥에 길쭉한 판석을 놓고 위쪽에 깨진 돌(할석)

차곡차곡 쌓아 벽체를 조성하고, 위쪽 천장에 덮개돌(개석)을 놓는 전형적인 고대 일본 규슈지역의 석실

무덤 얼개를 띄며 천장과 벽체에는 일본 고대 고분의 전형적 특징인 빨간 빛깔의 주칠을 한 흔적이 확인됩니다.

 

 

출토품은 대부분 도굴됐으나..... 무덤 주인을 밝히는 실마리가 될 유물이 상당수 수습

됐으니, 무덤방 입구에서 발견된 뚜껑 달린 접시(개배) 10점이 대표적으로, 개배

안에 조기등 생선뼈와 육류등 제수 음식으로 추정되는 유기물 덩어리도 검출됐습니다.

 

 

돌문짝 (문비석) 이 엎어진 채 드러난 장고봉 고분의 무덤방 석실은 길이와 너비가 각각 4m 를 넘고

천장까지 높이는 2m 에 달하는 큰 공간으로 일본 고분에서 확인됐던 제례 유물과 유사한

내용물과 배치가 주목된다고 조근우 연구원장은 설명했는데..... 무덤방을 직접 본 박천수

경북대 고고 인류학과 교수는 규슈의 왜인 무덤에 들어갔을 때와 느낌이 똑같았다고 말했습니다.

 

 

장고봉 고분은 봉분 길이 82m(도랑 포함), 높이 9m에 이르니 황남대총 등 신라 경주의 대형 고분 보다 훨씬

더 큰 국내 최대급 무덤이니.... 겉모습은 일본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장고형 무덤) 모양새로 전방

후원분은 봉분의 앞쪽은 네모진 방형, 뒤쪽은 둥그런 원형인 특징을 따서 일본 학자들이 지은 명칭입니다.

 

일본무덤 전방후원분이 고대 해상로 길목 전남북 해안 일대에 10여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은 1980~1990 년대에

잇따라 확인되자 일본 우파세력은 4~6세기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뒷받침하는

물증이라고 주장했으니, · 일 학계에서 묻힌 이의 출신지가 한반도인지 왜인지를 놓고 논란이 불거졌습니다.

 

 

해남 장고봉 고분은 1980년대초 학계에 처음 보고됐을 당시엔 자연 지형인 언덕으로 간주했으며 80년대

중반 강인구 전 영남대 교수가 발굴 허가를 신청했으나, 문화재위원회의 불허로 외형 실측밖에 할수

없었으며 1986년 전남도 기념물로 지정됐지만 보존 조처가 제대로 되지 않아 90년대에 두차례 도굴됐습니다.

 

국립 광주박물관이 2000년 도굴 갱을 확인하고 긴급 시굴 조사로 내부를 일부 확인했지만 공식

발굴은 20년 뒤인 2020년 가을에야 시작했으나, 무덤 석실은 2월말에 다시 묻혔으니

연구원은 코로나 방역을 위한 조처로, 5~ 9월 무덤 주구(도랑) 의 추가 발굴 뒤에

일반 공개를 추진하겠다고 밝혔지만 일각에선 발굴의 파장도 고려했을 것이란 해석이 나옵니다.

 

 

조사 내용은 한반도 전방 후원분 무덤 주인 논란을 다시 불러일으킬 공산이 큰데..... 지난

20여년간 백제의 통제를 받는 왜인 관료· 용병이란 설과 일본에 이주했다가

현지 무덤 문화의 영향을 받고 귀국한 마한인 또는 백제인이란 설 등 여러 추측이 나왔습니다.

 

해남 장고봉 고분에서 규슈 고분과 판에 박은 얼개와 뚜껑 달린 토기 접시(개배) .... 철제 갑옷

조각, 철촉 등 무기류가 묻힌 사실이 확인된건 국내 학계에 부담이 될 수도 있으니,

일본 우파 학자들이 또 다시   임나일본부설의 근거”  로 삼을 수 있다는  우려 까지 나옵니다.

 

 

권오영 서울대 국사학과 교수는 장고봉 고분은 왜계 무덤 구조를 갖고 있지만, 묻힌이를 섣불리 단정하면

안 됩니다. 외형, 구조, 유물 등을 당대 정세와 함께 살펴봐야 해요. 민족주의를 넘어 고대인의

관점까지 생각하며 열린 시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라고 조심스레 말하니 훗날로 미루자는 것 입니다?

 

발굴 결과를 발표하면 일본의 고분과 판박이인 무덤으로 인해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설의 증거

발견됐다고 주장할텐데, 반박할  대응논리”  가 매우 미약한지라 도저히 자신이 없으니 발굴

도중에 중단하고 덮어버린 것인데..... 제 생각으로는 “발상전환” 을 해서 임나 일본부 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그러니까 이 사람들이 바로 "왜인" 으로 그들이 건너가 왜국을 세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장원재 동아일보 논설위원은  “‘위안부 사과일 고노 전 장관 별세라는 기사를 썼는데, 8일 세상을 떠난 고노

요헤이 전 중의원(하원) 의장은 무라야마 도미이치 전 총리와 함께 일본의 양심으로 불렸던 정치인이다.

그는 일본에 가장 중요한 나라로 한국과 중국을 꼽으면서 과거사를 정확히 알고 반성해야 이웃과 신뢰를

쌓을수 있다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  관방장관이던 1993년 발표한 고노 담화는 그런 신념의 산물이었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 피해 증언으로 위안부 문제가 한일 간 현안이 된 후에도 일본 정부는 한동안 민간업자가

한 일이라며 책임을 부인했다. 하지만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라고 판단한 그는 당시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상의해 국내외 자료를 취합했고, 위안부 피해자 16명의 증언을 들었다. 생생하고 참혹한 피해 진술

확인한 그는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과 군의 관여를 처음 인정한 고노 담화를 발표하고 고개 숙여 사죄했다.

 

 

고노 담화는 무라야마 담화(95), 김대중- 오부치 선언(98) 으로 이어지며 한일간 화해와 협력 흐름을 궤도에

올렸다. 하지만 우익 세력은 담화가 국제사회에 일본을 수치스럽게 만들었다며 끊임없이 공격했다. 우익

단체 회원이 흉기를 소지한채 그의 집 앞에서 자해소동을 벌인적도 있었다 “정부 입장을 대표로 발표했을뿐

이라며 넘어갈수도 있었지만 고노의장은 그렇게 하는 대신 기회 날때마다 언론에 나와 담화의 의미를 설명했다.

 

 

그는 정계 은퇴 후에도 자민당의 온건파 원로로서 야스쿠니신사 참배, 평화헌법 개정 같은

우경화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위안부 험담은 공부 좀 하라며 직접 나서 꾸짖었다.

 

 

고노 담화를 눈엣가시로 여겼던 아베 신조 전 총리가 2014담화 작성 경위를 검증하겠다

고 나섰을 때도 위안부 동원에는 분명히 강제성이 있었다맞섰다.

결국 아베 정부는 고노 담화를 폐기하지 못했고, 일본 정부는 여전히 이 담화를 계승하고 있다.

 

 

그는 한국 거물들과도 가까웠는데 특히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각별한 사이였다. 퇴임을 앞둔 김 전 대통령

위로하기 위해 수술 직후 의사 몰래 병원을 빠져나가 서울행 비행기를 탔을 정도였다. 김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을 때는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존경하는 선배이자 친구를 잃었다며 애통해했다.

 

 

그의 이름 요헤이 (洋平)’ 평화로운 태평양을 기원하면서 부친이 지어준 이름이라고 한다.

고노 전 의장은 그 이름대로 일본이 불행한 역사를 되풀이하지 않고 주변국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길을 찾으려 했다. ‘강한 일본을 내세우는 다카이치 내각이

방위비 증액과 개헌을 밀어붙이는 상황에서 그의 별세를 안타까워 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 같다.

 

다카이치 사나에 (高市早苗총리는 10일 에 역사 문제를 진지하게 마주하며 대화와 이해를 

중시한 자세는,  우리나라 평화 외교의 초석으로 기억 되어야 할 것”   이라며  고인을 애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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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일본여행 [J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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