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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길흉

[스크랩] 동학 농민궐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해 일본이 승리!

작성자황룡|작성시간26.06.20|조회수0 목록 댓글 0

 

일본 34 - 동학 농민궐기로 청일전쟁이 발발해 일본이 청나라에 승리하다!

 

1868년 조슈번과 사쓰마번에 히젠번과 도사번 존왕양이파들이 무진전쟁 반란을 일으켜

260여이어온 에도 도쿠기와 막부를 종식시키고 메이지 유신을 진행하면서 일본을

서양국가  처럼 근대화 하는 과정에서  폐번치현과 칼 휴대등 사무라이 권한을 박탈

하고 국민개병으로 나가니 토사구팽 당한 사족들이 반발해 전국에서  반란이 잇따랐습니다.

 

 

이들을 달래려 1875년에 65명이 탄 운양호를 보내 조선군 400명이 지키는 강화도 영종진을 함락하고는

이듬해 강화도 조약을 맺는데, 그럼에도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등 사쓰마번 사족 2만명이 세이난

전쟁 반란을 일으켜 구마모토로 진격하니... 한때 4만 대군으로 기세를 떨쳤지만 조선인 포로 울산

사람들이 쌓은 견고한 구마모토성을 뚫지 못하고 평민 군대에게 패배하니, 사무라이의 시대는 끝납니다.

 

 

무장 반란이란 극단적 방식이 아닌 온건한 방식으로 메이지 신정부에 도전장을 내민 움직임도 있었으니

민주주의의 도입을 요구한 자유 민권운동으로 중요한 인물은 정한론 논쟁에서 패하고 사직했던

이타가키 다이스케이니 애국공당을 설립하고,  1874년 의회 설립을 요구하는 '민선의원

설립 건백서' 를 정부에 제출했으며.... 그후 민권 운동가들이 설립한 단체들은 2개 정당으로 통합 됩니다.

 

 

1881년 일왕(천황) 1890년까지 헌법을 발효시킨다는 칙유를 발표했으며, 1882년 이토 히로부미를 유럽으로

파견해 독일 제도를 연구하였으니 1883년 귀국한 이토의 노력으로 1888년 헌법이 작성되어 추밀원에서

심의에 붙여져 18892월 일왕(천황)이 국민에게 선물로 하사하는 형식으로 대일본제국 헌법이 발표되었습니다.

 

 

일본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기치는 민주주의적인 헌법을 구상했으니 이토 히로부미와 이노우에의

군국주의 헌법에 반대하여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해 그들과 절교했고이노우에가 대일본

제국 헌법, 황실전범 교육칙어, 군인 칙유를 주도하니 후쿠자와파 학자들은 헌법 작성에서 탈퇴합니다.

 

 

일본 헌법은 독일의 전례를 따라 군주의 권한이 강한 헌법으로 일왕(천황) 이 주권자임을 명시하였으며, 천황

밑으로 입법(제국의회), 사법, 행정의 삼권분립을 규정하였고 육해군의 통수권자를 정부가 아닌

일왕(천황)으로 정해 군부가 정부 통제를 벗어났으니 이는 수십년뒤 군국주의 국가가 되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메이지유신 이전 다카스키 신사쿠등 조슈번 존왕양이파들이 많이 죽었고 1877~78년에 유신삼걸인 사이고

다카모리, 오쿠보 도시미치, 기도 다카요시가 사망하면서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유신 정권의 중심이 되니

18785월 오쿠보 도시미치의 후임으로 참의 겸 내무경이 되었고,  초대 총리대신이 되어 헌법을 제정합니다.

 

 

이토가 물러난 1888430일 일본 2대 총리는 구로다 기요타카니 사쓰마번 출신으로 삿초 동맹에 참가했고

보신전쟁때 호쿠리쿠 전선과, 하코다테 전쟁에 지휘를 맡았으며 홋카이도의 개척을 지휘하던중 1876년에

강화도에서 조일수호조규를 체결했으며 1877년 세이난 전쟁에서 구마모토성 포위를 푸는데 공을 세웠습니다.

 

3대 총리는 조슈번으로 요시다 쇼인의 쇼카 손주쿠에서 다카스키 신사쿠, 기도 다카요시 및 이토 히로부미

등과 동문수학한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 인데 보신전쟁때 활약으로 일본제국 육군 원수이자

내각총리대신을 두번 지냈으며 일본 의회제도 체제 아래 첫 총리로 일본의 군사와 정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1868년 보신 전쟁에는 조슈번 군대를 이끌고 도쿠가와 막부군과 싸웠으며 1869년에 서구식 군대를 연구하기

위해 유럽에 파견되었으니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팽창주의, 공업 발전에 감명받고 농업국이었던 일본을

프로이센 같은 공업 군사국가로 탈바꿈하고자 했으니...  군 근대화를 추진하면서 1873년 징병제를 실시합니다.

 

야마가타는 1882년 메이지왕(천황) 이름으로 '황군' 의 복무 규율을 규정한 군인칙유 (軍人勅諭) 를 선포

했으니, 군국주의적이고 충성을 강조한 것이었으며 청일 전쟁이 발발하자 육군대신으로 전쟁을

지도하였고, 러일 전쟁때는 제1군 사령관겸 참모총장을 맡아 군을 지휘했으며 1898년에 원수가 됩니다.

 

 

3대 총리로 재직할때 1890년 군국주의적 교육관을 규정한 교육칙어 (教育スル勅語) 1890년 메이지

일왕(천황 )이름으로 반포하였으니 80여년 후인 훗날 박정희 유신정부의 국민교육헌장의 전범이 되었습니다.

.

1884년 일본 사상가 후쿠자와 유기치 훈수로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이 3일 천하로 끝나자 생존한

갑신정변 주역들은 후퇴하는 일본군을 따라 인천항에서 지도세마루호를 통해 일본으로

망명하는데, 이날 일본 공사관은 조선 병사와 난민의 습격을 받아 수명의 일본이니 학살당하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갑신정변 주모자를 대역죄인으로 공표했는데 김옥균 처는 관노가 되기전 딸과 함께 음독자결했고,

서재필의 아버지 서광효 내외와 맏형도 음독 자결했으며 박영효 어머니는 사형당했고 아버지 박원양은 판서

직에서 해임된 뒤 감옥에서 거적 (볏짚) 을 뜯어먹다가 굶어서 아사하는등 죽은 자는 600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개화파는 고대 (古代) 이후 중국에 반속국화된 사대교린 종속적 관계를 청산하고 자주독립국화 하려했으니

국왕 전제주의를 입헌군주제로 바꾸려 했으며 청나라에 사대행위 근절을 목표로 했는데, 중국의

고려와 조선 속방화 정책에서 탈피하려는 독립운동 시발점이지만 일본에 의지한 친일이라는게 문제니

이완용은 친청파에서 친미파가되고 친러파로 변한후 친일파가 되지만 당시 조선에 "자주파" 는 없었습니다.

 

 

갑신정변을 선동한 일본은 이듬해인 18854월 톈진 조약을 맺고 청· 일 양군의 공동 철병을

합의하니, 일본군 150명을 철수함으로써 청군 3천명을 철병하는 성과를 이루었고,

조선에 대한 일본의 경제 침략을 가속화하여 1886년 한양에 외국 상인은 일본 상인만 남게 됩니다.

 

 

조선 정부는 일본에 줄기차게 김옥균의 양도를 요청했으며 반대로 일본은 일본공사관이 불에 타고,

공사관을 지키던 서기관과 거류민이 살해되었다는 사실을 빌미로 책임을 조선정부에

묻고 조선정부의 사죄와 배상에 희생자에 대한 구휼금 지급을 요구하니 결국 한성조약이 체결됩니다.

 

 

일본은 이노우에 가오루(井上聲) 에게 육·해군 2개 대대와 군함 7척을 이끌고 인천에 가게 하니 1885

19일 전문 5개조의 한성 조약 (漢城條約) 이 체결되는데.... 일본에 대한 조선 정부의

사과와 사망자 및 기물 손괴 배상금 10만원 지급, 일본 공사관 수축비 부담 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또 일본은 청나라측에 청일 양국은 조선에서의 양국 군대의 철수할 것, 장래 조선에

변란 등이 일어나서 청일 어느 한쪽이 파병할 때에는 그 사실을

상대방 국가에 알리고 출병할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 조약" 을 체결하게 됩니다.

 

 

조선 정부가 갑신정변에 다케조에 공사가 연루된 점을 항의하자, 일본은 송환을 추진하니....

박영효와 서광범, 서재필은 다시 미국으로 망명했으며 김옥균은 상하이에서

암살됐고  살아 남은 류혁로, 박영효, 신응희, 이규완, 정란교는 친일 개화파로 변신합니다.

 

 

개화파는 문명개화는 곧 일본화라고 생각하여 일본을 모델로 삼았으니 친일파들이기도 한데

서재필은 실패한 이유를 첫번째는 개화파들이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는 점이고,

두번째는 일본을 너무 쉽게믿고 의존하였다는 점인데... 윤치호, 유길준, 박중양 등은 민중이

혁명을 이해할 만큼의 지적 수준이 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했으니 한마디로 민중은 무식하다는?

 

 

1884년 감신정변에서 청나라와 일본군이 전투가 발생하였고, 패배한 김옥균등 개화파 인사들은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1885년 톈진 조약을 체결했으니,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시킨다. 조선의 군대를 훈련하기

위한 훈련교관을 보내지 않는다. 변란 등의 중요 사건으로 어느 한쪽이 파병할 경우 상대방에 통보해야 한다.

 

 

상해에서 암살된 김옥균을 청국에서 넘겨받은 조선이 다시 부관참시하니 일본은 직접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였으며, 1894년 동학농민 봉기에 전주가 함락되었지만

조선군은 죽창을 든 농민군에 비해 대포와 기관포에 신식 총으로 "화력" 이 월등했습니다.

 

 

전주성도 수비군이 진압차 출동해 병력이 없는 틈을 타서 기습적으로 뺏긴지라 다시 전주성을 포위하고

네차례 전투에서 농민군에 승리하니 무느지는지라 전주성 탈환을 눈앞에 두었는데.... 서울 조정은

현장을 모르니 임진왜란과 임오군란에 갑신정변 처럼 또 청나라군 파병을 요청하는 손쉬운 길을 택합니다.

 

 

조선은 청군에 파병을 요청하면 일본군도 출동할수 있다는 텐진조약을 알고 있었지만 고종과 민왕비에

육군대신등 민씨 척족들은 청군이 일본군을 쉽게 무찌를 것으로 오판했으니.... 조정이 며칠만

참고 기다렸다면 전주성을 되찾고 동학군의 항복을 받았을 것이며 청일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청나라는 톈진 조약에 따라 파병을 일본에 알렸고 엽지초 휘하 2,800명 병력을 보내니, 일본에서는

내각 불신임으로 궁지에 몰렸던 이토 히로부미 총리는 하늘이 준 기회에 기뻐하며

아베 신조 전 총리의 외고조부 오시마 요시마사 8천명을 보내니 189469인천에 무혈

상륙해 723일 경복궁을 공격하여 두세시간만에 고종을 포로로 잡고 조선군의 항복을 받습니다.

 

 

일본은 흥선대원군을 내세워 군국기무처를 설치하고 조선의 내각을 김홍집, 박정양, 민영달, 유길준등 친일파

인사로 교체해 갑오경장을 실시하니.... 왕실과 정부의 회계분리, 경찰 과 재판소 설치, 도량형 통일,

반상의 산분차별 폐지, 천민제도 폐지, 노비 해방과 5백년 내려온 과부재혼 금지제도 폐지등 개혁을 실시합니다.

 

18947, 조선 내의 청나라 군대는 3,000 ~ 3,500명 정도였으며, 아산만을 통해서만 병력을 보충할

수  있었으니...... 일본의 목표는 우선 아산의 청국군을 봉쇄하고 일본 육군으로 포위하는 것이었습니다.

 

 

1894725일 순양함 요시노, 나니와, 아키쓰시마로 구성된 일본 제1유격대가 청나라 순양함 제원 (済遠)

군함 광을 (広乙) 과 마주쳤으니, 이들은 아산으로 물자를 나르는 또 다른 청나라의 군함 조강호와

만나기 위해 출항한 것인데,  1시간 전투 끝에 광을호는 화약고가 폭발해 암초에 좌초되고 제원호는 도주합니다.

 

 

청나라에는 런던의 인도차이나 증기 선박회사 소유 2,134톤급 영국 상선 가오슝호가 있었는데, 이 배는 청나라

가 군대를 조선으로 수송하기 위해 대여한 것으로... 골즈워디 선장과 64명 승무원으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가오슝호는 1,200명의 청나라 군사와 보급품과 장비가 적재되어 있었으며, 조강호와 함께

조선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청나라의 고문인 독일의 포병장교

하네켄 소령 (Major von Hanneken) 도 승선하고 있었고 725일에 도착할 예정이었습니다.

 

 

도고 헤이하치로가 지휘한 방호순양함 나니와가 두 배를 가로막았으니 군함은 결국 나포되었고,

일본은 가오슝호에 나니와호를 따를 것과 승선한 유럽인들은 나니와로 옮겨탈 것을

요구했는데, 승선한 1,200명 중국인들은 돌아갈 것을 원했고 영국 선장과 선원의 생명을 위협합니다.

 

 

4시간의 협상이 결렬되자 도고 선장은 사격할 것을 명하였으니 유럽인들은 바다에 뛰어들었고,

중국인들은 이들을 맞 사격했으며 일본군은 승무원들을 구조하였는데, 가오슝호의

침몰은 일본과 영국 간의 외교적 분쟁을 일으켰으나 폭동에 대한 국제법으로 처리되었습니다.

 

 

조선의 친일 내각으로 부터 청나라 군대를 몰아낼 권한(?) 을 부여받은 오시마

요시마사는 3,500명의 일본군 여단을 이끌고 한양에서 아산만까지

이동하여 아산과 성환(천안시 성환읍)에 주둔한 4,000명의 청나라 군대와 대치합니다.

 

 

1894728, 양측 군대는 아산 외곽에서 다음날 아침까지 전투를 벌였는데, 청나라 군대는

점차로 병력을 잃어 평양으로 후퇴하였으니.... 청나라 군대의 사상자는 500명에

달하였으나 일본군 측은 100여명에 불과했으며 81일 청나라와 일본 간에 전쟁이 선포되었습니다.

 

 

84일 이전에 조선에 남은 청나라의 병력들은 평양으로 철수하였고, 청나라로

부터 파견된 병력과 합류하였으니...... 평양에 15,000명의

청나라 수비군은 일본군을 저지할 것을 기대하면서 대대적으로 전투에 대비합니다.

 

 

915일 일본군은 평양을 습격하여 청나라 군대를 공격해 항복을 받았고, 폭우와 어둠을

이용하여 잔존 병력은 평양을 빠져나와 의주로 향했는데..... 청나라 군대는

사망자 1,000명에 부상자가 4,000명에 달했으며 일본군은 5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일본군은 916일 아침에 평양성에 입성하였으며, 평양 전투 이후로 일본은 조선의 내정을 간섭

하였고, 조선의 물자와 노동력이 일본군에 제공되었으며 이로부터 농민 봉기가 발생합니다.

 

 

압록강 전투 또는 황해 해전은 청일 전쟁에서 가장 규모가 큰 해전으로, 1894917일 청나라의 북양함대가

일본  함대와 압록강 하구에서 맞서 싸웠는데, 청나라 측은 화력이 우위에 있었음에도 선원들의 경험과

기동력 열세로 참가한 10대 군함 중 5척이 침몰, 3척이 파손되었으며 850명이 사망하고 500명이 부상합니다.

 

 

반면에 일본 함대는 4척 파손에 사망자 90, 부상은 200명이었으니..... 이로써

일본군은 황해의 제해권을 확보했으며, 그후 4,500명의 청나라

군대가 압록강 부근에 상륙하였으며 청나라 잔존 북양함대는 여순항으로 피신합니다.

 

 

청군은 압록강 요새에 방어태세를 갖추니 일본군은 18941024일 밤에 압록강에 부교를 놓았고 단둥 동쪽

호산을 공격하니 청군은 밤에 단둥으로 후퇴했으며, 조슈번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지휘하는 제1

(3, 5사단) 은 단둥을 향해 북쪽으로 진격해 사망 4, 부상 14명의 희생만으로 중국 영토에 교두보를 마련합니다.

 

 

조슈번 출신 가쓰라 다로의 3사단은 서쪽으로 도주하는 청국군을 쫓아 요동반도 도시

들을 점령하였으며, 사쓰마번 출신 오오야마 이와오가 이끄는 일본 육군 2사단은

요동반도 남쪽 해안에 상륙하여 도시들을 점령하였고 여순항은 일본군에 포위됩니다.

 

18941121일까지, 일본군은 여순항을 점령하였으며 일본군은 여순에 거주

했던 수천 또는 2만명의 시민들을 학살하였는데 이를 여순 대학살

이라 하며..... 18941210일까지 요동의 건양이 일본군 1사단에 점령됩니다.

 

 

한편 전봉준은 청일전쟁이 한창인 1894년 양력 10월 삼례에서 2차 거병을 했는데.... 당시 동학군의

적은 4개니 하나는 조선군이고 두 번째는 지주 양반들이 조직한 민보군이며 세 번째는 보부상

이고 여기에 일본군을 합쳐 4자를 상대해야 했는데, 전봉준은 민보군에 체포되어 일본군에 넘겨집니다.

 

황해도에서 궐기한 동한군 대장은 김구이며 반대편인 지주 양반들의 민보군 대장은 안중근과 그 아버지

안태훈인데.... 안태훈은 황해도 관찰사의 요청으로 산포군을 결성해 박석골 전투등에서 대승해

동학군 토벌의 1등 공신인데아이러하게도 훗날 도망친 적군인 김구를 안태훈이 숨겨주었다고 합니다.

 

 

동학군의 2차 궐기에서 교주 최시형의 명령으로 충청, 강원 그리고 황해 북접 (北接) 세력이

가세하여 동학 병력은 4만이 되었는데 양력 119일 전봉준은 일만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서울을 공격하기 위해 북상해 공주 주변에서는 관군과 여러차례 격돌합니다.

 

동학군은 123일 공주 남방을 3면에서 에워싸는 형태로 전개했으니.... 효포와 능치에서 맹렬한

공격을 하다가 방향을 틀어 경리청 부대가 주둔한 이인을 기습 점령하니 우금치 공격을 향한

교두보를 확보했는데..... 동학군은 조선군 + 양반들의 민보군 + 보부상 + 일본군 4자를 상대로

싸웠으며 그후 "의병도 관군이 일본군의 협조를 받아 토벌" 하니 조선군과 일본군은 한패입니다.

 

 

공주에 투입된 조선군은 신정희가 지휘하는 순무영과 경리청 등의 병력 3,500명이었으니, 공주

여러 전선에 분산 배치되었고...... 그 중에 우금치 방면에 투입된 병력은 우선봉장 이두황

(李斗璜 ), 좌선봉장 이규태(李圭泰) 가 지휘하는 2개 대대의 병력 1,500 명이었으며,

일본군이 훈련시킨 이진호(李軫鎬) 의 최정예 교도중대 350명도 우금치에 증강 투입 되었습니다.

 

일본군은 청일전쟁 중이라..... 후비병(예비군)인 미나미 고시로 소좌의 19대대가 3개 루트로 한반도 남부에

파병되었으니 공주에 도착한건 우금치 전투 12일 전으로 미나미 대대장과 모리오 마사이치 대위가

지휘하는 2002중대 병력이었는데 일본군 미나미 소좌는 조선군 2,500명과 일본군 200명을 지휘합니다.

 

 

미나미 소좌는 사전에 지형을 정찰한 후에 동학군을 우금치 고개로 유인해 몰살할 계획을 세우는데...

일본군  200명은 후비병이라 대포나 기관총이 없으니 후방에 본부로 삼고 전방에는 조선군을

배치했으니, 동학군이 개활지로 올라오면 1차로 조선군의 대포를 퍼붓고 돌파하면 역시 조선군의

기관총 10자 포화를 퍼부으며 그래도 살아남은 동학군은 조선군의 영국제 신식 소총으로 사살합니다.

 

 

전봉준의 동학 농민군은 화승총 몇자루에 칼과 창에 죽창이 주무기인데 폭 800미터 길이 1,200 미터의 좁은

계곡인 개활지를 우직하게도 40회가 넘게 공세를 계속해 퍼부었지만.... "미나미 소좌의 지휘를  받은

조선 관군" 의 막강한 화력, 즉 크루프제 야포와 개틀링 기관총 십자포화에 쓸려나갈 뿐이라 결국 전멸합니다.

 

 

몇달 전에 동학군에 참패하고 전주를 뺏긴 조선군이 희생자가 거의 없이 일방적으로 동학군을 전멸시킨건 지휘관

이 일본군 장교 미나미 소좌로 바뀐 탓인데, SBS 드라마 녹두꽃에서는 저 미나미 소좌가 전혀 등장하지도

않으며, 일본군이 기관총으로 동학군을 몰살시키는 장면을 클로즈업 하는데 일본군은 기관총이 아예 없었습니다?

 

청일전쟁에서 북양함대는 여순항을 거쳐 산둥반도의 웨이하이 요새로 피신하였으나, 일본

육군의 공격을 받게 되는데, 웨이하이 전투는 육군과 해군이 동원되어

1895120일부터 212일까지 23일간 진행되었고 웨이하이 요새는 일본군에 함락됩니다.

 

 

18953월에는 수도 북경이 바라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였고 35일에는 잉커우 외곽에서 전투가

벌어졌으며, 1895326, 일본군은 타이완(대만) 부근의 펑후 제도를 점령하였고, 329

가바야마 스케노리 지휘하에 타이완에 상륙해 점령하였으니 동중국해는 일본의 영역 처럼 변하였습니다.

 

청나라 요청으로 1895417일 청나라와 일본 사이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청나라는 조선이

완전한 자주독립국(?) 임을 확인하여 조선에서의 일본의 국제적 위치를 확립시켜 주었고, 배상금 2억냥

() 을 일본에 지급하였으며, 랴오둥반도· 타이완, 펑후 제도등을 할양했으며 통상상의 특권을 부여합니다.

 

 

그 결과 청나라는 무력함이 드러나 세계열강에 의한 청나라 분할 경쟁이 더욱 노골화되었고, 일본은  적극적

으로 조선 침략의 야욕을 표시하여 러시아 세력과 충돌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요동 반도는 러시아·프랑스·

독일의 삼국 간섭으로 반환되며... 청나라는 또 막대한 돈을 일본에 지불하니 자기 영토를 거액을 주고 샀다는?

 

조선 정부는 18951월 일본의 압박으로 종전의 청나라 연호를 폐지하고, 왕호를 대군주로, 왕비는

왕후로, 왕세자는 왕태자로 격상하여 호칭하는데, 그후 삼국 간섭에서 일본이 러시아의

요구에 굴복하는 것을 보고는 이제는 청나라 대신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 세력을 몰아내고자 합니다.

 

 

일본은 큰 위협을 느꼈고, 1895년 음력 820(양력 108) 주조선 일본 공사 미우라가

지휘하는 일본군 2개 대대가 경복궁 담을 넘으니 조선군 궁궐 수비대가 겁에

질려 대항하지 않고 모두 도주한 가운데..... 왕후 침소인 건청궁에 난입하여 왕후를 시해합니다.

 

이때 일본군에 의해 동원된 조선군 신식 군대 3개 대대 천수백명은 경복궁에 들어가 일본

낭인들이 민왕비를 찾기 위해 궁녀들을 댓돌에 패대기 치는  비명 소리를 담 밖에서

부동자세로 시립해 듣고 있었으며..... 그 옆에는 대원군도 가마를 타고 들어와 있었습니다.

 

 

그 뒤 대군주에게 왕후의 폐출 조서에 서명을 강요하며 위협하자 대군주가 거부하니 왕태자(순종) 에게 칼을

들이대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일본은 조선을 압박해 을미개혁을 실행하였으나 민중들의 반발로 무산됩니다.

 

18962월 고종이 새벽에 경비병들에게 뇌물을 준 엄상궁의 가마에 발을 치고 앞쪽에는

엄상궁이 앉고 뒤쪽에는 고종이 껴서 타고는...... 러시아 공사관으로 달아나는

아관파천을 감행하니 친일파 내각이 무느지고 이완용등 친러파 내각이 들어서 조선에서

일본의 세력은 감소한지라 이듬해 고종은 덕수궁으로 환궁해 대한제국을 선포하기에 이릅니다.

 

 

한편, 동아시아에 대한 주도권은 지난 3천년간 이어져온 중국으로 부터 일본으로 옮겨졌으며,

청나라 조정과 중국 중심의 중화사상에 치명타를 주었는데 이러한  경향이

1911년 신해혁명으로 이어지며 이후 일본 제국은 러시아 제국과의 치열한 대립을 펼칩니다.

 

또한,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일본의 사상가인 후쿠자와 유키치는 출정한 일본군 병사들을 상대로 이대로

곧장  중국으로 쳐들어가 성경과 길림과 흑룡강 3성을 점령하여 일본의 수중에 넣고, 북경까지

진공하여...... 보물과 고서적 같은 귀한 재보를 손에 넣으라는 글을 연일 시사신보 신문에 발표합니다.

 

 

일본의 초대 총리이자 2번째로 5대 총리직에 있던 이토 히로부미는 청일 전쟁을 승리로 이끈 후에

1896828일에 총리를 사임하고 이듬해 5월 영국 빅토리아 여왕 즉위 60주년 기념

축하 사절로 영국에 갔으며 18981월 일본 7대 총리로 임명되면서 제 3차 이토 내각이 출범합니다.

 

 

그러나 총선후 제 1당이 된 자유당과 제 2당인 진보당이 손잡고 이토 정부의 증세안을 부결시키자 610

의회를 해산했고, 정당 결성의 필요성을 느껴 신당 창당을 추진했지만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반대에 직면하자 6월에 총리를 사임하는데.... 10년 후에는 하얼빈에서 안준군 의사에게 피격되어 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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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원문 : 일본여행 [J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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