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자존심을 높이는 기미 3.1운동에 <민족운동총서 제2집 3.1운동>(민족운동총서편찬위원회, 1980)을 읽어보고 새롭게 조명해야 할 부분에 대해서만 간추려 소개코자 한다.
"처음에 독립선언을 고종황제의 국장날인 3월 3일로 내정했다가 3월 1일로 바뀌었다.(p.76)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중에서 서울에 있던 20여 인은 2월 28일밤 재동(齋洞)에 있는 손병희 집에서 마지막 모임을 가졌다. 여기에서 3월 1일 오후 2시에 탑동공원에서 독립선언키로 했던 것을 태화관(泰華館(明月館支店)으로 바꾸었다.(p.77)
보성사(普成社) 인쇄사장(印刷社長) 이종일은 2월 27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독립선언서 원고를 2만1000장을 인쇄했다.(p.78)
일본 요로에 전달하는 책임을 맡은 임규는 2월 26일 최남선의 부탁으로 독립통고문(獨立通告文)과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를 받아 27일밤 서울을 떠나 3월 1일 오후 도오꾜에 도착했다. ...3월 3일에야 서울의 독립선언 소식을 듣고 곧 그 문서를 내각총리대신과 귀중양원에 우송했다.(p.79)
독립선언 날 민족대표들은 태화관에서 한용운이 간단한 식사(式辭)를 듣고 대한독립만세를 제창하고 체포되었다.(p.81)
파고다 공원에는 팔각정(八角亭)앞에서 경신학교(儆新學校)졸업생 정재용(鄭在鎔)이 독립선언서를 읽고 대한독립만세 선언서를 마쳤다. 총독부에 연락을 해서 잡아가게 했다.(pp.82-83)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에 재일한국유학생들은 도오꾜 간다구(神田區) 고이시가와(小石川)에 있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조선청년 독립단의 이름으로 독립선언햇다.(p.54)
2.8독립선언은 사전에 국내의 지도층과 긴밀한 연락을 취해온 끝에 3.1운동의 시동역할을 일으킨 것이었다.p.56)
미국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의 발표, 재일유학생의 2.8독립선언, 고종황제의 붕어 등이 한데 겹쳐서, 독립운동의 가장 좋은 기회가 조성되었다. 이렇게 하여 거족적인 3.1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p.63)"
여기서 우리는 독립운동의 전개과정을 차근차근히 따져볼 일이 있다.
첫째, 독립선언할 행사일을 3월3일에서 3월 1일로 변경했다는 것에는 큰 의의는 없다고 하겠다. 그러나 그에 따른 다른 준비과정/일정에는 상당한 변화가 요구된다.
둘째, 2월 27일 오후 6시부터 10시까지 독립선언서를 인쇄하였으니, 그 뒤부터 3.1운동하는 시간까지 모두 38시간으로써 전국 8도에 전달할 수가 있는 방법은 무었이었나? 과연 가능했는가?
셋째, 2월 26일이면 독립선언서가 인쇄되지도 않았는데, 일본요로에 전달할 책임자 임규는 최남선의 부탁을 어떻게 받고 27일밤에 서울을 떠났는가? 이 27일밤에 왼쇄된 독립선언문을 가져갈 수 있었겠는가?
넷째, 2월 28일에 독림운동 주동자가 손병희 집에서 마지막 모임을 가졌다면, 다음날이 바로 3월 1일 D-Day이니 만큼 독립운동할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기란 매우 다급해졌다는 것이다. 언제 그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게 일본경찰들이 알지 못하게 연락을 취했을까? 하는 것이다.
다섯째, 독립과 같은 매우 중대한 사건은 공공연하게 하는 행사로 했어야 했고, 비록 비밀리에 준비를 했다고 할지라도 독립선언 행사만큼은 독립문/독립관에서 이루어졌어야 했음에도 왜 탑동공원이었는가? 하는 것이다. 어찌 독립문에 관한 언급은 없었는가? 탑골공원이 바로 독립문이 있는 곳이 아니었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여섯째, 2월 27일 밤에 서울을 떠난 사람이 3월 1일 오후에 일본 동경에 도착했다는데 그것이 가능한 지리적 거리인가? 가능하다면 그곳이 어디어야 하는가?
일곱째, 독립선언 민족대표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부르고 독립운동을 계속적으로 해야함에도 구태여 일본경찰에 연락을 해서 체포해 가도록 한 까닭이 무엇인가?
여덟째, 2.8독립선언이 일본 동경에서 이루어졌다고 했으면서 그 영향을 받아서 조선독립운동 3.1운동이 벌어지게 되었다는 명분은 합당한가? 만약 그렇다면 일본열도에서 일어났던 2.8독립선언한 운동이 어떤 형태였고, 어떤 방법으로 소식이 전해졌기에 조선에서 3.1운동을 일으킨 계기가 되었는가? 육지로 이어진 중화인민공화국 연변에서 사형을 집행당하고, 살해당한 소식도 1년이 지나도 대한민국사람들은 감감 무소식으로 지나고 있는 현대임에 과연 교통/통신 상황이 전혀 다른 90년 전에 가능했겟는가? 어떤 긴밀한 관계를 맺었는가?
하룻만에 조선에서 일본동경까지 갈 수 있는 지리적 위치라면, 대한해협을 건너는 것으로써는 불가능할 것이다. 훼리호가 있었다면 가능했다고? 물론 여객선은 있었다. 그렇다고 과연?
기미 3.1독립운동의 독립선언서 낭독과 관련한 독립운동의 전개과정은 하나씩 좀더 현실적으로 검토/분석해야 될 문제이다.
조선에서 하룻밤 사이에 일본동경으로 갈 수 있는 동경의 위치는 중국대륙 강소성 남경이다.
그리고 진작 <독립신문>에서는 독립정신고취의 목적으로 "독립문"을 세웠다고 했고, 거기에 중요사안을 발표한다고 했다.
그런데 정작 독립선언 당시에 이 독립문에서 독립선언서가 발표되었는가?
33명의 대표였던 한용운은 민족대표들과 함께 서울 "태화관"에서 발표하고 체포되었으며, 정작 독립문에서 발표는 되지 않고 원각사가 있었던 탑골공원에서 정재용씨가 독립선언문을 낭독했다.
그렇다면 이 탑골/파고다공원과 원각사는 어떤 관계이며, 어디에 있어야 하는가?
서울 종로구 지명 속에 "원각사(圓覺社)터가 있는데, 신문로 1가 58의 1, 16, 18로에 걸쳐있고,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터"라고 했다.
이 "신문로(新門路)"를 "새문"이라고 하고 돈의문(敦義門)이라고 하며 서대문(西大門)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종로구에 있어야할 지명이 실제로는 서대문구에 있게 된다.
이 영은문은 사실 모화관(慕華館)이며, <독리신문>에서 "새문 밧"(새문밖: 서대문 비깥)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영은문/연주문/모화관/독립문/독립관/원각사/서대문/새문/신문/탑골/탑동/파고다공원"이란 말은 하나의 같은, 동일 지역에 있어야 할 것들이다.
이것은 독립선언서 낭독이 종로2가에 있는 파고다공원이 아니라, 서대문이 있는 독립문 위치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그런데 원각사(圓覺寺/圓覺社)가 한반도 서울의 종로구에 있든, 서대문구에 있다고 하든, 그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든 그것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종2년(1471)에 세운 원각사비(圓覺寺碑)를 김수온이 지었는데, 그 글 속에 "백악산이 북쪽에 자리잡고, 목멱산이 남쪽에 끼어있다(白岳鎭北 木覓拱南)"고 했다.
이 목멱산이 종남산(終南山)이며, 곧 섬서성 진령(秦嶺)산맥이다. 탑골공원은 곧 섬서성 장안에 있어야 할 이름이다. 그 장안의 경복궁 서쪽 서대문, 돈의문이 있는 곳에서 독립선언서가 낭독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