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의 초대시인] 침묵이 머무는 자리에 시를 부리다 – 김부회 시인
꽃샘추위를 지나 따뜻한 봄이 열리는 3월, 시마을이 초대한 시인은 문단의 여러 층위에서 부지런히 활약해 온 김부회 시인입니다.
그는 시인이자 평론가, 그리고 동시 작가로서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지만, 그 모든 활동을 관통하는 것은 ‘문학의 확장’과 ‘소통’에 대한 열정입니다. 오랫동안 시를 쓰고 새로운 시인을 발굴하며 문학의 자리를 넓혀온 그의 수고로움은 고스란히 그의 시적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김부회 시인의 언어는 소란스럽지 않습니다. 그는 사물과 세계를 설명하기보다는, 그것들이 남긴 상처와 흔적을 가만히 어루만집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시를 읽다 보면 문장 행간에 숨겨진 ‘말하지 못한 마음’들이 더 크게 다가옵니다.
오늘 소개하는 시편들 속에서 시인은 바다와 확률, 불면과 가족의 이야기를 꺼내 놓습니다. 그에게 바다는 단순히 바라보는 풍경이 아니라 멈춤을 배우는 곳(「외옹치에서」)이고, 삶은 확률 게임이 아닌 윤리적인 선택의 문제(「러시안룰렛」)이며, 불면은 우주와 내가 연결되는 고독한 시간(「인썸니아」)입니다.
또한 함께 소개되는 동시(童詩)들은 김부회 문학의 또 다른 깊이를 보여줍니다. 치매나 돌봄 같은 무거운 소재조차 아이의 시선으로 담담하게 그려내는 솜씨는, 감정을 절제함으로써 오히려 더 큰 슬픔과 사랑을 전달합니다.
“나는 지금 제대로 서 있는가?”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위치를 의심하고 질문을 던집니다. 사물과 기억,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되묻는 그의 시적 여정은 읽는 이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만듭니다.
오랜 시간 시마을에서 활동하면서, 창작시 게시판과 비평 토론방 운영자 등을 맡아서 문학발전에 많은 발자취를 남긴 김부회 시인은, 2025년에는 계간《사이펀》의 동시 부문으로 등단하는 등 바쁜 일상 가운데서도 자기 발전을 위한 담금질을 계속 해왔습니다.
장르를 넘나들며 치열하게 문학활동을 해 온 김부회 시인의 열 편의 자선(自選) 작품들이 시마을 가족 여러분의 가슴 속에 긴 여운으로 남아, 위로와 성찰의 시간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김부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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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옹치에서 외 9편
김부회
바다를 대패질하면 하얗게 껍질이 일어납니다
겉을 아무리 깎아내고 깎아내도
바다는 코발트블루입니다
낯보다 더 달려드는 밤바다
멈춤이라는 닻을 내린 파도는
푸르릉 소리만 낼 뿐
더 이상 다가오지 않습니다
외눈 등대가 홍등처럼 흔들리고
키가 큰 국적선들은 어디론가 가고, 오고
여기 오면
바다는 살아 있고
때론 멈춰있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산다는 것은 멈추는 것이라는 것을
바다가 나를 부른 것이 아니라
내가 바다를 불러냈다는 것을
바다의 속살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어쩌면 전생의 나는 갯바위였는지 모릅니다
당신이 파도였듯,
오늘도 사내는 맨발로 모래를 밟습니다
3월의 모래 속이 차갑지 않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툭 튀어나온 항아리 모양의 언덕*에
모랫바닥과 발바닥이 만나
새 길을 만듭니다
그 온화한 신작로 위에 윤슬로 일렁거리는 별들
새로운 바다 냄새가 넘실거리는 바다에서
자신의 겉을 모두 깎아낸 사내,
등을 내주며
오래오래 걸었습니다
다시 못 올 사람처럼
*속초 외옹치항의 지명 유래
러시안룰렛
여섯 개들이 탄창에 다섯 발만 있고
한 발이 비었다면
다섯 개의 목숨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한 개의 행운이라고 할 것인가
방아쇠를 당기기 전까지
하나의 행운을 믿고 살아왔다
믿음이라는 말로 인해 믿음이 된 것처럼
다섯 개의 목숨은 남의 것이라도 되는가
부고장에 인쇄될 인사말 정도라고만 알았을까
한 번의 선택으로 한 개의 행운은 1/6의 확률
사는 내내 절반의 확률 게임이라면서
믿어 온 나를 믿었다는 것이 실패였을 것이다
상속의 상속,
내 대에서 상속의 고릴 끊어야 한다는 생각이 눈을 감는다
천천히 어금니를 깨문다, 꽉
우측에서 좌측, 방아쇠를 당긴다
(혹은 당기지 못할 엔딩의 경우를 포괄한다)
게임 체인져도 못 되는 비열한 남자라는 걸 알기까지
1/10초도 안 걸렸다
하나의 행운에도 나를 걸 수 없다면
다섯 개의 목숨을 구걸해야 하는 것인지
오른손잡이를 흉내 낼 수밖에 없는
왼손잡이의 쉼표 같은 머뭇거림과
방아쇠의 마침표는 공존 중이다
인썸니아*
손끝을 떠난 돌멩이가 호수로 날아가는 포물선
찰나의 한 점은 파문의 중심에서 점점 바깥이 되고 만다
언제부터인가 내게서 나를 찾을 때마다 바람 빠지는 소릴 들었다
헤모글로빈의 흐름이 불규칙해진 심장에서
헤매다 돌아오게 되는 꿈속은 늘 또 다른 계단
층층 밟으며 내려가거나 올라가거나 하는 인썸니아와 나
중심은 밖으로 밀려 나가고 동심원의 바깥이 된다
먼 어떤 날, 엉킨 궤도에서 떨어져 버린
운석 한 점에서 파생된 생명이 신을 만들고
그날로부터 바닥이 되어버린 사람의 서사들
죽음을 알아버린 두려움을 매개체로
우리는 우리가 만들어낸 절대자와 맺은 약속을 수없이 부수곤 한다
벽이 아닌 것을 벽이라 하고, 티끌 한 점을 목숨이라 우기는
그 모든 부정은 시작과 동시에 출발하였다
그것은 궤도의 밖을 빙빙 돌기만 하는 카이퍼 벨트**의
절대온도 속 얼음 유령들과 같은
고립적 군무
삶은 불면의 총합
그 경계 너머로 보일 듯 말 듯 작은 돌멩이 하나
제 궤도를 이탈하고 있다
미처 규정하지 못한 수많은 말의
종결어미가 알을 품을 때마다
내 꿈속의 명왕성 하나가 떨어져 나간다
* 불면증
** 해왕성 바깥쪽에서 태양계 주위를 도는 작은 천체들의 집합체. 명왕성도 여기에 속해있다
도비순설徒費脣舌*
한참 전, 그녀가 왔다. 갔다
발뒤축마다 고여있는 정적은 침묵의 자폐 현상
온갖 변명이 만장으로 날리는 공중에 싸구려 현수막을 걸었다.
사람을 찾습니다
없는 사람을 찾는 척하는 것처럼 우아한 일은 없다
동토의 겨울은 차갑다는 말과
어느 시절 화석이 된 매머드의 만도처럼 휘어진 상아와
이 계절의 ‘지금’이 그렇다. 우아하다
말을 시라고 써놓았을 때, 마치
추앙이라는 척하는, 교만을 닮은 겸손에 대하여 뒤돌아 욕하는
승냥이 떼의 우두머리들, 과 승냥이들
구두점 句讀點 없는 문장이 스피디하게 달린다.
여백이라는 빈칸이 없어야 가치 평가를 못 한다며
개가 웃는다
눈물, 콧물, 빗물, 물과 교배된 감정의 속성들이 뒤섞여
바다가 된다
그 바다에서 미역의 귀가 자랐다.
그녀가 잠긴 바다에 가야 내 귀가 열린다.
소음의 스펙트럼을 통과한 당신만의 침묵이 우아하다
한참 전, 내가 왔다. 그녀가 갔다. 내가 갔다.
모래톱에 벗어놓은 검은 구두
발살바 호흡(Valsalva maneuver)처럼 태풍이 다가온다
폐부종이 심한 날이다
끝내 우리는 서로를 복사하지 못한 채
파쇄기로 들어갔다. 그럴듯한 엔딩이라는 겸손에
우아한 마침표를 찍을 것이다 내일
* 도비순설徒費脣舌 - 헛소리, 잡소리
나는 있고 내가 없는데
간이역의 가락국수와
주전부리 카트를 밀고 다니던 홍익회 아저씨
국밥에 막걸리를 걸친 왁자한 소리들
어느 시절, 아무 역이나 내려 소읍의 풍경에 스며들다
집으로 돌아가기를 되풀이하던
겨울 개찰구
눈발에 젖은 머리를 털며 들어서는 대합실에
쉼표처럼 놓여있는 난롯가
서성거리는 사연들이 불쏘시개가 된 채
추스르다 남은 기다림의 근처에
잠시 머문 여정의 볼을 빨갛게 만들던 온기
혼자 떠나도 여럿이 되는
나의 삼등 완행열차는 이제 없다
별표 전파사가 별 속으로 사라지고
연탄 가게가 하나둘 문을 닫도록
간이역에 버리고 간 우산과
내게서 분절된 나와, 이름 모를 겨울이
낯선 언어로 서로 변주해 보다
돌아오는 열차 창밖, 어둑한 가로등이
마지막 담배 한 개비를 끝내 피우게 하는
그 기억이 나를 버리고
마른기침만 속절없이 폐를 찌를 때
그때처럼 눈이 오는데
내게서 표절된 위안을 기다리며
출구를 더듬거리는 차가운 계절의 음습한 온도와
광장을 노려보는 길고양이의 눈이
얼어붙은 화음을 만드는 어떤 날
입김 위에 써놓은 내 이름이 흘러내리듯
녹슨 철로 위에 나는 있고
내가 없는데
박
해름 참에 걷는 개울가 둑길
흔들거리는 코스모스 사이로 하얗게 드러난 둥근
엉덩이 같은,
어쩌다 해넘이 붉은 혀에 넋 놓고 해찰하다 불쑥 만난
하얀 꽃,
저물녘에 피어 중천에 시드는 것은 차마 부끄러움이 많아서일까
꽃이라 불러달라기엔 혹 같은 박을 달고 있기에 남우세스러웠을까
박,
덩굴이 자라고 풀이 자라고 그 틈에 둥근 박이 올망졸망
그래서,
당신이 소복 입은 여인처럼 다소곳했나 보다
낯의 찬란함보다
밤의 소박을 택했나 보다
꼴까닥
해가 떨어지고
동그란 얼굴이 바람을 타고 달려온다
온통 하얀 덩이들이 모의하듯 말을 건넨다
덩달아, 달
박을 닮았다, 둥글
나도 닮고 싶다 둥글어질수록 둥글어지는 이치를
초가지붕 주렁주렁 박들의 기억이 문득 눈시울을 적시는
내 기억의 개여울보다 빠르게 사라지는,
어머니 둥근 얼굴
뒷방
팽이의 중심이 회전을 멈추거나
길을 찾거나 그늘을 찾을 때마다 내몰려 간 그곳
그곳엔 햇살이 만든 따듯한 물감이 있다
벽과 벽이 어긋나며 만들어 낸 날카로운 모서리를 지나갈 때마다
떨어져 나간 살점들
그때마다 황급히 벽의 안쪽으로 들어와
헤진 살을 소독하고
그리고 싶었던 바다를 그렸다
다리를 가슴 쪽으로 당겨
바닥을 파고드는 파란빛 해수면을 미끄러져 가다 잠이 들곤 했다
방밖엔 더 많은 모서리
날카로운 네모와 네모가 수열처럼 증식했다
벽면의 키가 커질수록 그림의 온도는 어두워졌다
때론 하늘도 그렸다
밤하늘을 꼭꼭 채운 수천 개의 달과
어둠의 귀퉁이 낡은 지문마다
노란 달이 잔뜩 묻어있는 꽉 막힌 뒷방의 구석
뒷방에도 한 방이 있다고 그가 말했다
웅크린 어깨에도 빛은 비추고
허탕 치고 귀항하는 늙은 어부의 잔뜩 굽은 등에도 풍경이 있다며
네 귀퉁이 나무못에 박힌 묘혈 속에
곱게 화장된 차가운 온기가 누웠다
베옷의 까끌한 느낌
부연 연기로 뒷방은 사라지고
분홍 벽지로 새로 도배된 방이
새 주인을 기다리며 짧은 숨을 내쉬고 있다 햇살의 볼은
어제와 같이 선홍이 좀 더 짙어 발그레하다
가고 온다는 것,
적的
익숙하다 어디서 본 듯 들은 듯 흐르는 선율 이미 저승으로 떠난 가수의 허스키한 그가,
이승에서 울고 있다 소음을 달랜 소름이 음표가 되고 미명의 어스름이 노래가 되는 꿈과 꿈,
서로 밀접할 수 없는 등과 가슴의 결계에 내가 있다 소리 속을 흐르는 소리, 망각의 겹철릭을
걸친 소리가 이불 속을 뭉근하게 데운다 창틈으로 귀를 세울 때마다 선명하게 부조 浮彫
되는 소리, 몸이 떠난 자리에 마른 목소리만 꿈결인 듯 흐른다 그가 떠난 것인가 내가 남은
것인가, 지금이 어제였듯 오늘이 내일이 될 수 없는 여기 어디쯤 거슬러 갈수록 더 신선해지는
시간의 모호한 선도 鮮度를 더듬거린다 여적 살아있는 눈꺼풀의 몽롱을 지금도 기필코 적 的
하는 그대와 그대의 그대, ‘와사삭’ 자궁을 밟고 나오며 들었던 기저 모를 오래된 비명만 손에
쥐고
(동시)
몰라 할머니
할머니 저예요
누구세요?
할머니! 하다
할머니는 누구세요?
‘나? 몰라!’
치매 앓는 할머니 눈웃음
하루에도 몇 번씩
할머니에겐
아빠도 엄마도 누나도
처음 보는 사람,
새로 생긴 가족
날마다 새로 태어나시는
할머니
오래오래 사시라고 주름투성이 손
꼬옥, 잡아드리면 또
누구세요?
달걀을 굽다
갑자기 할머니가 아파
할머니 댁에서 하루 주무시고 오신다는 엄마
식탁 위 남은 빈 그릇들
잔뜩 남아있는 반찬 찌꺼기들
개수대 가득 담긴 설거질 끝냈다
집안일 시킬 때마다
심통 부렸던 내 얼굴이
닦인 그릇에 볼록하게 비친다
먹고 일어나면 그만이었는데
엄마는 말없이 헹구고 있었나 보다
빈자리에 남아있는 잔소리들
간단하게 아침을 준비하려다 문득
고픈 뱃속에 떠오른
맥반석 달걀
전자레인지에 날달걀 두 알을 돌렸다
철퍼덕
집 무너지는 줄 알았다
넘어지면서
식탁 모서리에 무릎을 박았다
너무 아파
엄마 빈자리가 조용하게
웃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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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회 프로필
2011년 <창조문학신문> 신춘문예 당선/제3회 《문예바다》 신인상 /제9회 중봉문학상 대상/제12회 《모던포엠》 최우수 평론상 /제17회 《문학세계》 문학상 평론 부문 대상/가온 문학상 대상/목월 문학상/제1회 평택디카시 공모전 최우수상/ 외 다수 수상. 2025 계간 사이펀 신인문학상 (동시), 호미곶 문학상, 시집 『시답지 않은 소리』『러시안룰렛』평론집 『시는 물이다』 외 공저 동인지 『시선』등 20여권 출간/ 계간 문예바다 편집부주간/ 월간 모던포엠 편집위원/도서출판 사색의 정원 편집 주간/김포신문, 대구신문 시 전문 해설위원 및 『시인의 눈으로 본 세상 만평』『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신문 연재 중/계간 문학리더스, 계간 삼광문학 평론 연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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