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문화유산답사

마이산 자료

작성자무심재|작성시간05.01.01|조회수217 목록 댓글 0

진안 마이산 답사자료

 

마이산의 개요

 

마이산은 전북 진안에 있다. 전주에서 40분 정도의 거리다. 마치 거대한 말의 귀를 세워 놓은 듯한 모습으로 인해 마이산이란 이름이 붙었는데, 멀리서 보이는 기이함만큼이나 산 속에서 만나는 신비로움이 많다.
과학의 시대를 여는 21세기의 벽두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한국의 불가사의 현상을 찾아 떠나보자.

"동으로 달리는 천마 이미 지쳤는가 / 갈길을 먼데 그만 쓰러지고 말았구나 / 연인은 몸통만 가져가고 귀만을 남겼는가 / 쌍봉으로 변하여 하늘에 솟아 있네 " 이성계가 마이산을 먼발치서 보고 지은 시다. 훗날 태종이 이 곳에 들러 부왕의 시를 보고 '마이산'이라 명명한 것이 지금 에 이르고 있다고 전한다. 이성계의 개국에 얽힌 설화가 있는 산은 두곳. 남해 금산과 바로 이 마이산이다. 금산은 태조 이성계에게 나라를 얻을 수 있는 힘을 줬고, 마이산은 이성계에게 나라를 세우라는 언지 를 주었다는 곳이다. 꿈에 선인이 나타나 금으로 된 자(金尺) 을 주며 '이 금척으로 삼한 강토를 헤아려 보라'했다. 그 후, 고려 우왕 6년 전라도 운봉에서 왜구 '아지말도'를 물리치고 개선길에 들른 이성계는 마이산을 보고 깜짝 놀란다. 산의 모습이 옛날 꿈속에서 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았던 바로 그곳이었다는 거다. 때문에 조선초에는 마이산이 조선조 창업의 영산으로 추앙받았다. 태종 또한 이 산 아래서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제사를 올렸고, 그게 지금까지 내려오는 마이산신제의 시원이 되었다.

마이산은 멀리서 보는 형상만큼이나 가까이서 살펴보는 모습도 신기하고 놀랍다. 마이산 여행에서 볼거리는 숫마이봉, 암마이봉이라 불리는 두 봉우리와 80여기의 탑이 오밀조밀하게 자리잡고 있는 탑사. 탑사는 암 마이봉 언저리에 자리잡고 있는데, 80여기의 탑이 오밀조밀하게 자리잡고 있는게 신비롭기 그지없다. 이 탑은 이갑용 처사가 무려 30년에 걸려 만든 것으로 본래는 120여기가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80여기만 남아 있다. 이 탑들은 8진도법에 따라 자리를 잡았다고 하고, 아무리 강한 비바람이 몰아쳐도 작은 돌조각 하나 끄덕하지 않는 다는게 여간 신비롭지 않다. 특히 이 탑주위에 물 그릇을 놓아두면 물그릇 중앙이 송곳처럼 삐죽이 쏫아 오르는 현상, 즉 거꾸로 고드름이 열린다.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이곳은 찬 기운이 위로 쏟구치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다. 어쨌거나 거꾸로 고드름이 여는 탑사 전체가 한국의 불가사의로 기록된다.
탑사에서 위로 조금 더 올라가면 마치 커다란 코끼리 형상을 하고 있는 숫마이봉이 보이고 그 아래에 은수사가 있다. 은수사에서는 북을 치면 1년 동안 무병장수 한다는 큰 북을 직접 쳐 볼 수 있다. 은수사에서 왼쪽에 있는 암마이봉에는 마치 사람의 발자국같은 큰 형상들이 보이는 데 자연침식현상으로 생긴 것인데도 퍽이나 신기롭다. 은수사 왼쪽으로 암 마이봉과 숫마이봉 사이를 오르는 길이 있다. 10분 쯤가면 두 봉우리의 중간 정상이다. 정상에서 뒤로 난길을 따라 내려가면 바로 북부주차장. 정상에 올라보면 누구나가 느끼는 것 이 산의 모양보다도 산을 형성하고 있는 구조물에 대한 신기함이다.
마이산은 마치 어마어마한 량의 시멘트를 부어 만든 인공구조물 같다. 마이산를 돌아보고 내려오면서는 금당사로 가보면 된다. 지금은 작은 산사에 그치고 있지만 예전에는 상당히 큰 절이었단다. 이곳에 또하나의 한국 유일물이 있다. 바로 대웅전에 모셔져 있는 삼존불이다. 는 이 불상의 예술적인 가치나 미려한 조각은 접어 두더라도 그 소재 만큼은 잘 살펴 볼일이다. 불상자체가 천년이 넘은 하나의 커다란 통은행나무이기 때문이다. 높이 230cm, 가로 165cm의 이 불상을 조각하려면 얼마나 큰 은행나무를 필요로 했을까? 이런 형태의 불상은 우리나라에 이곳 하나 뿐이라고 한다.

 

마이산의 지질

마이산은 1979. 10. 16.전라북도에서 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으며 공원면적은 17.221km2로 큰편은 아니다. 구역으로는 진안읍 5개리, 마령면 4개리에 걸처 있으며 많은 문화재와 볼거리를 기지고 있다 마이산은 산 자체가 국가지정 명승 제 12호로 지정되었고, 수성암으로 이루어진 673 m의 암 마이봉과 667 m의 숫 마이봉의 두 봉우리로 형성되어있으며 신라시대에는 서다산, 고려시대에는 용출산이라 했고, 조선시대부터 말귀를 닯았다 하여 마이산이라 불리어 왔다. 마이산은 중생대 후기 약 1억년전까지 담수호였으며 대홍수시 모래 자갈등이 밀려 호수를 메우고 물의 압력 의하여 이루어진 수성암이며 약 6 ~ 7천만전 지각 변동에 의하여 융기되어 마이산을 이루었으며 지금도 민물고기 화석이 간혹 발견되고 있으며 자연이 많든 최대의 걸작품이다.


타포니지형

마이산을 남쪽에서 보게되면 봉우리 중턱 급경사면에 군데군데 마치 폭격을 맞았거나 무언가 파먹은 것처럼 움푹 움푹 파인 많은 작은 굴들을 볼 수 있은데 이를 타포니 지형이라고 한다. 풍화작용은 보통 바위 표면에서 시작되나 마이산 타포니 지형은 풍화작용이 바위 내부에서 시작하여 내부가 팽창되면서 밖에 있는 바위 표면을 밀어냄으로써 만들어 진 것으로 세계에서 타포니 지형이 가장 발달한 곳이다. 마이산의 타포니는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형성된 것이 아니고 특수한 기후조건 즉 신생대 제 4기의 빙하기와 뒤에 온 한냉기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마이산이 된 산신부부

아득한 먼 옛날 큰 죄를 지어 하늘 나라에서 쫏겨난 한 산신 부부 내외가 이 세상에 살고 있었다. 그들은 인간 세상에서 두 아이를 낳고 기르며 살면서 수 억겁 동안 속죄의 시간을 보냈다. 오랜 속죄의 날들을 보내고 드디어 하늘 천상계로 승천의 기회가 열렸다. 이때 남편 산신이 아내 산신에게 말했다.
"이제 하늘 나라로 다시 올라갈 때가 되었소. 그러나 우리가 승천하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면 부정을 탈것이니 사람들이 깊이 잠든 한밤중(자시11시~01시)을 택해 승천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그러나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한밤중은 너무 무섭습니다. 게다가 밤중에 일을 치르자면 너무 피곤합니다. 그러니 푹 자고나서 이른 새벽에 올라가십시다. 누가 꼭두 새벽에 잠 안자고 우리들이 승천하는 것을 훔쳐보고 있겠습니까? "
남편 산신은 일을 그르칠까 걱정되었지만 아내 산신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오랜 속죄의 날들이 무위로 돌아갈지도 몰라 불안했지만 이튿날 새벽에 승천하기로 마음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이튿날 새벽, 산신 부부는 마침내 승천을 시도했다. 하늘을 향해 산이 쑥쑥 솟아가고 있을 때 아랫마을의 어느 부지런한 아낙네가 치성을 드리기 위해 정한수를 뜨려고 우물을 찾았다가 그 현장을 목격하고 말았다. 아낙네는 생전 처음 보는 그 광경에 놀라 비명을 질러 댔다. 이 소리에 부정을 탄 산신부부는 결국 꿈에도 그리던 승천을 하지 못하고 그 자리에 굳어져 지금의 암수 마이봉이 되었다고 한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남편 산신은 아내 산신을 걷어차고는 두아이를 빼앗아 버렸다는 뒷얘기도 전한다. 그래서일까? 지금의 수마이봉(해발 673m)은 두 아이를 거느리고 있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고, 암마이봉(667m)은 수마이봉을 등지고 앉아 한없이 고개를 떨군 채 후회하는 듯한 형상을 취하고 있다.


천황문과 화엄굴약수

암마이봉과 숫마이봉 사이에 있는 고개 정상이 천황문이다. 이 곳은 백두대간에서 호남. 금남정맥으로 이어지는 주능선이며, 금강과 섬진강의 분수령으로 산태극 수태극의 중심지이다. 천황문에서 숫마이봉 쪽으로 100m쯤 올라가면 중턱에는 하나의 동굴이 있는데 이곳이 화엄굴이며 사시사철 맑은 석간수가 흘러나오며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지 않는다.
이 약수를 마시고 정성을 다하여 기도를 드리면 옥동자를 얻을 수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으며 이는 숫마이산의 정기를 마심으로써 아들을 간절히 바라는 옛 어머니의 정성이 담겨 있을 것이다.또한 이 약수를 마시며 공부를 하면 과거에 등과한다는 전설도 같이 전해온다

 

은수사

은수사는 현재 조계종단 소속인데 조선 초기에는 상원사(上院寺)라 했고, 숙종 무렵에는 상원사는 없어지고 사지만 남아 있었는데 그 뒤 누군가 암자를 지어 정명암(正明庵)이라 했다. 은수사 황혜수(黃惠修) 주지스님에 의하면 '正' 은 5획으로 오행, '明'은 일월이므로 정명암 이란 이름은 음양오행의 순환을 나타낸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무튼 정명암도 퇴락하여 없어졌다가 1920년에 이주부(李主簿)라는 분에 의해 중창되었고, 이 때 은수사(銀水寺)로 개칭되었다.
'은수사'란 이름은 한글학회의<지명총람>에 의하면, 태조가 이 곳의 물을 마시고 물이 은같이 맑다고 하였으므로 지어진 것이라 한다. 은수사는 본시 불당 겸 요사채로 쓰인 건물과 그 위 산신도각(山紳度閣)이 있었을 뿐이었으나 근래 극락전, 태극전, 대웅전과 요사채를 건립하여 바야흐로 대 가람으로 도약을 기약하고 있다.
이 은수사에는 국내 최대 크기였던 법고(1982년 제작)가 소장되어 있다. 한편 조선 초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상, 삼신할머니상이 상원사지에서 출토되었다. 또한 은수사 경내에는 천연기념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마이산 줄사철 군락이고(천연기념물 380호), 또 하나는 은수사 청실배나무(천연 기념물 386호) 이다. 이 부분은 천연기념물에서 설명된다.


은수사 역고드름

처마끝에 매달려 아래로 자라나는 고드름이 정한수 그릇 안에서 밤사이 죽순처럼 위로 쑥쑥 자라난다면 쉽게 납득하겠는가. 전북 진안 마이산(673m)에 가면 이 같은 겨울철 미스터리를 목격할 수 있다. 탑사뒤 암수마이봉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은수사의 '역고드름'이 그것이다.
절 앞마당,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청실배나무 앞 약수터에 정한수를 떠서 밤새 놓아두면 그릇 속에서 고드름이 솟는다. 어른 손가락 굵기에 길이가 10∼15㎝ 정도. 가끔은 길이 30㎝, 직경 3cm에 이르는 큰 것이 생길 때도 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신비감'을 먼저 떠올리지만 은수사를 지키는 황씨 할아버지(75)는 "마이산의 특이지형에 따른 자연현상"이라고 해석한다. 암-수 마이봉, 나도 마이봉 등 봉우리 사이로 불어닥친 바람이 은수사 절터에서 만나 끊임없이 크고작은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는 과정속에 빚어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물이 얼듯 말듯 한 상태에서 회오리바람이 살짝 불어 살얼음이 조금 위로 올라가 바늘같은 작은 빙침이 생겨난다. 이후 점차 그릇안 물이 얼고 팽창하면서 빙침으로 물이 서서히 몰리며 조금씩 고드름의 형상을 이루게 된다. 역고드름이 날마다 생기는 것은 아니다. 풍향, 풍속, 기온(영하 10도) 등 자연조건이 일치되어야만 하고, 100여개의 정한수 중 2~3개 정도에서만 역고드름이 생긴다.
역고드름 앞에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데, 은수사에서는 한겨울에 만들어진 역고드름을 냉동실에 보관해두었다가 봄철까지 구경시켜주고 있다.


이성계 역성혁명 꿈심은 ‘神木' 은수사 청실배나무

고전소설 춘향전에 보면 이도령이 춘향이 집을 찾아가 첫날밤을 치르기 전, 월매가 장만해준 산해진미 주안상에는 여러 과일이 올라와 있다. 열녀 춘향 수절가에는 ‘청슬이’, 이고본(李古本)춘향전에는 ‘청술레’라고 한 과일이 바로 청실배(靑實梨)다.

먼 옛날 산에서 그냥 따먹기만 하던 돌배는 삼한시대부터 집 주위에다 한두 포기씩 심으면서 과수로 자리매김을 해나갔다. 세월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돌배나무 중에서 특히 맛좋은 열매가 달리는 나무를 골라 심고, 청실배나무란 새로운 이름을 붙여 아껴왔다. 300여년 전까지 이도령도 춘향이도 즐겨 먹던 청실배나무는 지금은 남원 땅에서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서양 문물과 함께 들어온 ‘개량배’에 밀려 사라진 것이다. 다행히 남원에서 그리 멀지 않은 전북 진안에 오랜 전설을 간직한 청실배나무 한 그루가 용케 살아남아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둥그스름한 바위 덩어리 두 개가 커다란 산을 이루는 마이산 자락에 은수사란 자그마한 절이 있고, 그 앞마당에서 이 귀한 나무를 만날 수 있다.
키 15m, 가슴높이 줄기 둘레가 2.8m에 이른다. 흔한 고목 품새처럼 옆으로 퍼진 것이 아니라 솟아오른 마이산과 경쟁하듯 훌쩍 큰 키로 자라고 있다. 봄날이면 수 십만개의 하얀 꽃을 뒤집어쓰고 가을이면 주먹크기의 배가 달리는 어찌 보면 평범한 배나무처럼 보일 따름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유일한 청실배나무다.
이렇게 서울에서 남원까지 우리나라 곳곳에 널리 자라던 청실배나무가 멀리 진안 땅에 살아남게 된 데는 이성계와의 깊은 인연 때문이다. 서기 1380년 전북 운봉의 넓은 들에는 이성계가 이끄는 군사들의 화살에 수많은 왜구의 시신이 쌓여갔다. 몇년째 왜구의 침입으로 남부지방이 쑥대밭이 되도록 당하기만 한 조선관군은 그들의 노략질에 종지부를 찍고 대승을 거두는 순간이다. 개선장군이 된 그는 백성들의 환호를 받으며 수도 개경으로 향한다. 훗날 임금이 될 디딤돌을 마련한 그는 예견이라도 한 듯이 곧장 내다르지 않고 명산 마이산으로 들어갔다. 천지신명에게 기도를 끝낼 무렵, 은수사 마당에 청실배나무 한 그루를 심고 이곳을 다녀갔다는 증표를 남긴다. 나라를 일군 이성계가 손수 심었다니 조선왕조 내내 보호받은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 흘러간 620년 세월을 나이테에 묻어두고 새 천년을 다시 살아가고 있다.
청실배나무가 자라는 곳은 산밑에서 꼭대기로 바람이 불 때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여름에는 나뭇가지가 흔들리면서 잎들이 서로 마찰하여 만들어내는 소리는 신비감마저 준다고 한다. 겨울철에는 나무 밑동에다 물 담은 그릇을 담아두면 아래에서 위로 곧추서는 역(逆)고드름이 생기기도 하는 특별한 나무다.


마이산 탑사 개요

자연이 만든 최고의 걸작이 마이산이라 한다면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은 역시 마이산의 탑군이 아닌가 생각된다. 마이산 탑군은 전라북도 지정 지방기념물 제 35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다.
자연석을 차곡차곡 쌓아 마치 송곳처럼 정교하게 만든 탑들은 태산처럼 위엄을 느끼게 한다. 주탑인 천지탑은 부부탑으로 2기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13.5m이고 남.북으로 축조되어있다.
주탑인 천지탑을 정점으로 조화의 극치를 이루며 줄줄이 세워저 있고 팔진법의 배열에 의하여 쌓았다고 전해지며, 당초에는 120기 정도가 있었으나 현재는 80여기가 남아있다. 맨 앞 양쪽에 있는 탑을 일광탑. 월광탑이라 하며 마이산 탑군은 태풍에 흔들리기는 하나 무너지지 않는 신비를 간직하고 있으며 탑들을 보면 양쪽으로 약간 기울게 쌓여저 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 이는 조탑자가 바람의 방향등을 고려하여 축조한 것으로 보인다

 

마이산 탑사

수박크기의 돌덩이에서 부터 엄지 손가락만한 작은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돌에 돌을 포개 얹어 크고 작은 외줄 돌탑을 80여개 쌓아 만든 석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는 곳 마이산 탑사(馬耳山塔寺).
높이 15m, 둘레 20여m의 거대한 돌탑도 즐비하다. 접착제를 쓴 것도 아니고, 시멘트로 이어 굳힌 것도 아니며, 더더구나 홈을 파서 서로 끼워 맞춘 것도 아니다.그런데도 1백여년의 풍상속에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덕 없이 견고하게 버티고 서있는까닭은 무엇일까?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보기 드문 불가사의로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이 신비로운 얘기는 1백여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이 탑을 쌓은 이갑룡 처사(본명 경의, 호 석정)는 1860년 3월 25일 임실군 둔남면 둔덕리에서 태어난 효령대군 16대 손이다. 수행을 위해 25세때 마이산에 들어와 솔잎으로 생식을 하며 수도 하던중 신의 계시를 받는다. "억조창생 구제와 만민의 죄를 속죄 하는 석탑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이처사는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전봉준이 처형되는 등 시대적으로 뒤숭숭했던 어두운 세속을 한탄하며 백성을 구하겠다는 구국일념으로 기도로써 밤을 보내고 낮에는 탑을 쌓기 시작했다. 이 처사는 탑을 쌓기 위해 30여년을 인근 30리 안팎에서 돌을 날라 기단부분을 쌓았고, 상단부분에 쓰인 돌은 각처의 명산에서 축지법을 사용하여 날라 왔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모아온 돌로 팔진도법과 음양이치법에 따라 축조를 하고 상단부분은 기공법(氣功琺)을 이용하여 쌓았다.
위치와 모양이 제각기 음양오행의 이치에 따라 소우주를 형성하고, 우주의 순행원리를 담고 있다. 외줄탑 가운데 있는 중앙탑은 바람이 심하게 불면 흔들렸다가 다시 제자리에 멎는 신비한 탑이다. 돌에도 암수가 있어 암수의 조화를 이뤄 쌓은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오행을 뜻하는 오방탑(五方塔)의 호위를 받고 있는 돌탑의 우두머리 천지탑(天地塔)은 제일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규모 또한 가장 큰 한 쌍의 탑이다.

이와 같이 형성된 석탑들이 1백여년의 풍상을 하나같이 지켜오고 있는 것은 정녕 부처님만이 아실 불가사의가 아닐 수 없다.

이 불가사의에 더하여 마이산 탑사에는 또 하나의 신비가 있다. 바로 역고드름이다.
겨울에 정한수를 떠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뻗쳐 오른다. 정성이 깊으면 깊을수록 그릇 속에는 이처사가 쓴 신서가 박힌다. 이 신서는 이처사가 신의 계시를 받을 때마다 그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부적과 같은 형태도 있으며 30여권의 책에 전해 내려온다. 사적비에는 언젠가 이 글을 해독하는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으나 아직까지는 없다.

마이산 탑사아래로 500m 지점에 위치한 관광지가 있으니 이것이 탑영제 벗꽃길이다. 이곳엔 봄마다 저수지를 따라 벗꽃길이 펼쳐지는데, 본래 관광풍치 조성을 위해 축조 되었다. 이곳에도 전설이 전해지는데 이태조가 백일기도를 드린 후 영험을 받았다고 한다.
탑영제에서 탑사를 올려다보면 산에 가리워져 탑은 보이지 않지만 암마이봉과 나도산 봉두굴이 유연한 자태로 탑영제 수면을 비추고 있다. 이곳은 큰 가뭄이 들때에도 물이 마르지 않아 방생의 최적지로 꼽힌다. 현재 이곳에 주석하고 있는 혜명스님은 바로 이갑룡 처사님의 3대손이다. 혜명스님위로 2대손인 도생 처사님이 이곳에서 수도하였고 지금은 혜명스님과 4대손인 진성스님이 함께 마이산 탑사를 지키고 있다.
스님은 처음엔 신비감과 호기심에 관광차원으로 찾은 사람들을 부처님과 연을 맺어주는 일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포교라 강조하면서 "마이산 탑사를 찾는 많은 불자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불교의 연을 잇는 관광 사찰로 더욱 발전시키겠다."며 "이제 불교는 산중불교에서 대중불교로 활성화 되어야 한다. "고 설명하면서 조용한 미소를 짓는다.
또, 4대손인 진성스님과 함께 3억원을 투입, 미륵당 앞에 나한전을 짓고 종각, 요사채, 화장실 설치는 물론 주위 조경과 사찰 환경정화 사업을 사업을 완공 하였다. 혜명스님은 사회봉사활동에도 적극적이다. 마이산 탑사문화재관리소장, 진안경찰서 치안행정자문위원회 회장, 진안 애향운동본부 본부장 등(진안애향본부장 및 마이산탑사 갑룡장학회를 10여년동안 운영하고 있으며 곧 장학재단도 설립중이며) 10여개가 넘는 사회사업직책을 가지고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고 있다.

 

탑사의 불가사의

접착제를 쓴것도 아니고, 시멘트로 이어 굳힌 것도 아니며, 더더구나 홈을 파서 서로 끼워 맞춘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1백여년의 풍상속에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덕없이 견고하게 버티고 서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100여 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이 탑들이 결코 쓰러지지 않았다. 탑들이 위치한 곳은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의 계곡인데 이곳에는 유난히 세찬바람이 사시사철 불어오고 있다. 지형적으로 앞쪽이 넓고 뒤쪽이 좁은 계곡이어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 오는 것이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불어오면 옆 언덕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웬만한 나무는 뿌리째 뽑혀 나가만, 이 곳의 돌탑들은 조금씩 흔들리기만 할뿐 쓰러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무런 접착물 없이 서로 맞닿아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놀라운 돌탑의 축조비법은 무엇이고 100년 풍상을 견뎌낸 돌탑의 신비는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낮에는 돌을 날으고 밤(자시)마다 하루 한 개씩 정성으로 올렸고, 음에 날에는 양에 돌을 올리고 양에 날에는 음에 돌을 올렸다. 또한 탑을 쌓기 위해 자리를 잡고, 다음 올라갈 음,양돌을 앞에 놓고 좌선을 하면서 천기를 받아 지기를 올리고 온 몸에 기를 넣어 자시에 정확히 단번에 올려 작은 돌맹이로 고정시킨다.
탑을 쌓은 것은 2가지 방식이 있는데 피라밋 형식과 일자형 탑인데 피라밋 형식의 탑은 팔진도법에 의해 타원형으로 돌아 올라가며 밖으로 돌을 쌓고 안으로 자갈을 채우고 그속 가운데 비문을 넣고 올라가며 쌓은 것이다. 또한 맨 꼭대기 마지막 돌을 올리는데는 100일의 정성의 기도 후 올렸고 피라밋 상단부분에는 잔돌로 자리를 만들고 그곳에 우물정(井)자로 나무를 고정시킨 후 그 위에 올라서 음양돌을 올렸다 한다.
정성도 정성이지만 이갑룡의 진법과 기공법등 축지법의 힘이 사용되었다 한다. 이갑룡 처사는 축지법을 39살부터 터득하였는데 이때부터는 몸이 가볍고 사쁜히 다니는등 아무리 무거운 돌도 '으흑음!' 하고 소리를 내면 거뜬히 돌을 들어 올렸다 한다.
이 곳에 사는 주민들의 이야기는 이갑룡 처사는 매일 다람쥐 바뀌 돌 듯 돌만 들고 다니거나 산 속에서 혼자 앉아있거나 암,수 마이산을 오르내리고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에 강목천을 묶어 놓고 건너갔다 왔다 하는 것을 본 이도 있다고 한다.
또한 전주를 단숨에 갔다 왔다하는데 당시 진안경찰서장이 찾아와 면담을 하고 전주에 갔는데 벌써 이갑룡은 전주에서 볼일을 다 보고 진안으로 오는 것을 보고 "아니 언제 전주에 오셨습니까?" 물으니 "당신이 나가고 나서 바로 출발해서 왔네" 하니 그 사람은 아니 놀랄 수 없다고 한다. 이렇듯 이갑룡의 축지법에 대해 많은 이들이 목격하고 이 탑을 쌓는데는 축지법이 아니고서야 이러한 불의의 명작을 축조할 수 있겠나 생각된다.
이와 같이 불가사의한 이 현상은 이갑룡 처사의 정신력이라 할 수 있겠다

 

이갑용 처사

갑룡 호 : 석정 (본명: 이경의, 자: 갑룡, 호: 석정)
1860년 임실군 둔덕면 둔기리에서 전주이씨 효령대군 16대손으로 출생했던 석정의 본명은 이 경의 호는 이갑룡이라 한다. 구한말 시기적으로 어려운 때에 지혜는 총명했지만 가난한 양반 집안이므로 서당에 다니지 못 하고 창호지 틈으로 세어 나오는 글소리로 학문을 읽혀으며 군불에 나무를 집히고 앉아서 나무 가락으로 땅 바닦에 글을 쓰며 틈틈이 일하시면서 공부에 열중하시었다.
아주 어릴 적에 갓 돐을 넘기시고 제사날에 조상 제사상에 홀로 술을 올리고 절을 하면서 침묵과 함께 기도를 한참 동안 하셨다 한다.
남달리 어릴적부터 효성이 지극 했으며 같은 동내에서도 이경의를 이길 자가 없었다. 한다. 어릴적부터 효성이 지극한 갑룡은 부모님이 자리에 누워 임종하실 때 이 갑룡은 자기의 손가락을 조금 잘라 피를 먹이시어 약 석달 간을 더 사시게 하셨다 한다.
16세때 부모님을 여의시고 부모님 묘소 옆에서 움막을 짖고 3년동안 시묘살이를 하시다 인생의 삶과 죽음의 인생 허무무상을 탄식하시다가 19세때 시묘 살이를 마치고 전국을 만행 하시면서 속세를 떠나셨다 한다. "疊疊山中, 萬康漁萬來"라 '오직 홀로의 산과의 대화요,강을 건너도 또한 물고기와의 대화로다.'
외로움을 달래며 이산 저산 이절 저절에서도 자리 잡지 못하시고 결국 고향에서 농사나 지으며 인생을 살아야지 하며 전국을 누비시다가 거창에서 장수로 임실 둔덕으로 넘어가실 무렵 어느 두 봉우리가 이 갑룡을 부르기 시작한 것이였다.
이때가 1885년경 나이 25세 되던해 젊음을 이곳에 묻으라 하신다. 유,불,선에 바탕을 두고 龍華世界의 실현이 이상적이라 믿고 구도의 행각 끝에 수도에 들어갔다.
마이산에서 남자산이라는 지리산이 200리, 여자산이란 계룡산이 200리 그 한복판의 마이령봉은 남녀 두 봉우리가 역역하고 그 절묘함이어느곳에 비할 수 없어 그 정기로 사바세계를 개척하리라 마음먹고 중생 구제를 위해 고행을 자처하며 1기,2기, 쉬지 않고 탑을 쌓기 시작했다.
세속과는 완전 등진 채 낮에는 돌을 날랐고 밤에는 기도하다 자시에 돌탑을 하루에 한층씩 30여년동안 인간의 괴로움을 달래기 위해 108기의 탑을 쌓으면서 108 번뇌를 해탈 하고자 108개의 석탑을 구상 자연석을 탑촌으로 하나둘 올려놓으면서 뭇 중생이 짖는 죄를 대신해 비는 기도로 일관하며 탑을 완성될 동안에는 사람이면 고독을 느껴서라도 하산의 길을 떠나 세속에 묻혔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람들의 힘이라고 믿기 어려울 만큼 큰돌로 기초를 쌓고 그 위에 돌탑을 완성 했으니 이미 석정은 그때부터 영의 힘에 의해 그 같은 일을 했을 것이라고 탑을 보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더욱이 받임대(기둥) 하나 없이 가파른 탑신을 축지법으로 오르내리며 누구의 도움 하나 빌리지 않고 돌탑들은 전국의 명산 각지를 순례할고 돌아올 때 한 덩어리의 돌이라도 배낭에 지고 와서 탑신에 섞어 쌓았다고 한다.
이러한 자연석 석탑은 세계조탑사에 비추어 그 유예를 찾아볼 수 없는 자연석으로 탑군을 축조하였는데 주탑인 천지탑은 같은 형태로 원형의 기단부로 부터 70%도 정도로 타원형인 포물선을 그리며 유유히 뻗어 상륜부에 해당하는 윗 부분은 잔석으로 괴여 힘이 눌리고 흔들릴 때 쿳숀 역할을 하고 자연판석을 그대로 올리고 높이 15m로 쌓아 올렸다 한다.
원추형으로 쌓은 두 천지탑은 알맞게 조화를 이룬 수법은 역학적인 면에서 보다 자연석으로 조탑했다는 기발하고 독창적인 착상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이 탑의 신비와 가치는 그러한 축조 기술보다 하나 하나의 조형미와 전체적인 조화미에서 오는 감동인데 펑퍼진 기단부로부터 유연히 뻗어 오른 선의 미와 육중한 탑신의 중량감에서 탑봉의 예각이 주는 섬세하면서도 신비한 아름다움을 주는 법열이다.
더군다나 돌로 이어지는 패턴은 절묘함과 처연한 아름다움을 더하고, 높고 낮고 크고 작은 탑의 배치는 단순한 가운데 다양한 변화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모든 탑군은 저마다 입부리를 하늘을 향해 애절한 염원을 소원 하는듯 하다.
자연석과 같은 암반으로 형선된 마이산의 산세를 이용하여 이 공간에 높고 낮고 체감율이 뾰쪽한 탑과 원추형의 탑을 알맞게 조화시켜 황홀하게 구조한 배치의 솜씨는 범중생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천지탑, 일광탑, 월광탑, 약사탑, 중앙탑, 월궁탑, 용궁탑, 신장탑 등 배열은 팔진도법을 적절히 이용하였으며 각각 다른 탑형은 음,양의 이치르 살렸으며 높고 낮은 구조는 환생과 오행의 이와 조형미의 극치를 이루고 신비의 전경을 이루게 했다. 이와 같은 조탑의 근본적인 원리보다는 갑룡의 천부적인 미적 감각이 뛰어 났던 것이며 이러한 조형 의욕이 작품으로 형상화하였을 것이다.
그는 또한 고된 작업에서도 자기의 뜻이 공간 속에 이루어져 가는 탑들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조화속에 도취되고 법설과 무아지경속에 고달품을 잊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불후의 걸작을 남겼을 것이리라.
우리나라는 백제 때부터 석탑이 발달하여 신라에 이르러 더욱 많이 축조되어 탑탑응행 (탑이 기러기처럼 줄서있다)이라고까지 말했으며 고려를 거쳐 이조초까지 1300기의 탑이 쌓여져 우리나라를 "석탑의 나라" 라고 불러졌으나 이조 중엽에 이르러 억불숭유정책에 의하여 조탑이 자연 이루어지지 않았다.

서양에서도 사원 탑 건조가 중단되어 오다가 철재로 파리에 에펠탑이 세워질 때 마이산 일각에 백 여기의 탑군이 신비롭고도 화려하게 축조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동서양을 통하여 근세에 조탑은 거의 이루어 지지 않을 때 마이산 탑과 같은년대에 건조된 파리의 에펠탑을 들 수 있다.
이 두 탑을 대조해보면 매우 흥미롭다, 프랑스 대혁명의 백년제를 기념하기 위하여 1889년에 8백만푸랑의 거액을 들여 300미터 상공에 철재탑을 완성시켜 예술의도시 파리를 상징하고 세계에 과시하고 있다. (석탑의 문화재로서의의 논문중에서......)
그러나 마이산 석탑은 단돈 백원의 예산도 없이 적수공권으로 이 만불탑을 이룬 것이다. 석정은 축조를 완성한 후에도 수도와 기도생활로 일관해 왔으며 영의 경지에 더욱 도달하여 60대에 불가사의의 신명글을 남겨 놓았다. 30여권에 이르는 이 대부서는 밤에 기도하면서 영의 계시를 받아 쓴 것으로 책자 조주 예한자등 기본형에 필획이 가감된 형태의 보통 사람이 도저히 판독 불능의 문자로서 생전에 이 글을 밝히지 않았으며 이 신명글은 영의 계시에 의한 통달한 사람이 나오면 이 글을 알게 될 것이란 유언이 있었다.
참고로 말하면 석정은 세속의 문자와 접한 것이 적었고 그리 사용한 적이 없었다한다. 어떻게 이렇게 훈륭한 30여권의 신서를 남기었는지? 신서의 내용뿐 아니라 석정은 다른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기도하는 시간을 축내지 않으려고 무답무어로 대답을 멀리 했다. 또한 소문을 듣고 제자 되기를 자원하여 찾아온 사람이 있어도 허락한 적이 없고 어쩌다가 다른 사람과 자리를 같이한 경우에도 도무지 말이 없었다 한다.

또 전주 관성묘에 가서 관성장군 사당에서 기도를 올리셨다고 한다 마이산에서 힘들고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풀땐 항상 관성 장군사에 묻고 대화를 했다 한다. 어느 은천리 누군가가 갑룡을 비판하고 다니고 탑사에서 그릇을 흠쳐가면 그 괴로움을 관성 장군상에 물으니 그놈을 내가 죽여주랴? 하고물으니 갑룡은 그러지말고 그냥 혼을 내주어 다시는 그런짓을 못하게 해달라고 하자 그다음날 부터는 그가 자리에 누워 시름시름 알고있었다. 그러자 자기가 갑룡에게 잘못을 뉘우치 고나니 병이 나아졌다고 한다. (전주 관성장군 성전 대표 대담)
갑룡은 유,불,선 선 주장으로 통합 종교로써 일관했고 삶의 생활은 유교 바탕으로 수련은 도교의 바탕으로 기도는 불문의 바탕으로 경전에도 가까이 하셨다 한다. 40세 중반에 고금당 굴사에 기도 갔다가 어느 여인과 음양 합일체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같이 탑군에 와서 정수물을 뜨고 혼례식을 올렸다 한다. 그후 자식 3형제를두고 얼마안되 최씨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다시 50후반부터 혼자서 살았다고 한다. 자식 3형제중 생계가 어렵고하니 아들이 없는 남원 어느 집에 양자로 보내고 차남 이 도생씨가 갑룡의 후에를 맞이하게 되었다고 한다.
삼남은 장성해서 완주로 가서 터를 잡고 후손을 내렸고 차남인 이 도생씨가 탑사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옛 어른말로는 암마이산과 숫마이산의 중턱에 강목천을 묻고 산을 왔다 갔다 하면서 솟금령 영신합이라 글을쓰고 천을 타곤 했다 한다. 낮에는 돌을 구분 하면서 날랐고 밤 자시마다 하루에 한층식 올렸다 한다.
천지탑과같은 타원형탑은 둥근원형 나선형 방향으로 쌓아 올라가다 계단식인 조금씩 튀어나오게 하여 원형계단을 이용해서 오르고 내려왔고 상단부위에 잔돌을 70cm높이로 차곤히 올려서 그 위에 널판돌을 올렸다고 한다.
상단부위에 잔돌사이에 사각모양으로 나무를 대고 그 위에서 축지법으로 몸에 기공을 넣어서 몸을 가벼게 만들고 돌을 오렸다 한다 맨꼭대기 부처님 머리돌을 올리기 위하여 백일동안 기도하고 천신에게 기공으로 매달려 마지막돌을 올렸다고 한다.
천지탑은 만 3년이 걸렸다고 한다, 탑이 완성되면 내려오면서 사각 우물 정자모양의 나무대를 철거하고 돌 망치로 툭 튀쳐 나온 계단형돌을 쳐서 들어가게 하면서 내려왔다고 한다.
천지탑은 음,양으로 나누워진는데 보는쪽에서 좌측이 음이고 우측이 양이다. 돌덩이 자체는 밑에부터 음으로 시작해서 위칸은 양이고 음양, 음양순으로 이루워져 서로의 흡입력 때문에 비바람이 몰아쳐도 넘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상판의 널판돌은 음은 14기 양은 15기 음은 짝수이고 양은 홀수로 표현했다고 한다.
천지탑앞에 오방탑을 세우고 오행을 상징하듯 우뚝 서있다 천지탑을 위해 지지하는 오방탑은 천지의 지,수,화,풍,사대와 자신의 몸체를 말한다. 그리고 천지탑주변 일렬 신장탑들은 천지탑을 보호하는 신군장들로 32기의 장수의 탑이다. 천지탑을 보호하고 마군위 칩입을 막기 위함이니 어느 마군이 침입을 할수 있겠는가.
천지탑아래 갑룡의 처소를 잡고 기도실과 방사를 만들어 생활의 거처로 삼았다. 대웅전아래 용궁이 있고 앞에 중앙탑이 있는데 (일명:흔들탑) 이렬의 신장으로 탑사의 정중앙에서 기준을 삼고 있다고 한다. 바람에 흔들거려도 넘어지지 않고 굳굳이 잘 흔들린다고 해서 별명이 흔들탑이다.
일렬 중앙탑에은 작은 신장탑들이 보호하고 있고 꼭 하늘을 치솟아 오를 듯한 경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우측에는 내공단 외공단이 있고 작은 용궁단이 바로 밑에서 자리하고 있다. 갑룡 좌상옆에 앞에 일광탑이 있고 좌상앞은 약사탑이 있고 암바위옆으로 월광탑이 있다. 일월은 이 사바세계의 세월을 나타내듯 인간의 세월을 보여준다 그중 약사탑은 인간의 육체적인 병, 정서의 병 등의 병고를 쾌유케 하기 함이다.

탑군은 우주의 축소판이며,인간의 삶의 현장이라 하셨다고 한다 ,묘법연화경 15품에 나오는 연화의 세계임이오 하를을 찌를듯한 기상이다. 항상 백 두루마기를 거치고 백의 민족의 얼을 배움의 터전으로 삶을 살았다고 한다
95세때 일이다 갑룡은 아무말도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그러자 후손들은 관을 짜고 초상을 치루는데 36시간만에(일일반) 다시 일어 나시며 죽음을 잘못 정했다고 하여 다시 살아 나셨다가 97세때부터 단식에 들어가 일년동안 용궁의 물만을 마시며 몸 속의 이세상의 사물의 이치를 씻어내고 있었다
아들은 뭐라도 드시고 기운을 차리기를 원했지만 갑룡은 절대로 아무 것도 먹지 않으면서 내가 이세상에 태어나 인간의 모든 때를 씻고 몸속에 똥 오줌을 완전히 제거해서 깨끗한 마음과 몸으로 이 세상과 하직하고 싶고 내몸이 정화가 되어야 이 세상에서 수도한 내가 조상을 찾아 갈수 있느니라라고 말씀하시고 용두봉 산위에 자리를 정하시고 98세로 눈을 감으셨다. 묘자리에 완전히 바위로 된 산을 어떻게 묻을까 걱정하면서 후손들은 정상에 올라가서 그곳을 파보니 진찰 흙이 깊이도 나왔다고 한다.
그곳에 잠든 갑룡은 지나가는 너희를 돌봐주고 행인을 돌봐주겠노라고 했다. 가파른 정상위에 자리한 묘소는 산을 3고개를 넘어야 오를 수 있다. 멀리서 보고프면 암 마이산 정상에서 남서쪽으로 내려다보면 이갑룡의 묘소가 보인다.
오로지 인간의 구제와 짖는 죄를 대신 속죄 하고자 기원과 기도로 일관하시다 가신 갑룡은 30여년의 축조탑과 신서만을 만기고 1957년 1월 9일에 몸을 보내고 탑사 모든 곳에 갑룡의 혼이 숨을 쉬면서 찾아오는 이들을 격려와 축원으로 인도하면서 계시는듯 하다

금당사 개요

마이산 남부 진입로에서 마이산을 오르다보면 매표소를 조금 지나서 왼쪽에 금당사가 있다. 금당사에서 1.4킬로미터를 올라가면 마이산 탑사가 나온다. 신라 헌강왕 2년(876년) 혜감대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극락전에는 수천년이 넘은 은행나무를 깎아서 만든 금당사목불좌상(지방유형문화제18호)과 가로5m, 세로9m 크기의 괘불탱화(보물1266호))가 있다.
이 괘불탱화는 단독의 관음보살입상이 그려져 있으며, 표현양식으로 보아 17세기 후반의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걸작으로 통도사의 관음보살 괘불탱화나 무량사의 미륵보살 괘불탱화등과 함께 걸작으로 손꼽힌다. 이 괘불을 걸고 기우제를 지내면 반드시 비가 온다는 얘기가 전해 온다. 또한 이곳에는 고려 시대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금당사 3층석탑(지방문화자료122호)이 연못 안에 놓여 있다.

 

금당사 목불좌상

이 목불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창건으로 전해져 오는 금당사의 주존불상으로 불단 위에 높이 봉인되어 있다. 중앙의 본존불을 중심으로 좌·우협시보살을 배치 한 삼존불상인데 중앙 본존불은 하품중생인을 한 아미타불상이고 좌우는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로 이른바 아미타삼존불상이다.
사각형이면서 평판화된 얼굴과 비교적 당당한 체구지만 움츠린 어깨와 경직된 양감, 그리고 도식적이고 단순화 된 법의의 표현으로 조선 후기 불상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둥근맛 나 는 수준의 작품으로 평가된다. 좌·우보살은 복잡한 보관이나 가슴의 영락장식 그리고 두 손에 잡은 연꽃가지 등 장식적 요소를 제외하면 본존불과 흡사하다.
괘불탱화는 높이 9m나 되는 거대한 의식용 불화로 단독의 관음보살입상이 그려 져 있다. 화면을 가득 메운 이 관음보살상은 약간 비튼 정면상인데 둥근 얼굴, 근엄한 표정, 당당한 자세, 화려한 꽃무늬가 그려진 보관과 천의, 갖가지 무늬들 로 수놓여진 광배, 질서있게 배치된 화불과 색색의 불꽃무늬 등의 표현으로 보아 17세기 후반기(1682)의 뛰어난 솜씨를 자랑하는 걸작의 불화임이 분명하다.

이점 은 현란무비한 색채의 아름다움과 정교치밀한 형태미의 표현으로 더욱 돋보이고 있어서 통도사의 관음보살괘불 탱화나 무량사의 미륵보살 쾌불탱화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힌다.

속금산(束金山)...木(李)의 氣를 살리려면 金의 氣를 묶어라!

마이산 금당사를 참배하기 전, 마이산하면 독특한 말 귀 모양의 두 봉우리와 사진에서 보았을 탑사의 돌탑들을 먼저 떠올렸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오늘 금남호남정맥의 산줄기를 좇아 마이산에 들어 가리워졌던 금당사의 옛 모습을 헤아려보고 나니 이제 저 앞의 산은 일전에 알고 있던 마이산과는 다른 산이 분명했다.
현재 금당사는 마이산에 들어서자마자 왼편 길가 한쪽에서 만나게 된다. 해발 673m 높이의 마이산이라지만 그 남쪽 들머리에 해당하는 마령면의 평균 고도가 280m나 되는 까닭에 금당사의 높이는 거의 느낄 수가 없다.
그렇게 금당사에 들어서면 마이산 전경을 담은 커다란 안내판을 만날 수 있는데 금당사의 영역을 표시해놓은 부분에서는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진다. 마이산 지역 대부분이 금당사의 사지인 까닭이다. 마이산이 금당사 안에 들어앉아 있다고나 해야 할까.
조선 개국의 상서로움을 소개한 용비어천가의 내용 중에는 “고려의 태조가 왕위에 오를 때에 바다 위에서 금탑이 솟은 전조가 있었듯이 이 태조가 왕위에 오를 때에는 하늘에서 금척(金尺)이 내려진 길조가 있었다.”는 대목이 있다. 사물의 척도(尺度)인 자가 금으로 되었다면 그 척도의 으뜸 내지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능을 뜻하리라.
“태조가 잠저에 있을 때에 명산을 찾아 기도를 올렸는데 그 기도가 끝나던 날 밤 꿈에 신인이 나타나 금척을 주면서 이 금척으로 삼한강토를 마음대로 하라.”고 한 바로 그 의미 그대로. 야사에 따르면 그 몽금척의 장소가 곧 호남의 영산 마이산이라고 한다.
이성계는 금척의 꿈을 꾸고 난 뒤 우왕 6년(1380) 운봉 땅에 침입한 왜구를 크게 무찌르고 개선 길에 마이산을 들르게 된다. 석봉의 빼어난 모습을 보던 이성계는 깜짝 놀란다. 산의 풍광이 옛날 꿈 속에서 신인으로부터 금척을 받았던 바로 그곳이 아니던가!
그 자리에서 이성계는 꿈속에서 얻었던 금척을 묶은 모습이라 하여 이 산의 이름을 속금산(束金山)이라고 부르도록 하였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당시 유행하던 음양오행 사상에 따라 이성계가 자신의 목(木)성과 상극인 금(金)성을 꺼린 까닭에 음양상생의 모습을 간직한 이 산에 세상의 금(金) 기운을 묶어달라는 염원에서 그렇게 명명했다고도 한다. 그렇게 마이산(馬耳山)은 조선 창업의 영산으로 대접받게 된다.
그런데 마이산 금당사 주지 성호스님은 태조 꿈속의 신인을 바로 나옹스님이라 말씀하신다. 마이산에 나옹굴(나옹 스님이 깨달음을 이룬 굴), 용마봉(나옹 스님이 타고다니시던, 혹은 제도한 말) 등 스님의 자취가 역력한 때문이다.
더군다나 조선 창업의 주역 무학대사의 스승이 바로 나옹스님이라는 대목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마이산의 신인은 나옹스님이 될 수밖에 없다는 성호 스님의 주장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그리고 나면 태조 이성계가 마이산을 찾아 기도를 드린 곳이 금당사였으리라는 추측이 한결 자연스러워진다.
금당사에는 괘불과 관련하여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옛날 이곳에서 수도하던 스님의 생활은 신선과 같았고 부처님의 높은 도를 깨우친 분이었다고 한다. 그 스님이 바로 나옹스님이었다고 하는데 어느 해 늦은 봄, 가뭄이 매우 심하자 사람들은 스님을 찾아가 애원하였다. 스님은 정색을 하며 기우제를 드리자더니 밤이 되자 호랑이 등을 타고 어디론가 가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이 기우제 준비를 마치고 사흘을 기다리니 홀연히 스님이 나타나 절의 뒷마당을 백 자만 파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모두들 주저하였으나 스님의 말대로 파기 시작했고 드디어 백 자가 되는 땅에서 부처님이 그려진 한 폭의 괘불이 나왔다. 이 괘불을 절에 걸고 기우제를 올리자 기다리던 비가 오기 시작했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그때의 괘불은 없어지고 지금의 괘불은 300여 년 전에 다시 제작된 것이다.
하지만 지금도 가뭄이 심할 때면 금당사에서 괘불을 걸어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틀림없이 비가 온다고 한다.
대웅전 중건 등 불사가 한창인 금당사 마당을 가로질러 극락전 부처님을 다시 뵙는다. 가운데 아미타 부처님이 앉아 계시고 그 옆에 아미타불을 꼭 빼어 닮은 보살님들이 앉아 계신다. 높이 2m30cm, 폭 1m65cm 가량의 커다란 통나무로 만들었다고 하는데 천년 묵은 은행나무라고 한다.
‘어디서 어떻게 옮겨올 수 있었을까, 어디서 이런 부처님을 뵐 수 있을까.’ 법당 문을 나서며 슬몃 돌아보는데 비스듬히 보아도 바로 앞에서 보던 온화한 얼굴 그대로이시다.


이산묘(馬+耳 山廟)

보국안민(報國安民)과 멸사봉공(滅私奉公)의 실천도장
마이산이 지닌 역사와 문화 그리고 이 고장과 결부된 정신적·상징적 바탕이 모두 마이산의 남부지역에 산재되어 있다. 이산묘와 금당사, 나옹암, 은수사, 돌탑군 등 용바위로부터 시작하여 두 봉우리 중간인 천황문에 이르기까지...

이산묘는 국조 단군왕검을 비록하여 四聖位, 40賢位, 34烈士位를 봉안한 사당이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항거하여 전국 각지에서 의병운동이 일어났을 때 호남지방은 본격적으로 의병운동이 없던 즈음 당시 유림의 태두(泰斗)였던 연재 송병선(淵齋 宋秉璿) 선생과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선생이 이 곳에 와서 분연히 민족혼을 일으켰다.
이에 주변 지역의 선비들이 뜻을 모아 쇠미해가는 국운을 다시 세우고자 조선 태조가 머물렀다는 이 곳에 황단을 쌓아 위업을 기리는 한편 친친계(親親契)와 현현계(賢賢契)를 조직하여 창의(倡義)의 기치를 내걸게 되었고 호남 최초의 의병봉기가 여기서 출발하게 되었으니 바로 1907년 8월에 정재 이석용, 해산 전기홍(海山 全基泓)(장수군 번암의 전해산 장군) 등을 중심으로 300여명의 우국 동지들이 의병 창의 동맹단(義兵 倡義 同盟團)이라는 의병대를 조직하여 이 곳 '용바위'위에 제단을 마련하고 소를 잡아 천지신명께 고한 뒤 거병하여 진안읍으로 진격한 것이 호남 의병의 효시(嚆矢)가 된 것이다. 이런 중에 고종황제는 '비례물동(非禮勿動)'이라는 어필을 내려 격려하였다.(회덕전 소장)
이 뜻을 받아 양계(친친, 현현)의 유지들은 결사동맹의 의지를 더욱 굳히고자 1924년 3월 산벽(山壁)에 이름을 각자(刻字)하고 이산 정사(精舍)와 회덕전(懷德殿)을 짓기로 결성 이듬해 완공하였다.(회덕전 ▶) 이후 이 곳에서 봄과 가을에 제사를 올리려 하였으나 일제 강점의 암흑기라서 여의치 못하다가 광복후 1946년 회덕전에 단군왕검과 세종대왕을 더 봉안하고 1947년에는 개국 이래의 충신·현유(賢儒)를 모시기 위하여 영모사(永慕祠)를 건립하였고, 을사조약 이후 항일 순국하신 34열사 위(位 위패)를 모시기 위하여 영광사(永光祠)를 건립하였다.
이산묘에서는 봄가을로 제향을 올리고 있다. 이산묘 건너편 암벽에는 고종황제의 어필과 白凡 金九 선생의 대형 친필 '청구일월 대한건곤(靑丘日月 大韓乾坤)'이 선명하게 남아있다.
이산묘의 현판은 성제 이시영(李始榮, 임시정부 부통령) 선생의 휘호이며 영모사의 현판은 해공 신익희 선생의 휘호이고 영광사 현판은 백범 선생의 친필이다.
초대 대통령이던 이승만의 광복기념비도 남아있다. 이로써 이산묘는 가히 이 고장 민족광복의 성지라고 말할 수 있다.

 

진안 마이산 역고드름 '희망이 솟다' 
정한수 그릇에서 위로 쑥쑥 바람이 빚어낸 자연의 신비
"소원성취 한다" 발길 북적 
 
◇ 호기심 일깨우는 역고드름. 마이산 은수사 절마당의 역고드름은 봄철까지 구경할 수 있다. 

처마끝에 매달려 아래로 자라나는 고드름이 정한수 그릇 안에서 밤사이 죽순처럼 위로 쑥쑥 자라난다면 쉽게 납득하겠는가. 전북 진안 마이산(673m)에 가면 이같은 겨울철 미스터리를 목격할 수 있다. 탑사뒤 암수마이봉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은수사의 '역고드름'이 그것.

절 앞마당, 조선 태조 이성계가 심었다는 청실배나무 앞 약수터에 정한수를 떠서 밤새 놓아두면 그릇 속에서 고드름이 솟는다.

어른 손가락 굵기에 길이가 10∼15㎝ 정도. 가끔은 길이 30㎝, 직경 3cm에 이르는 큰것이 생길 때도 있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신비감'을 먼저 떠올리지만 은수사를 지키는 황씨 할아버지(75)는 "마이산의 특이지형에 따른 자연현상"이라고 해석한다. 암-수 마이봉, 나도 마이봉 등 봉우리 사이로 불어닥친 바람이 은수사 절터에서 만나 끊임없이 크고작은 회오리 바람을 일으키는 과정속에 빚어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물이 얼듯말듯 한 상태에서 회오리 바람이 살짝 불어 살얼음이 조금 위로 올라가 바늘같은 작은 빙침이 생겨난다. 이후 점차 그릇안 물이 얼고 팽창하면서 빙침으로 물이 서서히 몰리며 조금씩 고드름의 형상을 이루게 된다. 역고드름이 날마다 생기는 것은 아니다. 풍향, 풍속, 기온(영하 10도) 등 자연조건이 일치되어야만 하고, 100여개의 정한수 중 2~3개 정도에서만 역고드름이 생긴다.

역고드름 앞에서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소문에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데, 은수사에서는 한겨울에 만들어진 역고드름을 냉동실에 보관해두었다가 봄철까지 구경시켜주고 있다. < 마이산(진안)=글ㆍ사진 김형우 기자 hwkim@>


청실배나무

배꽃에 달빛 내려 비추고 은하수 흘러가는 깊은 밤/한가닥 나뭇가지에 걸린 춘심(春心)을 두견새가 어이 알랴마는/다정도 병이련가 잠 못 들어 하노라" 고려 말의 문신 이조년의 다정가(多情歌)이다.

흐드러지게 피는 새하얀 배꽃 위로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걸려있는 모습 을 보면 누구라도 시 한 수 읊조리고 싶어진다. 여기에 배꽃 필 무렵 쌀로 빚는다는 이화주(梨花酒) 한잔을 곁들인다면 그야말로 '주상첨화(酒上添花)'이다.

배나무는 꽃으로 우리의 정서를 순화시키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복숭 아, 자두와 함께 대표적인 옛 과일로서 제사상의 맨 앞 과일 줄 조율시이 (棗栗枾梨)에 들어갈 만큼 먼 옛날부터 사랑을 받아왔다.

만해 한용운이 1920년대에 쓴 '해인사 순례기'를 보면 환경(幻鏡)이란 스님은 가을에 돌배를 따두었다가 즙을 내어서 그릇에 넣고 밀폐하여 공기 를 통하지 못하게 하여 두었다가 차로 만들어 먹었다 한다. 이 차는 돌배 에서 이름을 딴 석차(石茶)라고 하며 수년을 두어도 그 맛이 조금도 변치 않는다니 한번쯤 만들어 먹어 볼만하다.

배나무의 목재는 은은한 황갈색에 재질이 골라 옛부터 여러 용도로 쓰였 다. 대표적인 것이 벚나무와 함께 목판(木板)의 재료이다. 해인사 팔만대 장경판은 산벚나무 다음으로 돌배나무가 많이 쓰였으며 조선시대의 양반가 에 보관되어 오고 있는 문집의 목판도 배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많다. 배나 무 세포는 배열이 고르고 물관의 크기가 적당하며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 아 글자를 새기기에 알맞은 것.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 양원왕 2년(546) '봄 2월, 서울에 가지가 서로 맞붙은 배나무 연리(連理)가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연리란 나무와 나무 를 맞붙여 묶어두면 껍질이 파괴되고 서로의 부름켜가 연결되어 한 나무가 되는 현상이다. 연리목이 알려지면 나라에서는 상서로운 조짐으로 받아들 였고 백성들은 이 나무에다 빌면 금실이 좋아지는 것으로 알았다.

태조 이성계는 배나무와 인연이 많다. 왕업을 일으킬 꿈을 꾸고 토굴 속 에 있는 신승(神僧) 무학에게 그 뜻을 풀어보게 하였고, 즉위한 뒤에는 토 굴이 있던 곳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석왕사라 하였으며 배나무를 손수 심 었다.

전북 마이산의 은수사에 있는 천연기념물 386호 청실배나무는 태조가 명 산인 마이산을 찾아와 기도를 마친 뒤 그 증표로 씨앗을 심은 것이 싹이 터 자란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또 태조실록 총서에는 '백 보(步) 밖에 서로 포개어 달려있는 수 십 개의 배를 한 번에 쏘아서 손님을 접대하였다' 하여 활 솜씨 자랑에도 능수버들과 함께 배나무를 이용하였다.

그냥 우리가 배나무라는 것은 돌배나무, 산돌배나무, 참배, 백운배나무, 문배나무, 청실배나무 등 엇비슷한 배나무 종류를 통털어서 부르는 이름 이다. 우리나라에는 금화배, 함흥배, 봉산배 등이 옛부터 토종 배로서 널 리 알려졌으나, 일제 침략과 함께 들어온 개량품종들에 밀려 현재는 찾아 볼 수 없게 되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