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교의 자비(慈悲)와 기독교의 사랑은 어떻게 다른가? |
서재생 목사 / 서울대현교회,/ 개종선교회 회장. /승려에서 목사로 개종 /011-334-2567
제 11 장
불교의 자비(慈悲)와 기독교의 사랑은 어떻게 다른가? (불교와 기독교 주제별 비교론)1. 들어가는 말
불교(佛敎)는 자비(慈悲)의 종교라고 말하고,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하는 데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만일 자비를 성실하게 실천하는 불자가 있다면 그는 온전한 불자이고, 사랑을 성실하게 실천하는 기독교(基督敎)인이 있다면 온전한 기독교인 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와 불교를 비롯한 종교 경전들에서는 나로 말미암아 다른 사람이 고통을 당하거나 불행하게 되지 않고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인간관에 관한 여러 가지 실천 덕목들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기독교의 제일 항목은 “사랑”이고, 불교의 제일 항목은 “자비”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불교에서 불쌍히 여기는 것은 “자비”를 의미하고, 애착과 애욕을 뜻할 때 “사랑”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이란 불교에서는 일종의 욕망(慾望)이며, 번뇌(煩惱)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사랑”을 부정적으로 봅니다.
법구경(法句經)에는 “사랑으로부터 근심이 나오며, 사랑으로부터 두려움이 나온다. 사랑을 멀리하는 사람에게는 근심이 없으며 두려움 또한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불교에서는 “사랑을 집착하는 마음”으로 보기 때문에 “사랑”을 멀리하는 것을 이상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에서는 “사랑” 대신에 자비(慈悲)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먼저 불교의 자비 사상이 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살펴보고자 합니다.
2. 불교(佛敎)의 자비(慈悲)의 사상
불교(佛敎)에서는 자비(慈悲)의 자(慈)는 “불쌍히 여기다”는 뜻으로서 온갖 생명체를 보시하여 애지중지하며 즐거움을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비(悲)는 동정, 공감, 함께 슬퍼하다는 듯을 지닌 것으로서 온갖 생명체를 불쌍히 여겨 괴로움을 없애 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교 경전에서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이 자(慈)이고, 불행을 없애주는 것을 비(悲)라고 말하지만, 자와 비는 거의 같은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불교가 종교적 실천의 당위적 원리로서 특히 강조하는 것은 자비(慈悲)사상입니다. 이것은 인간이 인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까지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자비의 교리입니다. 그렇다면 자비에 대한 가르침은 처음부터 불교의 중심 되는 사상일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비의 사상은 대승불교(大乘佛敎)가 전해지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설법한 원시 불교에서는 자비가 중심 사상의 가르침이 아니었습니다. 소승불교(小乘佛敎)는 출가자 중심 불교 이였습니다. 그것은 출가자 한 개인의 구원을 위한 가르침 종교 이였습니다. 그러므로 초기불교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즉 자불(彿)사상이기 때문입니다. 석가모니도 제자들에게 너희 마음을 스승 삼아 성불(成佛)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비라는 개념이 비(悲)집고 들어갈 여지가 없었습니다.
불교의 사고방식에 대해 다음과 같은 비유가 있습니다. 여기에 폭이 넓은 급류천이 있다고 합시다. 강 이쪽은 번뇌(煩惱)가 많은 이 세상이고, 강 건너 저쪽은 깨달음의 세계 즉 삶과 죽음의 고통이 없는 고유한 무(無)의 세계 경지입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피안의 세계를 열반(涅槃)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의 목적은 사람들이 이 강을 건너 피안(彼岸)인 열반에 이르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이 강을 건널 수 있을까? 가장 평범하게 건너는 방법은 헤엄을 쳐서 건너는 것입니다.
헤엄을 쳐서 건너려면 우선 옷을 벗어야 합니다. 즉 금붙이며, 옷이며, 명예 등이 가득 든 보따리를 짊어지고 헤엄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가족들과 함께 건너는 것, 또한 무척 어려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물살이 세기 때문에 자기 한 몸 건너는 것도 무척 힘이 든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자기 혼자 몸이라 하더라도 건 널 수 있을지 없을지 보장 할 수 없습니다. 피안은 아주 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속세의 옷을 벗고 재물도 버리고, 처자를 버리고, 자기 혼자가 되는 것을 출가(出家)라고 합니다.
출가(出家)를 하지 않으면 피안으로 건너가 구원받을 가능성이 없는 셈입니다. 이것이 원시 불교인 소승불교(小乘佛敎)의 자력(自力)불교의 구원관입니다. 출가자는 오로지 자기 혼자만 구원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이런 출가 중심의 불교를 대승불교(大乘佛敎)가 형성된 후 대승불교를 따르는 사람들은 독선이라고 비난했고 가르침이 적다는 뜻으로 소승불교(小乘佛敎)라고 불렀습니다.
반면에 대승불교의 가르침은 커다란 배처럼 많은 사람들이 피안의 세계로 인도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대승불교(大乘佛敎)는 주후 1세기경에 생겨났습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는 재가신도 즉 출가를 하지 않은 신도도 피안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이 이 세상에서 혹독한 수행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고 모든 사람에게 자비(慈悲)를 베푸시는 부처님의 공덕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즉 부처는 재가신도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계시며 재가신도들이 피안에 이르기를 바라고 계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자비(慈悲)의 사상의 개념이 등장합니다.
불교의 자비(慈悲)사상은 대승불교가 발생하면서 강조되기 시작했습니다. 무신론(無神論)이고, 자력(自力) 중심이었던 원시불교가 유신론(有神論) 불교 즉, 부처는 우주의 어느 곳에든 살고 있다고 주장하는 대승 불교로 바뀌어졌습니다. 또한 각각의 부처마다 정토가 있으며, 정토는 부처의 수만큼 있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무수히 많은 가운데 한국 불자들에게 잘 알려진 부처로는 아미타불(阿彌陀佛), 지장보살,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 관음보살(觀音菩薩)등이 있습니다. 아미타불은 아득히 먼 우주의 서쪽에 있는 극락이라고 하는 정토에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주후 11세기 무렵에 씌어진 대무량수경이라는 불전에 따르면 아미타불은 15겁년 전(약648억년 전)에 지구에 “살았다”고 합니다. 그는 어느 나라의 왕이었으나 어느 날 왕위를 버리고 출가를 해 수행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5겁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윤회(輪廻)를 거듭하면서 계속 수행을 하고 선을 쌓아 마침내 큰 서원을 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모든 사람을 구원해 정토로 이끌겠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또한 만약 그 서원이 충족되지 않으면 성불하지 않으리라 굳게 결심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0겁 년 전에 마침내 성불을 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아미타불을 믿고 그 이름을 외우는 사람은 어느 누구라도 정토에 갈 수 있으며, 구원을 받는다(부처가 된다)는 염불의 가르침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결국 아미타불(阿彌陀佛)의 공덕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대승불교가 생기면서부터 불교는 유신론이 되었고 자비의 불교가 되었습니다. 자비가 강조되는 것도 마찬가지로 보살도 강조되었습니다. 보살이란 부처가 되기 바로 직전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보살이란 자비사상으로 나는 부처가 될 수 있지만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다 부처가 될 수 있도록 깨닫게 하고 그 다음에 부처가 되겠다는 뜻입니다. 지장보살은 지옥에 있는 사람들을 다 구원(부처) 하고 부처가 되고, 관세음보살은 모든 사람 소원 성취를 이루게 하고 부처가 되고, 약사여래보살은 모든 사람 다 고쳐주고 부처가 된다는 것이 자비(慈悲)의 보살상입니다. 대승불교(大乘佛敎)는 자비심을 가지고 다른 사람도 살펴보자는 것이므로 자기 구원에 몰두해 있던 소승불교와는 크게 차이가 있습니다.
불교(佛敎)에서는 사랑 대신에 자비(慈悲)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자비의 자(慈)의 원어는 산스크리트어인 “마이도래야(maitra)”로 인간에 대한 최고의 우정을 갖는 것이 <자>입니다. 한편 비(悲)라는 원어는 산스크리트어 “가루나(karuna)”로 “신음하다” 동정을 뜻합니다. 인생의 괴로움으로 신음소리를 냅니다. 이 신음소리를 내 본 사람만이 보다 깊이 타인의 괴로움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함께 괴로워하는 행위가 <비>인 것입니다. 따라서 불교에서 말하는 자비(慈悲)의 뜻은 타인(他人)의 괴로움을 이해하고 그리고 타인의 신음을 공감(共感)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종종 동체자비라는 말을 씁니다. 다른 사람을 나 자신의으로 여기고 자비를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화엄경에서 말하는 사종법계(四種法界)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화엄경의 우주관에서 현상과 본체와의 상관관계를 사법계, 이법계, 이사무애밥계, 사사무애법계 등 4가지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법계는 모든 차별 있는 세계, 곧 현상계를 가리키고, 이법계는 우주의 본체로서 평등한 세계를 가리키고, 이사무애법계는 이(理)와 사(師), 즉 몬체계와 현상계가 서로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걸림 없는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합니다. 사사무애법계는 현상계의 각사물이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의 걸림 없이 상호관계 속에 있음을 말합니다. “모든 사물에는 개체가 있고, 또 작용이 있으며 제각기 연기(緣起)하여 서로 상응하여 일연(一緣)을 이루고 있으며, 또 일연은 널리 두루 다연(多緣)을 도와 서로 그 역용이 교류하게 되고 서사무애하고, 중중무진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사무애법계의 관점에서 보면 “나”와 “너”는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관계가 성립됩니다. 내가 너이고, 네가 나이다. 나와 너가 한몸(동체)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치를 깨닫고, 나 자신에게 자비를 베풀듯이 다른 사람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이 동체자비입니다.
자비는 자기(自己)를 완성하기 위한 수행(修行)과 다른 사람에 대한 자비(慈悲)의 행위 가운데 어느 쪽만 결여되어도 안 되고 양자는 늘 수레의 양쪽 바퀴처럼 나란히 전진해야 한다며 자비를 가르칩니다. 불교에서는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선 첫째로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애(自己愛)이기 때문이란 것입니다. 인간이란 자기 편의에 따라 타인을 사랑하며 이렇게 해서 타인을 속박한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할 때도 그 부모는 자기 자식을 자기 소유물로 보고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자식이 자기 부모를 떠나 자기의 길을 걷기 시작하면 부모들은 배신당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남녀의 사랑에도 역시 상대를 속박하는 느낌이 있습니다.
결국 단적으로 말하면 불교는 사랑을 욕망의 일종으로 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욕애(慾愛)라고 부릅니다. 즉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서 집착심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집착된 사랑을 불교에서는 갈애(渴愛)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생각하여 불교에서는 사랑을 부정합니다. 그리하여 불교에서는 사랑 대신에 자비를 말하고 있습니다.
3. 기독교(基督敎)의 사랑의 사상
불교 자비의 종교라면 기독교(基督敎) 사랑은 언제나 기독교신앙의 중심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기독교의 사랑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출발하여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전개 된다고 보면, 그에 비해 불교의 자비는 현실세계의 인간관계에 대한 관조(觀照)로부터 출반하여 이웃에 대한 자비로 전개됩니다. 사랑과 자비는 이렇게 출발점이 다른 만큼 그 지향점도 일치하지 않습니다. 지금부터 기독교의 사랑의 사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고 질문하는 율법사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과 여호와를 서랑하라(신6;5)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fp 19;18)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35-40) 예수님은 그의 일생동안 사랑으로 교훈하셨고, 또한 몸소 실천을 통하여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줄 알리라”(요13: 34~-35).
성경(聖經)을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신 것 같이 그 만큼 인간들을 사랑하셨으며(요15:9) 인간들에게 권고하시기를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고(마43:9)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셨으며(눅23:34), 인간들을 극진히 사랑하사 그들을 위해 생명까지도 바치셨던 것입니다(엡5:2,25). 이처럼 사랑은 예수님 자신이었으며 기독교의 근본 사상입니다.
1)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입니다.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요일4:9~10). 이는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은 그것이 하나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사랑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2) 인간의 하나님에 대한 사랑입니다.
성경 말씀은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요4:19).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과 더불어 그 사랑에 응하듯이 인간들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한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것)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20:6~7)고 하면서 웨스트 민스터 신앙고백서의 소요리 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이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리문답은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는 불교와 같이 자기중심 보다는 하나님 중심으로 살도록 지음 받았으므로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이웃 사랑과 형제에 대한 사랑입니다.
성경말씀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이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고 하면서, 이웃과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이웃을 사랑하라”라는 하나님으로부터의 명령 때문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기독교의 중요한 교훈이며, 가장 아름다운 신성의 본질입니다.
“이웃”이 누구인가 이웃은 자신을 제외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지만, 특별히 힘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이웃이 누구이니까?” 질문하는 율법교사에게 강도 만난 사람의 비유를 말씀하신 후 “너도 가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강도 만난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라”고 권고하십니다(눅 10; 29-37) 마25장 31-46정에서 주님은“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십니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것이 곧 주님께 한 것이고(40절), 지극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주님께 하지 아니한 것이다(45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요일 4;21),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을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일 4;20)
기독교(基督敎)의 사랑은 영원불멸의 진리입니다.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 13;13)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유익만을 구하는 이기적인 욕망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희생적 사랑을 본받아서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합니다(딤전 1;16)
4. 나오는 말
불교의 자비(慈悲)와 기독교의 사랑을 동일시 생각하는 이들이 많지만, 엄청난 차이점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랑이 부정되고 있으며,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자기 갈애”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랑을 욕망(慾望:번뇌)으로 보는 것입니다. 사랑을 떠나는 것이 불교의 이상(理想)입니다. 사랑을 부정하는 대신에 자비(慈悲)를 설파합니다. 자비(慈悲)의 자(慈)자의 원어의 뜻은 모든 중생에 대해 최고의 우정을 갖는다는 것입니다. 자비(慈悲)의 비(悲)자의 그 뜻은 신음이란 뜻입니다. 불교에서는 인간은 고통 속에서 신음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일체개고라고 말합니다. 인간에게 고통이 아닌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비란 타인의 고통을 함께 나누는 행위입니다. 결국 불교에서 자비는 타인의 고통(苦痛)과 신음(信音)을 이해하고 함께 해준다는 것을 말합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는 죽으면서 제자들에게 유언과 같은 말씀을 남겼습니다. “모든 것은 변한다, 그러므로 변하는 나를 믿지 말고, 너희 마음과 변치 않는 법을 스승삼아 성불해야한다” 불교(佛敎)에서는 모든 것은 변화하지만 진리(法)만은 영원불멸이라고 석가모니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변치 않는다는 불교의 교리는 소승불교(小乘佛敎)와 대승불교(大乘佛敎)와 밀교(密敎)의 교리로 수없이 변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입니다. 그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중에서 어느 계명이 큽니까 하고 질문하는 율법사에게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하시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22;35-40)
기독교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석가모니(釋迦牟尼)가 출생하기 약 8백 년 전 주전 1400년경 구약성경에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에는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레19:18)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사랑”을 욕망의 일종으로 봅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욕애(慾愛)”라고 부릅니다. 즉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향해서 집착심을 일으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집착된 사랑을 불교에서는 “갈애(渴愛)”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생각하여 불교에서는 사랑을 부정합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사랑과 불교의 자비의 출발점이 다른 만큼 그 지향점도 일치 하지 않습니다.
(http://www.usaamen.net/news/board.php?board=write29&command=body&no=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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