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까지 저는 일부 문항들의 제시문을 추적하여 밝히고 간간이 오류를 소개하는 작업을 해 왔습니다. 이런 추적 작업은 단서가 주어지지 않았거나 번역이 왜곡되어 있을 경우 하염없이 헤매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작업을 했던 것은 학부 시절부터 감지했던 불안감 때문이었습니다. 한자어에 '사상누각'이라는 말이 있는데, 기초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입니다. 뭔가 조금이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원전에서 확인하지 않으면 안심하지 못하는 불안감이 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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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9. 12.) 이 부분에 있던 글은 사감이 많이 들어가 있어서 불필요하다고 생각되어 지웁니다. 작업에의 의욕이 떨어진다는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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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나중에 또 마음이 달라지면 그때 가서 글을 올릴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혹시라도 제가 추적한 문헌보다 더 정확하게 해당하는 문헌을 발견한다면 댓글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언제나 그렇듯이 100%의 확신을 하지는 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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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문 (가) : 『논어』「선진」 + 『맹자』「진심 상」(『맹자집주』+『맹자주소』)
기존의 지문 합성에는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패턴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서로 다른 사상가의 언설을 합성하는 경우로, 예전에 공자의 말과 증자의 말을 혼합했던 지문이 그 예입니다. 둘째는 경전 본문과 그에 관한 후대의 주석문을 합성하는 경우로, 예전에 『중용』 내용과 『중용장구』 내용을 혼합했던 지문이 그 예입니다.
이번에는 그 두 가지의 합성 방식을 한꺼번에 섞어서 적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맹자의 말을 번역하는 데 있어서 고주(古注, 『맹자주소』)와 신주(新註, 『맹자집주』)의 내용을 섞어서 윤문을 상당히 가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이 눈에 띄는 것입니다. 그동안은 주석을 섞더라도 주희의 '신주', 즉 대표적인 주석 하나만 혼합하는 경우만 보였지, 이번처럼 우리나라에 번역도 안 되어 있는 '고주' 내용까지 반영하는 경우는 못 봤거든요. 그래서 혹시 민간에서 지문 추적하기 어렵게끔 하려는 의도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물론 이 제시문에 해당하는 텍스트가 제가 미처 몰랐던 공자 어록 중 어딘가에 있을 수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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曰: “未知生, 焉知死?”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아직 삶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죽음을 알겠는가?”
【『논어』「선진」 11-11 중 】
이것은 이미 제가 예전에 소개했던 분석글(공자 말과 증자 말을 합성했던 그 문항)에서 소개한 바 있습니다. 문제는 다음부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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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래에서 α, β, γ 표시는 각 경문에 해당하는 주석문의 위치를 표시한 것임.)
殀壽不貳, 脩身以俟之, 所以立命也.{α} ... 莫非命也, 順受其正.{β} ... 盡其道而死者, 正命也.{γ}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을 의아하게 여기지 않고, 자신을 수양하여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올바른] 명(命)을 확립하는 방법이다.{α} ... 명(命)이 아닌 것이 없다지만 그 바른 것을 순리에 맞게 받아야 한다.{β} ... 그 도를 극진히 하여 죽으면 바른 명[을 받은 것]이다.{γ}
【『맹자』「진심 상」 7a-1·2 중 】
{α}
〈맹자집주〉
貳, 疑也.
[경문의] '이(貳)'는 의아하게 여긴다는 뜻이다.
〈맹자주소〉
殀若顏淵, 壽若邵公, 皆歸之命. 脩正其身, 以待天命, 此所以立命之本.
일찍 죽는 것은 안연 같은 경우이고 오래 사는 것은 소공 같은 경우인데, 이 모두가 명(命)에로 되돌아가는 것일 뿐이다. 자신을 수양하여 올바르게 함으로써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명(命)의 근본을 확립하는 방법이다.
{β}
〈맹자주소〉
命有三名, 行善得善曰受命, ... 惟順受命爲受其正也已.
명(命)에는 세 가지의 분류가 있다. 선(善)을 행하고 선을 얻는 것이 명을 잘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 오직 명을 순리에 맞게 받아야만 그 올바름을 받게 된다.
{γ}
〈맹자주소〉
盡脩身之道, 以壽終者, 得正命也.
자신을 수양하는 도[脩身之道]를 극진하게 하고 천수를 다 누림으로써 [삶을] 마치는 사람은 올바른 명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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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알파 베타 감마로 번호를 매긴 것은 문항 제시문을 분석하는 데 편리할 것 같아서입니다. 제시문을 한 문구씩 뜯어서 살펴볼까 합니다.
제시문 :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도 이상한 게 아니라네”
=> 여기에 해당하는 『맹자』 본문은 보통 ‘단명과 장수를 둘로 여기지 않는다’로 번역합니다. 그런데 주희의 주석을 따르면 ‘둘로 여기지 않는다’를 ‘의아하게 여기다’로 해석할 수 있게 됩니다. 표현을 조금만 다듬으면 우리 문항 제시문에서 말하는 ‘이상하게 여김’이 됩니다. (위에서 {α} 부분의 신주 내용을 참고.)
제시문 : “사람으로서 올바른 도리를 다하고”
=> 이것은 {γ} 부분이 해당할 것 같습니다. 수신의 도를 다한다고 했죠. 「진심 상」의 해당 부분을 보면 주어가 계속 사람(자신 포함)을 가리킵니다. 그러면서 "수신하여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바른 명을 받는 방법"이라고 했습니다. '수신의 도리'는 '바른 명을 받는 방법'이며, 이상을 합치면 '사람으로서 올바른 도리'가 됩니다. 그런데 『맹자주소』에 따르면 이 도리를 '극진하게 한다'고 했습니다. '다한다'는 말입니다. 이상을 종합하면 제시문의 해당 문구에 들어맞게 됩니다. 출제자는 아마 이런 프로세스를 거쳐서 윤문한 것 같아 보입니다.
제시문 :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마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네”
=> 이 문구가 가장 고민스러웠는데, 일단 주요 고전들은 대강 검색해 보았는데 검색 결과로 마땅한 게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런데 위의 『맹자』「진심 상」을 살펴보니, 1장 다음 2장에서 ‘바른 명을 받아야 한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것에 착안해서 보면, 바른 명을 받아야 한다는 말은 주어진 삶을 올바르게 끝내야 한다는 말이고, 출제자는 그것을 ‘아름답게 마치는 것’이라고 윤문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위의 {β}부분 고주를 보면 善을 얻어야 명을 잘 받은 것이라고 했고, 고대어에서 ‘善’은 때로 ‘美’와 통용되어 ‘아름답다’고 쓰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α}부분 경문과 주를 보면 ‘명을 받는다’는 것은 ‘죽는다(되돌아간다)’로 해석됩니다. 이상을 고려해 보면 제시문의 마지막 문장 역시 제가 추측한 대로의 프로세스를 거쳐서 다듬어진 것이 아닐까 하는 게 잠정적인 저의 짐작입니다.
+ 추가 (2018. 9. 10.)
제가 위의 글을 작성했을 때 한가지 미심쩍은 게 있었습니다. 이 당시 시험문제들을 보면 원문을 읽어내는 데에 곤란을 느끼는 분들이 출제진에 참여했을 텐데, 어떻게 번역본도 없는 『맹자주소』를 출제에 반영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맹자주소』외에는 딱히 발견한 고전이 없어서 찜찜한 상태에서 그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사서 이외로 '경'(사서삼경 할 때의 그 '경' 말입니다)으로 가 보니까 단서가 나오더군요. 이 단서는 2009년에 쓰여진 논문에서 알게 되었는데, 당시 경상대학교 윤리교육과 강사였다는 이상호(李相浩)의 「五福 개념을 통해 본 유교의 행복론」이 제명입니다. 여기에 '삶을 아름답게 마친다'는 언급이 도처에 등장하더라고요. 거기서 알게 된 게, 『서경』 주서 「홍범」(역주 상서정의에서는 4권, 성백효 서경집전은 하권)의 끄트머리에 있는 '考終命' 부분이 내용상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시간 되는 대로 대표적인 주석들을 좀 살펴보고서 기록해 보겠습니다.
(+ 그런데 '고종명'을 그런 표현으로 해석하는 것은 각주를 따라가 보니 공영립의 논문 「제례의 기원과 본질」 269p에 있는 공영립 개인의 임의적 해석이었습니다. 결국 우리 기출 지문의 표현은 서경의 '고종명'을 해석한 것인데, 그 번역을 학계의 권위있는 통설을 따라간 게 아니라, 어디 잘 알려져 있지도 않았던 논문 저자가, 전문적으로 정밀하게 연구하려는 논문도 아닌 가볍게 자기가 임의로 대강 번역한, 그 번역표현을 쓴 겁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을 활용한 윤리교육과 강사의 논문에 인용된 것을 출처 확인 없이 재인용해서 실은 거예요.)
메모용 : 북경대 십삼경주소 3권 상서정의 383쪽; 학민사 서집전 2권 406쪽; 김학주 새로옮긴서경 3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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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문 (나) : 『장자』「지락」·「대종사」
우선 해당하는 원문을 아래에 싣습니다.
形變而有生. 今又變而之死. 是相與爲春秋冬夏四時行也.
형체가 변하여 삶이 있게 되었다. 지금 또 변하여 죽음이 되었을 뿐이다. 이는 서로 마주하여 사계절이 운행되는 것과 같다.
【『장자』「지락」 4 중 】
*추가(10.29) : '사시(사계절)'의 비유에 대해 학생들의 질문을 접하다 보면 이것을 평가원에서 순환반복으로 제시한 것으로 이해하는 듯 합니다. 안동림과 김달진은 그런 식으로 봅니다. 하지만 조초기는 이것을 '스스로 그러하게 변화한다'는 점을 가지고서 비유어를 쓴 것이라고 봅니다.(309~310쪽.) 저는 자연스러움의 비유이면서 유가 무로 되돌아가는 것과 같은 일회성 순환에 한한 비유라고 생각하는데 아직 체계적인 연구를 진행하지는 못했습니다. 그 바로 뒤에는 밤낮의 비유가 나오는데 조초기는 여기서도 역시 자연스러움을 비유한 것으로 보았지 순환반복 얘기는 없습니다.('주야'는 「대종사」 VI-1-4에서도 '천연스러움'의 비유어로 쓰임.) 그 뒤로 가면 해골과의 문답에 다시 사시 비유가 나오는데 여기 원문에서는 '죽음에 있어서는 사계절의 일도 없다'는 멘트가 나옵니다. 이 우화에서는 죽음을 삶보다 더 좋아할 만한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합니다.(다양한 문헌비평의 문제가 있을 것.)
이전 6월 모평 생윤 8번의 선지에서는 '사계절'의 비유어가 '필연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저는 이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다만 '과정'이라는 표현 대신 '현상'이라는 표현을 썼으면 더 좋았을 것입니다.) 비유어는 반드시 구체적으로 뭘 비유한 것인지 한정해서 이해해야 하는데, 사계절이나 낮밤의 반복성을 비유한 것인지 필연성을 비유한 것인지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소감의 경우 낮밤의 비유에 대해 필연성의 비유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장자철학』 번역서 개정판 291쪽).
古之真人, 不知說生, 不知惡死. 其出不訢, 其入不距. 翛然而往, 翛然而來而已矣.
옛적의 진인은 삶(태어남)을 기뻐할 줄도 몰랐고 죽음을 싫어할 줄도 몰랐다. 그 [삶으로] 나온 것은 기꺼워하지 않았고 [죽음에] 들어서는 것은 꺼려하지 않았다. 걸림없이 가고 걸림없이 올 뿐이다.
【『장자』「대종사」 5 중 】
보시다시피 원문의 ‘翛然’에 해당하는 부분을 저는 ‘걸림없이’라고 번역했는데, 우리 문항 제시문에서는 ‘자연’이라고 번역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은 주석가들마다 ‘翛然’의 뜻에 대해 해석이 다양하게 갈리는 지점이라서 함부로 자연이라고 번역하면 편향된 해석이됩니다. 더군다나 제가 위에서 말했듯이 '자연'은 장자에서 중요한 개념이므로 이 제시문이 마치 '자연'개념이 나오는 원문인 것처럼 사람들이 오해하고 재활용하게 될 위험이 발생합니다. 수능 수험생 뿐만 아니라 평가원 기출지문 따로 빼서 정리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전국적으로 오류를 퍼져나가게 하는 결과가 빚어지는 것입니다. (* 15학년도 6월 모평 3번 문항에서는 원어 '天'을 괄호 속에 병기함으로써 오해의 소지를 없앴더군요. 이렇게만 해도 한결 나을 듯..)
그리고 제시문 외로 선지들도, 교육과정 선에서 학생들이 '풀' 수는 있지만 학술적으로는 다소 위험해 보입니다. ㄱ, ㄴ 둘 다 위험요소가 있는데 편의상 ㄱ만 보도록 하겠습니다.
"(가) : 죽음은 기가 흩어지는 것이므로 슬퍼할 이유가 없다."
이 선지 하나만으로도 최소한 세 가지의 가능한 문제점이 예상 혹은 지적될 수 있습니다.
1) (가)의 범위를 '유가' 일반으로 설정했을 경우
=> 죽음이 기의 흩어짐이라는 것은 유가 도가를 막론하고 중국철학 일반의 사유입니다.
2) (가)의 범위가 '공자(혹은 맹자)'에 한정될 경우
=> 공자나 맹자의 어록에서 죽음이 기의 흩어짐이라는 어록이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본 적이 없습니다. 없다고 칩시다. 하지만 만약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선지가 오답인 거라면 교육과정 이탈이 됩니다.
3) 이 선지가 (가)가 아닌 (나)를 가리키는 것이라서 오답 선지라고 의도했을 경우
=> 장자에게 있어서 죽음을 슬퍼할 필요가 없는 '이유'가 기의 흩어짐이기 때문일까요? 선지에서 "~이므로 -다" 라는 문형을 썼으므로 이 문장에서 전건과 후건 사이에 '인과관계'가 성립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장자에게 있어서 죽음을 슬퍼할 필요가 없는 '이유'는,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점(연결되어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기의 흩어짐이라서 슬퍼할 필요가 없다는 게 아닙니다. (『장자』「지북유」「지락」 등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죽음이 기의 흩어짐이라는 말은 그냥 동어반복에 불과하기 때문에 슬픔의 감정을 해소해주는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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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글을 맺습니다.
다른 선생님들께서도 분석한 게 있으면 부담없이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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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힉스 작성시간 17.09.09 댓글 달고 나서 일단 글의 맨 아랫 부분만 읽어봤는데, 아주 훌륭한 지적이 있네요. 나중에 글 전체를 읽고 댓글 달겠습니다. 역시 실력 있으시네요.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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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힉스 작성시간 17.09.09 지금 글 전부 읽고 댓글 답니다. 생윤 4번 문항 ㄱ 선지에 대한 코멘트만 하겠습니다.
ㄱ 선지가 틀린 이유는 일단 '슬퍼할 이유가 없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앞의 어구인 '죽음은 기가 흩어지는 것'에 대해서는 평가원이 어떻게 생각한 것일까요? 이것 역시 유가 입장에서 '틀린 내용'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 증거는 2016학년도 9평 16번 문항 ③번에 있습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③ 사계절의 운행과 같이 기(氣)가 정기적으로 순환하는 과정이다.
유교 입장에서 '죽음'에 대한 관점을 물은 건데, 이것을 당시 평가원에서는 '오답'으로 처리했습니다. 근데 이것은 장자 입장뿐만 아니라 유교 입장에도 맞는 것이죠. -
답댓글 작성자힉스 작성시간 17.09.09 님이 본글에서 쓴 대로 공자, 맹자가 죽음을 '기가 흩어지는 과정'이라고 명확하게 언급한 바는 없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춘추전국시대에 이미 형성된 관점으로 압니다. 더욱이 유교 사상의 예시로 당시 2016학년도 9평이 제시한 것은 "대학"에 나오는 문장이었습니다. 성리학자들이 대학을 매우 중시했는데, 성리학자들 글에서는 죽음을 '기가 흩어짐'으로 보는 사례를 많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평가원은 이번 생윤 4번 문항의 '죽음은 기가 흩어지는 것'도 유교 입장에 부합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봅니다.
그렇더라도 ㄱ 선지가 '오답'인 사실은 변함이 없어서 문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
작성자깡디드 작성시간 17.09.17 이제서야 이 글을 보았네요. 반드시 누군가가 했어야 할 필요한 작업인데, 이제까지 아무도 하지 않았던 것을 훌륭하게 하시는 건데, 해도 별로 좋은 변화가 없으니 저도 안타깝네요. 그래도 여기 들어오시는 선생님들은 많은 자극 도움을 받으셨을 거예요. 저도 그렇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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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한삶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9.02.25 본글에서 줄쳐놓은 부분에 대해 언제 정리해야지 하고 미루고 있다가 이제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moraltc/MS9O/6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