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에서 돌아온 후 지속적으로 두통을 겪고 있다. 아이들이 기절놀이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어떻게 기절을 인위적으로 유발하는 것이 가능할까 생각해 본 적이 있다. 기절은 의식의 연속적이 단절되는 것이고 술에 절여진 인간이 필름이 끊어졌다는 무용담과 함께 이야기할 수 없는 다른 차원의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런 상태를 겪고 깨어나 보니 머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정신은 아득한 구름 속을 걷는 것처럼 몽롱했었다. 기절을 한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리고 시린 발목과 함께 걷고 또 걸어서 목적지까지 도착했고 집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면 이구동성으로 병원에 가서 사진도 찍고 하란다. 솔직히 말해서 중간에 방해받지 않고 끝까지 두 발로 그냥 걸어서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었다. 그래서 현지에서 병원에 가지 않았고 시린 왼발의 통증을 참아 견디며 낯선 땅 스페인의 북쪽을 걷고 걸어서 산티아고에 도착했다. 부서지지 않는 한, 살아 있는 한, 삶은 움직임 속에 있고 손으로 포착하기 어렵게 유동하고 있다. 삶과 죽음 사이에 중간계는 없다. 삶이거나 죽음이거나 둘 중의 하나다. 이 두통의 원인이 그날의 충격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를 속시원히 알고 싶어서 오늘 병원에 갔다가 왔다. 4월 20일로부터 지나간 날들이 거의 두 달에 육박하고 있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지니고 살고 있다.
두통이 있으니 정신을 집중해서 무엇을 하기가 쉽지 않아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요양하듯이 지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특유의 서사 중독증이 도지고 말았다. 집사람은 나랑 드라마 보는 것을 좋아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나랑 같이 화면을 보면서 공유할 만한 이야기를 겪어내는 일이 우리 두 사람을 단단하게 묶어주는 원초적 경험치가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밥상머리에서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눌 만한 그런 소재를 만드는 것을 좋아한다고나 할까. 이는 내가 대화에 인색하기 때문이 아닐까 반성을 하게 된다. 그런데 묘한 것은 일단 시동이 걸리면 다음부터는 아내가 바람을 잡지 않아도 비탈길을 굴러가는 공처럼 관성적으로 서사 중독증세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한 번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가기 시작하면 원료 공급이 끊어질 때까지 멈추질 않는다. 정신을 집중하기 어렵다는 핑계로 이번에 본 드라마들은 이미 다 장안의 화제가 된 것들이라고 한다. '폭삭 속았수다.' 이후의 네 편의 드라마를 그렇게 보게 되었다.
드라마 하나,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 일명 '모자무싸'
드라마의 줄거리나 인물에 대한 세세한 언급은 많은 사람들이 했고 하고 있고 할 것이니까 양보하기로 한다. 그냥 나는 나의 개인적인 감상기를 아주 간략하게 언급하는 것으로 만족하련다. 어떤 장르든 어떤 작품이든 수용론적 차원으로 바라보면 저자는 사라지고 독자의 관점에서 모든 것이 새롭게 의미 부여되는 것이니까. 사람들이 드라마를 보고 몰입하거나 몰입하지 못하거나 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그 내용을 자신의 삶과 얼마나 동기화해서 보게 되느냐 그렇지 않으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하나의 문장이면서 시적 아포리즘을 지닌 제목 덕을 참 많이 보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마치 이성복 시인의 시 그날에서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구절이 뇌리에 남아 맴도는 것처럼 말이다.
인간은 의미를 추구하며 산다. 의미라는 것은 가치라는 말과도 호환될 수 있는 단어다. 살 의미가 없다는 것은 살 가치가 없다는 것과도 의미적 차원이 맞닿아 있는 것이다. 이 드라마에 나오는 인물들은 예술가들이다. 그들은 영화판에서 감독이며 영화를 위해서 좋은 시나리오를 써야 하는 창작자들이기도 하다. 순수한 원작자가 아닐 수도 있지만 그럴 경우 각색을 해야 할 것이고 원작이 없는 경우에는 시나리오를 스스로 만들어내야 한다. 흥행을 통해 돈을 벌 수 있게 할 만한 좋은 시나리오는 투자 시스템에 의해서 선택되고 여기에 복잡한 먹이사슬이 연결되어 있고 자본의 논리와 예술적 안목과 인간적 자존감이 뒤엉켜 용광로처럼 부글거리면서 끓어오른다.
'응답하라 1988'과 같은 분위기도 회상 속에서는 간혹 떠오르지만 그랬던 그들이 현역 감독으로 데뷔를 하고 작품을 통해 상처받고 때로는 자긍심을 느끼기도 하면서 대학시절의 끈끈함은 서로에 대한 질시와 '샤인 프로이데'의 정서 속에서 뒤죽박죽 얽히지만 여전히 그들은 청춘기의 도원결의 같은 8인회의 자장 속에서 심리적 이전투구를 벌이고 있다. 아직 막차를 타지 못한 황병만과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상처를 안고 있는 변은아의 관계를 보면 왜 그런지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이야기가 자꾸만 떠오른다. 왜일까. 변은아는 황병만을 다독이고 지지한다. 그리고 그녀 자신도 황병만의 일그러진 언행 속에서 언뜻언뜻 드러나는 상처와 함께 반짝이는 내면의 빛과 함께 자신의 그것과 동질적인 목소리를 듣는다. 그것은 대중적인 언어로 변환하면 대충 이런 의미를 가진 발화가 될 것이다. '나를 봐줘. 그리고 나를 도와줘. 내 손을 잡아줘.'
내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떠난 것도 대단한 깨달음을 얻기를 바라고 그런 것이 아니다. 황병만이 요설과 자학적인 행동을 통해서 영화 '박하사탕'의 주인공처럼 '나 돌아갈래'라고 외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산티아고 길 위에서는 모든 것이 단순해진다. 먹는 것, 걷는 것, 씻는 것, 자는 것, 그리고 똥이나 오줌을 싸는 것 모두가 원초적이고 반복적이고 단순하다. 사람들은 그런 단순함의 쳇바퀴 위에 자신을 올려두고 싶은가 보다. 그래서 그렇게 많이들 그 길 위에 서는가 보다. 우리의 삶도 그런 순간을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들을 결국 의미를 찾아가는 것이고 이는 환언하면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다. 공자가 일찍이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라고 한 맥락도 이에서 멀지 않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일, 경제적으로 자신의 삶을 윤기 있게 꾸려갈 돈을 버는 일, 유명해지고 유능해지고 탁월해지는 일들이 이것과 연관되어 있다.
무가치함의 지옥에 빠지지 않으려고 그 개미지옥에 빠지지 않으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다. 이 드라마는 그런 사람들의 모습을 하나의 측면에 확대경을 들이대듯 까발리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생각해 보건대 한 때 뜨거웠던 마음들과 인간관계들에 대한 기억은 훼손되지 않고 소중하게 보존되고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유효하게 살아 생동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바라건대 저마다 자신만의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가 한 사람쯤 있기를 희망한다. 그래도 세상에 나를 긍정적으로 바라봐주고 응원해 주는 한 사람이라도 있기를 누가 바라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그런 사람을 잘 끌어안고 고맙다고 말을 건넬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위악적인 언행 속으로 숨지 말고 서툴지만 있는 그래로 솔직한 모두의 언어로 말할 수 있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무가치함의 개미지옥에서 건져내어 주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