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이 깊어지면 독이 되어 상사병이 되고 선망이 오래되면 질투가 되어 상대를 무너뜨리고 싶어지는 법이다. 그것이 이제껏 성숙하지 못한 채 날것 그대로의 인류가 보여온 감정의 기본값이다. 가장 가까운 곳에 병의 근원이 있고 가장 먼 곳에 치료할 수 있는 약이 있다. 인류가 나아갈 수 있는 최대치의 윤리는 무엇인가?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아닐까. 아니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라는 말씀도 있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인간은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고 나를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인 양 훨씬 쉽게 따르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모든 사랑은 자연스러운 것일까. 모든 증오 역시 자연스러운 것일까. 사랑이라면 성선설로 가기 쉽고 증오라면 아니 투쟁이라면 성악설을 따라 살게 되겠다. 그도 아니면 인간의 본성은 '빈 서판'이어서 학습되는 대로 형성되어 가는 것일까. 나는 환자의 마음으로 이 드라마를 보았다.
성서에 따르면 인류 최초의 살인자는 카인이다. 그는 제 아우 아벨을 죽였다. 질투의 감정 때문이다. 자신의 제물보다 동생 아벨의 제물이 더 기쁘게 받아들여지는 것을 느끼고 동생에 대한 시기의 감정과 신의 사랑에 대한 좌절감으로 동생을 들판에서 살해한 것이다. 존 스타인벡의 '에덴의 동쪽'에서 다시 반향하고 있는 내용이 되고 있다. 동양의 삼강오륜 중에는 '장유유서'와 함께 '붕우유신'이 자리 잡고 있다. 친구란 형제자매의 사회적 확장판이다. '은중과 상연'은 바로 이 친구 간의 우정에 대한 집요한 서술이다. 사랑의 감정을 뒤집으면 미움의 감정으로 변한다. 가장 친한 친구가 가장 큰 적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세상의 숱한 역사와 현실 속에서 종종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그런 이야기를 종종 한다. 인생은 평균적으로 멀리서 보면 공평하다고. 누군가는 초기에 좋은 패를 쥐고 누군가는 그 반대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간혹 처음부터 끝까지 불행만 겪다가 끝나는 경우도 있고 처음부터 끝까지 최상의 패를 쥐고 살다 가는 사람도 있어서 이런 논의를 무력화시키지만 어느 정도 참고할 만한 이야기다. 은중의 삶은 바닥에서 시작한다. 아버지가 세상을 등지고 어머니와 힘들게 시작한다. 누군가는 화장실이 집 안에 있으며 그것도 두 개씩이나 있는 집에서 살고 있을 때 그녀는 푸세식 화장실을 당연하게 여기며 유년기를 보냈다. 그래서 그렇게 선망하던 집이 친구가 된 상연이 살아가는 공감임을 알았을 때 영주의 성에 사는 귀족의 딸과 무지렁이 백성의 딸로 대비해서 경쟁할 투지를 아예 갖지 않는다. 그렇게 그들은 악연으로 시작해서 포용과 밀쳐냄의 양극적 관계 속에서 흔들리다가 죽음 앞에서 화해하게 된다.
상연과 은중은 서로에 대한 오해 속에서 자신의 생각대로 상대방을 규정하면서 서로 배신감을 느끼면서 동일한 대상을 놓고 경쟁하는 카인과 아벨의 그것과도 유사한 관계가 되어 버린다. 은중이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은 상연의 어머니이고 '3년 뒤에 이 떠꺼머리 중학생은 나의 첫사랑이 된다.'라는 극 중의 진술처럼 상연의 오빠 상학은 그녀의 첫사랑이 된다. 어쩌면 상연의 언니였을지도 모르겠다. 성적 정체성의 문제에 대한 이 드라마의 수용방식은 간접적이고 우회적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상연의 죽음의 방식에서 또 논쟁적인 지점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조력사 혹은 존엄사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자신의 죽음을 선택할 권리'라는 예민한 지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이 드라마는 상당히 윤리적인 논쟁으로 발화할 수 있는 요소들을 끌어안고 있는 셈이다.
상연은 자신의 오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그의 죽음을 아파했고 혹여 자신 때문에 오빠가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 진실을 알기 두려워 부모의 이혼과 무너진 엄마의 존재를 일부러 외면하듯 살아낸다. 그리고 오빠의 SNS를 통해 성이 다른 상학을 만나고 그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세상에 발을 내디딜 용기를 낸다 그리고 그렇게 입학한 대학에서 자신이 꼬리를 자르듯 단절했던 은중을 만나지만 은중은 자신이 좋아하는 김상학의 연인이 되어 있다. 어머니의 사랑과 죽은 오빠의 따뜻한 관심, 그리고 또 다른 남자인 상학을 놓고 은중은 몰랐고 의도하지도 않았지만 상연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가진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가려는 경쟁자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고 믿은 것이리라. 그래서 상연은 은중이 자신의 유일한 친구이지만 동시에 무너지고 망가졌으면 좋겠다는 이율배반적인 욕망과 감정에 휩싸이는 것이다. 이는 두 사람의 사이에 파국을 일으키게 되고 그들의 학창 시절은 그렇게 김상학과 은중과 상연 모두 뿔뿔이 흩어지는 것으로 끝나게 되는 것이다.
영화판에서 밥벌이를 하는 존재들로 흩어졌던 그 세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되고 다시 한 사람의 남자를 놓고 두 사람의 오랜 친구는 경쟁구도가 아닌 듯 경쟁하는 관계가 된다. 애인이 되고 아니고의 현실적인 관계의 차원이 아니라 누가 더 그의 애정의 대상으로 존재하는가에 대한 경쟁은 눈에 보이지 않는 불꽃을 피우며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다. 신이 사랑을 갈구하는 존재들로서의 인간이 보일 수 있는 파괴성과 연대성 사이에서 인간은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또다시 파괴적인 결말로 끝나고 셋은 다시 시간의 격류 속으로 휘말려 서로 흩어져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 단계에서 상연은 은중을 찾아온다. 시한부의 생이라는 운명과 말기암의 고통을 안고 은중이 자신의 최후를 보아주고 위로해 주기를 청한다. 실랑이 속에 은중은 상연을 받아들이고 함께 스위스로 조력 자살의 형태로 생을 마감하는 과정에 동행한다.
그래서 다시 생각하게 된다. 인생에서 진정한 친구를 셋 정도만 만들고 가도 성공한 생이라는 말을 말이다. 내게 그런 친구가 있는가. 그리고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수 있어야 할까. 드라마에서처럼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일이 과연 인간의 자유의 행사이기만 할 것인가. 거기 다른 차원은 없을까. 나는 예수님을 생각해 본다.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씀을 말이다. 삶의 모든 국면을 끝까지 살아낼 수 있을 때 우리는 진정으로 살아본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든다.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무너져 가는 육체를 견디며 끝까지 오르비 엣 우르비의 축복을 전하지 않았던가. 바라건대 온전하게 모든 것을 겪어낼 용기가 내게 있기를 바란다. 그 길을 온전히 다 걸어서 가야 할 곳까지 닿을 수 있기를 거듭 바라고 또 바란다. 내가 죽어갈 때 상연처럼 누군가가 나를 위로해 주는 존재가 있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