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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 중독증 환자의 병상 일기 4

작성자차대식|작성시간26.06.18|조회수25 목록 댓글 0

인생의 즐거움이란 것은 어떤 것일까. 이는 사람마다 다른 답을 제시할 만한 열린 질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교육과 관련해서 맹자의 이야기가 자주 거론된다. 인생에 세 가지 즐거움이 있는데 천하의 왕 노릇을 하는 일은 여기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물론 돈을 많이 버는 일도 여기에 포함되지 않을 것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시고 형제들이 무탈하게 잘 지내는 것이 그 하나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고 사람들에게 거리낄 것이 업이 살아가는 일이 두 번째 즐거움이고, 뛰어난 자질을 지닌 후인을 가르쳐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하는 것이 세 번째의 즐거움이라고 한 말이다. 이는 교육에 대해서 공유되는 동양적인 정서의 원천이 되어 왔다.

이와 함께 타인과의 관계가 아니라 자신의 수양과 학습이라는 관점에서는 공자의 삼락도 기억할 만하다. 논어 '학이편'에 기록된 것과 같이 '사람이란 배우고 때로 익히면 기쁘고, 멀리서 친한 벗이 찾아오면 또한 즐거울 것이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알아주지 못해도 이에 대해 성내지 않을 수 있다면 군자답지 않겠느냐'라고 한 말이 그것이겠다. 이는 자기 연찬과 인간관계 및 윤리적 수양과 연결되어 전인적인 지표를 제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공자는 자신의 제자인 안회에 대해서 평가하면서 이런 말을 남기 바 있다. '어질도다 안회여, 한 그릇의 밥과 표주박에 담긴 물 한 모금을 먹고 마시며 누추한 곳에 거쳐하면서 그 배우는 즐거움을 고치지 않으니 어질도다!'라고 말이다.

드라마 '참교육'을 보면서 교육이라는 단어 앞에 붙어 있는 '참-' 접두사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 본다. 교육이라는 영역을 둘러싸고 있는 오류나 군더더기를 제거하고 진짜라는 차원을 부여하는 이 접두사는 뭔가 자극적이다. 몇 년 전부터 '참교육하다'라는 표현이 곧잘 들리곤 했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이러한 접두어를 붙여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관행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재의 교육이 그 본래의 의미를 살리지 못하고 있으니 그것을 바로잡겠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 참교육이라는 표현은 전교조가 출범하면서 내건 구호이면서 단순한 구호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에 대한 자정적 움직임 모두를 내포하는 의식적인 표현이었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드라마는 학교 현장을 할리우드 식의 도식에 따라 그려내는 것처럼 보인다. 드라마에서 느끼는 시원함(사이다 맛?)과 통쾌함은 그 뒷맛이 개운치가 않다. 왜 그럴까. 그것은 현실과 극적 또는 시적 정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 때문일 것이고 인간이 지닌 근본적인 복잡함 때문이다. 인간은 참으로 깊은 존재이며 때로는 신비롭기까지 한 존재다. 그 인간의 진실에 가 닿기가 참 어렵게 느껴진다.

30년 이상을 학교에서 근무했던 사람으로서 이 드라마를 보면서 나 자신이 우리 사회의 전반적인 변화가 교육 현장에 고스란히 삼투되는 과정에 대해서 눈으로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것을 떠올리게 된다. 우선 교육을 바라보는 사회 전반의 관점이 급속하게 변화했다. 교육은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계층 이동성을 보장하는 사다리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다. 신분제적 사회였던 조선시대를 마감하고 일제강점기와 6.25 전후의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사회적 유동성을 강제했고 다양한 요소들이 이러한 변화에 결합되었다. 신분적 질서는 근대화의 과정에서 흔들렸고 경제적인 요소와 사회적 체계의 새로운 변화에 빨리 적응하는 사람들에게 기회가 열렸던 측면이 있다. 교육은 사회적 기득권과 여전히 맞물려 있었지만 그래도 과도기적이기는 했지만 상대적으로 여백이 많이 존재했다고 할 수 있겠다.

60년대와 70년대를 지나면서 압축적이고 노동집약적인 경제적 변화 추구라는 국가적 전략은 학교 교육을 통해 교육받은 노동력을 흡수하면서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했다. 물론 최소한의 교육을 이수한 사람들과 고등교육을 이수한 사람들의 상대적인 격차도 점점 벌어지기 시작했지만 전체적으로 경제적 성장의 낙수효과는 농촌의 희생과 노동자의 희생이라는 사회학적 진단에도 불구하고 절대적인 측면에서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세.'로 갈음할 수 있는 심리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흘렀다. 농촌인구가 절대적으로 다수였던 시절에서 이호철의 소설 '서울은 만원이다'와 같이 신경림의 '농무'에 드러나는 것처럼 도시로의 흐름이 가파르게 나타나고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나 황석영의 '객지' 등에서 드러나는 도시 빈민과 노동자의 문제들이 떠오른 것이다. 이문구의 소설들은 이러한 농촌의 현실과 함께 사라져 가는 전통적 삶의 인식에 대한 애도의 비문일 수도 있겠다.

80년대에 이어 90년대 초반까지도 이러한 경향과 흐름들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하나의 화두였을 것이다. 전태일의 '근로기준법'에 대한 외침도 YH사건을 비롯한 다양한 사건들도 그 과정에서 겪어야 했던 사회적 고통과 파열의 일단인 셈이다. 지난번에 언급한 것처럼 드라마 '미생'이나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등도 이런 시절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다. 1997년 IMF 외환위기는 우리 사회의 경제적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저주받은 학번이라는 말처럼 대학 졸업 후에 그럭저럭 취업할 수 있었던 시절은 가고 노동의 영역이 그야말로 복잡하게 계층화되면서 단일한 노동자가 더 이상 아니게 되었다. 그리고 사회적 성장의 내용이 수치적인 차원의 성장의 셈법이 아니라 세계적인 흐름에 맞물려 돌아가면서 양극화된 모습이 강화되었고 토지와 자가 소유 여부, 직장의 구체적인 성격, 그리고 이전의 초기 경제 성장 단계에서 어느 정도 기득권을 형성한 부모의 경제력 등에 의해 교육 현장의 분위기도 점점 달라지게 되었던 것은 아닐까 한다.

나는 사회적 변화를 세밀하게 따질 만한 역량을 지닌 사람은 아니다. 다만 체험을 통해 느낀 것들을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다. 분명히 우리 사회는 경제적으로 규모가 커졌고 삶의 수준 역시 향상되었다. 이는 수많은 사람들의 오랜 희생적인 노고 덕분이겠다. 애덤 스미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다른 사람을 더 잘 살게 하려는 이타적인 마음이 이러한 성장을 가져온 것은 아닐 것이다. '잘 살아 보세'라는 구호는 사실 자신의 욕망을 반영한 구호였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세계 10위 권의 경제적 규모를 자랑하는 나라가 되었다. 그리고 독재적이고 권위적이었던 정권을 많은 희생을 겪으면서 변화시켜 왔다. 그리고 정치적 경제적 측면의 성장 못지않게 사회와 문화의 전반적인 제도와 내용적 가치에 대해서 되돌아볼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고스란히 학교 현장으로 흘러들었고 긍정적인 측면들이 분명히 보였다.

교육은 사회와 독립되어 있는 영역이 결코 아니다. 사회의 질적 발전은 교육에도 스며든다. 퇴직 이후에 외국에 몇 번 나가보니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의 위상이 정말 많이 달라진 것을 체감할 수 있었다.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던 나라, 전쟁 고아들이 구호품에 의지하여 거두어지고 사회가 스스로 키우지 못하는 아이들을 무수히 입양 보내던 나라, 교육을 위해 보다 나은 삶을 꿈꾸며 이민을 떠나던 나라에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며 오고 싶어 하는 나라가 되었다. 나라의 위상이 그 나라 국민들을 바라보는 외국의 공항 관계자나 현지인들의 시선에 영향을 준다는 점을 실감하게 된 일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빛이 있으면 그림자가 있듯이 우리가 안고 있는 병리적인 측면들을 떠올리게 되기도 한다.

교육 현장에서 1997년의 IMF와 같은 변곡점이 된 사건을 꼽으라면 아마도 서이초 선생님의 일을 떠올릴 수 있을 것 같다. 그 소식을 듣고 맥이 탁 풀리던 그 순간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체험학습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도의적 책임을 넘어 법적 책임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일들과 체벌 금지를 넘어 아동학대와 관련된 다양한 상황들, 시험과 관련된 사건과 그 상황들, 학폭과 그에 따른 심리적 어려움들, 매뉴얼화되어 가는 교육 현장의 지침들 속에서 교육의 자율적 영역과 심리적 유연성은 점점 쫄아들고 마는 것 같은 느낌을 지니고 살게 되는 시간들이 많았다. 교육과 관련된 민원들은 다른 영역과 맞물려 점점 더 폭증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이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닐 수 있다. 어쨌든 많은 고민거리가 있다는 것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그 극적 과장성이나 단순화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동시에 이런 상념들을 떠올리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그래도 학교는 존재하고 있고 학생들이 있고 선생님들이 있다. 그 안에서 만남이 이루어지고 있고 상호작용이 이루어지고 있다. 자신의 자식을 스스로 가르칠 수 없어서 '자식을 바꾸어서 가르치는 교육의 사회성'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배움이라는 것이 지식에만 국한된다면 저 거대한 학교 교육 시스템은 많이 달라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교육에 부여했던 의미들이 그런 것만이 아니라면 인내심을 갖고 문제에 직면해야 할 것이다. 교육이 단순히 계층을 재생산하고 사회적 지위를 배분하는 역할만 해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무엇을 담아야 할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자신의 욕망에서 한 발 떨어져서 우리 모두의 세대론적 관점에서 다음 세대가 어떻게 성장하고 이 사회를 만들어 갔으면 좋겠는지 고민하는 공적 관점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본다. 학교 폭력, 마약 문제의 위험성, SNS를 통한 왕따나 제반 문제들, 성적과 사회적 지위나 소득의 상관관계에 대한 집요한 추구 등 학교를 둘러싸고 있을 수 있고 발생할 수 있는 모든 문제들에 대한 답은 존재하지 않겠지만 좀 더 먼 곳을 가리킬 수 있는 교육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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