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해】]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 - 제4권

작성자이성준|작성시간12.03.27|조회수546 목록 댓글 0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제4권]

그리스도인의 성품

The Character of The christian

 

질적 향상을 위하여

만약 당신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 1, 2, 3권을 마쳤다면, 성경말씀을 찾아 상고하며 진리를 찾는 개인 성경공부의 유익을 이미 체험했을 것입니다. 당신 스스로가 캐어낸 말씀이 매일 매일 당신의 태도와 행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당신이 비록 조직적인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알고 있을지라도 당신이 공부를 계속해나가는 동안 아마도 어떤 방해를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敵인 사탄 자신도 당신 생활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을 알고 항상 당신을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떼어 놓으려고 애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너는 너무 바쁘다” 혹은 “너는 지금 성경공부에 집중할 수 없으니 이 간단한 일 먼저 하고 다음에 성경공부를 하라”는 핑계로 접근해 옵니다. 사탄은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지 못하도록 방해하고, 유혹을 해오고, 심지어는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을 비난하게 하는 등 많은 방해 공작을 합니다.

사탄이 원래 이러한 방해의 원천임을 아는 것은 도움이 됩니다. 이러한 사실은 당신에게 성경공부의 중요성을 재인식시켜 주며, 승리하고자 하는 당신의 결심을 견고하게 해 줍니다. 어떻게 승리를 얻을 수 있을까요? 여기에 몇 가지 실제적인 제안을 드립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이미 사탄과 사탄의 역사를 무너뜨리고 승리하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고린도전서 15:57)

둘째, 주님의 지혜와 능력을 구하십시오.

셋째, 자신을 훈련하십시오. 영적 훈련은 결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당신이 매주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을 계속 지켜 나가려고 애쓰는 것같이 당신이 성경을 공부하는 시간도 계획을 세워서 열심히 지켜 나가야만 합니다. 매주 일정한 양의 성경공부를 마치도록 분명한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에 도달하도록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솔로몬이 “소원을 성취하면 마음에 달다”(잠언 13:19)고 말한 것같이 당신이 계획한대로 목표를 성취했을 때 분명히 만족을 얻게 됩니다.

넷째, 성경공부 목표를 이루고 있나 매주 친구와 서로 검사하십시오. 그리고 성경공부에서 받은 축복들을 서로 나누십시오. 웹스터 사전에는 성품이 “속성, 특성 또는 고유성, 정신적인 활력 또는 견고함”으로 정의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에 요구하시는 것은 외적인 행동뿐만 아니라 내적인 성품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그리스도인의 성품에 관하여 무엇이라 말하는가를 아는 것은 절대로 필요합니다. 이 책에서 공부하게 될 그리스도인의 성품에 대한 다섯 가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열매 맺는 생활로 부르심

•행동으로 나타나는 진정한 사랑

•순결한 삶

•정직한 생활

•인격의 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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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과

 

열매 맺는 생활로 부르심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 가운데 맺어지는 열매를 그들의 활동의 양으로 계산합니다. 이것은 그의 삶의 질에 대한 진정한 모습을 반드시 보여주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이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인간이 완전하다면 사람됨과 행동 사이에 모순이 없을 것이다.

그의 행동은 그이 내적인 인품의 진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A. W. 토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실 때 나무보다 잎을 보기 위해, 꽃을 보기 위해 부른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보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과수원지기가 열매 맺는 유실수 나무를 기를 때 잎이나 꽃을 보기 위해 기르는 것이 아니라 많은 열매를 취하기 위해서 기릅니다. 하나님도 동일합니다.

하나님은 요한복음 15장에 농부라고 묘사하였습니다. 당신이 어떠한 사람인가? 하는 것은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 보다 훨씬 중요합니다. 즉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바울 서신에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떤 사람인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들어 사용하십니다. 구약에 이새의 아들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성장을 해야 하나님이 나를 통해 뜻을 이루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먼저 성품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받을 면류관은 열매와 관계가 있습니다. 인격의 열매에 세 가지 그리고 사역에 두 가지 면류관의 상이 있습니다. 인격의 열매는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인데 이것은 주님의 성품입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에 사역의 열매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는 성품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행위와 그의 결과에 강조점을 둡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됨과 성품을 강조합니다.

 

당신의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

 

1. 요한복음 15:4~5절에서 예수님은 영적인 열매를 맺는 일에 대한 비유를 보여 주셨습니다.

(1) 이 비유에서 포도나무는 누구이며 가지는 누구입니까?

포도나무는 “예수님”이시고, 가지는 “나”를 가리킵니다. 즉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입니다. 나는 주님 몸의 지체입니다. 포도나무 자체가 어떤 신비한 나무가 아닙니다. 포도나무를 들어 비유를 설명한 것은 포도나무가 관계성을 가장 잘 타나내어 주기 때문입니다.

첫째, 포도나무의 특성은 열매를 맺는 것뿐입니다. 포도나무는 관상용의 정원수나, 목재로나, 땔감으로도 부적한 나무입니다. 포도나무에 강조되는 것은 오직 열매뿐입니다. 열매의 특성 때문에 많이 재배합니다. 이 나무는 어느 나라에서도 흔한 나무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포도나무로 지적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열매이다, 라고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둘째, 포도나무는 늘 보는 나무입니다.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보는 나무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생활 속에서 주님과 관계를 맺고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늘 생활 속에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께 기뻐하시는 증거를 받은 사람입니다. 그는 모세와 같이 홍해 바다를 가르고 반석에서 생수를 나오게 하고 불기둥, 구름 기둥, 만나의 기적 같은 능력은 한 번도 행한 일이 없었지만, 그러나 하나님은 에녹을 사랑하셨습니다.

무엇이 하나님을 그토록 기쁘시게 하였겠습니까? 그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가장 중요합니다. 내 일상생활 속에 주님을 신뢰하고 따라가야 합니다. 우리는 기적적인 생활 보다는 일상생활 속에서 즉 가정이나 교회생활은 동전의 양면처럼 손바닥과 손등처럼 균형 잡힌 자의 삶을 통해 성실할 때 또한 내 명철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주재 권을 인정하고 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이것은 순종생활 속에 주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셋째, 포도나무는 유기적인 생명의 관계입니다. 유독 포도나무만큼은 접붙임이 잘 안됩니다. 이것은 단순한 조직체가 아니라 유기체의 생명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주님과 나는 하나라는 말입니다. 의자는 조직체입니다. 서로 못으로 조립이 되어 있습니다. 분리 시켜 놓으면 각각 제구실을 하지만 그러나 포도나무의 가지는 원나무에서 떨어져 나오면 아무 쓸모없이 생명은 끝이 나고 맙니다. 주님과 나는 조직의 관계가 아닙니다. 생명의 관계입니다. 주님은 몸이고 우리는 지체입니다.

(2) 가지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어떤 조건이 필요합니까?

이것은 열매를 맺는 방법입니다. 가지는 원나무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유기적인 생명의 관계를 가지고 있어야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농부이시고 주님은 포도나무이시고 나는 가지입니다. 가지는 반드시 열매를 맺어야 하는 사명이 있습니다. 가지가 단독으로는 절대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나무에 붙어 있을 때 즉 주님의 생명 안에 거할 때 인격의 열매와 사역의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주님이 도와주셔야 열매를 맺게 됩니다. 여기에서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3) 왜 가지는 포도나무를 필요로 합니까?

진액 즉 자양분을 공급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범죄하고 기도하였을 때 “진액이 마르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밤마다 침상과 베개를 적시면서 구원의 기쁨을 회복시켜 달라고 하였습니다. 우선 가지는 나무로부터 생명의 진액을 받아야 합니다. 나의 모든 자원은 주께로부터 옵니다.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하듯이 먼저 갈급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받지 못하면 잎도, 꽃도 필수 없고 열매도 맺을 수가 없습니다.

(4)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하십시오.

“거한다”는 말은 깊은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사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므로 “네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거한다는 말은 젖 먹는 아이와 엄마의 관계입니다. 이 관계는 떨어질 수 없는 관계입니다. 이것이 나와 주님의 관계입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신앙에 대해 하박국 3장 17~18절에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주님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주님이 없으면 기쁨이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엄마가 있으면 모든 것이 형통입니다. 그러나 엄마가 없으면 기쁨도 즐거움도 없습니다. 아내가 남편이 없으면 즐거움도 기쁨도 없는 그 부부가 정상적인 부부입니다. 이런 자가 그 사랑 안에 거하는 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없으면 아무것도 없고 불안해야 합니다. 성도는 자기 목사를 제일 좋아하는 그것이 그 안에 거하는 삶입니다. 이런 관계가 거하는 삶입니다. 이런 관계가 말씀 속에, 주님의 사랑 속에, 인격 속에 거하는 삶입니다.

 

2. 당신의 인격은 다른 사람들의 관심을 어떻게 하나님께로 이끌게 합니까? (마태복음 5:16)

인격이 사람을 이끌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인격으로 사역하길 바라십니다. 착한 행실이 인격입니다. 목회는 인격을 세워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란 주님의 인격을 말합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바로 주님의 인격입니다. 주님의 사역은 섬김입니다. 우리가 인격으로 섬겨야 합니다. 말로 섬기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 자체가 변화 되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었을 때 주님은 사역의 열매를 가져다줍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인격 속에서, 삶과 생활에서 그 능력이 나왔습니다. 인격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말로서는 이끌 수가 없습니다. 따라 오지 않습니다. 내가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먼저 변화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인격으로 섬겨야지, 활동으로, 노력으로 평가를 받으려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보셨을 때 그 인격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활동과 노력보다는 그 인격을 더 중요시 하십니다. 주님의 부활 때 막달라 마리아가 향유를 가지고 새벽에 무덤을 찾아 온 것은 활동 면입니다. 그러나 이 활동 면을 나중에 보면 그것과 아무 관계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과의 관계가 먼저이고 그 다음에 활동과 노력입니다.

가인과 아벨의 제사에도 하나님과의 관계에, 하나님 앞에 드려짐이 중요하였습니다. 즉 주님 안에서의 삶이 중요하였습니다. 주님 안에 거하여 주님으로부터 자양분을 공급 받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즉 주님 안에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깊은 교제를 해야 합니다.

 

3. 갈라디아서 5:22~23절에 있는 성령의 열매에 대한 말씀을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당신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기를 원하시는 성품들이 무엇인지 열거하고 그것들을 간단하게 정의해 보십시오.

(1) 사 랑

사랑은 느낌상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데 우리는 느낌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상대방에게 꼭 필요를 채워주고 세워주는 그것이 참 사랑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어 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 주셨습니다. 먼저 우리가 사랑을 하려면 상대방에 관심을 가져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상대의 필요를 알고 채워 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2) 희 락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현재 환경에서 불평이나 원망 없이 현 위치에서 족한 줄 알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3) 화 평

좋은 대인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상대방과의 관계에서 있어서 아주 좋은 관계를 맺는 것입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도 상대방을 기분 나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화평의 관계가 없기 때문입니다. 일을 시켜도 기분 나쁘게 시키는 것은 화평이 없어 그렇습니다. 성도의 공통적직분이 화평입니다. 세상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과 화목을 만드는 것입니다. 화평을 깨트리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입니다. 화평은 하나님과 나와 원만한 관계를 맺어 주는 영적 열매입니다. “싹쓰”는 무력으로, 힘으로 대항해서 만드는 평화입니다. 주인과 종의 관계입니다. 세상의 평화는 모두 싹쓰입니다. 그러나 “샬 롬”은 하나님과 나의 관계입니다. 주님은 예루살렘 입성하셨을 때 예루살렘성 안에 거한다고 평화롭다고 하지 말라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고 다 무너진다고 하시면서 우셨습니다. 유대나라는 착각 하였습니다. 성민으로, 평화로 착각을 하였습니다. 성도라, 하여 평화로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 평화입니다.

(4) 오래 참음

약속이나, 목표나 고난 등을 견디는 것입니다. 속이 뒤틀리고 끓은 가운데서 참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고난도, 그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의지하고 참아야 합니다.

(5) 자 비

불쌍히 여겨 주고 덮어주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그 사람을 불쌍히 여겨 주고 잘못을 덮어주고 받아주는 것입니다. 자비와 사랑의 차이는 사랑이 절대적인 것입니다. 상대방과 아무 관계없이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사랑 할 때의 사랑입니다. 즉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자비는 상대적 관계입니다. 그 사람의 행동에 따라 관계가 되어 집니다. 자비 보다 사랑이 더 차원이 높습니다.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자기의 태반을 불쌍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자식을 그 태에서 담아 길러 냅니다. 창자의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면서 불쌍히 여긴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실제 그렇게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속성인 긍휼이기도 합니다.

(6) 양 선

손해를 보는 마음입니다. 혹은 계산이 없는 마음입니다. 부모 자식은 계산이 없습니다. 부모가 늘 손해 보는 마음으로 길러 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생활면에 늘 손해 보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깍쟁이로 너무 똑똑하게 살면 안 됩니다. 따지지 않고 늘 손해 보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 동일합니다. 주님은 철저히 손해를 보는 삶을 살았습니다. 바울도 성도들을 위해 허비한다고 하였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위해 손해를 보고 키웁니다.

(7) 충 성

성실로 외적과 내적의 성실이 충성입니다. 성경은 내적인 면을 더 중요시 합니다. 내적 충성에는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이때 외적으로, 내적으로 충성 할 수가 있습니다. 충성은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충성에서의 질적 충성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것입니다. 외적인 충성은 처음부터 끝까지 똑같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주님은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 하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 한번 섬기면 끝까지 섬기는 그것이 충성입니다. 처녀가 한번 시집을 갔으면 끝까지 살아가야 합니다. 양적 충성은 질적인 충성에서 옵니다. 충성은 거짓이 없는 마음에서 해야 합니다. 믿음과 충성은 같은 뜻입니다. 맡은 일만 잘해야 하고 거짓이 없어야 합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자가 로마서 14장에 나오는 바울의 동역자인 부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입니다. 이 부부는 바울을 위해 목숨까지 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사를 네 번 하면서 바울을 따라 다니며 복음 사역을 도왔습니다. 다윗의 주변에도 이런 충성된 자 삼백 명이나 있었습니다.

(8) 온 유

자기의 뜻, 생각, 사상 모두 하나님의 뜻에 굴복 시키는 것이 온유의 인격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와 사람에게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지상에 가장 온유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모세의 온유는 길들여진 온유입니다. 야생마가 조련사에게 긴 시간을 두고 길들여졌을 때 누구든지 탈 수가 있습니다. 온유는 훈련에서 옵니다. 자기를 꺾어야 합니다. 즉 비워내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내 뜻, 의지, 나의 모든 것이 꺾어져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굴복 시켜야 합니다. 교회 일꾼은 자기 뜻, 의지, 생각을 하나님 앞에 와 목회자 앞에 굴복하는 자를 세워야 합니다. 굴복 시키는 이것이 온유한 인격입니다.

(9) 절 제

균형을 잘 맞춘 자세입니다. 무조건 참는 것은 아닙니다. 전체적인 균형을 생활면에서 조화를 이루면서 나아가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신을 조절할 줄 아는 자입니다. 막연한 조절이 아닙니다. 균형을 잡는 조절입니다. 우리는 절제할 때 생활의 전체 면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는 그것은 절제를 못해서입니다. 예로서, 음식도 편식을 하면 안 됩니다. 덕은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것을 말합니다. 성도의 생활면은 덕으로 해야 합니다.

 

4. 예레미야 17:5~8절에 있는 두 종류의 사람의 결과를 비교해 보십시오.

열매를 맺기 위해서, 하나님을 의뢰하기 위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의뢰하고 삽니다. 사람을 의뢰 하든지 하나님을 의뢰 하든지 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의지하고 아내는 남편을 의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만 의뢰하고 살기를 원하십니다. 사람을 의뢰하고 살면 저주를 받는다고 경고를 하셨습니다. 사람은 사랑의 대상일 뿐입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그는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뿌리를 강변에 뻗치고 더위가 와도 두려워 아니하고 그 잎이 청청하며 가뭄의 해에도 걱정이 없이 결실을 하는 축복을 받습니다.

사람을 의뢰하고 사는 자는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는 삶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아무 해택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살면 하나님의 것이 모두 내 것이 됩니다. 사람을 의뢰하는 자는 사막의 떨기나무와 같습니다. 전혀 소망이 없습니다. 좋은 일이 오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즉 광야의 건조한 곳, 건조한 땅에, 사람이 거하지 않은 땅에 거하게 됩니다. 이것은 결국 망하게 됩니다. 우리나라 군사 정부에서 역력히 볼 수 있습니다. 박정희는 김재규를 믿었다가 김재규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우리나라 격언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을 믿으면 반드시 그렇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마치 물가에 심기운 나무와 같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섭취하고 살 수 있다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공급을 받고 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흘러넘쳐 진액이 마르지 않는 복으로 늘 푸르고 열매를 많이 맺게 됩니다. 어떤 가뭄 속에서도 견딜 수가 있습니다.

다른 말로하면 어떤 시험과 시련 속에서도 이긴다는 말입니다. 사람을 의뢰하는 자는 열매를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뿌리와 생명이 있다할지라도 열매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는 자는 삶 속에 열매를 많이 맺게 하여 주십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나를 나무로 비유한다면 내가 어디에 심겨져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한번 자기를 점검하여 보십시오.

내가 하나님을 의뢰하고 사는데 심겨져 있는지? 아니면 사람의 배경을 의뢰하는데 심겨져 있는지? 를 확인하여 보십시오. 내가 사막의 떨기나무인가? 강가에 심겨 있는 나무인가? 확실하게 체크하여 보고 다시  한번 위치를 제 정리하십시오. 하나님을 의뢰하고 기도하면서 성장하는 자와 자신을 의지하거나 사람을 의지하고 기도 없이 성장하면 일꾼이 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의뢰하고 기도하면서 성장한 사람은 기대 이상으로 성장하여 교회에 헌신을 하게 됩니다. 사역에도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하는 가를 점검을 하여 보십시오. 내 활동이 바쁘면 그 결과는 없습니다. 우리 중심에 하나님을 의뢰하는 신앙이 중요합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라는 말은 내 실제 생활 속에서 하나님을 의뢰하고 살라는 말입니다. 기도가 인격화되라는 말입니다.

 

5. 이러한 말씀들에 비추어, 당신 자신의 열매를 검토해 볼 때 어떠한 적용을 해야 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제자 교육을 받고 있는 자 중에 열매가 없는 자를 한번 들아 보십시오. 그리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변화가 옵니다. 자기 자신도 분명히 돌아보면 사람을 의뢰하는지? 하나님을 의뢰하든지? 자신을 알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의뢰하고 기도할 때 열매가 있습니다.

 

인격의 변화

 

6. 하나님이 계속해서 당신의 삶을 변화시키시면서 당신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베드로전서 1:15)

하나님의 뜻은 거룩입니다. 거룩을 향하여 성장을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입니다. 성결한 삶은 히브리서 10장 10절에 “주께서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노력을 해야 하는가? 본 절은 우리가 거룩한 위치 변화 즉 중생하였음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거룩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즉 성화 또는 상태 변화가 된 것은 아닙니다. 실제 생활, 실제 인격, 실제 행동이 변화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실제 내 행동 상태에서 거룩이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거룩은 예수님과 하나님과의 일치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하는 거룩입니다. 이것은 경건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 데까지 자라야 한다는 말은 주님의 인격의 거룩을 닮는 것이 하나님의 기준입니다. 주님처럼 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거룩함으로 우리도 거룩하라고 하였습니다.

 

“거룩함이란 순결 이상의 것입니다.

거룩함이란 선한 것과 신성한 것과

예수님의 성품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분과 일치되는 것 이것이 바로 거룩함입니다.”

-앤드류 머레이-

 

7. 우리의 인격이 드러나야 하는 삶에 몇 가지 중요한 영역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무엇입니까?

(1) 빌립보서 4장 8절

거룩해야 합니다.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하였습니다.

생각이 우선 거룩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신자인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하였습니다. 생각이 고정되어 있지 않고 갈대처럼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생각이 거룩해야 말도 행동도 거룩할 수 있습니다. 가룟유다는 예수 팔 생각을 마귀로부터 받았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자기 행동으로 팔았습니다.

(2) 골로새서 4장 6절

생각이 거룩할 때 말이 거룩할 수 있습니다.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고 하였습니다. 말을 거룩하게 하라는 말입니다. 즉 혀가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혀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것은 말이 그 사람의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말이 거룩해야 행동도 거룩하게 됩니다. 말이 지저분한 자는 음담패설을 잘하는데 그 생각 속에 그것이 들어 있기 때문에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마음도 지저분한 것입니다. 우리는 말이 깨끗해야 합니다.

(3) 베드로전서 2장 12절

행동이 거룩해야 합니다.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생각이 거룩하려면 주님을 계속 묵상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늘 묵상하여야 합니다. 해바라기는 해만 바라봄으로 꽃도 피고 열매를 맺게 됩니다. 우리도 계속 주님을 바라보고 묵상을 하면 변화되게 됩니다. 내가 무엇을 묵상하고 있느냐에 따라 거룩할 수도 있고 지저분할 수 도 있습니다. 생각, 말, 행동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이 깨끗한 자가 지저분한 말을 할 수 없고 말이 깨끗한 자가 지저분한 생각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생각이 중요합니다. 깨끗한 생각이 내 인격이 되어 하나님의 거룩이 내 생활 속에서 흘러 나와야 합니다. 이것은 묵상 훈련으로 될 수 있습니다. 우선 생각이 거룩해야 합니다. 하나님 아버지가 거룩하니 나도 거룩하기 위해서 묵상을 계속 하다보면 생각이 바뀌어 지고 말이 거룩하게 되고 행동도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 영역은 서로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서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생각이 거룩하면 말도, 행동도 거룩하게 나타납니다. 생각이 지저분하면 말도, 행동도 지저분하게 나타납니다.

 

8. 이 중 어느 한 가지가 다른 것들 보다 더 중요합니까? 만일 그렇다면 어느 것이며, 왜 그렇습니까? (누가복음 6:45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생각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선한 사람은 마음의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자는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고 하였습니다. 선한 것에 선한 것이 나옵니다. 하나님을 내 생각에 가득 채워야 합니다. 다른 말로하면 인격이 거룩 하라는 말입니다. 그래야 말도 행동도 거룩으로 바뀝니다. 말은 그 나라 문화를 만들어 냅니다. 거친 말을 쓰면 거친 행동이 나타납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을 훈련시킬 때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람은 높은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라고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열국의 아비라는 뜻으로 그 인격을 만들도록 하여 주셨습니다. 늘 생각이 열국의 아비로 생각했기 때문에 인격화 되었던 것입니다. 하늘의 별을 쳐다보라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의 의식을 고쳐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긍정적인 말로 그 긍정이 인격이 되면 나는 긍정적인 사람이 됩니다. 사래에게는 무자식이 인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래를 사라라고 이름을 고쳐 주셨습니다. 열국의 어미로 그 의식을 고쳐 주셨습니다. 이름을 부를 때 그것이 인격이 됩니다. 한두 번으로는 인격이 안 됩니다. 계속적으로 생각하고 반복하면 인격이 되어 버립니다. 우리가 계속 주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암기하고 묵상하면 그것이 인격이 되어 주님을 닮게 됩니다.

 

9. 당신의 인격이 변화되어 가면서 당신의 생각에는 어떤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까? (에베소서 4:23~24)

마음과 생각이 변화 되어야 합니다. “오직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라고 하였습니다. 생각이 변화 되어야 내가 변화 됩니다. 선한 생각, 거룩한 생각으로 바뀔 때 선한 것이 나옵니다. 누가복음 6장 45절에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을 낸다고 하였습니다. 성경 암송과 암송된 말씀을 계속 묵상하면 생각이 변화 됩니다. 변화의 근본은 생각입니다. 생각이란 품는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내가 암송을 많이 하면 그 말씀으로 성령께서 내 생각을 바꾸어 주십니다. 성령이 내 마음을 지배하시면 내 생각이 깨끗하여 집니다. 이것이 근원적입니다. 

 

10. 베드로후서 1:1~8절을 주의 깊게 살펴보십시오. 성경의 이 부분은 그리스도인 인격의 성장에 대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은 당신의 인격이 성장하도록 당신을 어떻게 준비시켜 주셨습니까? (2~4절)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신의 성품을 나에게 주셨습니다. 이것은 근본적인 것을 우리들에게 이미 주셨습니다.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내가 확신을 가져야 하는 것은 내게 신의 성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내 성품을 이루어 가는데 경건의 모든 자원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에 블랙도그는 여전히 있습니다. 우리는 블랙도그에게 양식을 주면 안 됩니다.블랙도그는 옛 사람의 성품을 들어 주지 않을 때 굶길 수 있는 것입니다. 블랙도그의 양식은 첫째, 육신의 정욕입니다. 이것은 끝없이 방탕하고 싶은 욕망입니다. 둘째, 안목의 정욕입니다. 이것은 내 눈에 보이는 것은 모두 가지고자 하는 욕심입니다. 이것은 탐심이고 우상 숭배의 죄에 해당합니다. 셋째, 이생의 자랑입니다. 이것은 명예욕입니다. 이런 것들을 들어 주지 않는 것이 양식을 주지 않는 것이 됩니다. 신의 성품의 양식은 신령한 젖,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이것을 먹을 때 성장합니다. 먹는 것은 말씀을 듣고, 묵상하고, 읽고, 공부하고, 암송하면 반드시 변화가 옵니다.

(2) 열매 맺는 일에 대하여 8절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전력을 다해 개발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라고 하였습니다. 생활화 되지 않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변화는 하나님의 선물이면서 내가 노력을 해야 합니다. 첫째, 중생은 신의 성품(위치 변화)의 경건에 대한 모든 자원을 주셨습니다. 둘째, 상태변화는 내가 노력을 할 때 우리가 더 깊이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할 때 하나님은 성화의 열매를 주십니다.

(3) 8절에서 언급된 “이런 것”은 무엇입니까? (5~7절)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입니다. 믿음은 말씀의 약속을 그대로 받아 드리는 것이며, 덕은 전체적인 탁월성입니다(전체를 포함). 지식은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며 그 지식을 생활에 적용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절제는 - 셀프 - 자기 조절하는 능력입니다. (4), (5)는 적용입니다.

(4) 이러한 성품들 중에서 어느 것을 당신이 개발하기 시작할 수 있습니까?

 

내가 무엇이 부족한가를 체크 해 보십시오. 부족한 것은 개발하십시오. 당장 착수 할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십시오.

(5) 당신이 언급한 성품을 드러내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도를 더욱 닮게 되도록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겠습니까?

구체적인 생활 조치는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계획을 하여보십시오. 말에, 생각에, 행동에 있어서 어떤 생각이 가장 나를 많이 지배하고 있는가를 체크 해 보십시오.

(1) 당신의 생각에 있어서 →

가장 많이 생각하고 있는 그것을 체크하여 보십시오.

(2) 당신의 언어에 있어서 →

가장 많이 잘 나오는 것을 체크하여 기록하여 보십시오.

(3) 당시의 행실에 있어서 → 체크하여 기록하여 보십시오.

내가 내 안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입니다. 예로서, 내 생각에 돈, 각종 정욕 등이 마음의 생각에 차 있으면 이것이 내 인격입니다. 남이 나를 거룩히 보아 주는 그것이 내가 아닙니다. 나는 얼마든지 탈을 쓸 수 있습니다. 탈을 벗어야 하나님 앞에 진실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벌거벗은 그대로 서십시오. 그래야 내가 진실할 수 있습니다. 남이 나를 모릅니다. 내가 생각을 하고 있는 그것이 자신입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말씀을 생각하고 살 때 말씀의 사람이 됩니다. 내 말이 거룩하면 내 생각도 거룩하여 집니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으면 인격을 거두고,

인격을 심으면 일생을 거둡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심느냐에 내 일생을 좌우됩니다. 주님의 말에 “내 때가 아직 되지 않았다”는 말을 십자가에 죽으심에 대한 말입니다. 주님은 항상 십자가를 떠나지 않고 지배하였습니다. 내 마음이 밭이므로 무슨 생각을 심느냐에 따라 내가 변할 수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나를 지배하는 그 생각이 바로 자신입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고, 예수만 생각하고, 말씀을 묵상하고 살면 주님이 내 인격이 됩니다. 우리의 몸은 겉보다 속이 더 중요합니다. 즉 속 사람이 겉 사람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생각이 늘 묵상하고, 주님을 의뢰하고 살 때 인격이 되고 주님의 능력이 그 속에서 나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인격이 되었을 때 그 속에서 바울처럼 손수건을 환자 위에 얹어도 병이 낫게 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생각을 심으면, 행동을 거두고,

행동을 심으면, 습관을 거두고,

습관을 심으면, 인격을 거두고,

인격을 심으면, 일생을 거둔다.

묵상을 위한 질문

 

고린도후서 10:5절을 상고하십시오. 어떤 종류의 생각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합니까?

                                                          

                                                          

 

 

묵상에 대한 설명

생각부터 복종을 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변화가 옵니다. 내 마음속의 생각부터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복종을 시켜야 합니다. 우리의 책임은 복종이 생각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생각으로 인해 마음이 거부하므로 겉만 복종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즉 바리새인들과 같은 자입니다. 가룟유다의 생각은 늘 예수 팔 생각만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는 언제나 랍비여 라고만 불렀습니다. “랍비”는 율법을 가리키는 선생에 불과 합니다. 그는 “랍오니여”라고 한 번도 불러 보지 못했습니다. 이 말은 “나의 주인이십니다.”라는 말입니다. 거지 바디메오는 한번 만났지만 “랍오니여”라고 나의 주인이라고 불렀습니다. 생각부터 그러했기 때문에 입에서 그 말이 나온 것입니다. 교회에서 주님의 일꾼은 생각부터 주님께, 담임 목사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경건한 지혜

세상도, 하나님도 지혜를 요구 합니다. 뱀처럼 지혜로워라, 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편에서는 영적 지혜 즉 경건의 지혜, 거룩한 지혜를 말합니다.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지혜는 거룩한 삶에서 나옵니다. 즉 경건의 생활에서 나옵니다. 지혜는 지식을 활용합니다.

 

11. 잠언의 목적 가운데 하나는 “지혜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잠언 1:2). 다음 구절들은 지혜에 관하여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1) 잠언 3장 13~14절

지혜가 가장 가치가있습니다. “지혜, 명철을 얻는 자는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낫다”고 하였습니다.

(2) 잠언 9장 10절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것이 지혜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지혜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하였고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내가 알고 시작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내가 경외할 때마다 지혜를 공급받습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구하였습니다. 목회자는 능력보다 지혜가 더 우선입니다. 지혜를 얻어 해결할 때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고 이것은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3) 잠언 19장 20절

권고와 훈계를 받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체크하여 지적과 책망을 해줄 때 그것을 받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지혜를 얻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일천번제를 즉 경건의 생활을 통해 지혜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권고와 훈계를 받을 때 지혜를 얻는다, 고하였습니다. 경건의 지혜를 얻기 위해 잠언서를 많이 읽으십시오. 경건의 지혜가 12번에 나옵니다.

12. 야고보서 3:13~18절을 읽으십시오. 경건한 지혜는 어떻게 나타나게 됩니까? (13절)

경건한 인격이 경건한 지혜입니다. 온유와 선행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온유와 선행이 인격입니다. 이것은 경건하고 거룩해야 합니다.

•경건한 지혜와 경건치 못한 지혜를 비교해 보십시오. (15~17절)

 

경건한 지혜

 

(1) 성 결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중요합니다. 그것이 경건의 지혜입니다. 경건한 인격을 가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베드로, 사도 바울이 그 인격이 거룩했던 것은 하나님의 거룩함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세상의 지혜는 우선 하나님 앞에 숨기려 합니다. 언제든지 숨으려고 합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고 숨었고 무화과나무 잎으로 가렸던 것입니다. 숨는 것은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입니다. 즉 멀어지는 일만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2) 화 평

결과를 올바르게 만들어 줍니다. 늘 가까워지게 하여 줍니다. 화목은 성도의 직책입니다. 화목이 없으면 계속 멀어집니다. 화목은 사람의 관계에서도 가까워지게 하여 줍니다. 이것이 경건의 지혜입니다.

(3) 관용과 양순 → 용납하고 순한 것입니다.

(4) 긍휼과 선한 열매 → 이것이 경건의 지혜입니다.

(5) 편벽과 거짓이 없는 것

진실하고 속이지 않고 탈을 쓰지 않는 것이 경건의 지혜입니다. 경건치 못한 것은 세상의 지혜입니다.

 

경건치 못한 지혜

 

(1) 목표도 경건치 못합니다.

(2) 각종 정욕적인 것입니다.

(3) 마귀적인 것입니다.

마귀를 기쁘게 하고, 사람을 헤치고 파괴하는 일, 그리고 속이는 이런 것이 세상의 지혜입니다. 북한에서 잠수함으로 무장공비를 침투시켜 놓고 시치미를 툭 떼고는 세계 여론에서 압박을 가하니까 오일 후에 하는 말이 훈련하다가 고장으로 인한 일이므로 공비의 시체와 잠수함을 그대로 보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세상 지혜입니다. 사탄이 하는 짓, 그대로 거짓말을 참말 하듯이 합니다.

(4) 혼란 한 것. → 분열과 싸움입니다.

(5) 거짓말을 합니다.

이런 결과에서 오는 것은 후회와 멸망 밖에는 없습니다. 경건한 지혜는 계속 하나님과 가까워지지만 세상 지혜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숨는 것입니다.

13.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어떤 결정을 내리기 위한 지혜를 얻는데 관하여 야고보서 1:5~6절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기도하는 것이 경건의 지혜입니다. 지혜 자가 되려면 기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인생은 생활면에 시련을 통해서 지혜를 알게 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는 철학이나 사색이나 지식적인 것이 아니고 실제 생활에서 기도로 지혜를 구하고 적용되는 것입니다. 솔로몬도 실제 백성들을 잘 다스리기 위해서, 지식을 활용하기 위해서 지혜를 구했던 것입니다. 오늘의 시대는 지식은 많은데 지혜가 부족하여 활용을 잘 못합니다. 교회는 지혜 자가 많아야 합니다. 지식이 진리의 내용이라면 지혜는 생활하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지혜는 지식을 최고로 활용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혜를 믿음으로 구하여 지식을 최대로 활용해야 합니다.

 

“지혜란 사실들을 모아놓은 지식 그 이상의 것입니다.

그것은 도덕적이고 영적인 일에 대한 지식의 올바른 적용입니다.”

J. 오스왈드 샌더스-

 

묵상을 위한 질문

 

열왕기상 3:5~13절을 상고하십시오. 지혜의 가치와 부(富)의 가치를 비교해 보십시오.

                                                          

                                                          

 

                                                            

묵상에 대한 설명

솔로몬은 자기 사명을 활용하는데 지혜가 필요 하였습니다. 백성 한 사람 한 사람 다스리는데 지혜가 필요 하였습니다. 지혜가 있는 자에게 부가 따라옵니다. 제자 양육은 절대적으로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솔로몬은 정치적 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했습니다. 영적 지도자도 영적 지혜가 필요합니다. 영적으로 삶을 이끌어 가기 위해 지혜가 필요합니다. 솔로몬이 만일 지혜가 없었더라면 부가 따라 올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솔로몬은 지혜를 기도로 하나님께 구하여 그 지혜로 정치를 하여 부가 따라왔고 금이 너무 많아 돌덩이처럼 굴러 다녔다고 하였습니다. 남편이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다 주어도 아내가 지혜가 없으면 부한 삶을 살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지혜를 하나님께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구체적으로 구해야 합니다. 솔로몬은 백성들을 잘 이끌어가기 위해 지혜를 구했습니다. 기도는 구체적으로 해야 합니다.

 

거룩한 삶의 기쁨

 

14. 다음 세 구절에서 발견되는 예수님의 계속적인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15:11, 요한복음 16:24, 요한복음 17:13)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거룩한 삶과 기쁨이 신앙생활에 성숙한 열매입니다. 생활에 거룩함과 기쁨이 없으면 미성숙한 자입니다. 반드시 생활에 기쁨이 있어야 거룩의 열매입니다. 현재 환경이 어떻다 할지라도 불평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고 감사하면 성숙한 자의 삶입니다. 기뻐하는 생활이 우리들의 거룩한 삶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15번부터 기쁨을 얻는 비결입니다.

 

15.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많은 것을 “버린 자”에게 그가 약속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누가복음 18:29~30)

거룩한 기쁨을 얻으려면 버릴 것을 버려야 합니다. 버린 자에게 하나님은 기쁨을 주십니다. 버릴 것은 세상의 것입니다. 양육의 목표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세상의 것을 버리게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을 버려야 하나님의 것을 취하게 됩니다. 버릴 것을 버리지 못하면 두려움이 옵니다. 내가 세상에서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은 세상의 것을 버리지 못하여서 염려와 긴장이 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버렸을 때 하늘의 신령한 기쁨을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예로서, 술을 버리고 담배를 버리면 하나님이 하늘의 기쁨을 주십니다. 세상의 것을 버리지 못했을 때 혹시 내가 무슨 낙으로 살 것인가? 세상 친구 모두 잃게 되면 어떻게 하나? 집안에서 미움을 받고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 사업을 실패하면 어떻게 하나? 이러한 두려움이 오는 것은 아직도 세상의 것을 버리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을 버리면 금세 곧 이 세상에서 여러 배를 받게 되고 내세에도 영생을 받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버릴 것을 버리면 즉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리는 자는 땅에서도 많이 받게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잃지 않게 하십니다. 주님을 최고 우선으로 사는 자는 버릴 것을 버립니다. 이때 하나님은 금세와 내세에 여러 배로 풍성히 주십니다.

“내게 어떤 미래가 닥쳐 올 것인가?” 또는 “내가 무엇을 포기해야만 하나?”라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과 갖는 교제를 이해하는데 성숙하지 못한 단계에 머물러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경험할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크고 높은 수준의 삶을 경험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그는 당신이 그의 수준에서 어떻게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을 주셨습니다.

 

16. 당신은 어떻게 기쁨의 태도를 지속할 수 있겠습니까? (시편 16:11)

주님께 소망을 두어야 합니다. 주께 소망을 두는 자에게 생명의 길을 보여 주시며 주님 앞에서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 소망을 두고 사는 자는 항상 거룩한 기쁨으로 살 수 있습니다. 기쁨의 근원이 주님이십니다. 돈, 물질, 건강, 자녀 이것은 잠시 주는 세상의 기쁨입니다. 참 기쁨은 주님께로부터 옵니다. 그러므로 세상 물질, 돈, 권세, 명예, 자녀, 물리적인 것에 두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소망을 주님께 두고 살아야 합니다.

마치 하박국 선지자처럼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여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 지라도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는 하박국 선지자처럼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철저히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훈련이 안되면 무겁고 무서운 짐이 됩니다. 항상 해바라기처럼 해를 바라보듯이 우리는 소망을 주님께 두고 주님만 바라 볼 때 주님은 기쁨을 주십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그 환경으로는 기뻐할 수 없지만 여호와를 바라보았을 때 그것으로 기뻐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 “너희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는 줄 안다”고 하였습니다. 탈을 벗어 버리는 일은 헛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 서기관들은 탈을 벗지 않았습니다. 섬기는 삶은 헛되지 않습니다. 이런 삶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십니다. 이런 삶을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기쁨을 주십니다.

 

17. 빌립보서 3:4~14절에 있는 바울의 목표를 읽으십시오. 그의 옛 목표와 그의 새 목표를 비교해 보십시오. 특별히 그 목표들에 대한 그의 태도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전 목표

새 목표

 

1. 육체를 신뢰함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배경을 신뢰하였습니다.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파요, 율법에 흠이 없는 자로 제사장들로부터 신뢰 받는 그것으로 바라보고 산 것이 이전 목표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이전 목표들을 해로 여겼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가 발견 되려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께 받은 직분을 가장 영광스럽게 여겼습니다.

 

2. 종교적 지도자

 

사람으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날 때부터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것들이 이전의 목표였습니다.

 

이런 것들을 모두 배설물로 여기고 무가치하게 여겼습니다.

 

3. 교회를 핍박함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는 것이 이전의 목표였습니다. 이런 일이 하나님 앞에 충성된 일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예수를 위해 핍박을 받는 자로 바뀌었습니다. 자기 몸에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려고 하였습니다. 흔적을 가졌다는 말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의 고난은 고린도후서 11장 22~23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4. 율법의 의(義)로는 흠이 없음

 

바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킨 자였습니다. 자기의 의를 주장하였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흠이 없는 자라고까지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를 나되게 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만 나타내고 믿음을 나타내었습니다.

 

5. 모든 것을 자신에게 유익한

것으로 여김

 

율법으로 바리새파였고 날 때부터 가진 로마 시민권, 모든 명예 자기의 유익을 주는 것으로 알고 적극적으로 행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 박해도 적극적으로 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충성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이런 모든 것들을 주님의 일에 해로 여겼습니다. 영적 생활에 방해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그것을 최고의 고사한 지식으로 알았습니다. 주님께 가치관을 두고 살았습니다. 즉 주님이 최고 가치 있는 것으로 믿고 주님만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주님을 아는 것을 최고 고상한 지식으로 알고 주님을 배우십시오. 이것이 우리들의 새 목표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왜 바울이 그렇게 미래에 대하여 긍정적인 태도를 가졌다고 생각합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것이 그리스도에게 소망을 두고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신앙의 성장이 옵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야 합니다. 즉 십자가를 질 때 성장한 사람입니다. 사람들은 십자가 지기를 싫어합니다. 이것은 성장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영적 기형아로 머물러 있으려고 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지 않고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려고 하면 성장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육체적 평안을 추구하고 자기중심으로 신앙 생활하려고 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늘 두려움 속에서 생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것이 기본적인 것이면서 이때 탁월한 헌신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로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을 때 하나님께 헌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신앙은 소망을 하늘에 두고 위엣 것을 사모하고 바라보는 것 즉 주님을 항상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들의 기본 생활은 주님께 소망을 둘 때 세상 것을 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때 주님만 바라보고 하나님의 것을 취하게 됩니다. 세상의 것을 버리지 못하고 세상의 것을 바라 볼 때 신앙 성장이 오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지혜를 가지고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취하는 자기 되어야 하겠습니다.

18.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거룩하고 풍요한 삶을 살기 위한 여덟 가지의 기본 요소를 제시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3~12절을 읽고 예수님께서 이 각각의 특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삶의 축복을 열거해 보십시오.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로드, 나의 주인이 될 때 주님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면 겸손하고 섬기는 삶이 나에게 나타납니다. 교만하면 성장은 끝이 납니다. 우리는 계속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즉 주님의 인격을 닮을 때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복 있는 자와 예수님의 약속을 볼 수 있고 오른쪽에 복이 있는 자와 왼쪽에 약속을 주님은 주셨습니다. 먼저 복이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오른쪽에 있는 것을 위해 열심히 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왼쪽의 있는 복 있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는 것입니다.

복 있는 자

예수님의 약속

1. 심령이 가난한 자

(영적인 일에 대한 자신의 가난을 인정하는) 3절 - 주님 중심으로 살아 갈 때 가난한 자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중심이 될 때 오른쪽의 복 있는 자가 됩니다. 우리의 삶의 기쁨은 예수 중심이어야 합니다.

 

천국이 따라 옵니다.

2. 애통하는 자

(죄를 진정으로 슬퍼하는) 4절 - 주님 중심으로 생활하면 주님의 마음을 품게 됩니다. 이때 죄에 대하여  애통하는 자가 됩니다.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받게 됩니다.

3. 온유한 자

(자신의 뜻을 그리스도께 굴복시키는) 5절 - 예수 중심이 자기 뜻을 포기 하는 것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게 됩니다.

4.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의를 위하여 깊은 열정이 있는) 6절 - 예수 중심이 될 때 주님처럼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됩니다.

 

배부를 것입니다.

5. 긍휼히 여기는 자

(도덕적인 죄가 없는) 8절

긍휼히 여김을 받습니다.

6. 마음이 청결한 자

(도덕적인 죄가 없는) 8절

하나님을 보여 주십니다.

7. 화평케 하는 자

(다른 사람을 화해케 하므로 화평을 이루는) 9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됩니다.

8. 핍박을 받는 자

(그리스도 때문에 압박을 받는) 10~11절

복이 있는 자가 됩니다.

위의 여덟 가지는 한마디로 주님의 인격입니다. 주님의 인격이 되면 이것이 기쁨의 삶입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중심이 될 때 복이 있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내 중심의 생활은 그 반대입니다.

 

요 약

 

다음 내용에 한두 문장을 첨가해서 이 과를 요약하십시오.

당신의 열매에 대한 하나님의 기대.

하나님은 당신이 그분과의 교제의 결과로, 당신의 삶 속에 열매가 맺어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보충설명>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으면 열매를 많이 맺게 되듯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생활해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와 인격의 열매를 맺게 되고 하나님이 주신 기쁨을 맛보고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 세상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것인 위엣 것을 취하게 됩니다.

인격의 변화.

인격의 성장은 생각과 말과 행실의 영역을 모두 포함합니다.

 

<보충설명> 사람은 생각이 변하고 말이 변하고 행동이 변화 되어야 합니다. 즉 거룩하든지 더럽든지 어느 하나가 아니라 전체적이어야 합니다. 생각, 말, 행실이 변화될 때에 그리스도의 인격이 우리 속에서 나타납니다. 생각을 먼저 개발하고 말을 개발하고 행실을 무던히 개발해야 합니다. 여기에 자신과의 끝없는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개발할 때 성령께서 도와주십니다. 즉 성령을 통해서 변화가 와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내 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격에서 나오기를 원하십니다. 말에서만 복음이 나가지 말고 인격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바라보고 생각하면 주님의 인격이 나에게 나타납니다.

경건한 지혜.

경건한 지혜는 지식 그 이상의 것입니다.

 

<보충설명>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고 거룩하게 살면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 속에 생활하는 것을 적용하게 됩니다. 이것이 경건한 지혜입니다.

거룩한 삶의 기쁨.

기쁨은 당신이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 때에 당신 생활의 특징이 될 것입니다.

 

<보충설명> 세상적인 것을 버리고 오직 주님께 소망을 두고 주님을 중심으로 살아 갈 때 거룩하고 풍성한 삶을 살게 되고 성숙한 자가 누리는 기쁨의 생활을 소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삶을 보여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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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 과

 

행동으로 나타나는 진정한 사랑

오늘날 사람들은 여러 가지의 서로 다른 사랑의 정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은 영화나 텔레비전이나 광고물이나 잡지나 다른 출판물에서 보게 되는 사랑의 이야기에서 알게 되었거나, 아마도 개인의 경험을 통해서 얻었을 것입니다. 성경은 사랑에 대하여 매우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말씀은 사랑이 무엇인가를 이야기해 줄 뿐만 아니라 사랑을 어떻게 드러내는가를 설명해 줍니다. 우리의 사랑이 행동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개념이나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행동에서 나타나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1. 진정한 사랑의 몇 가지 특성은 무엇입니까? (고린도전서 13:4~8)

사랑은 행동화 된 사랑을 말합니다. 성경에 말하는 사랑은 철학적 정의나 시적 정의도 아닙니다. 유행가처럼 눈물의 씨앗도 아닙니다. 그리고 감상적인 것도 아닙니다. 성경에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정의를 하여 주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사랑이 아닌 것은…

1. 사랑은 오래 참고, 온유하고

성급하고 고집스럽고 자기 주장만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온유는 자기를 포기하고 포근한 것입니다. 자기주장을 꺾지 아니하고 주장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2. 투기하지 않는 것과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남이 잘 되는 것을 시기하고, 시샘을 하고 투기하는 것과 미워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3. 교만하지 않는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겸손한 것이 사랑입니다.

교만하고 자기를 내 세우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바울은 십자가만 나타내고 자랑 하였습니다. 이 말은 자기를 자랑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4. 무례히 행치 않는 것입니다.

예의가 바른 것이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예의 바른 자에게 복을 주십니다.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에게 무례히 행했을 때 하나님은 벌을 주셨습니다.

비인격화 된 태도와 행동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구약에서 부모에게 무례히 행했을 때 돌로 쳐 죽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랑이 아닙니다.

5.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습니다.

나의 책임을 사람 앞에 내 세워 행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이기적인 행동과 자기중심, 욕심 등은 사랑이 아닙니다. 세상의 사랑은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한 것은 이기적인 것의 산물입니다.

6. 성내지 않습니다.

사랑의 사람이 되려면 온유해야 하고 웃는 얼굴로 살아야 합니다.

성을 냅니다. 그 이유는 자기주장 때문에 성을 냅니다. 남에게 자기주장을 내 세우고 합리화 시키려고 하는 것 때문에, 즉 교만하기 때문에, 남이 나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성을 냅니다. 성을 내고 분을 내면 결정적 타격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즉 복음 전달이 안 됩니다. 분을 내고 설교하고 가르치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즉 성숙이 없습니다. 즉 열매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분은 해가 지기 전에 풀어야 합니다. 먼저 미안하다고 행동하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7.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사를 선하게 생각하고 하는 그것이 사랑입니다. 

상대방에게 악을 품고 잘못되는 것을 소망하고 자기 보다 못되기를 바라고 망하기를 바라는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악을 품으면 손해를 봅니다. 자녀가 잘못하였을 때 “너 언젠가는 혼날 줄 알라”고 하는 것은 악을 품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그렇게 하였을 때 아이들은 정서가 불안하여 집니다. 주님은 부모가 자식에게 함부로 대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한 말은 악을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편견했을 때 자식을 노엽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사랑이 아닙니다.

8. 불의를 기뻐하지 않습니다.

불의를 기뻐합니다. 즉 세상을 편하게 살려고 합니다. 자기희생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희생 속에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 포기 하는 것이 희생입니다. 희생을 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손해를 보고 희생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자식이 잘못하였을 때 훈계하고 때리는 것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자식을 바로 세우기 위해서 훈계와 매로 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편이 주일 날 같이 낚시 가자고 또는 등산이나 다른 어디 가자고 하였을 때 따라가면 불의를 행하는 일이기 때문에 사랑이 아닙니다. 주님은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 사랑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실제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와 같이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행동으로 키웁니다. 바울도 그렇게 교인들을 길러 내었습니다. “유모처럼” 이란 말은 유모는 위탁 받은 아이를 기릅니다. 그러다가 자기 집에 와서 자기 아이에게 위탁받은 아이 때문에 하지 못한 것, 그 모든 것을 쏟으면서 자기 아이를 길러 냅니다. 그런 심정으로 기르는 것을 말합니다. 양육은 이런 자세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2. 요한일서 4:8~21절을 주의 깊게 읽으십시오.

(1) 8절은 하나님에 관하여 어떤 중요한 사실을 선언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의 원천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람 속에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입니다. 진정한 사랑 속에서 하나님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계실 때 참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갈릴리에서 고기 잡는 베드로에게 찾아 오셔서 질문하였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5절에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 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주님은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으셨습니다. 두 번째 질문도 아가페의 사랑으로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의 사랑의 고백은 형제사랑으로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세 번째 주님은 질문하기를 형제의 사랑이라고 했느냐? 라고 하시며 주님은 형제의 사랑이라도 하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만큼 온달도 반달도 초생 달도 그믐달도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만큼 교인들에게 사랑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해야 합니다. 우리 속에 사랑이 없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이기주의 사랑입니다. 상대가 주는 만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가 받는 만큼 내가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말하는 것과 “사랑은 하나님이시다”라고 말하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인격 자체가 사랑이십니다. 행동을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인격화 되신 분이십니다. “사랑은 하나님 이십니다”라는 말은 사랑을 신격화 시킨 것이기 때문에 잘못입니다. 하나님이 질서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인격화 되신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나 “질서는 하나님 이십니다”라는 말은 질서를 신격화 시키는 것이므로 잘못된 것입니다.

(3) 하나님은 당신에 대한 그의 사랑을 나타내시기 위해 무엇을 하셨습니까? (9~10절)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행동화된 사랑이십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하여 속죄 물로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 말은 남겨둔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아들을 주신 하나님께서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시지 아니 하겠느냐”고 로마서 8장 32절에 말씀하셨습니다. 아들을 주신 것은 다 주신 것입니다. 희생하시고 주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하고 겸손하여 집니다. 아낌없이 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받은 것도 없이 다 주셨습니다. 죄인 된 나는 죽어 있었으므로 하나님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 주셨습니다.

(4) 우리는 왜 사랑을 해야 합니까? (11, 19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였습니다. 사랑의 바른 태도는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기대하지 말고, 먼저 받으려고 하지 말고 내가 먼저 사랑해야 풍성히 돌아옵니다. 예로서, 시골 물 펌프에 바가지로 한 바가지 부어주고 펌프질하면 계속 물이 올라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내가 먼저 알아야 합니다. 어떤 위치에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는지를 과거를 생각하여 보십시오. 바울은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았으면 받아드려야 합니다. 즉 영접해야 합니다. 우리가 받아드리지 않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항상 마음 문을 열어 놓아야 합니다. 삭개오는 주님이 자기 집에 유하시겠다고 하였을 때 영접하였습니다. 영접 후 자기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겠다고 하였습니다. 불의한 것은 네 배로 갚아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을 받아 드리면 이렇게 변하게 됩니다. 나는 죄인이지만 먼저 받아드려야 합니다.

(5) 사랑과 두려움은 함께 존재할 수 있습니까? (왜 그렇지 않습니까?) (18절)

사랑과 두려움은 함께 존재 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이 함께 존재 하지 못하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빛이 비추면 어두움은 물러 가버립니다. 사랑의 사람은 두려움이 없습니다. 이런 자는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사랑을 행하지 않으면 두려움이 임합니다. 기본적인 생활, 기본적인 사랑은 두려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말씀을 읽고 공부하고 주일 성수하고 전도하고 십일조 드리고 하는 성도의 기본적인 것을 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랑을 하는 삶이기 때문에 두려움이 사라집니다. 기본적인 삶을 살지 못하면 두려움이 옵니다. 신앙생활에 사랑을 실천하고 기본적인 삶을 살아가십시오.

 

3. 당신이 이제까지 공부한 것을 가지고, 사랑이 무엇인가 요약해 보십시오.

사랑은 실제적이고 다른 사람에게 구체적으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다 필요합니다. 사랑을 행하는 그것이 중요합니다. 사랑을 행하려면 먼저 나타나는 사랑을 먼저 주어야 합니다. 예로서, 시골에 물 펌프는 먼저 물 한바가지 부어주고 난 다음에 펌프질 하면 한 없이 받아 낼 수가 있습니다. 먼저 한바가지 주지 않으니까 그런 사랑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물 한바가지 먼저 줄 때 상대로부터 되돌려 받게 됩니다. 내가 사랑을 받으려면 먼저 요구하지 말고 먼저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리하면 많은 사랑을 받게 됩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내게서 흘러넘치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주께로부터 먼저 받았을 때 내가 줄 수 있고 그리고 내가 사람에게 먼저 줄 때 받게 됩니다.

여기서 서로 토론을 해보십시오. 사랑에 대해 주제를 가지고, 내가 먼저 사랑을 주는 자인가? 아니면 먼저 받고자 하는 자인가? 내가 왜 먼저 사랑을 주지 못하고 있는가? 그리고 내 마음에 시샘과 시기와 질투는 없는가? 이런 것들은 어떤 점들이 다른가?

이와 같은 것들은 내 마음 속에서 나옵니다. 특히 많은 사람들 속에 시샘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은 사랑의 반대입니다. 사랑을 한다면 잘 되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성경에 사랑의 특성은 실제적이고 구체적입니다. 성경은, 사랑한다는 것은 모든 행동으로 나타남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사랑도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어야 합니다. 사랑은 수고가 따르고 믿음은 역사가 따릅니다.

 

사랑의 지침

 

4. 그리스도인은 누구를 사랑해야만 합니까?

(1) 신명기 6장 5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과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근본 되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여기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성경에 부자 청년이 주님을 찾아와 질문 하였을 때 주님은 계명을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 청년은 어릴 때부터 다 지켰다고 하였습니다. 십계명 중에 오 계명부터는 사람 사랑 계명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고 하였는데 그는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습니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먼저 사랑해야 사람을 사랑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부활 하신 후 갈릴리에서 고기를 잡는 베드로에게 찾아가셔서 그에게 주님은 “나를 사랑하느냐”고 아가페 사랑으로 물어 보았지만 베드로는 형제의 사랑으로 대답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실제적이고 희생과 수고가 따라야 하는데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였습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형제의 사랑이라도 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랑도 하나님에게서 나온 사랑입니다.

(2) 데살로니가전서 3장 12절

모든 사람에게 사랑이 더욱 넘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사랑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3) 누가복음 6장 27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라고 하였습니다. 나도 처음에는 주님과 원수이였지만 주님은 나를 사랑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할 때 하나님의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4) 베드로전서 4장 8절

열심으로 서로 사랑 하라,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성도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지침인데 우선 성도를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만 진정한 자유가 있습니다. 모든 사람을 사랑을 하고 있는가? 를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에 대하여 합격한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제한적입니다. 국한된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원수까지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수도 용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진리도 하나님의 사랑 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 35~39절에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 이긴다, 고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허다한 허물도, 죄도, 덮을 수가 있습니다. 여기에 참 사랑 있고 자유 함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적으로 행하십시오.

 

5. 요한복음 13:34~35절을 읽으십시오. 예수님은 사랑을 나타내는 일에 왜 그렇게 강조점을 두셨다고 생각합니까?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고 하였습니다.

사랑하면 첫째, 내가 그리스도의 제자인 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해야 그리스도의 제자로 판가름 납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 믿는 자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이 사랑입니다. 내게서 사랑을 나타내지 않으면 주님의 제자가 아닙니다. 제자에게서 주님의 사랑이 나타나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사랑을 하면 전도의 열매가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할 때 결국 전도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없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뜨거움이 없으면 열매도 축복도 없습니다. 사랑은 열매를 맺어 줍니다. 뜨거운 사랑으로 그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돌보면 하나님께서 열매를 맺게 하여 줍니다.

 

6. 요한일서 3:16~18절을 읽고, 진정한 사랑이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 당신 자신의 말로 요약해 보십시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도 반드시 희생이 따라야 합니다. 오직 행함과 진실한 사랑은 희생으로서 구체적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희생으로 우리들에게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얼마든지 말로도 나타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을 할 때 희생으로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은 능력이나 권세나 지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희생으로 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나 성도가 영적지도자를, 영적지도자가 성도를 사랑하는 것은 희생으로 해야 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우선 내가 먼저 희생하는 것이 큰 사랑입니다. 사랑의 순서는 하나님, 내 가족, 성도가 먼저입니다. 이것을 먼저 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입니다.

첫 번째, 나와 제일 가까운 것은 주님입니다.

주님은 나와 한 몸입니다. 부부 보다 가깝습니다. 부부는 떨어져 있는 시간들이 많습니다. 직장 생활하는 동안을 떨어져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내 몸 속에 계십니다. 사랑은 연습과 훈련을 해야 합니다.

두 번째가 가족입니다.

가족 중에도 먼저는 부부입니다. 성경에 부부는 한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 한 몸이라고 네 번 나옵니다. 여기에 하나라고 하는 것은 생각, 뜻, 이념, 세계관, 신앙도 똑 같아야 한 몸이 됩니다. 주님과 내가 뜻이 같아야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로, 동역자로, 한 지체로 인정하였습니다. 디모데의 말이 곧 바울의 말이라고 하였습니다.

셋 번째는 교회 성도입니다.

사랑은 반드시 연습과 훈련을 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해, 가족을 위해 성도를 위해, 기쁨으로 연습을 해야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사랑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고아들은 훈련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을 알지도, 할 줄도 모릅니다. 우리는 사랑을 허비 시킬 때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 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 왔습니다. “만일 당신이 할 일을 하면, 나도 내가 할 일을 하겠소.” 이렇게 조건이 있어야 해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말하기를 원하십니다. “비록 아무 보답을 받지 못하더라도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기심이 없이 주는 것과 사랑하는 성품을 우리의 태도와 행동 속에 이루어 주십니다.

이기적인 것이 없이 희생적인 사랑을 해야 합니다. 이기적인 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희생적인 사랑을 할 수 있는 자로 성장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가장 가까운 자를 사랑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점검하여 보면 이기적인 그 무엇이 나올 것입니다. 이유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반드시 훈련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은 연습을 해야 합니다. 부부는 서로 사랑한다고  연습을 해 보십시오. 조용기 목사 부부는 이혼의 문턱까지 갔었습니다.

그러나 미국 집회에 가서 그 교회 목사님이 사모님께 시간이 있을 때마다 사랑한다고 하는 것을 보고 도전을 받고 집회 마치고 집에 와서 용기를 내어 처음으로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말했더니 사모님이 미쳤나 보다, 고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두 번째도 사랑한다고 하니까 아마 잘못되었나 보다 했는데 세 번 그리고 계속 사랑한다고 했을 때 아내의 태도가 바뀌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들의 사랑에 대한 문제점이 무엇인지를 찾아보아야 합니다. 여기에는 결국 자기희생이 없기 때문입니다. 희생적인 사랑을 연습하십시오. 구체적인 사랑을 하려면 먼저 겸손해야 할 수 있습니다. 교만은 사랑을 하지 못합니다. 교만은 자기중심입니다. 겸손은 상대방을 세워 주는 일을 합니다. 겸손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실제로 하면서 사십시오.

 

겸손으로 나타나는 사랑

 

7. 겸손은 하나님과 당신 자신을 올바른 관점에서 봄으로써 이루어집니다. 다음 구절은 하나님과 당신 자신에 대한 당신의 관점에 관하여 무엇을 말해줍니까?

(1) 예레미야 9장 23~24절

지혜를 자랑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용맹을 자랑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부함을 자랑치 말라고 하였습니다. 자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아는 것과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행하는 자이신 것을 깨달으라, 고 하였습니다. 즉 자기의 부나 지휘 힘을 나타내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이것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입니다. 모든 것은 하나님에게서 나왔습니다(신명기 8:17~18). 하나님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2) 고린도후서 10장 18절

오직 주께서 칭찬하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를 자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왜 자기를 자랑하겠습니까? 주님의 수준에서 보지 않고 사람을 보고 비교함으로 자기가 났다고 보기 때문에 자기를 자랑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으로부터 자기를 보았을 때 하나님은 영광이고 자기는 죄인 인 것을 보았던 것입니다.

(3) 빌립보서 2장 3절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지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였습니다. 남을 자기보다 좋게 여기지 않는 것은 교만이고 사랑이 아닙니다. 남을 나보다 좋게 여기지 않고 무시하면 허영입니다. 여기에는 남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를 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베드로전서 5:5~6절을 읽으십시오. 겸손한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숙고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왜 한 인간의 삶 속에서 겸손의 성품에 그렇게 높은 가치를 두십니까?

                                                          

                                                          

                                                          

 

     

묵상에 대한 설명

사람에게 겸손하지 못하면 하나님 앞에서도 겸손하지 못하게 되어 버립니다. 즉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로 나타나고 결국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로 나타나게 됩니다. 목사 앞에 교만한 자는 하나님 앞에서도 교만합니다. 교만은 자기를 나타내고 자기 잘난 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을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사용하시는 것이 기본적입니다. 사랑은 항상 수고하고 남을 먼저 세워주는 것입니다. 자기를 세우는 자는 사랑이 아닙니다.

 

8. 로마서 12:3절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1) 당신이 주의해서 피해야 할 잘못은 무엇입니까?

자기를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7번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 겸손임을 말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는 그것이 겸손입니다. 로마서 12장의 은사와 봉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은사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사를 감사해야 합니다. 바울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자기를 받아드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나를 그대로 받아드리고 수용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때 하나님의 큰일도 할 수 있습니다. 작은 일번은 마땅히 품어야 할 것 이상 품지 말라는 것입니다. 품으면 그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주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 겸손입니다. 그 이상은 교만입니다.

(2) 당신 자신을 과대평가할 때에 오는 결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일이 잘되면 교만합니다. 나만이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그랬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깨달을 때까지 풀을 뜯어 먹게 하였습니다. 사울 왕도 그러한 자였습니다. 사울은 자기를 위해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자기를 과대평가하면 교만입니다.

(3) 당신 자신을 과소평가할 때에 오는 결과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잘되면 교만하고 잘못되면 열등감에 빠지는 것도 교만입니다. 이것은 자기 육체 자기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믿으면 저주 하십니다. 광야에 떨기나무와 같이 되고 맙니다. 이런 자는 좋은 일을 보지 못합니다.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거나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중심이 아닙니다. 자기중심입니다. 모세도 이런 두 가지에 걸린 일이 있었습니다. 므리바 반석에서 물을 낼 때 과대평가로 자기를 나타내었습니다. 내가 이 반석에서 물을 내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나태내지 못했습니다.

교만은 열등감에도 빠지게 합니다. 설교 듣고 난후 하나님께 은혜 받았다고 해야지 사람에게 은혜 받았다는 말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의 사람 엘리야도 로뎀나무 아래에 지쳐 쓰러졌을 때 열등감에 빠졌습니다. 이것은 자기중심입니다. 자기중심은 교만입니다. 어떤 형태로든 자신에 대한 선입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교만입니다. 예로서, 자신을 너무 높이 생각해서 하나님의 일은 나 없이는 될 수 없어, 라고 생각하는 것과, 자신을 너무 낮게 생각해서 하나님은 나를 통해서는 아무것도 하실 수 없어, 라고 하는 것도 교만입니다.

 

9. 다음 구절은 무엇에 관하여 경고합니까?

(1) 고린도후서 10장 12절

자기가 표준이 되어 비교하지 말아야 합니다. 비교 할때는 하나님이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를 표준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사람을 표준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하나님을 표준으로 할 때 하나님을 바라보게 됩니다. 예로서, 옆집에 누구를 닮아, 라는 이 말은 자기중심입니다.

(2) 야고보서 3장 16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습니다. 이것은 의논할 때 나타납니다. 자기를 나타낼 때 교만입니다. 아무리 좋은 동기, 좋은 의견이더라도 자기를 나타낼 때 하나님 앞에서는 교만입니다.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잘못을 했을 때 바른 말을 했지만 하나님 앞에 교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한 그것이 무서운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해야 합니다.

 

10. 잠언 8:13절을 읽으십시오.

(1) 교만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미워하고 떠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9장 27절에 “내가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 함이로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교만하면 하나님께 미움을 받습니다. 교만과는 끝없이 싸워야 합니다. 겸손으로 허리띠를 동여매어야 합니다.

(2) 당신의 삶에서 교만은 대개 어떤 모양으로 나타납니까?

나도 교만한 자 앞에 교만하고 겸손한 자 앞에 나도 큰 소리치고 상대의 태도에 따라 나도 그렇게 나타내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아내의 태도에 따라 남편의 태도에 따라 나타나는 그것은 교만입니다. 내가 교만하면 내게서 주님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화를 내고 분을 품으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합니다. 주님은 위와 같은 환경 속에서도 겸손을 나타내셨습니다. 교만한 제자들 앞에 주님은 그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결국 교만한 자 앞에 겸손을 나타내고 섬기는 삶을 살 때 사랑이 나타납니다. 잘되나 못되나 하나님을 나타내는 그것이 겸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중심입니다. 잘 안된다고, 실패했다고 자살하는 그것은 교만입니다.

(3) 이러한 영역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당신에게 행하기를 원하시는 특별한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일이 잘될 때나 못될 때에도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더 잘 아십니다. 베드로 자신보다 주님은 베드로를 더 잘 아시고 세 번 부인 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나를 내 자신 보다 더 잘 아시는 주님 앞에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이란 마음의 완전한 평온을 말합니다. 겸손은 초조해 하거나 슬퍼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내게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지 않습니다. 아무도 나를 칭찬하지 않을 때나 내가 비난과 멸시를 당할 때에도 겸손은 나를 평안하게 하여 줍니다. 행동 자체는 사랑인데 그 마음은 겸손하지 못할 때 교만입니다. 잠언 3장 4~5절에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것이 겸손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자를 하나님은 인도하여 주십니다.

사랑은 겸손이 따라야 합니다. 겸손이 따르지 않으면 교만입니다. 교회 봉사 헌금을 하면서 불평을 하고 말을 많이 하고 따지는 그것은 교만입니다. 교만은 행동에 절대 사랑이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겸손은 비굴한 것입니다. 이것은 아부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겸손이 따라야 합니다. 겸손하지 못한 사랑은 교만입니다. 자기인격 자기중심은 교만입니다. 상대인격을 위해 할 때 사랑입니다. 인격적으로 해야 합니다.

 

“겸손이란 마음의 완전한 평온을 말합니다. 겸손은 초조해 하거나 슬퍼하거나 실망하지 않습니다. 겸손은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으며 내게 일어난 일을 이상히 여기지 않습니다. 아무도 나를 칭찬하지 않을 때나 내가 비난과 멸시를 당할 때에도 겸손은 나를 평안하게 해 줍니다.”

-앤드류 머레이-

 

언어로 나타나는 사랑

 

사랑으로 섬기는 훈련이 되어야 좋은 신앙, 아름다운 신앙입니다. 사랑은 말에서 겸손이 나타나야 합니다. 상대를 깔아뭉개는 말은 사랑이 아닙니다. 인격을 무시하면서 상처를 주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겸손이 말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말은 상대방을 죽이기도, 살리기도 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러므로 겸손한 말을 하여 세워주고 살리는 말을 하도록 하십시오. 말도 훈련을 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는 입에 재갈을 채우라고 하였습니다.

 

11.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은혜롭고 사랑에 가득 찬 말을 주실 수 있습니다. 올바른 말은 어떤 일을 할 수 있습니까?

(1) 잠언 12장 25절

다른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즐거움을 주는 말을 할 때 사랑입니다. 말에 가시가 들어 있는 것은 질병입니다. 말 한마디에 교회나 가정에 분위기가 바뀌어 긴장을 풀어 주고 또 매인 것을 풀어 주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에게 먼저 평안을 빌어 주라고 하였습니다.

(2) 잠언 16장 24절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는 사랑의 말을 하면 내 마음에 기쁨이 되고 뼈에도 양약이 되고 육체에도 유익이 됩니다. 그 반대로 사랑이 없는 말을 하면 사람을 병들게 합니다. 주님도 미워하면 살인죄라고 하였습니다. 사랑이 없는 말은 죽이는 일을 합니다. 이상구 박사도 사랑하면 세포를 상대방도, 자기도 살린다고 하였습니다. 미워하면 서로 세포를 죽인다고 연구 발표를 하였습니다. 아내가 병들고 건강하지 못한 이유를 살펴보면 남편이 악한 말을 많이 하고 영양 없는 말을 할 때 아내는 독을 먹고 살기 때문에 건강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장도 약하고 관절염도 생기고 늘 근심하고 살다보니 골다공증에도 걸립니다. 이런 가정은 투박한 말을 많이 합니다. 이런 가정은 사랑이 없습니다. 즉 영양 없는 말을 하기 때문에 병약한 가정이 됩니다. 사랑하는 말을 많이 할 때 그 가정은 건강한 교회가 됩니다. 말을 고치는 연습을 하십시오. 이것은 자기와의 끝없는 싸움과 연습으로 사랑의 말을 인격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칠고 투박하고 영양가 없는 말을 없애야 합니다.

(3) 잠언 22장 11절

좋은 말을 하고 마음이 정결한 자는 덕이 있습니다. 덕이 있는 말을 하면 높은 사람이 친구가 되어 줍니다. 그리고 가까이 하고 따릅니다. 요셉이 그러한 자였습니다. 영양가 있는 말을 항상 하였습니다. 말을 은혜스럽게 영양가 있는 말을 하는 자는 성숙한 자입니다. 마음이 정결한 자는 정결을 사모하고 은혜스러운 말만 합니다. 모세는 처음에는 거칠었지만 광야 훈련 후에 은혜스러운 말만 하였습니다. 기름지고 영양가 있는 말을 하였습니다. 하나님 편에 서서 말했을 때 하나님은 모세의 말을 들어 주셨습니다. 다윗도 은혜스러운 말만 하려고 자기 입술에 파수꾼을 세워 달라고 하였습니다. 상처를 주는 말을 하면 그 주위에 상처를 주는 자가 많습니다. 상처를 주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12. 어떤 죄를 피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까?

(1) 잠언 10장 19절

말을 많이 하면 잘못됩니다. 실수가 많아집니다. 말이 많다는 것은 쓸데없는 말과 의미 없는 말, 영양가 없는 말은 하지 말고 상대방을 세워주고 덕을 주고 유익을 주고 영양을 주는 말만 해야 합니다.

(2) 잠언 17장 9절

남의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정죄를 하는 것은 그 사람을 위하여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즐거움과 자기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해결할 능력도 없으면서, 책임도 없으면서 말을 합니다. 나는 말할 대상의 자격도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눈에 들보를 먼저 보고 남의 티는 보지 말아야 합니다.

(3) 잠언 27장 2절

자기 자랑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죄입니다. 대인 관계에 즐거움을 주지 못합니다. 거기에는 시기와 질투와 분쟁이 따릅니다. 이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13. 데살로니가전서 2:1~12절을 읽으십시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큰 사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8절). 그리고 그는 그 사랑을 말로써 나타내 보였습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어떻게 말했습니까?

(1) 3절

우리들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즉 사랑은 간사, 부정, 궤계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런 식으로 사랑의 관계를 말하지 않았습니다.

(2) 4절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3) 5절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 하시느니라, 고하였습니다. 즉 아첨이나 남의 탈을 쓰지 않고 진실한 동기에서 말을 하였습니다.

(4) 11절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 하노니, 라고 하였습니다. 즉 아버지가 자녀에게 하듯이 그런 말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유모처럼 하였는데 이 말은 돈 때문에 남의 집의 자식을 하루 종일 수고하므로 자기 자식에게 하루 종일 하지 못한 것을 밤새도록 쏟아 붙는 이것이 성경의 유모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을 유모처럼 키웠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의 말로 나타낼 때 빨리 변화가 옵니다. 잘못했더라도 사랑으로 세워주는 말을 했을 때 그 아이나 성도는 어디서나 자유 함이 있는 사랑의 사람이 됩니다.

 

“전 세계를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참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내 이웃에 대한 사랑이다.”

 

선행으로 나타나는 사랑

 

사랑은 단순히 내적인 감정만은 아닙니다. 사랑은 의지의 행동입니다. 사랑은 그것이 산출하는 행위에 의해서만 알려질 수 있습니다. 아무리 그 속에 많은 사랑이 있더라도 밖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14. 구원과 선행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에베소서 2:8~10)

구원과 선행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구원은 선물로 받았지만 구원을 받은 자녀들은 반드시 선행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선행으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선행이 나타나야 합니다.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들이 선행을 실천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까?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라고 하였습니다. 선행이 나타나야 될 이유는 선행을 위해 예비 되고 하나님이 준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선행이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라고 구원하신 것과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지인 나에게 선행의 열매가 나타나야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드리는 것입니다. 참고로, 디도서 2장 14절에 선한 일에 열심을 내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았다, 고하였습니다.

 

15. 당신의 행동 이면에는 어떠한 것이 주된 동기가 되어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0:31)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였습니다. 14번을 토의해 보십시오. 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구원파나 이초석 목사는 흔들리는 바퀴는 그대로 두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바꾸어라, 고 하였습니다(자기 합리화, 본처와 이혼하고 다른 여자와 결혼하였습니다). 선행의 동기는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사랑에서 동기가 될 때 기쁘게 행할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소자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한 것도 상을 잃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오른쪽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났습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은 자기가 나타났습니다. 선행의 동기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나타나날 때 지속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없기 때문에 계속 할 수 있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요한일서 3:17절에 관하여 생각해 보십시오. 당신은 궁핍한 그리스도인에게 기꺼이 겉옷까지도 벗어 줄 수 있겠습니까?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는 기회에 대하여 잠깐 생각해 보십시오.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당신은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묵상에 대한 설명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라고 하였습니다. 가난한 사람에 대해 내가 어떻게 할 것인가? 생활의 여유가 있으면 가난한 자들을 위해 십일조를 떼어서 주는 수준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감사 헌금도 십일조를 떼어 놓고 감사 헌금을 주일마다 드릴 때 돈을 쓸 줄 아는 자입니다. 요한 웨슬러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으면 신앙은 성장하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여유 있는 자들은 세상의 썩을 것에 허비하지 말고 주를 위해 사용해야 합니다. 그것은 영원히 썩지 않을 것으로 하나님께서 값아 주십니다. 주님은 너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고 하였습니다. 충현교회 감창인 목사는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고 육신의 부모에게도 십일조 하라고 가르쳤다고 합니다. 감사 헌금도 십일조를 떼어 드리는 자가 하나님의 것을 관리 잘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여유가 있는 자는 이렇게 할 때 충성된 청지기이며 일군제자입니다.

 

16. 당신이 선행의 생활을 실천하고자 할 때에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1) 갈라디아서 6장 9~10절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선을 행하되 우선순위가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의 과정을 위해서 특별히 해야 합니다. 몸 된 지체를 위해서 구약에는 첫째가 목회자, 고아, 과부의 순위였습니다. 물질의 여유가 있으면 개인적으로 목사에게 헌금을 해야 합니다. 중이 자기 머리 깎지 못하듯이 목회자가 바로 가르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육이란 가르치는 것입니다. 성도들이 선행에 부한 마음을 품을 수 있도록 가르칠 때 마음을 가지기만 하면 실행을 합니다. 많은 성도 중에는 선행의 목표가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도 없기 때문에 자기만을 위한 삶을 살다보니 성장도 없고 축복도 없습니다. 목회자에게 헌금을 하고 섬기는 것은 바로 주님을 섬기고 주님께 한 것입니다. 빌립보서 4장 18~19절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하였으며 “하나님이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쓸 모든 것을 채우시리라”고 하였습니다. 기독교의 경제 원리는 하나님 앞에 십일조 그 다음에 사람 즉 첫 번째가 주의 종에게고 그 다음에 형제에게 하는 것이 경제의 원리입니다.

(2) 디도서 3장 8절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에게 유익하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것으로 유익하게 해야 합니다. 선행을 하되 아름답게 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게 해야 합니다. 받아도 미운 자가 있고 주어도 미운 자가 있습니다. 인격이 교만하면 주어도, 받아도 아름답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선행에 대해 묵상을 해 보십시오.

내가 목회자에게 유익한 자가 되면 하나님은 지혜를 주십니다. 이왕이면 유익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예로서, 가난한 형제를 돕고 싶은데 직접 전달하면 상대방에게 불쾌감이나 어떤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치게 될까 생각하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지혜를 주십니다. 이런 일은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잘못하면 마음을 상하게 합니다. 이때 목사를 통해 하면 목사는 교회적으로 할 때 상대방도 좋게 여기고 자신도 나중에 그렇게 하기를 원하므로 그렇게 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이것이 오른 손이 하는 것, 왼손이 모르게 하는 원리입니다. 이때 선행에 대하여 마음에 품게 됩니다. 이런 헌금이 목적이 있는 헌금입니다. 둘째는, 굳세게 가르쳐야 합니다. 자기 생활을 보여 줄 때 가장 잘 가르치는 자입니다.

 

“내가 말하는 이 사랑은 인내를 쉽게 잃어버리지 않습니다. - 사랑은 건설적인 길을 찾습니다. 사랑은 소유하려 들지 않습니다. 사랑은 감동을 주려고도 않으며, 사랑이 귀중하다는 생각만으로 우쭐거리는 마음을 품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예의 바르며, 이기적인 유익을 구하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성내지도 않습니다. 사랑은 악한 생각을 품고 있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악한 일에 대하여 기뻐하지도 않습니다. 반면에, 진리가 퍼져나갈 때 모든 선한 사람들과 함께 기뻐합니다. 사랑은 참는 일에 한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신뢰에 끝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소망이 끊이지 않는 것도 압니다. 사랑은 그 어느 것보다도 오래 지속됩니다.”     -고린도전서 13:4~8上 필립스역-

 

요 약

다음 내용에 한두 문장을 첨가해서 본과를 요약하십시오.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 -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알려줍니다.

 

<보충설명> 하나님은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고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이란 이론적인 것이나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행동적으로 보여 줍니다. 사랑은 행동입니다. 자식을 기를 때 말로만 기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하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희생을 하면서 상대의 필요를 채워 주어야 합니다. 사랑은 반드시 수고가 따라야 합니다. 믿음은 반드시 역사가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의 지침 - 성경은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 당신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증거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보충설명> 하나님은 안 믿는 자에게 지표를 주셨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나를 그리스도의 제자로 알아주지 않습니다. 나에게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적극적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사랑은 이적이나 기적이나 능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성장으로 봅니다. 주님은 마지막 만찬 상에서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으냐고 도토리 키 재기를 하였을 때 주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시면서 너희는 나와 같이 섬기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곧 사랑입니다. 이때 안 믿는 자들로부터 하나님을 믿는 자라고 지표가 되는 것입니다.

겸손으로 나타나는 사랑 - 겸손은 사랑의 출발점입니다.

 

<보충설명> 겸손한 사랑으로 하나님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바울은 죽으면 내 몸에서 주님의 존귀가 나타나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랑은 겸손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울 왕은 자기의 기념비를 세웠습니다. 이것이 교만입니다. 여호사밧은 하나님께 돌려 드렸습니다.

언어로 나타나는 사랑 - 사랑은 우리의 말로 표현이 됩니다.

 

<보충설명> 말로 사랑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영양가 많은 말로 사랑을 한다고 해야 합니다. 영양가 없는 거친 말 같은 욕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브람은 삼촌이라는 뜻이고 사래는 무자식이라는 뜻입니다. 이들 부부는 이름 그대로 계속 그렇게 부르니 말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래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 - 열국의 아비 - 으로, 사라 - 열국의 어미 - 로 고쳐 주셨습니다. 말은 사람을 죽기기도, 살리기도 합니다. 야고보서 3장 6절에 “혀는 곧 불이요 불의 세계”라고 하였습니다. 권능보다 권세가 더 높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하였습니다. 내 속에 말의 권능이 들어 있습니다. 성령을 받은 첫 번째 증거가 복된 언어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랑은 언어로 그리고 선행으로 나타납니다.

선행으로 나타나는 사랑 - 행동은 우리의 사랑의 참 모습을 보여 줍니다.

 

<보충설명> 선행으로 나타날 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만물을 충만케 하는 것이 교회입니다. 즉 교회는 주어야 합니다. 실제적으로 줄 때 복음이 전해집니다. 복음은 실제적입니다. 실제 필요를 채워 주면서 전도를 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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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 과

 

순결한 삶

“신 도덕”에 관하여 많은 논란이 있어왔습니다. “신 도덕은 구세대의 부도덕보다도 나을 것이 없다”라고들 말하고 있습니다. 사회가 도덕의 타락을 경험하고 있음에 따라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하나님 말씀의 도덕적, 절대성 위에 서는 것이 점점 인기가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비록 상황윤리나 모든 책임으로부터의 자유가 많은 사람들의 인기를 끌고 있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계속해서 성서의 가치 기준에 다라 살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집에 비디오테이프 중에 부도덕한 것은 버려야 합니다. 인천의 이벤트 매춘소개 업소에 일반 가정주부 특히 고급간부 아내들이 매춘행위에 기록된 명단이 수천 명이나 나왔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말세에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은 상실되고 있습니다. 능력은 경건에서 나옵니다. 순결한 삶에서 성숙하지 못하면 그리스도를 닮지 못합니다. 이 세상은 썩고 썩은 세상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순결한 삶으로 맑은 공기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하나님의 기준

 

1. 사전을 사용하여 순결의 정의를 내려 보십시오.

상대적인 정의 즉 누구와 비교하여 순결 하느냐? 정의를 해보십시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비교하여 나는 지금 어떠한가? 를 정의를 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예수님과 같은 순결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하였습니다. 만약에 사람이 기준이 된다면 계속 표준이 바뀔 것입니다. 순결의 표준은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처럼 순결해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수준을 말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의 수준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의 장성한 분량까지 성장하라고 하였습니다. 

 

2. 하나님께서 마음이 청결한 자에게 무엇을 약속하셨습니까? (시편 24:3~5, 마태복음 5:8)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한 수준에 이르면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에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순결한 자가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것을 받을 수가 있는 자입니다. 여기에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이런 자를 찾아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청결한 자를 찾아 쓰십니다. 여기에는 두 가지 면이 있습니다. 바울의 예로 다메섹에서 주님이 부르셨을 때 첫째, 바울은 “뉘십니까?”라고 말을 하였습니다. 여기에는 배우려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배우려고 하는 것이 가장 겸손하고 순결한 마음입니다. 두 번째는, “내가 무엇을 해야 하오리까?”라고 하였습니다. 유용한 자로 쓰임을 받기를 원하였습니다. 배워서 유용된 자를 하나님은 쓰십니다.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자는 순결과 거룩한 자입니다. 죄가 있으면 하나님과 교제가 안 됩니다. 죄악이 있으면 하나님은 우리들의 기도를 듣지 않으십니다. 부도덕한 자는 예배도 성찬도 참예하면 안 됩니다. 두아디라 교회처럼 행동도 결단도 없는 그것이 부도덕한 삶입니다. 이런 자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순결의 정도에 따라서 온달도, 반달도, 초생 달도, 그믐달도 됩니다. 불결한 자는 순결에 대해 등한히 합니다. 어두움은 빛을 싫어합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성도의 교제에 빛 가운데서 참된 교제가 있는 것입니다. 순결한 성도가 되어야 생활면에 하나님이 나타납니다. 예수 피는 교회를 깨끗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죄를 원수시해야 합니다. 주일날 오락의 발을 금해야 합니다(이사아 58:13). 이 말은 경건의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오늘 현대 교회들이 이것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삼손처럼 머리를 깎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자는 소금의 맛을 잃은 자입니다. 이들은 길가에 버리워져 밟힐 뿐입니다. 경건의 훈련으로 능력 있는 자가 되십시오.

 

3. 당신의 행위에 대한 하나님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1) 마태복음 5장 27~28절

마음에 음욕을 품지 않는 그것이 순결의 척도입니다. 품었다는 말은 순간적으로 유혹을 받은 것과 다릅니다. 사람들은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발전하지 않도록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묵상을 하고 사색을 하는데 이것은 음욕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음욕을 품지 말아야 합니다. 피하여 도망쳐 버려야 합니다. 유혹을 받았을 때 생각을 빨리 바꾸어야 합니다.

(2) 고린도후서 7장 1절

육과 영에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해야 합니다. 영속에도 더러운 것이 많습니다. 빛은 빛으로 어두움은 어두움으로 야합합니다. 온갖 더러운 것 속에서 순결해야 합니다. 순결의 기준은 하나님이십니다. 영과 육이 깨끗해야 합니다. 육은 도덕적인 면에서 순결입니다. 직접 몸으로 죄를 짓는 것이 육입니다. 영의 더러운 것은 순수한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합니다. 순수하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을 때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영을 다 믿지 말고 분별하라고 하였습니다. 영분별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시험을 해야 합니다. 말씀이 빛이고 거울이기 때문입니다. 신비주의에 끌리면 영이 더러워집니다.

(3) 데살로니가전서 4장 3~7절

성적으로 순결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성결의 표준입니다. 성적으로 욕심을 부려 남을 헤치면 하나님은 반드시 갚아 주십니다. 다윗의 밧세바 사건으로 하나님은 그 아들이 대낮에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다윗의 후궁들에게 악을 행하였습니다. 성적인 욕심은 가정을 파괴시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시키는 것입니다. 로마가 성적으로 가정이 파괴 되었을 때 나라가 망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에도 음란 비디오가 가정에까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울, 인천에 가정주부들이 그것도 부유층에서 매춘행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거룩하지 않는 것은 보지도 말아야 합니다.

(4) 베드로전서 3장 3~4절

인격적인 순결을 말합니다. (3)번은 성적, 도덕적인 반면에 (4)번은 꾸미지 말고 즉 탈을 쓰지 말고 속으로 깨끗 하라는 것입니다. 치장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장식으로 나타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말에 장식을 한다고 하였습니다. 요즘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장식을 많이 합니다. 귀결이, 목걸이, 배꼽 걸이, 팔지 등 여러 가지를 합니다. 두 번째, 인격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가면을 쓰는 인격보다는 꾸밈이 없는 인격를 말합니다. 치장하는 이것이 사람의 열매입니다.

모든 사람은 그가 홀로 있을 때 타고 달리는 생각의 열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삶의 품위와 고상함은 그의 행복과 마찬가지로 이 생각의 가치가 어디로 달려가느냐? 무엇을 싣고 가느냐? 또한 그 기차가 통과 하는 곳의 풍경이 어떠한가? 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즉 깨끗한 것을 보느냐? 더러운 것을 보느냐? 음탕한 것을 보느냐? 보는 풍경이 무엇이냐? 는 것입니다. 유다는 주님을 파는 생각과 도둑질 하는 것과 어떻게 하면 높아 지느냐하는 것만 창밖으로 보다 보니 결국 주님을 팔고 말았습니다. 내가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한경직 목사는 잠을 잘 때마다 십자가를 평생 묵상했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은 그가 홀로 있을 때 타고 달리는 생각의 열차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의 삶의 품위와 고상함은, 그의 행복과 마찬가지로, 이 생각의 기차가 어디로 달려가느냐, 무엇을 싣고 가느냐? 또한 그 기차가 통과하는 곳의 풍경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죠셉 포트 뉴톤-

 

4. 하나님은 더러운 것을 행하는 자를 어떻게 묘사합니까? (에베소서 4:18~19)

감각까지도 하나님은 순결하기를 원하십니다. 더러운 것을 행하는 자는 무지하고, 감각이 무디어져서 더러움을 행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오히려 부끄러움이 영광으로 둔갑을 해버립니다. 아브라함과 롯을 비교 해보면 아브라함은 세상의 더러운 것을 만나면 뛰어 넘어 갔습니다. 롯은 점진적으로 더러운 쪽으로 갔습니다. 그래서 롯은 세상의 대표자가 되었습니다. 세상을 너무 좋아하면 세상으로 흘러 가버립니다.

데마는 결국 세상으로 가버렸습니다. 세상을 너무 밝히고 좋아하면 생활에 변화가 없고 세상으로 발전하여 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애급에 잠시 갔다가 곧 깨닫고 그것이 얼마나 죄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왔습니다. 롯은 그 반대로 세상을 좋아 하다가 도시형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소돔을 심판하실 때 산으로 도망하라고 천사의 손에 끌려 나오다시피 하여 나와서는 소알성에 가게 하여 달라고 자기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상 음란에 물들었을 때 자기 자식까지 내어 놓겠다고 하였습니다. 롯이 요단 뜰로 내려갔을 때 점진적으로 더러운 것으로 발전하여 갔습니다. 그러므로 첫 발걸음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원치 않으면 아예 가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온전하신 주님만 바라보고 가야 합니다. 롯처럼 도시형 사람이 되어 노래방이나 비디오 방이나 세상 불꽃문화 속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유혹의 현장에는 아예 가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말이 있는데 하나님은 자연을 만들고 사람은 도시를 만든다고 합니다. 죄악의 도시 바벨론과 애급은 세상입니다. 여기에 젖어들면 산으로 가기를 싫어합니다. 도시로 가고 싶어 합니다. 거기에는 죄의 낙이 즉 세상의 정욕이 끝없이 방탕하고 싶어 하는 욕망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있는 그곳에 젖어 살고 싶어 합니다. 아브라함이 애급에 잠시 들어갔을 때 아내를 팔아먹었습니다. 그러나 곧 스프링처럼 튕겨져 나왔습니다.

지금 내가 잘 보이는 것이 무엇이냐? 오락이냐? 돈이냐? 여자냐? 남자냐? 솔직하게 체크하여 보십시오. 내가 현재 순결하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지? 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내 마음속에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만족감이 없으면 죄를 짓게 됩니다. 사람은 어느 쪽에서든지 만족함을 누리려고 합니다. 성도는 날마다 성경을 읽고 매일 기도해야 합니다. 묵상기도를 통해 나를 점검하면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것을 생각하면서 주님을 닮아가야 합니다. 그러한 것들이 기도하는 사람보다 더 순결한가? 체크해 보십시오. 교회 일꾼은 거룩한 자를 세워야 합니다.

 

개인의 순결의 중요성

 

5. 고린도전서 6:13~20절에서 당신이 부도덕한 것을 피해야만 하는 몇 가지이유를 열거하십시오.

(1) 13절

내 몸이 주님의 영광을 위해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목적관은 내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몸은 음란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를 위해서 즉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몸 전체를 산 제물로 드려야 합니다.

(2) 15절

“그리스도의 몸을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이것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 죄를 짓고 창기의 지체를 만드는 것을 주님은 결코 원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원리적으로 맞지 않습니다. 내 몸은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죄를 지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나는 죄를 지을 특권이 없습니다. 나의 책임은 순결을 지키는 것입니다.

(3) 16~17절

내가 창기와 합하면 창기와 한 몸이 됩니다. 내가 주님과 합하면 주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와 합하느냐가 중요합니다.

(4) 18절

음행을 피해야 합니다. 죄를 던져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음행은 죄를 내 몸에 담아버리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종이지 죄의 종의 신분이 아닙니다. 주님의 종은 순결해야 합니다. 내 몸을 죄에 맡기면 죄의 종이 되어 죄에 끌려 다니게 됩니다. 내 몸을 죄에 드리지 말고 의의 병기로 드려야 합니다.

(5) 19절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고 성령의 전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성전을 시장 소굴로 만드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들어 상을 둘러엎고 채찍으로 다 쫓아내어 정화시키셨습니다. 내 몸을 천히 사용하면 하나님은 노하십니다. 내 몸을 순결하고 깨끗하게 관리하여야 합니다.

(6) 20절

값으로 샀습니다. 결국 내 몸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고 깨끗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주님의 몸으로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바울을 통해 구체적으로 가르쳤습니다. 우리는 항상 주님이 계신 성전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성전에 세상 더러운 잡동사니를 집어넣는다거나 하면 안 됩니다. 깨끗하게 하려면 늘 창밖으로 좋은 것만 보아야 합니다. 좋은 말만 하십시오.

 

6. 당신의 삶 가운데 어떤 영역들에서 순결이 중요합니까? (에베소서 5:3~5)

어떤 면에서 순결해야 하는가? 좋은 말을 하느냐? 해로운 말을 하느냐? 자신을 체크하여 보십시오. 이것을 위해 기도하고 이런 삶을 살기 위해 고칠 것은 고치고 결단할 것은 결단해야 합니다. 나의 고쳐야 할 점은 무엇인가? 내가 순결해야 할 것은 어떤 것들인가? 기록하여 보십시오. 그리고 기도하고 3개월 동안 반복하면 고쳐집니다. 좋은 것은 좋은 쪽으로 계속 행하여 발전시켜 나가야 합니다.

 

7. 세상의 수준과 하나님의 수준과는 굉장히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세상 수준의 세 가지 기초는 무엇입니까? 정의해 보십시오. (요한일서 2:15~16)

기   초

정      의

(1) 육신의 정욕

끝없이 방탕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2) 안목의 정욕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입니다.

(3) 이생의 자랑

명예욕입니다. 

이것이 세상의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수준과 세상의 수준 어느 쪽에 내가 기울어져 있는지를 체크하여 보십시오. 기울여 있는 그것이 바로 자신입니다. 세상은 이 세 가지로부터 옵니다.

 

8. 올바르지 못한 도덕 행위에 대하여 여러 가지 핑계가 있습니다. 다음 핑계들에 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아래의 내용은 타협하는 변명들입니다.)

(1) “모든 사람이 그 일을 하니까, 그것은 틀림없이 옳은 일일 것이다” (잠언 14:12)

이런 자는 도덕을 성경의 기준에 두는 것이 아니라 사회나 상황 윤리에 둡니다. 즉 사람에게 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쩔 수 없이 상황 윤리가 그러하니 통념상 그렇다고 하는 것입니다. 현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수를 따라 갑니다. “이 정도쯤이야”라고 하는 것은 상황 윤리입니다. 성경에는 거기에 대한 답을 분명히 주고 있습니다. “어떤 길은 사람에게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사람의 생각이 옳다하더라도 필경은 사망과 죽음으로 간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가니까?” 나도 가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으로 볼 때 그것은 변명이고 타협입니다.

예로서, 가나안 땅을 바로 눈앞에 두고 열두 지파에서 대표로 한사람씩 뽑아서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였습니다. 그중에 열 사람은 눈에 보이는 대로 탐지하여 부정적으로 보고를 하였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믿음으로 보고 밥상에 차려 놓은 것을 먹기만 하면 된다고 긍정적으로 평을 하였습니다. 백성들은 그 보고를 듣고 하나님의 약속보다는 많은 수의 보고를 옳다고 인정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두 사람의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따라 가지 않고 사람의 많은 숫자에 따라 갔음으로 광야에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첫째로, 든든히 세워주는 역할을 하게 합니다. 사도행전 20장 32절에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기업이 있게 축복을 하여 주십니다. 실패의 주원인은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기 경험, 자기 명철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말씀께 부탁하지 않았기 때문에 넘어졌습니다. 주의 말씀께 부탁할 때 반드시 세워 줍니다.

시대의 통념이나 다수가 간다고 따라가면 사망을 만납니다. 사업이나 내가 하는 모든 일에나 특히 신앙생활에 상황을 따라 가고 다수를 따라가면 망합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갈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야 약속이 있습니다. 그리고 세워주시고 기업을 주십니다.

(2) “나는 다만 이 일이 내게 정당한지 아닌지를 알아내야 할 필요가 있을 뿐이다.” (전도서 11:9)

경험을 일단 해 보아야 한다는 핑계입니다. 먼저 경험하고 알아야 한다는 것은 마음 자체가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내 마음속에 노래방, 비디오 방, 카바레, 술집 등 이런 곳은 온갖 죄가 다 들어있는 곳입니다. 경험을 해보자고 하는 것은 죄를 적극적으로 지어보자는 것입니다. 세상을 너무 자상히 많이 알며 많이 아는 것만큼 사랑을 하게 되고 결국 세상으로 가게 됩니다. 승리의 삶을 살려면 도망치는 것을 잘 배워야 합니다.

한번만 죄를 지어보겠다는 것은 자기를 합리화 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분의 이야기는 마음으로 음욕을 품어도 간음죄인데 그럴 바에야 몸으로 짓겠다고 합니다. 이것은 자기를 합리화 시키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음의 행동도 중요하게 보십시다. 예로서, 춤을 추는 자의 심정을 알고 싶어서 실제로 남의 여자나 남자와 춤을 추면서 몸을 부딪치는 것은 연습도 아니고 실제적인 죄입니다. 주님은 마음의 행동도 죄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변명이나 합리화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것은 정당한 것인지 아닌지를 알 필요는 있습니다. 네 눈에 보이는 대로 행하면 심판하실 줄을 알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거룩하고 온전하신 주님을 보고 그대로 행하여야 합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상급이 있습니다.

(3) “내가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는 한 그것은 괜찮다.” (레위기 5:17)

통념상 상대가 서로 응하면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성경은 죄라고 하였습니다. 성경에는 부지중에 짓는 것도 죄라하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벌을 당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죄에는 첫째, 자(고의) 범죄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뜻으로, 의지로 계획적으로 짓는 것입니다. 둘째, 허물입니다. 이것은 연약성 때문에 짓는 것입니다.

(4) “내가 한 일을 결코 아무도 알아내지 못할 것이다.” (히브리서 4:13)

은밀한 가운데서 짓는 죄도 하나님은 아시고 찾아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까지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다윗이 지은 죄는 몇 사람만 아는 범죄였지만 하나님은 아시고 나단 선지를 보내셨습니다. 요셉은 단둘이만의 은밀한 장소였지만 죄를 짓지 않았던 것은 면전신앙 즉 하나님이 앞에서 보고 계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은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신앙 이였습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그 사실을 항상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혹에서 도망쳐 이 길 수 있었습니다. 다윗은 적극적으로 죄를 지었습니다. 요셉은 적극적으로 도망쳤습니다. 이것은 면전신앙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늘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5) “이번 한번만 하고 그만 두겠다.” (갈라디아서 6:7~8)

자기가 심는 그대로 거둡니다. 예로서, 담배를 오늘 한 갑만 피고 끊겠다고 합니다. 오늘만 술을 먹고 끊겠다고 합니다. 도박도 딱 한번만하고 하지 않겠다고 하는 자는 평생을 끊지 못합니다. 성경은 대답하여 주시기를 너의 심는 그대로 거둔다고 하였습니다. 이미 심었으면 거두게 됩니다. 아예 심지를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유심히 살펴보고 좋은 것만 심어야 합니다. 심은 것은 반드시 나타나게 됩니다. 성령을 위해 심으면 영생을 거두게 됩니다. 우리가 선을 심느냐? 죄를 심느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내가 현재 거두고 있는 것은 심은 것을 거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심어야 합니다.

(6) “나는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 나는 그것을 생각만 했을 뿐이다.” (마태복음 5:28)

이것은 생각으로 죄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음란서적, 음란비디오 등을 마음의 열차 창밖으로 보고 있을 때 행동으로는 하지 않았지만 성경에는 이미 심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심으면 반드시 나게 되어 있습니다. 잉태하면 성장하여 낳게 됩니다. 현대 부부들은 무섭게 타락하고 있습니다. 기혼자들이 애인을 두고 싶다고 하고 기회만 주어진다면 행동으로 죄의 낙을 누리고 싶다고 합니다. 이것이 보편화되어가고 있습니다. 많은 대학생들의 의식이 혼전에 관계는 죄가 아니라는 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치 성의 해방으로 흐르고 있는 현실입니다. 부부 생활에도 사랑이 없는 행위는, 믿음이 없는 행위는 죄입니다. 이것이 오늘을 무섭게 황폐케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를 한번 살펴보아야 합니다. 살펴본 여섯 가지를 자기를 합리화시키고 있지는 아니한가? 이런 것들이 내 속에 있으면, 기회가 있을 때 죄를 짓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이 내 마음속에 들어 있으면 하나님의 깨끗한 말씀으로 채워서 없애 버려야 합니다. 오늘날 시대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순결을 유지하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사회의 윤리도덕과 성경의 진리는 너무나도 거리가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만 따라가면 말씀이 우리를 든든히 세워주십니다. 그리고 기업을 주십니다. 타협하는 신앙은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고 오직 말씀만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생활로 승리합니다. 중고등부 청년들을 복음의 전사로 길러내야 합니다. 이것은 철저히 가르치는 교육에서 나옵니다. 타협하게 되면 계시록에 나오는 소아시아 교회 중에 두아디라 교회처럼 열심을 잃어 버렸고, 사데교회는 죽은 교회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델비아 교회는 생명력이 있는 교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속에만 생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순결에 이르는 길

 

9. 유혹으로부터 죄에 이르는 단계는 무엇입니까? (야고보서 1:14~15)

욕심이 잉태됩니다. 잉태한다는 말은 무엇인가? 그 안에 생명력을 가진 것이 죄이든, 무엇이든지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잉태하지 않게 하여야 합니다. 욕심은 여자의 태반과 같습니다. 태반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잉태를 하게 되고 자라면 낳게 됩니다. 아예 잉태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이것을 하려면 마음에 품지를 말고 물리쳐야 합니다. 예로서, 아름다운 처녀가 미니스커트에 배꼽티를 입고 내 옆에 있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묵상을 할 것인가? 그 자리를 피할 것인가? 이때는 묵상을 하게 되면 품게 되는 것입니다. 아예 피해버려야 합니다. 앞 칸으로 가든지 내리든지 해야 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창세기 3:6, 8절과 여호수아 7:21절을 읽으십시오. 이 구절은 서로 어떻게 비교가 됩니까? 그 유사점을 열거해 보십시오.

 

(1) 육체의 어느 감각 기관이 자극을 받았습니까?

 

(2) 그 결과 어떤 감정이 일어났습니까?

 

(3) 그 결과 어떤 행동이 일어났습니까?

 

(4) 그 행동의 형적을 어떻게 처리하였습니까?

 

 

묵상에 대한 설명

(1) 육체의 어느 감각 기관이 자극을 받았습니까?

눈입니다. 유혹은 눈을 통해서 먼저 받게 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을 통해 왔습니다. 즉 眼目의 정욕입니다. 여기에서 내가 무엇을 보느냐가 중요합니다. 사람이 눈을 가지고 안 볼 수 는 없습니다. 승리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볼 것인가에 달여 있습니다. 눈으로, 마음의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2) 그 결과 어떤 감정이 일어났습니까?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하나님이 금하신 것을 보았을 때 보암직도 했고 먹음직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름답게 보인 것이 문제입니다. 창세기 6장 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름다움으로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아 죄를 지었습니다.

(3) 그 결과 어떤 행동이 일어났습니까?

먹고 싶은, 가지고 싶은 것이 욕심으로, 행동으로 나타났습니다. 하와는 선악과를 따먹었고 아간은 금덩어리를 취하였습니다.

(4) 그 행동의 형적을 어떻게 처리하였습니까?

하와는 숨었습니다. 죄는 항상 숨게 합니다. 숨는다는 개념은 어두움 속에 잠기게 합니다. 그러므로 빛을 싫어합니다. 아간은 감추었습니다. 언제든지 죄를 지은 자는 위장을 합니다. 구약에 음행을 한 자는 죽이라고 하였는데 이 말은 음란과 음행의 바람이 번져가면서 바람을 일으키기 때문에 음풍이 불지 못하게 번져가지 못하게 잘라 버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먹는 음식도 형제에게 실족케 한다면 먹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지도급에 있는 자들이 술이나 담배를 피우고 불꽃문화 속에 들어가면 신앙이 어린 자들에게 오히려 담력을 주게 됩니다. 장로가 술 먹고 담배를 피우면 평신도들은 우리쯤이야, 하고 죄의식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게 행하게 됩니다. 미혹을 당하지 말라는 말은 연막 즉 연극에 넘어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을 분별해야 합니다. 이것은 단 한 가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말씀은 빛이기 때문입니다.

욥은 31장 1절에 눈과 언약을 세웠습니다. 처녀를 보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욥이 의인이 된 것은 보지 말 것은 보지 않고 볼 것만 보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무엇을 보느냐? 세상을 보느냐? 주님을 보느냐? 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지 말아야 할 장소, 보지 말아야 할 것들은 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보고 좋은 것만 보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6장 22~23절에 눈의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도 중요합니다. 무엇을 바라보고 사느냐? 내가 세상 욕심이 생기지 않을 때 순결을 유지하게 됩니다. 거룩한 말씀을 볼 때 욕심이 잉태하지 않습니다. 내가 철저히 눈을 단속해야 합니다. 자녀들 방에 무엇을 붙여놓았나 살펴보고 마이클 잭슨 등의 연예인들 사진들을 붙여놓았다면 자녀들에게 이런 것들은 잘 이해시켜 없애게 하고 주님의 성만찬이나 사무엘의 기도나 구별된 신앙의 성숙을 주는 그림을 붙여놓게 해야 합니다.

 

10. 디모데후서 2:22절에 언급된 순결한 삶을 위한 중요한 세 가지 원리는 무엇입니까?

첫째, “피하고”라고 하였습니다. 영어 성경의 뜻은 “떠나라”, “달아나라”는 것입니다. 즉 정욕에서 피하고 달아나고 떠나가라는 것입니다.

둘째, “쫓으라.”고 하였습니다. 경건한 연습을 하라고 하였습니다. 계속 긍정적인 것을 따라가야 합니다. 반복해서 따라가다 보면 경건하여 집니다.

셋째, 적극적으로 교제를 해야 합니다. 롯은 정욕을 쫓아 가다가 망했습니다. 아브라함도 애급으로 갔다가 돌아 왔습니다. 요셉은 피할 것 피하고 따라 갈 것은 따라 갔고 적극적으로 교제할 것은 교제하였습니다.

 

내가 순결하려면 첫째, 부정하고 음란 한 것을 피해야 합니다. 즉 노래방 가는 것도 금지하고 비디오 방, 카바레 이런 분위기를 피해야 합니다. 잡지책이나 야한 것을 피할 때 내가 경건의 훈련에서 승리할 수 있습니다. 둘째, 혼자 있는 것을 피해야 합니다. 양은 무리 속에 있어야 합니다. 왕은 백성과 군인들과 항상 같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혼자 잠을 자고 혼자 옥상위로 거닐다가 죄를 지었습니다. 마귀는 혼자 있는 자에게 틈을 탑니다. 부부는 혼자 다니지 말고 둘이 다녀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과 말씀과 같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성도와 같이 있어야 합니다. 다윗은 혼자 어슬렁거리다가 큰 죄를 범하였습니다.

 

당신이 싫어하는 숫자, 이를테면 “4”를 잊어버리려고 시도해 보십시오. 그것을 잊게 되었거든 이 □속에 표시를 하십시오. 잊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어떤 사람들이 부도덕한 것을 피하려고 시도하는 방법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그런 것들을 단순히 생각하지 않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어떤 좋은 것으로 당신의 생각을 대치시키지 않는 한 나쁜 생각을 제거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에베소서 4:22~24절은 옛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해 줍니다.

 

•이 구절은 대치원리를 설명해 줍니다. 당신은 성경 암송을 이 원리에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습니까?

순결하게 살려고 하면 대치원리를 잘 알아야 합니다. 예로서, 한약을 먹고 나면 입이 쓸 때 사탕하나 먹으면 대치가 됩니다. 마라에 물이 써 먹지 못했을 때 한 나무를 던져 대치했을 때 물이 달았습니다(출애굽기 15:23~24).

내 속에 더러운 것이 있으면 성경 말씀을 내 속에 계속 집어넣어야 합니다. 그러면 더러운 것이 밖으로 밀려나오게 됩니다. 예로서, 내가 지금 명동이나 압구정으로 가고 있을 때 대치해야 할 것은 “주님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는 시편 119편 105절의 말씀으로 대치 할 때 발걸음이 반대로 돌아서 오게 됩니다. 갈 수 없게 되고 맙니다. 내 마음을 비워 내려면 그 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암송하고 묵상하고 반복을 계속하면 다 빠져나가고 하나님의 그 좋은 말씀이 거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생각도 의식도 바꾸어 주십니다. 대치원리를 사용해야 합니다. 성경의 말씀만 생각나게 하는 그것이 대치원리입니다. 현대는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오염된 세상입니다. 그 속에 산소 같은 좋은 공기를 호흡하려면 오직 하나님 말씀뿐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성경을 읽고 암송하고 묵상을 계속해야 합니다. 나무는 땅이 있어야 살고, 고기는 물이 있어야 살고,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살아야합니다.

 

11.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깨끗한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1) 시편 51편 10절

마음에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기를 원하였습니다.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였습니다. 정직한 마음, 정직한 영으로 이끌어갑니다. 내 마음이 세상 각종 정욕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지배를 받고 살아야 합니다. 이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 수 있습니다.

(2) 잠언 4장 14~15절

악인과 함께 하지 말고 피해야 합니다. 사특한 자의 첩경에 들어가지 말고 악인의 길로 다니지 말고 피하라고 하였습니다(시편 1편).

(3) 로마서 13장 14절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옷은 자기의 신분입니다. 예로서, 내가 주변의 사람들로부터 예수 칭찬을 받는 그것이 옷을 입는 것입니다. 옳은 성도의 행실입니다.

(4) 베드로전서 1장 22절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적극적으로 뜨겁게 피차에 하면 허물도 덮어 주게 되고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결국 남을 해치지 않고 손해를 주지 않고 필요를 채워 주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남을 이용하기 위해 사람을 만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으로 사랑을 할 때 순결하여 집니다.

“마음을 평온함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그 마음을 순결하게 여과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마음을 순결하게 갖기 위해서는 그것을 성령의 지배에 맡기고 음란한 것들을 피해야만 합니다. 마음을 순결하게 보존하려면 마음을 지키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의 순결한 진리로 그 마음을 가득이 채워 놓으십시오.” -케이스 L. 부룩스-

묵상을 위한 질문

 

창세기 39:7~12절과 사무엘하 11:1~4절을 공부하십시오. 요셉과 다윗을 비교해 보십시오.

 

(1) 주위 환경이 어떠하였습니까?

 

(2) 그들 각각의 태도는 어떠하였습니까?

 

(3) 그들의 결과적인 행동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당신은 왜 이 두 사람이 비슷한 유혹에서 두 가지의 서로 다른 반응을 나타냈다고 생각하십니까?

                                                         

                                                         

 

   

묵상에 대한 설명

(1) 주의 환경이 어떠하였습니까?

여자와 함께 있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의 아내와 한방에 단둘이 만 있었습니다. 여자 쪽에서 적극적으로 달려들었습니다. 다윗은 멀리 떨어져 있는 밧세바의 목욕하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마음에 품었습니다.

(2) 그들 각각의 태도는 어떠하였습니까?

여자는 같았지만 요셉은 먼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매달리는 여자 앞에서도 하나님 앞에 득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여자를 먼저 보았습니다. 그리고 마음에 품었습니다. 요셉은 적극적인 환경에서도 하나님께서 보고 계신 사상 때문에 뿌리치고 도망을 칠 수 있었습니다. 유혹의 현장에서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말씀을 생각하고 도망쳐야 합니다. 다윗은 여자와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여자가 목욕을 하고 있는 것을 바라보다가 매료 되었습니다. 결국 환경보다 마음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환경을 보면 요셉이 죄에 빠지기가 더 쉬웠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날마다 그리스도의 옷을 입는 삶을 살았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이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있는 것을 보고 재산을 모두 맡겼습니다. 다만 자기 아내만 금하였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보디발의 금한 것보다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그 옷을 입지 못하여 결국 여자에게 빠져 버렸습니다.

(3) 그 결과적인 행동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요셉은 그 여자로부터 옷을 잡아당김을 받았으나 벗어 버리고 도망을 쳤습니다. 유혹의 현장에서 붙잡힌 상태에서 도망쳤을 때 죄에서 승리를 하였습니다. 승리한 자 만이 받아 누릴 것이 많습니다. 다윗은 그 반대로 여자를 붙들고 간음을 하였습니다. 마음에 품었을 때 잉태하여 적극적인 행동으로 죄를 낳았습니다. 마음이 더 중요함으로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같은 마음에서 요셉은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고 다윗은 여자만 보이고 하나님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환경으로 변명을 하지 말고 내 마음에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래야 유혹을 물리칠 수 있고 죄를 이길 수 있습니다. 사울 왕은 환경을 핑계하였습니다. 사무엘이 정한 기간이 지나서 옴으로 자신이 제사를 드렸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환경은 전쟁에는 승산이 없고 백성들은 떠나가고 하여 그 환경 때문에 그렇게 한 것입니다. 다윗은 왕의 자리란 환경이고 요셉은 종의 자리란 환경 이였습니다. 종은 주인의 소유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유혹을 이겼습니다. 결국 경건하게 살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외의 것은 부수적은 것입니다.

 

대인 관계

 

신약 성서의 여러 구절이 다른 사람들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의 생활특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12. 다음의 사람들을 당신은 어떻게 대하여야 합니까? (디모데전서 5:1~2)

(1) 나이 많은 남자

바울은 디모데에게 목회만 가르친 것만 아니라 신앙의 순결에 대하여서도 가르쳤습니다. 나이 많은 남자에게는 아버지처럼 대하라고 하였습니다.

(2) 나이 많은 여자

어머니처럼 대해야 합니다. 이것도 경건입니다.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를 친어머니처럼 여겼습니다.

(3) 젊은 남자

형제로 대해야 합니다.

(4) 젊은 여자

자매로 대해야 합니다.

특별히 젊은 남자, 젊은 여자를 성도의 교제에서 대할 때 친 형제자매로 친 가족처럼 생각을 할 때 순결할 수 있습니다. 육적으로 대하면 유혹을 받게 되고 순결을 지키지 못합니다.

•당신이 어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러한 수준에 이르도록 개선해야 될 필요가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그것에 대해 어떻게 하겠습니까?

예로서, 젊은 여자나 남자를 볼 때 유혹을 받으면 음욕이 생겨 날 수가 있습니다. 이때 내가 적용하려면 먼저 인격이 성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모순에 빠지기 쉽습니다. 청소년 학생들이 교회에 은혜를 받으려고 하는 것보다 유혹을 받고 다닐 수가 많습니다. 그럴 때 얼마든지 자기 열심으로 봉사를 하면서 자기모순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성숙하지 못합니다. 젊은 남녀가 성도로 교제를 할 때 육으로 대하지 말고 영적으로 대해야 합니다. 바울은 항상 영적으로 대하였습니다. 육으로 대하면 절대로 변화가 없습니다. 제자 교육은 육으로 대하면 실패합니다. 항상 영적으로 대할 때 성장이 옵니다. 우리가 뜨거운 마음으로 열망하고 순수하고 영적으로 할 때 성장이 오고 감화를 받아 성장합니다. 육으로 하면 느낌으로 통합니다. 주님은 수가성의 여인을 영적으로 대하였습니다. 처음 말을 걸때에는 육으로 시작했으나 영적으로 이끌어 가셨습니다. 교제에 있어서도 육으로 대하면 매일 세상 밖으로 놀로만 다니고 세상의 재미를 보려고만 할 때는 여기에는 각종의 유혹으로 신앙의 순결을 지키지 못합니다. 성도는 영적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애를 쓸 때 변화가 오는 것입니다. 육으로 대하는 것은 곧 물리쳐야 합니다. 물리치지 못하고 걸려들면 신앙이 무너집니다. 성도의 교제에는 영적으로 대할 때 순결을 지키고 유혹을 피하면 이길 수 있습니다.

 

13. 디도서 2:2~8절을 읽고 다음 네 종류의 사람들의 삶 속에 꼭 나타나야 하는 성품을 최소한 세 가지씩 기록해 보십시오.

나이 많은 남자들의 성품은 첫째, 절제가 있어야 합니다. 말이 많아지고 말이 길어집니다. 간섭을 많이 하려고 합니다. 모든 면에 절제하는 성품이 나타나야 합니다. 둘째, 경건이 나타나야 합니다. 경건하지 못하면 꼴불견이 됩니다. 보기가 사납습니다. 나이 들어 돈이 좀 있다고 정욕제나 찾아다니고 보신 관광이나 다니고 하면 사람이 지저분하게 보입니다. 셋째, 근신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을 조심해야 합니다. 넷째, 온전해야 합니다. 믿음, 사랑, 인내함으로 모든 면에 온전케 되어서 본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변화가 없으면 비극입니다. 젊을 때는 애교로 보아 주지만 나이 들어서 변화가 없으면 존경을 받지 못하고 지저분하게 보입니다.

나이 많은 여자는 첫째, 행실이 거룩해야 합니다. 둘째, 참소를 하지 않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수록 남의 흉을 잘 봅니다. 특히 며느리 흉, 사위 흉을 잘 봅니다. 좋은 말을 하고 자랑을 할 때 아름다운 것입니다. 셋째, 술을 먹지 말아야 하고 담배를 피우지 말아야 합니다. 나이가 들면 이런 면에 담대하여져서 쉽게 하게 됩니다. 이것은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넷째, 선한 것을 잘 가르쳐야 합니다. 나이가 많은 권사님은 권면을 잘해야 합니다. 즉 선으로 본을 보여 주면서 가르쳐야 합니다. 이런 성품들이 반드시 나타나야 합니다.

젊은 남자들은 근신을 해야 합니다. 특히 많은 유혹에서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삼가야 할 것은 삼가야 합니다. 특히 본을 보여야 할 것은 선한 일에 대해서입니다. 말씀에 “교훈에 부패치 않음과”라고 하였습니다. 무엇인가 선으로 남에서 신선한 충격을 주라는 것입니다. 지금 시대는 부패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서글프게 합니다. 막가파들인 20대들은 단란주점 주인인 여사장이 외제 승용차 타고 가는 것과 돈이 많은 것을 증오하여 옷을 다 벗겨 산채로 암매장을 했다고 하였습니다.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선행으로 신선한 충격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가정에서나 교회에서 보여 주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절은 여자들은 남편과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지 않을 때 유혹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직 남편만, 자녀만 가족을 사랑을 해야 근신을 하고, 순결을 지킬 수 있고, 정절을 지킬 수가 있습니다. 특히 집안일을 잘 돌아 보아야 합니다. 가사 일에 실증을 느끼기가 쉽습니다. 집안일을 하나님의 일로 믿고 잘 돌볼 때 유혹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부지런히 일을 해야 합니다. 게으르면 유혹을 받아 세상 친구들과 동창생을 만나 노래방 가고 유흥업소에 가서 춤도 추게 됩니다. 그리고 이벤트 사건에 걸려들기 쉽습니다. 이런 성품들을 하나님의 말씀의 빛에 비추어서 개발시켜야 합니다.

 

내 나이는 어디에 해당되며 점검해야 될 성품들은 어떤 것들인가 점검을 해보십시오. 그리고 좋은 쪽으로 개발시켜 나가십시오. 그래야 성결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1) 위에 기록한 성품들 중에서 당신이 진보를 보기 원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경건한 성품들이 있습니다.

(2) 당신은 어떻게 이러한 일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큐티로 영적 훈련을 쌓고 유리창을 닦듯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닦아야 합니다. 하나니 앞에서, 말씀의 거울 앞에 비추어서 경건의 훈련을 해야 합니다.

(3) 당신과 성(性)이 다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성품 중에서 당신에게 중요한 것들은 무엇입니까?

거룩하게 살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4) 이런 것들은 당신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수준과 차이가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어떻게 다릅니까?

나이가 많은 남자는 온전해야 합니다. 내 나이만큼 성장을 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요셉은 나이가 적어도 그 인격이 형들보다 성숙했습니다. 나는 혹 형제들과의 관계에서 도와주지 않는다고 응어리진 것들은 없습니까? 이것이 있다면 신앙으로 미성숙한 자입니다.

(5) 당신의 이성(異性)과의 관계와 연관해서 당신이 취해야 할 성서적인 수준은 무엇입니까? 그 중에서 두 가지만 기록하십시오.

예로서, - 나이가 들었으면 - “거룩하고 참소하지 말라”, “간섭하지 말라”는 성경 구절을 찾아 놓고 자신의 약점을 두고 기도하고 고치려고 훈련을 할 때 변화가 옵니다.

 

결혼에 대하여

 

14. 창세기 2:18~25절을 읽으십시오.

(1) 누가 결혼을 제정하였습니까?

그 주인공은 하나님이십니다. 결혼 생활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행해야 합니다.

(2) 어떤 목적으로 결혼이 제정되었습니까?

행복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결혼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가문이나 사회의 관습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서입니다. 함께 교제를 나누라고 주신 것입니다. 성인이 되면 누군가와 교제를 하지 않으면 외롭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홀로 독처하는 것을 보기 싫어 하셨습니다. 그래서 아담을 깊이 잠을 자도록 하시고 갈빗대를 취하여 여자를 만드셨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모든 만물들과 교제 할 자가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은 여자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이끌어 주셨습니다.

참된 결혼은 서로 교제하기 위해서입니다. 교제라는 것은 대화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서로 돕는 배필로 주셨습니다. 사람은 나약하고 부족하기 때문에 돕기 위해서 결혼의 목적이 되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신앙의 안정이 될 수 있도록 도아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한 몸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 한 몸이 될지니라는 말씀이 네 번 나옵니다. 하나 된다는 것은 마음도 뜻도 생각도 이념도 하나 된다는 즉 같다는 개념입니다. 이때 참된 하나이면서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나님께서 결혼 목적으로 주시고 결혼을 재정하여 주신 것입니다.

(3) 24절의 내용을 당신 자신의 말로 기록해 보십시오.

예로서, 고부간에 갈등은 아들을 몸으로는 떠나보내면서도 마음으로는 떠나보내지 못한 것입니다. 남편이 마마보이가 되어 어머니로부터 떠나지 못하면 안 됩니다. 결혼을 하면 아내와 한 몸인 것입니다.

 

15. 고린도후서 6:14~15절에서,

(1) 하나님께서 어떤 원리를 선포하셨습니까?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아야 합니다. 멍에는 둘이 매면 같은 방향으로 갑니다. 소와 말이 같이 멍에를 매면 말은 뛰고 소는 뛰지 않으므로 맞지 않습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와 결혼 하면 절대로 같은 방향으로 갈 수 없습니다. 죽은 자와 산 자는 하나 될 수 없습니다.

(2) 이 원리는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어떻게 적용됩니까?

같이 예수 믿는 자와 결혼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성숙도 같아야 합니다. 그래야 한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3) 이 원리가 어겨질 때 그 결과로 어떤 문제점들이 나타난다고 생각하십니까?

첫째, 하나님의 자녀 된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누리는 축복이 최고인데 그것을 누리지 못합니다. 벨리알과 예수는 합하지 못합니다.

둘째, 두 사람이 하나 되는 목표가 없습니다. 목표를 가지고 허락을 했는데 생의 목표가 이루어 질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가정에 주신 목표가 하나 되지 않기 때문에 하나 되지 않습니다.

 

16. 당신이 이미 이런 식으로 결혼을 해버렸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실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7:12~16)

서로 해어지면 안 됩니다. 그럴수록 착한 행실로 감동을 주면서 선행을 보여 주면서 감당을 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질 때 구원을 시킬 수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자라 할지라도 미성숙 할 때 선행을 보여 주면서 따라 오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먼저 성숙할 때 따라옵니다. 목표를 이루지 못했을 때 죄 된 삶이 됩니다. 상대방을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그것이 자기 십자가로 믿고 십자가를 지어야 합니다.

 

17. 결혼하지 않는 것에 대한 세 가지이 이유를 들어 보십시오. (고린도전서 7:7~9, 25~35)

첫째, 은사라고 한다면 혼자 사는 것도 축복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 마지막 때 환난과 고통의 시대가 옵니다. 이때 이 환경을 이겨 내려면 가족이 없고 혼자로 있는 것이 나을 수도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 젖먹이와 아이 밴 자들에게 화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가족 때문에 신앙을 포기할 수도 있게 될 수 있습니다.

셋째, 주님께 신앙의 헌신을 위해서 주님을 온전히 섬기고자하면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과 같이 말입니다. 예로서, 선교사로 가려고 했을 때 가족이 있으면 선교에 여러 가지 방해가 될 수 있기 때문에 자녀를 낳지 않을 수도 있고 결혼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세 가지가 아니라면 결혼을 해야 합니다.

 

18. 에베소서 5:21~23절은 그리스도인의 결혼에 관한 구절입니다.

(1) 하나님께서 남편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남편은 아내를 주님이 교회를 사랑하듯이 하고 아내들은 교회가 주님께 순종하듯이 하면 즉 존경할 때 가장 멋있는 부부인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을 머리로 인정해야 합니다. 여기에는 사랑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가 표준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합니다. 부부 사랑은 아가페로 하고 아내는 주께 하듯이 해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표준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2) 남편은 하나님이 그에게 원하시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 성취할 수 있습니까?

아내를 자기 몸으로 여겨야 합니다.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가 아프면 내가 아픈 것처럼 해야 합니다. 왜 약을 사먹지 않았느냐? 고 하지 말고 내가 가서 약을 사서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집안일까지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편이 머리라고 하는 것은 막노동 공사판의 감독처럼 명령하는 주종의 관계가 아닙니다. 몸을 보호하고 도와주는 사랑의 명령입니다. 손이 위험할 때 머리는 피하도록 지시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자시를 하는 것입니다. 즉 도와주고 보호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머리입니다.

(3) 하나님께서 아내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순종입니다. 따라가야 권위를 가지고 질서가 섭니다. 머리가 명령을 하는데 따르지 않으면 몸이 파괴되고 맙니다. 자동차가 위험할 때 머리가 피하라고 지시하는데 피하지 않으면 몸은 파괴되고 마는 것입니다. 남편에게 순종하는 것이 결국 자기를 위한 것입니다.

(4) 아내는 하나님이 그녀에게 원하는 것을 어떤 방법으로 취할 수 있습니까?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이 해야 합니다. 항상 주님이 표준이 되는 원리를 배워야 합니다. 남편을 내 머리로 여겨야 합니다. 교회가 주님을 주인으로 여기듯이 해야 합니다. 주님이 부부 사이를 떠나시면 행복한 부부로 유지할 수 없습니다. 세상에는 결혼하면 누가 주도권을 가지느냐? 에 있어서 신경전을 벌입니다. 주도권 싸움을 하는 것은 좋은 부부 관계가 못됩니다. 그것은 주종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관계가 되면 불행합니다. 이것은 정말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부는 서로 인격의 만남입니다. 이 말은 남편도 아내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결혼을 한 부부가 순결을 유지하는 비결은 가식이 없이 서로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이때 마음의 죄까지도 떠나가게 됩니다. 사랑이 적으면 적을수록 순결을 잃어버립니다. 사랑은 자꾸 행할 때 생겨나는 것입니다. 생일날 장미꽃 한 송이 보다는 국화꽃 한 다발 사가지고 가면 더 기쁨을 줍니다. 사랑은 행동으로 합니다.

성경에도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생활은 자녀 교육의 영향력에 크게 작용이 됩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러한 모습들을 볼 때 자녀들은 어머니를 공경합니다. 아내가 자녀에게 대접받지 못하면 그 화풀이는 남편에게 돌아갑니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의 생일 날 선물할 때는 후하게 하십시오. 그러한 모습들을 자녀들이 보게 됩니다. 사랑에 대한 표현을 하십시오.

 

“아버지가 자녀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그들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다.” -디어도어 히스버그-

 

요 약

다음 내용에 한두 문장을 첨가해서 본과를 요약하십시오.

하나님의 수준.

하나님은 생각과 언어와 행동의 순결을 위한 분명한 수준을 가지고계십니다.

<보충설명> 사랑이란 상황에 따라서 바르게 할 수 없는 수준을 영적으로 내 수준까지 깨끗하게 유지하십니다.

개인의 순결의 중요성.

성경은 순결을 유지하기 위한 명백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보충설명> 어떤 이유로도 하나님 앞에 변명이나 타협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 수준을 떠나서 나의 몸의 성전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순결에 이르는 길.

성서적 원리의 적용은 순결한 삶을 살도록 인도해 줍니다.

<보충설명> 마음의 순결을 유지하지 못할 때 실패를 합니다. 성경 말씀을 마음에 새겨 놓는 것만이 순결로 인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전체의 요약입니다.

대인 관계.

하나님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개인적인 기준을 갖기를 원하십니다.

<보충설명> 젊은 사람에게 대해서는 성도로서 형제나 자매에게 대할 때 그 이상의 성품을 말씀에 의해 개발시켜 나가도록 해야 합니다. 자신의 인격 수준을 항상 살펴보면서 적극적으로 계획을 중요시함으로 인식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결혼에 대하여.

성경은 결혼에 있어서 순결에 대한 하나님이 관점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보충설명> 결혼이 하나님의 축복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원리와 목표를 따라 하지 않을 때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은사를 따라서 결혼을 하지 않은 축복은 축복을 누리지 못합니다. 일달 결혼을 하면 순결의 책임을 다해야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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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4 과

 

정직한 생활

각 사람은 매일같이 올바른 것과 잘못된 것, 곧 선과 악의 문제를 처리해야만 합니다. 이러한 문제들과 싸울 때에 행동을 합리화하거나 하나님의 온전한 수준을 적당히 절충하여 손상시키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주 이러한 죄들은 교묘한 변명으로 모면되거나 무시되어 버립니다. 이러한 것을 “고상한 악”이라는 것인데 정상적인 수준처럼 받아들여진 죄악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가 그들의 삶에 침투케 되는 어떠한 타협도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정직을 위해서는 끝까지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1~4번까지는 온전히 정직하게 싸움이 있어야 합니다.

 

정직을 위한 투쟁

 

1. 온전성 또는 정직의 필요에 관하여 하나님은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레위기 19:11)

정직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너희는 도적질 하지 말며 속이지 말며 서로 거짓말 하지 말며”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쳐서 복종시키고 순종하면서 정직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도적질이나 속이는 것은 정직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것을 드리지 못하는 것은 도적질입니다. 예로서, 십일조, 주의 날 범하는 것, 선한 일 하지 못하는 것, 전도하지 못하는 것, 기도하지 못하는 것 등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아니하는 것은 도적질이고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국가에 바칠 것 바치지 않는 것 등 국세 공세 이것도 도적질인 것입니다. 마땅히 주어야 할 것을 주지 않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남의 것만 훔치는 것이 도둑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나를 통로로 원하십니다. 내가 통로하지 않는 것도 도둑질입니다.

 

2. 예레미야 17:9절을 읽으십시오.

(1) 무엇 때문에 정직한 생활을 하기가 그렇게 힘듭니까?

내 마음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정직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오늘의 세대를 보면 부패가 극으로 달리고 있는 현실에 있습니다. 개는 자기 주인을 배신하지 않습니다. 진돗개는 한번 주인이 되면 죽을 때까지 주인으로 섬깁니다. 그러나 사람은 배신을 잘 합니다. 이것에 대하여 군사 정부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박정희는 김재규에게 배신당해서 총 맞고 죽었습니다. 그것도 획인 사살까지 하였습니다. 개는 발로 걷어차더라도 돌아서면 꼬리 칩니다. 짐승은 주인을 압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도 사람 앞에서도 정직해야 합니다. 자신에게도 정직해야 합니다.

(2) 잘못된 행동임을 알면서도 합리화하려고 했던 최근의 실례를 하나 들어 보십시오.

적용하는 면입니다. 하나님은 불의한자의 길을 막으십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합리화 시킨 것을 자백하는 마음으로 적어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씩 고쳐서 정직하게 살려고 싸워 보십시오.

(3) 하나님께서 그 행동이 옳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당신의 삶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셨습니까? 자기 삶 가운데 어떻게 역사하는 가를 적용해 보십시오.

 

3. 당신을 속아 넘어가게 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자 신

 

(1) 야고보서 1장 22절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속습니다. 사울 왕은 자신에게 속았습니다. 듣고 알고 행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요나 선지자는 갈 바를 알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절대적인 사랑을 전하라고 그를 택했습니다. 전도하라고 택했습니다. 요나가 니느웨성으로 가지 않았던 이유는 보는 눈이 하나님과 달랐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를 망해야 될 세상으로 보았습니다. 하나님은 니느웨가 소돔과 고모라와 노아 시대와 같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끝까지 참고 인내하셨습니다. 마지막 그때까지 참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는 자가 전도자의 눈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는 사명 의식이 분명해야 합니다. 요나는 분명한 사명 의식이 없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이였습니다. 전도하지 못하게 하는 적은 자신입니다. 그래서 요나처럼 풍랑을 만나게 됩니다. 그래서 지옥과 같은 환경에 떨어집니다. 요나는 자신과 하나님을 속였습니다. 진실하기 위해 피 흘리기까지 자신과 싸워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 진실한 삶을 살게 됩니다.

(2) 요한일서 1장 8절

스스로 죄가 없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자신을 속이는 것은 일반적으로는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는 큰 죄입니다. 자기의 길을 굽게 하는 것이 자신입니다(잠언 19:3).

 

다른 사람

 

(1) 로마서 16장 17~18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에 내가 속아 넘어가기 쉽습니다. 욕심이 많은 자, 정직하지 못한 자가 넘어 가기 쉽습니다. 정직한 자는 속지 않습니다. 속는 이유는 자기 욕심이 많아서 입니다. 사기꾼은 그 욕심을 이용하여 사기 행각을 일삼습니다. 청와대를 사칭하여 교제비를 먼저 달라고 합니다. 내가 욕심이 없으면 부정직한 방법으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속지 않는 것입니다.

(2) 에베소서 4장 14절

사람의 궤술과 간사와 유혹에 빠져서 속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성숙한 자 일수록 신앙에 굴곡이 없습니다. 굴곡이 심한 자는 신앙의 미성숙한 자입니다.

 

사 탄

 

(1) 고린도후서 11장 3~4절

거짓 진리를 참 진리인 것처럼 주장하는데 속습니다. 그래서 하와는 죄를 지었습니다. 사탄은 선악과를 따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눈이 밝아진다고 하였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과 같은 수준에 이르게 된다고 했습니다. 비 진리를 계속 주장했습니다. 그 목적은 확신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사탄의 작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희미하게, 혼미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나 진리는 확신 안에 거하게 하여 줍니다.

(2) 창세기 3장 1절

천사처럼 나타나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심을 품게 합니다. 사탄은 광명의 천사로 가장합니다. 그 이유는 사람을 속이기 위해서입니다. 속으면 불의한 것이 상대방의 신뢰성에 배반을 당하게 됩니다. 신뢰심이 탈취를 당합니다. 진실하지 못할 때, 정직하지 못했을 때 하나님을 계속 속입니다. 일주일 내내 죄와 싸워 보지도 않고, 전도하여 보지도 않고, 기도하지도 않고, 주일날 하나님 앞에 용서하여 달라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반복적인 죄를 짓고 자백을 반복적으로 하는 것도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죄와 반드시 피 흘리기까지 싸우면서 기도해야 하나님이 힘을 공급하여 주셔서 승리의 삶을 주시는 것입니다.

 

4. 당신이 그렇게 쉽게 속아 넘어간다면, 당신이 죄를 범할 때 그것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1) 시편 139편 23~24절

기도하면서, 자신을 살피면서 혹 죄를 범하였으면 용서를 구하여야 합니다. 이때 간절히 기도했을 때 죄 용서와 함께 죄를 이길 힘을 주시면서 하나님과 관계성을 회복시키십니다. 불성실한 자백은 자백이 아닙니다.

(2) 히브리서 4장 12절

하나님의 말씀 안에 나아갈 때, 그것 밖에는 해결책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환경을 초월하면서 끝까지 따라갈 때 하나님의 언약이 이루어지는 삶이 됩니다. 이것이 진리 안에 자유 된 축복입니다. 내가 주의 말씀 안에 나아가는 삶이 해결책입니다. 이때 주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이 따라옵니다. 말씀이 나를 정직하게 만들고 깨끗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정직하려고 무섭도록 노력을 해야 합니다. 피 흘리기까지 노력을 하십시오. 노력도 하지 않고 자백만 하는 것은 하나님을 속이고, 자신을 속이는 부정직한 자입니다.

 

거짓을 버림

 

5. 고린도후서 8:21절을 사도행전 24:16절과 비교해 보십시오.

(1) 매일 매일의 생활에서 바울을 도와준 지침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이 선한 상태에 있어야 합니다. 양쪽에 거리낌이 없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것을 지침으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 앞에서만 정직하려고 합니다. 자기 양심이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마다, 문화권마다, 국가마다 다릅니다. 양심은 성경에 분명히 모든 만물보다 부패하다고 하였습니다(예레미야 19:9). 다윗은 양심을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깨끗하게 하여 달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선한 양심이 사람 앞에도 선해야 합니다. 내 생각에는 사회생활을 하나님의 선으로 하면 금방 망한다고 생각이 드나 결코 망하지 않습니다. 장사도 정직하게 하면 고정 손님이 계속 늘어나게 됩니다. 사람은 신뢰심을 저버릴 때 제일 기분이 나쁩니다. 하나님은 정직한 것을 원하십니다. 다윗은 정직한 마음을 창조하는 정직한 영을 부어 주셔서 새롭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2)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 가운데 있는 죄를 드러내 주실 때에 깨끗한 양심을 갖기 위해서 어떻게 했으리라고 생각합니까? (요한일서 1:9절과 비교하십시오.)

성실한 자백을 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이때 하나님 앞에 깨끗할 수 있습니다. 자백의 자세는 토설하듯이 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정상적인 관계가 이루어집니다.

(3) 당신의 삶 가운데 깨끗한 양심을 갖지 못하는 부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한번 자신을 점검하여 찾아내어 써보십시오.

(4) 깨끗한 양심을 갖기 위해 당신은 어떤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까?

더러워진 양심에 대하여는 성령으로 훈련된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성령께서 내 마음을 새롭게 합니다.

 

6. 당신은 위선자가 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오늘날 성도들이 탈을 너무 많이 쓰고 있습니다. 이양호 국방장관 장로지만 탈을 썼습니다. 뽀빠이 이상용씨는 어린이 심장 수술의 돈을 착복했습니다. 오늘날 세상은 선한 양심이 실종된 세상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정직하게 살아야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전두환은 사회 정의 구현이란 타이틀을 걸어 놓고 자신은 탈을 썼습니다. 그래서 돈을 창고에 사과 상자에 쌓아 두었습니다.

(1) 예수님은 외식하는 자를 어떻게 묘사하셨습니까? (마가복음 7:6~8)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탈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헛된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는 가면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게 하는 가르침이 위선입니다. 갈라디아 교회에 유대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예수도 믿고 할례도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이것이 거짓된 자들의 가르침입니다. 베드로도 초반 사역에 유대인 행세를 하다가 바울에게 질책을 받았습니다. 그 일로 실라와 바울이 갈라섰습니다. 우리는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2) 이런 형태의 생활이 부정직한 한 가지 이유는 무엇입니까? (로마서 2:23~24)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 지키지 못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진리는 행하라고 있는 것입니다. 지키지 않는 것은 속이는 것이고 위선입니다. 이런 삶 때문에 하나님을 욕을 먹게 하고 영광을 가리웁니다. 요나 선지자는 그 속에 진리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셨습니다. 그러나 자기중심 때문에 위선자가 되어 풍랑을 만났습니다. 자기중심은 복음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변화의 삶이 없었습니다. 회칠한 무덤 이였습니다. 그러므로 탈을 쓴 위선자들이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대접하려고 힘을 써야 합니다. 이것이 섬기는 삶입니다. 자신의 계산으로 살면 인색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의 계산 방법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하나님이 책임을 져주십니다.

(3) 하나님의 이름이 비방을 받게 되는 한 가지 예를 들어보십시오.

 

하나님은 나를 너무도 잘 아십니다. 나를 점검하여 써보십시오. 특히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점에 대해 살펴보고 인색함에 대해 살펴서 보완하여 보십시오.

 

7. 당신의 삶은 다른 사람들의 정밀한 시험에 잘 견디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거짓된 인상을 조장하기 위해서 당신이 무엇이나 되는 것처럼 꾸미지 마십시오. 사람들의 실제 모습과 그들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말해줄 수 있는 발명품이 있다고 상상해 보십시오. 거짓된 인상이 조작입니다. 탈을 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현재 있는 그대로 받으십니다.

(1) 이 기계가 당신 자신에게 사용되어지기를 원하십니까? 왜 그렇습니까?

내 양심을 다 볼 수 있다는 기계가 만약에 있다면 내가 자신 있게 그 위에 올라 설 수 있겠는가? 바울은 말하기를 자신에 대하여 하나님이 증인이라고 말하였습니다. 바울은 사실 깨끗하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나를 본받으라고 하였습니다. 위와 같은 삶은 정직한 삶입니다. 능력을 행하는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양심이 더럽기 때문에 그 기계 위에 올라서기를 두려워합니다.

(2) 당신이 계속 감추어 두고자 하는 것 중에서 드러나 버릴 것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 앞에서 하나하나 해결을 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요셉은 하나님 앞에서 득죄 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앞에 모두 다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속일 수가 없습니다. 나의 위선은 하나님 앞에 모두 드러납니다. 감추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해결하려고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불성실하면 오래 쓰임을 받지 못합니다. 불성실은 반드시 사울처럼 쓰러지고 맙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사도행전 5:1~11절을 읽으십시오. 부정직한 행동이 왜 성령을 모독하는 것입니까? 그들의 죽음이 예루살렘에 있는 다른 성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습니까?

                                                         

                                                         

                                                         

 

 

묵상에 대한 설명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한 예입니다. 사람을 속인 것이 하나님을 속인 것입니다. 사도를 속인 것이 하나님을 속인 것이며 성도들이 목사를 속이는 것이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사람 앞에 잘못한 것이 하나님 앞에 잘못이 됩니다. 그러므로 잘못된 것을 축소시키려고 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 드려야 합니다. 왜 이런 것이 중요합니까? 나의 부정직한 태도가 교회의 성령의 불을 꺼버리는 결과가 되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예로서, 교회를 활성화 시키기기 위해 적정 기도회와 전도에 목표를 두고 실행하면 주님이 교회를 활성화 시킵니다. 주님은 나와 함께 모으지 않는 자는 해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영적으로도 부정직한 태도는 가장 무서운 것입니다. 거짓과 무엇인가 반항적인 태도 역시 무서운 것입니다. 교회에서 이런 것을 고치려고 하면 열심히 정직하게 일하는 자에게 불을 붙여놓아야 합니다. 영적 불을 꺼버리는 무서운 것이 바로 부정직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사도들을 속인 것은 하나님을 속인 것이며 초대 교회의 성령의 불을 꺼버리는 원인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죽이신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이런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하였습니다(시편 51:10). 우리는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자신 앞에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8. 고린도후서 8:21절을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다음 항목들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이러한 문제들이 당신에게도 있습니까? 그 옆에 표시를 하십시오.

            과장

            선의의 거짓말

            속임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 인상을 믿도록 만든 것

(1) 과장

체험 했을 때, 예화를 들 때 과장을 많이 합니다. 특히 간증도 과장을 많이 하고 간증 책도 그리고 성공담도 80% 선의의 거짓말을 합니다. 이것은 더 적극적인 거짓말입니다.

(2) 선의의 거짓말

흰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더 적극적인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3) 속임수

 

암 환자에게 속이려고 합니다. 이웃집에 갔을 때 저녁 드셨냐고 물으면 먹지도 않았으면서도 먹었다고 합니다. 기도 부탁을 했는데 물으면 하지도 않았는데 했다고 합니다. 이런 거짓말도 속임수입니다. 이런 것들이 더욱 적극적인 속임수가 됩니다.

(4)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도 부정직한 것입니다. 특히 부모가 자녀에게 무엇을 해주겠다고 하여놓고 잊어 버렸다고 말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내일 사주마하고 계속 넘어가는 것도 거짓말입니다.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 거짓말입니다. 특히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것 하나님과의 약속 시간인데 지각하고 예배시간 빠지는 것은 하나님 앞에 거짓말이 되는 것입니다. 구역예배와 심방은 서로의 약속을 잘 지켜야 합니다. 시간을 지키지 않는 것을 예사로 여기는 것은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제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5)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 인상을 믿도록 만든 것

마음과 겉이 다른 것을 말합니다. 미워하면서 사랑하는 것같이 가면을 쓰는 것, 속으로는 경계하고 하면서 상대를 믿게 만들어 자기 욕심을 채우는 것, 말장난으로 그 사람을 믿게 만들어 돈을 빌려 쓰고 갚지 않는 것 등이 있습니다. 특히 개척 교회와 백명 미만의 교회에 와서 일 년 동안 사람 앞에 들어나도록 충성하고 십일조, 감사, 새벽 기도를 열심히 합니다. 교회 일에 큰일은 부부가 다하다시피 하여 목사에게 인정받아 교회 여전도회 회장하며 부부가 교인들의 부러워하는 선망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전 교인들에게 돈을 빌리기 시작하여 많은 돈을 빌려 생활에 쓰고 자기 사업을 한답시고 일 저질러 다른 곳으로 옮기는 예가 많이 있습니다. 돈을 빌려주는 그 사람도 자기 욕심에 끌려 빌려 준 것입니다. 물질 면에 정직해야 합니다. 욕심을 비워 내면 거짓 인상에 속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정밀히 분석하여 위에 다섯 가지에 걸려 있으면 내가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어떻게 고칠 수 있을까? 묵상기도를 통해 부정직한 것을 이제는 정직한 사람이 되기 위해 훈련을 해야 합니다. 훈련 없이는 정직 할 수가 없습니다.

 

9. 시편 15:1~5절을 읽고, 정직한 사람의 자질들을 최소한 다섯 개를 열거하십시오.

정직한 사람들의 자질은 우선 정직하게 행하되 공의를 일삼으며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모든 처사를 선한 양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혀로 참소하지 말아야 합니다. 벗에게 행악을 하지 말고 이웃을 훼방하지 말고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지 말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를 존대해야 합니다. 즉 이웃을 해롭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마음에 서원 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지켜야 합니다. 결혼 때 서약한 것, 교회 직분을 받을 때 서약한 것 등 서원을 해놓고 지키지 않는 것도 부정직한 자입니다.

정직한 자는 자신에게 해로울지라도 지킵니다. 입다 선지자는 자기에게 해로울지라도 지켰습니다. 마음으로 서원을 하고 갚지 않으면 내 평생에 짐이 됩니다. 작은 약속부터 큰 약속까지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정직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정직한 자를 들어 사용하십니다. 세상도 자신은 부정직하면서도 자기가 고용하는 자는 정직한 자를 찾습니다. 서원을 하나님 앞에 한 것이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 하며 더디 지키는 것은 죄라고 하였으며 또한 하나님은 그 서원을 찾아내신다고 하였습니다.

신명기 23장 19~21절에 “이식을 취하는 것” 즉 이자 놀이 하는 것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덕목에 걸린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의뢰 하지 못한 것에도 걸려 집니다. 이런 자는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과 물질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될 수 있는 데로 돈을 빌리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법정 은행 이자는 성경에 허용하였습니다. 그 이상은 정직하지 못합니다. 높은 위치에 있는 자들은 뇌물을 받지 말아야 합니다. 받는 그 자체가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10. 데살로니가전서 2:10절에서 바울은 그가 살아온 길을 어떻게 나타내고 있습니까?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신 앞에 정직하였습니다. 거룩하고 옳게 하나님 뜻대로 선하게 기뻐하고 온전하게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로마서 12장 2절에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은 사람 앞에, 하나님 앞에 옳게 살았습니다. 목회자는 정직하게 살아야 합니다. 양의 특징은 방향 감각이 없습니다. 보호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목자가 있어야 합니다. 목회자의 신뢰성은 말과 행동이 일치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양이 따라 옵니다. 성도의 양심의 표준이 목회자가 될 때 따라옵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자기 자신 앞에 정직해야 합니다. 배웠으면 행해야 정직한 자입니다.

 

정직의 실천

 

11. 정직은 당신 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나타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당신이 등한히 여기기 쉬운 영역들을 아래에 열거하십시오.

사회생활에서 정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빛으로 살아야 합니다.

(1) 로마서 13장 6~7절

세금을 바치는데 정직해야 합니다. 공세와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 할 자 두려워하고 존경할 자 존경을 해야 합니다. 이랜드 회사는 비장부가 없습니다. 세금을 바치는데 정직해야 합니다. 본문 묵상하면 유대인들에게는 그 당시 세금이 로마에 들어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억울한 돈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나라는 유대 나라와 다릅니다. 반드시 정직하게 세금을 바쳐야 합니다. 오늘 세금을 포탈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세금을 포탈하려고 뇌물을 주고받고 하는 현실을 김영삼 대통령이 부조리를 뿌리 뽑으려고 해도 안 되었습니다. 인천 부천 세금 포탈 사건 그리고 어느 부서할 것 없이 뇌물을 주고받고 하는 것들을 피부로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직해야 합니다. 정부에 정직하지 못한 것이 하나님 앞에도 정직하지 못한 것입니다. 주님은 그 당시에 세금이 로마에 들어갔어도 내라고 하였습니다. 국가가 부요해야 합니다. 우리나라 국가는 빚에 허덕이고 있고 개인은 잘 사는 부자가 많습니다. 국세는 모두가 정직해야 합니다.

(2) 골로새서 3장 23~25절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인 일들에 성실하게 일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자기가 하는 일이 예로서, 주부가 하는 일은 가정에서 성실해야 되고 남편은 직장에서 성실해야 하고 학생은 학교에서 공부를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 일도 성실하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정직한 자입니다. 요셉이 그렇게 살았을 때 보디발이 요셉과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정직하게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십니다. 하나님은 나의 정직을 아십니다.

(3) 베드로전서 2장 13~14절

국가의 법을 성실하게 지키면서 생활하는 것이 정직한 것입니다.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해 순복하라고 하였습니다. 믿는 자들이 국법을 어겨 감옥에 가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기초 질서부터 잘 지켜야 합니다. 아무리 바빠도 교통질서를 지켜야 합니다. 여호와의 증인들처럼 국방의무 거부하는 것은 옳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당신에게 필수적인 두 기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은 모두 정당하게 얻어진 것인지 확인하십시오.

•당신의 입에서는 오직 진리만이 나오도록 하십시오. 언제나 반드시 이야기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특별히 의견의 문제에서 그렇습니다. 사랑과 온유와 예의가 당신의 혀를 다스리도록 해야 합니다. 말을 할 때는 진리만을 말하십시오. “선의의” 거짓말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사무엘상 15:10~23절을 읽으십시오.

 

(1) 사울의 말은 정직했습니까?

 

(2) 그는 어떤 면에서 불순종했습니까?

 

(3) 꾸중에 대한 사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4) 그는 자신의 불순종을 어떻게 합리화하려고 했습니까?

 

(5) 비슷한 방법을 당신도 사용해본 적이 있습니까?

 

 

묵상에 대한 설명

(1) 사울의 말은 정직 했습니까? → 정직하지 못했습니다.

(2) 그는 어떤 면에서 불순종했습니까?

말에 정직해야 합니다. 바울은 종교법에도 국가법에도 성실했습니다. 사울은 자기 잘못을 변명하고 남에게 전가시켰습니다. 아말렉에게 가서 모두 죽이라고 한 하나님의 명령을 불순종하고 사무엘에게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의 거짓말은 하나님께 길갈에서 제사를 드리려고 양과 소를 취했다고 했습니다.

(3) 꾸중에 때한 사울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범죄 한 이유에 변명을 했습니다. 백성을 두려워했다고 했습니다. 전쟁에 승리하면 백성들에게 전리품을 나누워 주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 보다 백성을 더 두려워했습니다. 정직하지를 못했습니다. 아담도 여자에게 전가시키는 변명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다 알고 묻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너는 정직하여 보라고 한 것입니다. 사울은 하나님 앞에, 사무엘 앞에 자신에게 부정직하였습니다. 사울은 사무엘상 13장에 망령된 제사를 지냈습니다. 블레셋과 싸움에서 하나님께 길갈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칠일을 기다렸습니다. 사무엘은 오지 않고 백성은 흩어지고 하여 자신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4) 그는 자신의 불순종을 어떻게 합리화하려고 했습니까?

사무엘이 물었을 때 첫째, 백성에게 전가 시켰습니다. 칠일을 기다려도 오지 않고 백성은 흩어졌다고 하였습니다. 백성들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사람을 의식한 죄입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제사하려고 살려두었다고 했습니다. 이미 이 제사는 산제사가 아니라 죽은 제사 이였습니다.

(5) 비슷한 방법을 당신도 사용해 본 적이 있습니까?

전도 작정하여 놓고 전도하지 않는 것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정직한 순종을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이것이 나의 가장 귀중한 것으로 여겨야 합니다. 다윗은 정직한 삶에 초점을 맞추어 놓고 살았습니다. 사울은 정직할 수 있었지만 부정직했습니다. 다윗은 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진실하게 자백을 했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산 것은 평상시에 정직한 기도를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에 있으면 뇌물 때문에 정직을 지키기 힘들기 때문에 다윗은 가장 높은 자리에서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시편 51:10). 실수 했을 때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정직할 때 하나님이 오래 쓰십니다. 돈에, 말에 정직해야 합니다.

 

언어에서의 정직

 

12. 당신이 하는 말은 무엇을 나타냅니까? (마태복음 12:34~35)

말에서도 정직해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거짓말이 나옵니다. 마음속이 정직해야 합니다. 그 마음이 입을 통해서 나오기 때문에 입이 정직해야합니다. 말이 정직해야 그 마음에 채울 수 있습니다. 컵 속에 잉크를 넣으면 잉크가 보입니다. 내 마음이 부정직하면 부정직한 것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정직한 것이 근본 해결책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을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13. 시편 기자는 혀를 어떻게 묘사했습니까? (시편 52:2~4)

여기는 부분적인 방법입니다. 혀를 조심하면서 사용을 해야 합니다. “내 혀가 심한 악을 꾀하여 날카로운 삭도 같이 간사를 행하는도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혀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합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에 있습니다. 혀는 정직보다는 부정직하기가 더욱 쉽습니다. 혀를 잘못 사용하면 칼같이 됩니다. 혀를 잘못 사용하면 다른 사람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근본 해결책은 마음이 정직해야 내 입에서 정직한 말이 나옵니다. “말을 적게 하라 말이 많으면 실수가 많다”고 잠언 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말을 아껴야 합니다. 한꺼번에 다 쏟아 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이끌어 가실 때 일일 양식을 주셨습니다. 한꺼번에 줄 수 있었으나 일일 양식을 주시면서 따라오게 하셨습니다. 말을 조금식해야 합니다. 

“우정이 당신으로 하여금 친구에게 불유쾌한 것을 이야기해도 좋은 것으로 정당화 시켜 준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당신의 대인관계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더 재치 있게 행동하고 예의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 올리버 웬델 홈즈 ~

 

14. 왜 거짓말과 욕설이 그리스도인들과 조화될 수 없습니까? (골로새서 3:8~10)

말에 정직이 필요합니다. 새로운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새 사람으로 지음 받은 사람은 주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주님의 형상을 쫓아가기 위해 말에 정직해야 합니다. 자기 성숙을 위해 부정직을 버려야 합니다. 오순절 우리 지체 가운데 불의 혀 같이 갈라진 것을 보여준 것은 하나님은 거룩한 자를 찾아 쓰시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자신의 지체 중 가장 더러운 것이 혀인 것을 알고 제단 숯불로 입술을 지져달라고 했습니다. 성도는 삶에 정직해야 합니다. 목회자는 더욱 정직한 삶으로 강단에 서야 합니다. 남을 헐뜯고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과 반대의 삶입니다. 말과 생활 속에 그리스도가 나타나기를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정직하게 살 때 주님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15. 생활 속의 부정직이 거짓말을 하게 만들었던 개인적인 경험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설명해 보십시오.

항상 가장 가까운 자에게 거룩한 말을 하지 못하고 심하게 영양가 없는 말하기 쉽습니다. 가까울수록 기름지고 영양가 있는 말을 해야 합니다. 이런 말은 훈련을 해야 합니다. 아내보고 “어~이봐” 이런 말을 사용하지 말아야 합니다. 심한 말을 하면 병에 걸리고 뼈를 마르게 합니다. 가까울수록 좋은 말을 사용하십시오.

 

“거짓말이란, 행동, 태도, 또는 침묵, 고의적인 과장,

진리의 왜곡, 거짓된 인상의 조장 등

모든 종류의 속임수입니다.”

 

16. 다음 구절을 쉬운 말로 써 보십시오.

(1) 에베소서 4장 29절

“더러운 말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듣는 말도 정직한 말을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서로 유익이 됩니다. 덕이 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농담도 좋은 농담은 하되 될 수 있으면 농담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는 아무리 고상한 농담이라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죄가 됩니다.

(2) 골로새서 4장 6절

남에게 즐거운 말만 해야 합니다. 말을 소금 치듯이 해야 합니다. 이 말은 소금은 조미료입니다. 반찬에는 소금이 들어가야 맛을 낼 수 있습니다. 즉 맛있는 말을 하라는 것입니다. 설교는 복음적인 설교를 해야 합니다. 율법적인 설교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더라도 마칠 때는 복음적으로 마쳐야 합니다. 기쁨을 주는 말, 좋은 말을 해야 합니다. 가시가 있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자기 인격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부정직합니다. 복을 비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복의 근원이 됩시다.”라고 서로 인사를 해 보십시오. 말에 훈련이 안되면 실패합니다.

 

17. 위에 있는 구절들을 당신이 알고 있는 어떤 사람과의 관계에 적용 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언제 그렇게 하시겠습니까?

자신의 잘못을 알았으면 한번 고쳐 보십시오. 자신을 정밀하게 점검을 하여 고치십시오. 그리고 그것들을 한번 써보십시오.

•누구에게                                                  

•무엇을                                                    

•언제 

                                                       

요 약

다음 내용에 한두 문장을 첨가해서 본과를 요약하십시오.

정직을 위한 투쟁.

거짓은 갈등을 일으키며 온 전성의 부족을 노출시킵니다.

<보충설명>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는 정직의 투쟁에 훈련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당신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부패하기 때문에 투쟁이 없이는 내 스스로 속아 넘어가고 다른 사람에게도, 사탄에게도 결국 속아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거짓을 버림.

당신은 깨끗한 양심과 흠 없는 삶을 목표로 삼아야만 합니다.

<보충설명> 바울은 매일 매일 삶에서 양심이 깨끗한 삶이되기 위해서 마음으로부터 하나님을 섬기며 순종하는 자가 되기 위한 좋은 본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위를 기우려야 합니다. 그래야 내 자신으로부터, 이웃으로부터, 사탄으로부터 승리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정직의 실천.

하나님은 성경말씀 안에 정직의 수준과 특성을 설명해 놓으셨습니다.

<보충설명> 일반적인 일에서 우선 실시하며 행해야 합니다.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일반적인 것에서도 하나님의 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이 증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정직해야 합니다. 국가의 의무적인 법 앞에서도 정직해야 합니다. 주님도 이 땅에 계실 때 국가의 법을 지켰습니다. 재판 때 종교재판과 국가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몸소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언어에서의 정직.

당신의 말은 당신의 마음을 드러내며 당신의 마음을 표현합니다.

<보충설명> 당신은 새로 지음을 받고 남을 위해 살기 위한 자가 되었습니다. 자신과 남을 위해서 정직한 언어 사용에 가장 기본적인 비결은 먼저 마음을 정직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마음과 행동까지 보시기 때문에 마음으로 음욕을 품으면 간음을 했다고 하셨고 미워하면 살인했다고 하였습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하려면 그 방법은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채워야 합니다. 그래야 더러운 것이 밖으로 밀려 나오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생각, 내 사고방식까지도 바꾸십니다. 다윗, 여호수아는 묵상을 많이 했습니다. 이것이 성결케 되는 비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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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과

 

인격의 연단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현실적인 인간생활에서 면제된 것은 아닙니다. 질병, 슬픔, 죽음과 여러 형태의 고통과 괴로움은 모든 사람이 다 경험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고통이란, 삶의 내면적인 성품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에 대한 약속이 반드시 따르게 됩니다.

 

“곤경, 제약, 훼방과 사별, 손실 등으로 인해 우리가 극도로 맥이 빠지지만 이러한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성장시키기 위해 사용하시는 매개물인 것입니다. 마치 한 유아가 영양을 공급받고 운동함으로써 그의 손발이 발육되는 것처럼 영적인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역경을 통해 강하게 됩니다.”              -죠지 뮬러-

 

제자의 손가락 예화

엄지 - 로드심(주재권)입니다.

순종하는 생활입니다. 모든 손가락을 받치고 있는 것이 엄지입니다. 모든 손가락에 영향을 줍니다. 내 모든 생활에 주님을 주인으로 인정하고 살아야 합니다. 혹 우리는 어느 영역에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지 못하고 있는가? 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 하나님의 주재권이 미치고 있는 곳은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가장 큰 믿음은 주재권에 복종하는 믿음입니다.

검지 - 비전입니다.

제자는 비전이 있어야 합니다. 비전은 첫째, 주님을 닮아야 합니다. 닮으려고 하면 주님을 배우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유용하게 사용되어야 합니다. 제자는 베워야 합니다.

장지 - 인격이 있어야 합니다.

인격은 계속 성장해야 합니다. 손가락 중 가장 잘 드려나는 것이 장지입니다. 우리 삶에 제일 먼저 드러나는 것이 인격입니다. 인격과 인격의 만남에서 제자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제자의 삶은 인격이 성숙해야 합니다. 인격이 성숙하지 않으면 주인의 상에 올라갑니다. 인격은 훈련에 훈련으로 다듬어 집니다.

약지 - 환경입니다.

환경에 따라서 자꾸 훈련을 시켜야 합니다. 환경을 바꾸어주어야 합니다.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환경을 통해서 배웁니다. 약지는 약한 것이 특징입니다. 약지는 변화를 잘 알 수 있습니다. 약지는 성장에 따라 반지가 달라집니다. 약혼반지, 결혼반지 이것을 보고 나의 변화를 보아야 합니다. 성장이 있어야 합니다. 셋방에서 전셋집으로 자기 집으로 성장하듯이 예수를 믿으면 계속 믿음도 인격도 생활도 성장을 해야 합니다. 성장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약지를 통해 나의 성장을 볼 수 있습니다.

소지 - 팀워크입니다.

제자는 함께 하는 삶을 배워야 합니다. 개인플레이는 안 됩니다. 제자는 항상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인격의 성숙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 데까지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통치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적극적인 주재 권에 따르는 삶입니다. 양은 성취의 삶이 아니라 따르는 삶입니다. 통치 면에서 하나님은 나를 환경을 통해 단련시켜 욥처럼 인격을 다듬어 주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나의 인격을 바로 세우시는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통치

 

1. 다음 구절은 하나님의 섭리와 목적에 대해 어떤 사실을 가르쳐 줍니까?

(1) 이사야 45장 5~7절

필요를 위해서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행하십니다. 하나님이 필요하다면 환난도 주고 평강도 주십니다. 시편 23편에 하나님은 선한 목자장이시기 때문에 푸른 초장으로도 물가로도 때로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인도하십니다. 나의 필요를 따라 영혼을 소생시키기 위해 의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절대 주권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한 목적을 따를 때 나의 유익이 됩니다.

(2) 이사야 46장 9~10절

하나님은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일하십니다. 이것은 그 누구도 탓치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역경도 주시고 평강도 주시고 하시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가지시고 다스리시고 통치하신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주시는 분도 여호와시요 취하시는 분도 여호와시라고 하였습니다. 즉 나의 가는 길은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즉 하나님이 정하십니다. 내가 고난 속에서 단련이 되어 나올 때 정금처럼 내 인격이 빛을 발합니다.

 

2. 요셉은 그가 처하였던 어려운 환경과 그러한 어려움 가운데 빠지게 했던 사람들에 대하여 무엇이라 말했습니까? (창세기 50:20)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이기 때문에 전화위복으로 궁극적인 하나님의 통치권을 믿은 요셉이었습니다. 요셉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어주셨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우리의 삶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통치하여 가십니다. 악한 환경도 하나님은 선으로 나의 유익이 되도록 바꾸어 주십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철저한 통치 주권을 믿었습니다. 요셉이 창세기 50장 20절에 말할 때 이복형제들에게 얼마든지 복수 할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믿음으로 살았고 또한 그들을 믿음으로 대하였습니다.

사람은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후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항상 뒤를 돌아봅니다. 둘째, 근심하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항상 주변을 살핍니다. 누가 나를 도와줄 사람이 없는가? 하고 사람을 의지하려는 사람입니다. 셋째, 믿음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우러러 봅니다. 요셉은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절대 주재 권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가야합니다.

 

3. 로마서 8:28절에서 바울이 결론지은 것은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위대한 신앙입니다. 우리가 이런 수준 안에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악인에게로부터 나를 절대적으로 선하게 역사하십니다.

•이 약속은 누구에게 한 것입니까?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 입니다. 이것은 아무에게 나가 아닙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만 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권이 미치는 곳을 말합니다.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후회하지 않고 즉 뒤를 돌아보지 않고 항상 주변을 살피고 근심하지 않는 믿음으로 하나님만 바라보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4. 당신이 경험했던 일 가운데서 그 당시에는 아무런 선을 이룰 것 같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유익한 것으로 판명되었던 일을 한 가지 이야기해 보십시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억장이 무너지는 환경들이 있습니다. 다윗도 작전 참모 아히도벨이 병문안 왔다가 늙은 다윗을 보고 그 아들 압살롬 편에 가담하여 압살롬의 앞잡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권은 다윗에게 선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면 결국 좋은 환경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필요한 것이며,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는 모든 것은 불필요한 것입니다.   -죤 뉴톤-

 

고난의 목적

 

5. 예수님이 왜 고난을 받으셨는지 숙고하십시오. 이사야 53:3~5절을 읽고 고난 받는 하나님의 종 그리스도를 관찰해 보십시오.

(1)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부당하게 고난을 받으셨습니까? (3~5절)

고난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괜히 고난을 받으신 것이 아닙니다. 죄인이 된 우리들을 죄에서 구원을 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대신 담당하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지옥 형벌을 대신 받으셨습니다. 주님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대신 했고, 주님이 상하심은 우리의 죄악을 대신 했고, 주님의 징계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주님이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의 질병이 나음을 얻었고 주님이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가 부요함을 얻었습니다. 주의 죽으심으로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죄에서 고난은 부끄러운 것이지만 주님을 위해 의에서 고난 받는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 있는 것입니다.

(2) 이 고난에 대해 그는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7절)

잠잠히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고난에 대해서 억지로 변명을 하거나 해결을 하려고 하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히 맡겨 버렸습니다. 너무나도 고상한 목적이라 할지라도 입을 열어 쉽게 인간의 방법대로 하지 않고 하나님 뜻대로 하시라고 맡기셨습니다.

(3) 그는 누구를 위해서 이 고난을 참으셨습니까? (8, 10~12절)

더 좋은 결과를 위해 참으셨습니다. 고난 속에서 참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무고히 당하는 것같이 느껴져도 하나님을 바라보고, 여기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알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범사에 주재 권을 인정하고 살 때 말씀이 분명히 지도하여 주십니다.

(4) 그리스도의 고난이 당신에게는 어떻게 연관되어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2:21)

그리스도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십니다. 이 말은 고난 주간에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어 필리핀에서는 고난 주관의 행사로 실제 십자가에 못 박혀 십자가를 지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내 생활면에 실제 주님을 첫 자리에 모시고 즉 우선권을 드려서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말없이 따라가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구원시키고 그 사람의 영적 삶을 위해 나도 고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영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 때 살리는 일을 하게 됩니다.

주님은 고난을 통해 나의 필요를 채워 주시므로 살려 주셨습니다. 그리고 계속 필요를 공급하여 주시고 계십니다.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고 도움을 주기 위해서 교회 장로가 되고 권사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위해 생활면에 근면하고 검소하게 생활하여 건축 헌금하여 교회를 짓고 교육관을 지어 영적 유익을 항상 제공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 중직 자들은 교회에서 자신의 유익을 찾는 자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 힘쓰고 애를 써야 합니다. 이것이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생활입니다. 고난주간에 십자가지고 간다고 주님을 따라가는 삶이 아닙니다.

 

6. 하나님이 이스라엘 자녀들을 시험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1) 신명기 8장 2절

겸손히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 사십년을 시험 하셨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이 광야에 사십년 훈련을 받지 않고 15~25일 안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갔다면 그 땅의 가치에 대해 모를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사십년 동안 훈련을 받고 들어갔기 때문에 가나안 땅의 가치를 알고 첫 농사, 첫 곡식으로 맥추절, 추수절기를 통해 430년 동안 땅이 없이 살다가 하나님이 주신 그 땅에 대한 감사를 했습니다. 결국 그 고난 속에서 그 가치를 알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환경을 통해서 깨닫고 알게 됩니다. 고난 없이 들어갔으면 하나님이 주신 땅이라는 믿음도 없이 우연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감사 생활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쉽게 얻는 자와 어렵게 얻는 자의 차이는 감사하고 귀하게 여기는 것과 감사 할 줄도 모르고 귀한 줄 모르는 차이가 있습니다. 은혜와 은사도 힘들게, 어렵게 받은 자는 귀하게 여기고 감사합니다.

(2) 신명기 8장 3절

삶의 가치관을 바꾸어 놓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고 배우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의 기본적인 것이 먹고 입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농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모두 주셨습니다. 만나를 주셨고 메추라기 고기도 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참 가치를 두고 살라는 훈련이셨습니다. 그들은 농사하지 않아도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물질보다 하나님이 더 귀하다는 사실을 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그 의미를 두라는 것입니다. 물질에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을 확실하게 알라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라고 광양에서 시험을 통해 배우도록 하셨습니다. 고난을 통과하고 나면 많은 것을 배우게 됩니다. 내 인생의 변화와 가치관도 하늘에 두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십니다. 그 일속에 우리들의 고난도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열심히 일을 해야 합니다. 나의 일에 목적과 목표는 전도와 가르치는 것입니다.

(3) 신명기 8장 16절

시험의 목적은 복을 주려 하심입니다. 고난을 통과 했을 때 복이 옵니다. 산골짝의 물은 아름다운 소리를 냅니다. 우리는 계속 영적으로 부딪칠 때 하나님의 신령한 사람으로 바뀌어 집니다. 내 인격이 다듬어 집니다. 다윗은 사울의 육적 부딪침을 영적으로 부딪쳐 주었을 때 시편의 아름다움, 영적인 신령한 많은 노래를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부딪침이 없는 큰 강물은 조용히 아무 소리 없이 흐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영적인 복을 주십니다. 그리고 신명기 8장 17~18절의 말씀처럼 내 힘으로 내 능으로 재물을 모았다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이 주심에 대해 영력이 알게 됩니다. 다윗은 고난이 내게 유익이라고 하였습니다(시편 119:71). 하나님은 복을 주시고 강하게 키워 성장시킵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능력을 주십니다. 고난 속에서 힘을 쓰고 기도하고 배우고 몸부림을 치고 하다보면 내 모서리가 깎아지고 내 인격이 다듬어 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십니다.

하나님은 연단 속에서 귀하게 다듬어 주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사역이십니다. 하나님은 연단 속에서 귀하게 다듬어서 사용하십니다. 내가 다듬어 졌을 때 유라굴라 같은 광풍 속에서도 소망이 없는 그들에게 선실에 누어 여러 날 굶어 먹지도 못하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그들에게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의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내가 섬긴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게 안심하라 배의 모든 사람을 다 네게 주셨다고 하면서 내게 말씀한 그대로 되리라고 믿는 다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27장). 고난 속에서도 바울처럼 위를 바라볼 때 하나님을 믿을 때 찬송과 감사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좋은 믿음입니다. 결국 믿음이 중요합니다.

 

“어려움이란 - 우리 자신보다는 우리를 더 잘 아시며 우리를 더욱 사랑하시는 최상의 보호자이시며 입법자이신 분이 우리 위에 세워주신 - 엄격한 교사입니다. 우리와 맞붙어 싸우는 자가 우리의 기력을 강건케 하며 우리의 기술을 예리하게 만듭니다. -에드먼드 버크-

 

7. 고난의 또 다른 목적은 무엇입니까?

(1) 요한복음 15장 2절

과실을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과수원에 가보면 과원지기가 전지합니다. 나무 입장에서 아프지만 싹둑 싹둑 잘라 버립니다. 결국 그 나무에 과실을 많이 맺게 하기 위해서 필요 없는 것을 자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필요 없는 것을 잘라내는 역할을 합니다. 내 인격 속에도 동일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는 불필요 한 것을 잘라 내십니다. 전지할 때 내게 가장 가까이 계십니다. 그래서 어려움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좋은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고난을 원망이나 불평하지 말고 감사로 대처하는 지혜 자가 되십시오.

(2) 히브리서 12장 6~7절

아들로 대우하게 하기 위해서 즉 유익하게 하게 하기 위해서 고난을 허락하십니다. “아바 아버지”라는 말에 “아바”는 아람어로 “참 나의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참 나의 아버지이기 때문에 나에게 고난을 주셔서 감당하게 하십니다. 내가 잘못하여 매를 맞을 때 그때는 아프지만 그것은 나의 나쁜 점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결국 나를 바르게 세워주시는 부모님을 존경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징계는 사생자가 아닌 증거가 됩니다. 그리고 그 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매를 드십니다. 아픔이 있지만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삽니다.

(3) 베드로전서 1장 6~7절

주님이 오실 때 즉 마지막 때 존경과 영광을 받기 위해서, 다른 말로하면 면류관이 있습니다. 고난을 벗는 자는 결코 영광이 없습니다. 고난이 있는 자만이 영광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총을 보게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뒤를 돌아보았습니다. 즉 후회하였습니다. 근심하므로 주위를 살폈습니다. 즉 누가, 형제가, 친구가 나를 도와주지 아니한가 하고 말입니다. 사람에게 기대한 것입니다. 믿음으로 위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고난 속에서 하나님만 바라보게 하십니다. 광야에 던져 놓았을 때 나의 참 가치관이 하나님을 발견했을 때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게 하신 그 뜻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8. 그리스도를 위하여 고난을 당할 때 우리는 왜 놀라지 말아야 합니까? (베드로전서 4:12~13)

주님의 영광과 고난에 참예하기 위하여 고난을 줍니다. 모세는 히브리서 11장 25~26절에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기 위해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즉 애급의 영광을 버리고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고난을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 했습니다. 이것은 참 가치관에 대하여 알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먼저 가치관을 바꾸어 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참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 때 생활에 변화가 옵니다. 참고적으로 로마서 8장 17절에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後嗣)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苦難)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위한 고난을 특권으로 부여 받아야 합니다. 구약에 광야 생활의 고난은 그들이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이기 때문에 사십년 고난을 받았습니다. 반면에 애급에서 추격하여 온 군대는 홍해 바다에 수장시켜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특권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을 때 그 고난 속에서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즐거움이 될 때 고난을 삼켜 버릴 수 있습니다. 현재의 고난을 특권으로 믿어야 합니다. 고난 뒤에는 주님이 부활의 영광을 얻었듯이 더 좋은 것이 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바울의 위대한 것은 바울의 소원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빌립보서 3:10).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까지 참예하는 그 수준까지 동참하기를 소원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도 주님과 똑같이 가서 주님의 부활에까지 동참하기를 소원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꽉 채우기를 원했습니다.

 

9. 요한복음 15:18~21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겨 보십시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세상의 태도에 관하여 무엇을 보여줍니까?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지 않고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는 증거입니다. 세상과 반대되기 때문에 고난을 당합니다. 내가 양으로 살지 않고 이리로 살려고 하면 고난이 없습니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고난이 있습니다. 내가 세상과 짝하면 고난이 없습니다. 영적으로 살려고 하기 때문에 고난이 있는 것입니다. 고난은 항상 가까운데서 옵니다. 모세는 그 형과 누이가 모세의 주권에 도전하였습니다. 요셉도 역시 가까운 형님들로부터 고난이 왔습니다. 가장 가까운 자가 배신을 하고 배반을 당해도 그리스도인들은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하늘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장 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敬虔)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핍박은 두 가지에서 있습니다. “모나게 사는 자”와 “경건하게 사는 자”에게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후자입니다. 고난을 받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고난을 처리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야고보서 1장 2절에 “고난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고난은 색깔입니다. 하나님은 나의 인격을 다듬으시고자 여러 가지의 색깔을 사용하십니다. 그래서 나를 위대한 작품으로 만드시길 원해, 작업을 고난을 통해 일하십니다. 고난은 그리스도 안에 생활하는 증거가 됩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대비를 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자부심입니다.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갑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세울 때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바울은 해산하는 고통을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냥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왜 이러한 반응을 얘기할 수 있습니까?

우리들의 반응은 고난을 싫어합니다. 항상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만 원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목자는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알고 좋은 자세로 대처해야 승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생활을 하나님의 특권으로 여기지 못하고 그만 좋지 않은 반응으로 대처했기 때문에 실패하고 출애굽 1세 중에는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승리의 맛을 보았습니다.

 

고난에 대한 당신의 반응

 

10. 우리는 어떤 모양의 고난을 얘기할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 6:22~23)

선지자들이 오히려 고난을 기쁘게 여겼습니다. 성경에 믿음의 선진들이 모두 기쁘게 통과를 했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고난을 멀리하고 싶어 합니다. 고난을 미워하고 욕을 합니다. 고난을 당하는 자를 보면 판단과 정죄를 잘하여 버립니다. 얼마나 죄를 지었으면 하고 평가를 해버립니다. 마치 욥의 세 친구들처럼 말입니다. 우리는 고난을 기뻐하고 감사하며 날뛰듯이 즐거워 할 수 있는 수준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주님은 나의 수준을 몰라서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과정을 통과한 후에 받게 될 축복을 알기 때문에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내가 알고 고난을 기뻐하고 뛰놀며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대학 시험을 준비하는 수험생들은 그 시험을 잘 대처하되 이 과정을 통과하여 대학가게 될 것을 기뻐하면서 공부하면 잘 됩니다. 바울은 현재의 고난을 기쁘게 대처한 것은, 최선을 다해 달려 갈 수 있었던 것은 받을 면류관을 기뻐했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 원망하던 엘리야는 성질이 대단히 급했습니다. 그래서 로뎀나무 아래서 죽기를 구했습니다. 요나는 더 심한 사람 이였습니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요나서 4장 9절에 “성내어 죽기까지 할지라도 합당하다고 하나님께 대들었습니다.”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합니까?

구원을 받은 자의 특권으로 여기는 믿음의 사람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기쁘게 잘 통과해야 합니다.

 

11. 야고보서 1:2~4절을 살펴보십시오. 여러 가지 시련을 받을 때 우리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합니까?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수준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고난이 오면 걱정부터 합니다. 우리는 잘 참고 인내해야 합니다. 그러면 웃고 기쁘게 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때가 왔다는 것을 알고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우리는 원망부터 해놓고 보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고난 속에서 대처하는 것이 나의 영적 수준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하였습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훈련에 의해서 준비된 상태”, “준비된 마음”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우리들의 인격을 다듬으십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욥기서 23장 10절의 욥의 고백을 볼 수 있습니다. “단련 하신 후에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내가 잘 되는 것, 편한 것 못 보신다.”, “하나님은 나에게 감정이 많으신가 보다” 이런 태도를 취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고난에 대하는 나의 태도가 바로 내 인격입니다. 평상시에는 남에게 잘 대하여 주는 것은 하나의 기술에 지나지 않습니다. 참 인격이 아닙니다. 특히 정치인들 선거 때의 모습입니다. 고난 속에서 나의 참 모습을 찾아야 합니다.

 

“어려운 문제를 당하고 있습니까? 좋은 일입니다! 당신의 삶 가운데서, 또는 역사 속에 있는 어떤 인물의 삶 가운데서 그 개인이 어떤 어려운 문제에도 부딪치지 않고 어떤 일을 실제적으로 성취한 실례를 단 하나라도 알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W. 클레멘트 스톤-

 

12. 에베소서 5:20절과 데살로니가전서 5:18절을 읽으십시오.

(1) 하나님은 우리가 모든 상황에 어떤 반응을 보이기를 원하십니까?

범사에 감사하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을 당했을 때 한심스럽게 생각하거나 불편하게 생각하면서 고난을 받을 때 하나님 앞에 불평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나의 인격입니다. 원망과 불평을 하는 그것이 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이것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 앞에 불평을 토하여 화를 내고 내가 죽기까지 합당하다고 대어든 그것이 그의 인격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범사에 감사하는 그런 인격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환경을 통해 항상 첵킹을 하고 계십니다. 요셉은 고난 속에서도 범사에 감사 했습니다. 범사에 내가 감사 하려고하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 드리고 믿어야 합니다.

예로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급에서 해방과 홍해 바다를 건너는 일과 광야의 생활은 모두 하나님의 섭리였습니다. 다윗도 푸른 초장이나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 드리면서 감사를 했습니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대부분 하나님의 섭리를 볼 줄 모릅니다. 이것이 그 신앙의 수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재 환경의 고난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을 때 범사에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2) 이러한 반응은 왜 중요합니까?

고난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고 하신 그 의미는 하나님의 뜻을 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많은 고난 속에서 주님의 뜻을 보았던 것입니다. 다니엘도 포로 생활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보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려고 힘을 썼습니다. 성도는 뜻으로 뭉쳐야 합니다. 뜻으로 뭉친 교회가 강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는 생활하는 자게에 하나님은 놀라운 복을 주십니다.

 

 

그림은 고난에 대처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내가 반응을 긍정적으로 받아드리면 승리자가 됩니다. 그러나 부정적으로 대처하면 패배하게 됩니다. 문제점에 대한 반응은 그 사람의 성숙의 수준을 결정짓게 하여 줍니다. 모든 위기는 승리 또는 패배를 위한 기회입니다. 예로서, 돈에 고난을 많이 받을 때 부정적으로 대하면 인색하여 집니다. 고아원 아이들이 긍정적인 인격으로 성장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고난 속에서 매사에 사물을 부정적으로 보면 성품이 좋지 않아 집니다. 그것이 인격으로 형성되다 보면 막가파가와 같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들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라다보니 거칠고 사납게 되었습니다. 성도 중에도 순종하지 않고 따지는 자는 자라는 성장 과정에 반드시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라도 고난을 승리로 만든다는 태도에서 고난을 긍정적으로 감사하게 받는가? 아니면 부정적으로 불평하는 자세로 받느냐에 결정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 고난을 긍정적으로 감사하게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고난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광야에 12지파가 가나안 땅을 40일 관찰을 하고 돌아 왔을 때 같은 환경에서 보고 관찰하고 돌아 왔지만 보고하는 내용은 크게 두 팀으로 나누어 졌습니다. 10명은 환경, 현실 그대로 보고 부정으로 판단하고 부정적으로 말하였습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습니다. 열 지파들은 현재를 본 것입니다. 즉 환경을 보았습니다. 실제적인 문제가 크고 작은 것이라도 하나님의 뜻을 바라 볼 때 감사 할 수 있고 내 인격이 긍정적인 자로서 성장 하게 됩니다. 요셉의 고난 속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었습니다. 감옥에서 떡 굽는 관원장과 술 맡은 관원장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와 하나님의 깊으신 뜻이 있었습니다. 신앙이 미성숙한 자는 고난 속에서 이런 하나님이 뜻을 보지를 못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그 현재 고난 속에서 영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는 성숙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행복과 모든 완전함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최단 코스의 길을 당신에게 이야기하려고 한다면, 그는 당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을 당신 자신의 습관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해야만 합니다.”

-윌리암 로어-

 

문제점에 대한 반응은 그 사람의 성숙의 수준을 결정짓습니다.

모든 위기는 승리 또는 패배를 위한 기회입니다.

 

13. 당신의 생활 가운데서 결코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할 수 없었던 어떤 환경이 있었는지 주의 깊게 생각해 보십시오.

현재 환경에서 교회가 부흥이 안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 고난 속에 자기를 개발하다가 보면 하나님이 성장 시켜 주십니다. 개발 했을 때 하나님은 능히 감당할 수 있게 하십니다. 쉽게 내가 부해지고 교회가 성장하면 축복으로 좋아할지 모르지만 자기 개발이 없기 때문에 어느 날 갑자기 쓰러져 버립니다. 큰 교회가 바로 그런 예입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라 볼 수가 있어야 합니다. 고난 속에서 자기 성장이 옵니다. 즉 자기 개발이 옵니다. 그러므로 고난 속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향하신 뜻이 분명히 있습니다. 우리는 성숙을 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감당할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급 궁전에서 40년 광야에서 40년 훈련 후 성장 했을 때 민족의 지도자로 사용하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그냥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1) 그것은 무엇입니까?

오래된 중병이라고 한다면 그 약속이 희미합니다. 즉 확신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사가 없고 믿음이 없어집니다.

(2) 그것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기도 응답의 약속이 희미하져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힘이 없어집니다. 하나님의 응답의 약속을 의심하고 감사치 못하는 그것이 이유가 됩니다.

(3) 지금 그것에 대하여 무엇을 해야만 합니까?

주님의 응답의 약속에 대해 회복시키기 위하여 말씀을 깊이 묵상하고 질병이 오래 되었더라도 하나님의 응답의 약속을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4) 이러한 상황이 당신의 성품을 어떻게 계발시키고 있습니까?

인내를 계발하고 범사에 감사로 그 인격을 변화 시켜놓아야 합니다. 고난은 내 의지로 당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다윗은 주님의 약속의 말씀으로 대처 하여서 그 고난을 승리로 장식을 하였습니다. 자기감정으로는 안 됩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빌립보서 1:12~21절을 읽으십시오.

 

(1) 바울은 어떻게 고난을 당하였습니까?

 

(2) 그의 태도는 어떠하였습니까?

 

(3) 그가 고난 받은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묵상에 대한 설명

(1)바울이 어떻게 고난을 당하였습니까?

복음을 전파하다가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바울은 감옥의 환경에서도 기뻐하고 감사했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받으면 지겹게 생각하고 또~라고 불평을 토해 놓습니다. 우리는 고난을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성장도 오고 성장하지 못하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내 모습이 성숙한 자인가 미성숙한 자인가 나타납니다.

(2) 그의 태도는 어떠하였습니까?

바울은 복음 전파하다가 매인 몸 즉 감옥에 갇힌 것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고 했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됨을 감사하고 기뻐하면서 오히려 밖에 있는 성도들에게 감사하고 기뻐하라고 권면을 하였습니다. 성령이 충만하면 그 고난 속에서 감사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면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실제 그 여러 고난에서 기뻐하고 감사 했습니다.

(3) 그가 고난 받은 결과는 무엇이었습니까?

결과는 반드시 있습니다. 복음이 더 전파 잘 되었습니다. 오히려 더 큰 기여를 하게 된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그 사실로 하나님의 뜻은 복음을 전파하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했습니다. 간수장이도 바울 앞에 무릎을 꿇고 구원에 대하여 질문을 할 정도 이였습니다. 결국 엄청난 변화를 보여 주었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감옥에 들어가서 불평을 토했더라면 이런 하나님의 역사가 없었을 것입니다. 범사에 그 고난 속에 기뻐하고 감사 했을 때 많은 성도들에게 믿음을 굳게 하고 은혜가 넘치게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현재의 모든 고난을 바울을 지켜봄으로 잘 이겨 내었습니다. 바울은 결국 좋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했을 때 믿음으로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보지 못하고 세속적으로 대처하면 나쁜 영향을 받게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나쁜 영향을 줍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알게 될 때 감사하고 기뻐하며 인내할 때 내 인격도 다듬어져서 주님을 닮게 되어 은혜를 계속 공급받게 되고 좋은 영향을 주님께서 끼칠 수 있도록 해 주십니다.

14. 다음 사람들은 고난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보여 주었습니까?

(1) 욥 (욥기 1:20~22)

욥의 태도는 그 고난을 찬송하고 경배를 했습니다. 자식들이 생일잔치에 모였다가 대풍으로 하루아침에 집이 무너져 압사 당했습니다. 그 많은 재산 모두 도둑을 맞고 잃게 되었지만 하나님께 경배하였습니다. 그 고난 속에 이런 것들이 귀중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이것을 하나님이 주신 사실도 알게 되었고 하나님이 주재자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신자도 주님이시요 취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심을 알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나는 이런 고난 속에 하나님을 찬송할 수 있는 자로 성장을 했나 살펴보십시오. 

(2) 사도들 (사도행전 5:40~41)

사도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능욕을 받는 일에 합당히 여기고 기뻐했습니다. 전도자로서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써 위대한 자부심과 긍지심에서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참 기쁨은 고난 속에서 참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될 때 반드시 그 고난 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납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보고 기뻐하고 감사를 한 적이 있는가? 한번 점검을 하여 보십시오. 이제는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고 감사하는 성숙한 사람이 되십시오. 고난 속에서 감사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것은 아직도 미성숙한 자입니다.

(3) 스데반 (사도행전 7:59~60)

스데반 집사는 자기를 핍박하고 돌을 던지는 자를 용서하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고 주님처럼 기도를 했습니다. 그 열매로 사울이 바울로 변하여 주를 위해 헌신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 집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이런 일은 성령 충만했을 때 그 고난을 감사히 능히 감당할 수 있습니다.

(4) 바울 (로마서 8:18)

장래의 영광을 위해서 현재의 고난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 했습니다. 앞으로 내가 받을 영광을 고난 속에서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다윗도 그러했습니다. 후회 하는 자는 항상 뒤를 돌아봅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가 믿음의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주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까지 닮기를 바랬습니다. 우리는 그 고난 속에서 실제로 주님을 닮고 있는 가 점검을 하여 보십시오.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생각하십시오. 주님을 바라 볼 때 상처를 받지 않고 평안함이 있습니다. 고난 속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로 바꾸어 보십시오. 우리는 지금까지 실제로 감사한 일이 있는가? 하나님의 축복 속에 살면서도 불평하고 원망하고 상대적인 비교를 통해 빈곤 속에서 감사를 잃고 산 것은 아닌가? 점검하여 살펴보십시오.

 

15. 고난 중에 드러내기 쉬운 그릇된 반응은 무엇이며 또 무엇이 그것을 그릇되게 합니까?

(1) 시편 106장 13~15절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고난을 받을 때 욕심이 생기고 정욕이 생깁니다. 이것을 영적으로 해결하지 않고 육적으로 해결하려고 하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희미하여져 갑니다. 민수기에 보면 정욕을 위해 고기도. 마늘도 여러 가지를 구했습니다. 하나님은 주시기는 주셨는데 그들의 영혼이 파리해 갔다고 하였습니다(민수기 11:34)

(2) 로마서 12장 17~19절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걸 잘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기지 못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갚으려고 하다 보니 손에 피를 무치게 됨으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자기감정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대부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맡기지 않게 됩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고 용서하고 용납까지 하라고했습니다. 하나님께 맡겨 버리고 나는 잊어 버려야 합니다.

(3) 히브리서 12장 15절

쓴 뿌리를 내리게 하는 태도 버려야 합니다. 즉 교회에서 구역 모임에서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게 됩니다. 교회에 쓴 뿌리를 내리게 하는 것을 흔히들 잘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불평하고 원망하면 다른 사람에게 나쁜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이것이 쓴 뿌리를 내리게 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고난 중에 쓴 뿌리를 내리게 하려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주의를 해야 합니다. 이것은 성숙하지 못하여서입니다. 감사하는 태도가 가장 좋은 태도입니다. 감사하는 자가 되십시오.

 

고난의 결과

 

16. 로마서 5:3~5절을 읽으십시오. 고난을 통해서 야기될 수 있는 결과는 무엇입니까?

환난 중에 우리가 기뻐하는 것은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이 이루어집니다. 내가 고난이 없으면 내 안에 인내가 생기지 않습니다. 즉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어집니다. 같은 환경에서 고난을 대하는 자세에 따라 소망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합니다. 우리는 긍정적으로 대처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10지파가 바로 부정적으로 대처했습니다. 고난 속에서 우리가 청결할 수 있고 깨끗하여지고 순수하여 집니다. 하나님을 볼 수 있는 그 정도까지 변화될 수 있는 것이 바로 고난 속에서 오는 복입니다. 

 

17. 하나님의 사랑의 훈련이 당신 안에 무엇을 이루어 놓을 수 있습니까? (히브리서 12:10~11)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하게 됩니다.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거룩에 참여하면 세상에 있을 동안에 내 성품에 나타나는 것마저도 거룩으로 나타납니다. 즉 상태 변화가 나타납니다. 히브리서 10장 10절에 말하는 위치적인 변화입니다. 고난 속에서 얻어지는 내 마음 상태에서 거룩케 됩니다. 가장 아름다운 인격, 의와 평강의 인격이 균형 잡힌 인격입니다. 대부분은 그중 한 가지만 가지기가 쉽습니다. 다른 사람과 평강은 있는데 의가 없습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이 화목과 평강을 맺는 것은 아름다운 인격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고난 속에서 이렇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럼으로 현재의 고난을 감사로, 기쁨으로 대처하십시오.

 

18. 고린도후서 1:3~4절은 고난의 유익에 대하여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고난을 통과 한자는 다른 사람을 위로 하게 만듭니다. 고난의 능력을 통하여 다른 사람을 위로 할 수 있도록 사용하시기 위해서 고난을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들에게 넘침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모든 환난 받는 것도 너희의 위로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의 고난을 동일시하지 못하면 공감대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내가 고난을 통과 하지 않으면 그 대화는 피상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껍데기만 되기 때문에 진정한 위로를 줄 수 없습니다. 예로서 오래토록 집을 장만하지 못하다가 집을 구했을 때 전세를 주거나 월세를 줄 때 싸게 주는 그것이 공감하고 그 고난을 통해 그 사람에게 위로를 줄 수가 있습니다. 옛날 임금이 궁전밖에 행차하던 중 백성들의 얼굴이 너무 야위어서 신하에게 왜 그렇게 되었느냐? 고 물었습니다. 그 신하는 죽을 먹어서 그렇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임금은 밥을 먹으면 되는데 왜 죽을 먹느냐? 고 하였습니다. 임금은 고난 속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고난을 이해하지 못해 백성들에게 위로하여 줄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가 있습니다. 베이컨의 말에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못한 자와 인생을 논 하지마라고 했습니다. 내가 고난에 동참하여 보지 못했으면 참된 위로자가 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고난을 통해 참된 위로자로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참된 위로자가 될 때 성숙한자이고 건강한 그리스도인입니다. 요셉, 다윗, 다니엘 이들은 끝까지 위로하여 주는 위로자가 되었습니다.

(1) 지금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쓰십시오.

(2) 당신은 이 사람을 격려하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고난당하는 자들에게 어떻게 위로 할 것인가? 써보고 대처 해보십시오. 바나바는 위로 자였습니다.

 

19. 역경이 당신 안에 무엇을 이루어 놓을 수 있습니까? (시편 119:67, 71)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율례를 생활 속에서 배웠습니다. 순종으로 주의 율례를 즉 하나님의 계명을 배운 것입니다. 지식으로 배우는 것이 아니라 순종을 통해 배운 것입니다. 고난이 없을 때 지식으로 알았던 것은 내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 순종으로 배움으로 말씀이 자기 자신의 것이 되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실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예로서, 십일조 하지 않는 자가 실제 많은 손해를 통해 경험을 하고 십일조하게 되는 것은 실제 고난 속에서 배우게 된 것입니다. 지식적으로 배워서는 남들보다 좋은 믿음으로 볼 수 없습니다. 고난 속에서 배워야 그 믿음이 성장한 믿음입니다.

•이런 일이 어떻게 해서 일어난다고 생각합니까?

지식적으로 배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체험을 통해 배우는 것이 신앙입니다. 욥이나 다윗은 고난을 통해 눈으로 하나님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고난 속에서 믿음의 눈으로 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고난 속에서 준비 시키시고 성장 시키십니다. 우리가 고난의 환경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환경을 통해 훌륭한 인격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업적 위주로 봉사나 목회하지 말아야 합니다. 양육을 위주로 해야 합니다. 강권하여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은 인격에 변화를 시키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이것은 양육에서 오는 것입니다. 주님과 바울은 전도하다가 죽었는데 요즈음의 목회자들은 교회 건물을 짓다가 죽습니다. 고난을 통해 규례를 배우고 율례를 배우는 실제적으로 눈으로 보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고난 속에 내 인격을 다듬으시는 것이 하나님이 뜻입니다.

묵상을 위한 질문

 

시편 78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국가를 다루신 역사를 상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주 이스라엘의 유익을 위한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궁극적인 섭리로 이런 것들을 보지 않고 오히려 그들 자신의 근시안적인 꿈만 가지고 보았습니다.

 

시편 78:11~18절에서 하나님이 그의 자녀들의 행복을 위하여 행하신 점들을 열거해 보십시오.

                                                         

                                                         

                                                         

 

 

묵상에 대한 설명

홍해를 갈라놓고 길을 내시고 그 길을 건너가게 하셨고 사람이 가지 아니한 광야 길로 가게 하시고 반석을 쪼개어서 물이 시냇물이 되게 하시고 다른 사람들이 체험을 하지 못한 그런 은혜를 하나님의 능력으로 고난을 통해 체험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였더라면 광야의 여러 가지 은혜와 기적의 체험인 반석에서 물이 나오고 만나와 메추라기 고기, 구름 기둥과 불기둥 홍해 바다와 여리고성, 요단강 체험을 전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남들이 가지 않는 광야로 인도하시고 그 고난을 통해 이런 많은 체험을 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반드시 그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와 축복이 예비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을 훈련시키사 피를 끓게 하시고 솜씨를 빛나게 하고 하실 때, 하나님이 한 사람을 지으사 지고한 일을 맡기고자 하실 때, 그가 온 힘을 다해서 그처럼 위대하고 담대한 사람을 지으사 온 세상으로 놀라게 하고, 하실 때 보라 그의 방법을, 보라 그의 솜씨를!, 그가 친히 선택하신 사람을 어찌도 그리 사정없이 완전케 하시는지!, 고통 하는 마음이 부르짖으며 탄원의 두 손을 들어 올리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은 망치로 두드리시고 상하게 하시며 강한 풀무로 붙어서 오직 자신만이 이해하시는 시련의 진흙덩이로 바꾸시는도다! 하나님이 그의 유익을 떠맡으실 때 그를 구부리시거나 아주 꺾지 않으시며 자신이 택하신 자를 사용하시고 모든 목적으로 그를 융합케 하심이여, 자신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모든 행위로 그를 권고하시나니 하나님은 친히 하시는 일을 알고 계시도다!”    -J. 오스왈드 샌더스-

 

요 약

다음 내용에 한두 문장을 첨가해서 본과를 요약하십시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

하나님은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지배하십니다.

고난의 목적.

당신은 고난당할 것을 예기해야 하며, 또한 시련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배워야만 합니다.

고난에 대한 당신의 반응.

하나님은 당신이 모든 상황에서 기쁨과 감사를 나타내기를 원하십니다.

고난의 결과.

고난이 당신의 삶에 훌륭한 성품을 이루어 줍니다.

<보충설명> 인격의 연단으로 요셉은 자기가 당하는 모든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심의 섭리가 있었음을 믿었기 때문에 결국 승리를 했습니다. 당신도 바울처럼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믿고 감사해야 합니다. 삶의 가치를 발견하고 열매를 맺고 마침내 복을 얻게 될 뿐만 아니라 주님이 오실 때 상급과 영광도 받게 될 것을 확신하십시오. 고난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큰 목적이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의 배후에도 우리의 구원의 큰 목적이 있음을 잊으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고난에 대한 그 반응 속에 승리도 실패도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욥이나 신약의 사도들이나 바울이나 스데반을 통해서 고난의 올바르게 반응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욕심이나 쓴 뿌리를 내는 것은 경계해야 합니다. 인내와 연단과 소망을 이루게 하며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게 합니다. 주의 율례를 배워 변화된 삶을 살면서 다른 사람을 격려 하고 위로하는 성숙한 제자의 삶이 고난이 주는 위대한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로 자라감에 있어서……,

제5권 믿음의 기초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길 시리이즈의 다음 책입니다. 튼튼한 기초를 쌓는 일은 건축물의 필수조건입니다. 비록 기초가 눈에 뜨이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그 위에 세워질 구조물에 대한 기반을 마련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도 튼튼한 기초가 중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 연구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당신과 그와의 교제에 대하여 주의를 집중하는 이유입니다. “이 닦아 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 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고린도전서 3:11). 당신이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모습으로 성장해 감에 따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당신의 믿음의 기초에 관한 지식과 경험을 깊게 해 주는 성경의 위대한 진리들이 발견됩니다. 제5권 믿음의 기초에서 당신은 이러한 위대한 진리들을 살펴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누구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의 원리

•성 령

•영적인 전쟁

•그리스도의 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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