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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그리고 지금' 북콘서트

작성자이광영|작성시간19.07.11|조회수78 목록 댓글 0

지난 7월 4일(목) 오후 2시 프레스센터 프레스클럽에서 '그때 그리고 지금'이란 이름으로 북콘서트를 가졌습니다. 우리나라 원자력 발전에 기여한 원로 과학기술인과 정책담당자 그리고 언론인 17인의 이름으로 발간한 책입니다. 이곳에 수록된 '팔십년을 사는 동안'주제의 글입니다. 감사합니다.






팔십 년을 사는 동안

이 광 영

하늘을 날았다. 몸이 붕 떠 나지막한 우리 집 초가지붕을 넘어 들과 산을 신나게 날았다. 꿈만 꾸면 예수님 손을 잡고 하늘을 나는 것이 일상이었다. 어머니는 키 크는 꿈이라 했다. 일제시대의 국민학교(현 초등학교) 1학년, 여덟 살 때의 일이다. 나는 그 무렵 친구 따라 교회를 열심히 다녔다. 대전 대흥동에 있는 감리교회였다.

저녁 예배는 주로 성경 속 인물을 동화 형식으로 들려주는 시간이었다. 여전도사님이 손짓 발짓 온 몸을 던져 들려주시던 다윗 왕이 골리앗을 돌팔매로 쓰러뜨리는 장면은 지금도 내 기억에 생생하다. 어렸을 때 나는 꽤 영리했던 것 같다.

네 살 때, 두 살 터울인 내 여동생이 잠에서 깨어나 울자 기저귀를 채운 체 손잡고 어머니를 찾으러 나갔다. 어머니가 오실 것으로 생각한 논길을 따라 조심조심 뒤뚱뒤뚱 손잡고 가다 물웅덩이를 만났다. 논두렁에 난 작은 물길을 건너뛰어야 하는데 그 아래 웅덩이가 보였다. 너무 무서웠다. ‘빠지면 어떻게 하지하는 생각으로 고민고민하고 있던 차에 어머니가 오셨다. 어찌나 좋았던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하다.

여섯 살 되던 해 늦여름 오후 다섯 시쯤 어머니가 나를 부르셨다. 나는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솔가지에 불을 붙여 나무에 지폈다. 그리고 삶은 통보리쌀에 쌀을 조금 섞어 가마솥에 넣고 물을 손등에 찰 듯 말 듯 붓고 뚜껑을 덮었다. 옆의 양은솥엔 물에 불려놓은 미역을 건져 들기름을 넣고 볶은 후 국을 끓여 밥과 함께 어머니에게 갖다드렸다. 그리고 2킬로미터 밤길을 걸어 큰이모님을 모셔왔다. 두 번째 여동생 산바라지를 한 것이다. 나는 이 일로 두고두고 칭찬을 받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충북 옥천 아래 이원(伊院)에서 심천으로 가는 금강변 한 외딴 부락 산등성이에 있는 외갓집이다.

나는 일곱 살부터 여덟 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외갓집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두 살 터울로 두 딸을 낳아 기르게 되어 나를 외갓집에 맡긴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원동(院洞)이란 고을에서 큰 부자였다. 앞 뒷산을 비롯해 심천으로 흐르는 금강 언저리에 기름진 논과 밭을 많이 소유하고 있었다.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 뒷동산을 배경으로 본채와 사랑채가 있었고 양 옆으로 넓다란 광을 비롯해 디딜방아와 연자방아 그리고 두 채의 소 외양간이 있었다. 가을 추수철 외할머니와 이모들이 디딜방아를 찧고 소가 끄는 연자방아를 돌릴 때 나는 주위를 맴돌며 놀았다. 본채 뒤는 동산과 맞닿은 울창한 대나무 숲이 큰 감나무를 에워싸 울타리를 이루었다. 대나무 숲 뒤로는 탱자나무가 외곽을 둘러쌌다. 넓다란 장독대가 있었고 주위엔 채송화와 봉선화 등 각종 꽃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피었다. 이모님은 나의 손톱에 불그스레한 봉선화 물을 들여주었다.

본채 앞으로 넓다란 타작마당이 자리잡고 있었다. 타작마당에서 본채 마루까지 높이는 자그마치 2미터는 되었다.

마당에서 마루 아래 뜰까지가 1.5미터, 이곳에서 마루까지가 0.5미터로 어린애 혼자 오르내리기가 쉽지 않아 나는 나지막하게 쌓아 올린 층계를 따라 부엌을 통해 안방으로 들락거렸다. 본채를 이토록 높인 것은 옛 산적(山賊)에 대비한 것이라 했다. 외할아버지의 아버지 그러니까 외고조할아버지가 오래전 칼과 창을 들고 덤비는 여러 명의 산적을 대청마루에서 방망이 하나로 혼자 물리칠 수 있었던 것은 기골의 장대함도 있었지만 집 구조의 힘이 컸다고 하였다.

겨울엔 먹을 것이 넘쳐났다. 뒤뜰 처마 밑에 땅을 파고 밤송이를 묻어 두었다가 어느 때고 꺼내서 굽거나 삶아 먹었다. 곶감과 고염, 감주가 끊이지 않았다. 거의 매달 제사가 있어 저녁부터 전과 두부 부침에서 각종 나물을 무치고 밤 등 과일을 깎느라 부산했다. 외할머니 세 분과 결혼 직전의 이모 두 분 그리고 일꾼과 도움을 주는 동네 아주머니들로 왁자지껄했다. 특히 명절엔 대단했다. 동네잔치가 벌어지곤 했다. 소쿠리엔 먹을 것이 늘 가득했다.

그래서 나는 너무 먹어 짜구가 났고 배가 볼록 튀어 나와 밤이면 늦게까지 응가를 했다. 이럴 때면 개가 쭈르르 나와 내 응가를 먹어치웠다. 짜구난 손자와 조카를 위해 세 분의 외할머니와 두 분의 이모가 돌아가며 밤을 함께 지새웠다. 성장 후에도 소화기능에 문제가 있어 고생하곤 했는데 이때의 영향이 아닌가 싶다.

외할아버지는 일직 개화한 분이었다. 한문에 능했고 본채 한 채를 한약방으로 만들어 동네에서 환자가 생기면 약을 처방해 주었다. 육갑(六甲)을 짚어 마을의 길흉을 알려주기도 하여 찾아오는 손님이 많았다. 일꾼(머슴)을 두었지만 건장하셔서 그 많은 땅과 논 그리고 큰 산을 직접 관리했다. 한겨울에도 얇은 내복 하나면 족했다. 젊어서 먹은 산삼덕분이라 했다. 이재(理財)에도 밝아 한때 금광을 찾아 평안도와 함경도를 누볐다.

북녘 땅을 오르내리던 중 서울에서 노상전도 하는 구세군 영국인 선교사를 만나 신도가 되었다. 집으로 돌아오더니 곧바로 땅을 떼 구세군 교회를 세우고 사관(개신교의 목사)을 파송 받았다. 마을에 첫 교회가 들어섰다. 이 교회 첫 사관으로 파송된 분이 친할아버지다.

국민학교 2학년 때 일이다. 날씨가 제법 차가운 날 조회(朝會)를 하다 갑자기 뺨을 세차게 얻어맞았다. 기오쓰게(きをつけ: 차렷)를 했는데 움직였다는 것이다. 야단 한 번 맞은 경험이 없던 나에겐 엄청난 충격이었다. 선생님으로부터도 똑똑하다고 귀염 받고 있었는데 이럴 수가. 가라시로 센세이(せんせい: 선생). 지금도 잊지 않고 있는 이름이다. 나는 그 일로 큰 충격을 받아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대전 신안동 집에서 나와 삼성국민학교로 가는 중간 지역 대전 철도국 야구장 외곽의 버드나무 둥지를 싸고돌며 놀다 귀가했다. 부모님은 이런 일을 전혀 알지 못했다. 평소에 성실한데다 아침에 나가 학교가 파할 무렵 귀가했기 때문이다. 그러기를 몇 달. 어느 날 사이렌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하늘에 하얀 꼬리를 길게 그리며 무엇인가 지나갔다. B-29라 했다. 그리고 며칠 후 8·15를 맞았다. 해방이었다. 광복이 없었다면 나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래서 광복은 나에게 남다른 감회이다.

해방 직후 지금은 휴지로도 사용할 수 없는 조악한 누런 치리가미(ちりがみ: 화장지)에 인쇄된 책과 공책(空冊)을 이용해서 한글을 깨쳤고 역사 공부도 하였다. 4학년 때 일이다. 과학에 관심을 가진 심 선생님이 담임으로 왔다. 심 선생님은 방과 후 과학반을 운영하며 코일을 감아 전기모터를 비롯, 글라이더와 고무줄로 날리는 비행기 등을 함께 만들며 우리나라 실정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우리나라는 천연자원이 없어 가난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에디슨과 같은 발명가 한 사람만 있으면 국민 모두가 잘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에디슨 이야기는 나에게 큰 감명으로 다가왔다. 한국의 에디슨이 되자. 그래서 한국을 잘사는 나라로 만들자. 과학자의 꿈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과학시간을 기다렸고 수학에 재미를 붙였다. 시험을 치른 다음 대전중학교에 입학했다. 입학을 하고 제식(制式)훈련을 받게 되었다. 땡볕에서 받는 제식훈련은 고욕(苦辱)이었다. 일요일이면 교회를 다녀와 대전중학고 뒤편 보문산(寶文山)을 자주 찾았다. 여치와 메뚜기, 따개비를 잡는 것이 취미였다. 그날도 여치를 잡으러 갔다. 풀로 엮어 처마 끝에 달아놓은 여치 집에 넣기 위해서였다.

몇 마리 여치를 잡아 집으로 오는 길에 요란한 사이렌 소리를 들었다. 선화동 집을 가기 위해 대전 도청 앞을 지나게 되었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경찰들이 모자 끈을 내려 쓰고 총을 맨 채 정문을 삼엄하게 지키고 있었다. 도청 건물옥상엔 기관총이 걸렸고 경관 여럿이 아래를 살피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전쟁이 났단다.

1950625일 한국전이 터졌다. 며칠 후 외할아버지가 오셨다. 걱정이 되셨다고 하셨다. 일단 외갓집으로 피난을 가기로 했다. 장남인 나는 새벽부터 외할아버지를 따라 먼저 대전 집을 떠나 백리 길을 걸어 어둑어둑할 무렵 외갓집에 도착했다. 며칠 후 부모와 여동생 넷 등 일곱 식구가 합류했다. 7월 초 어느 날, 외할아버지는 일찍부터 우리를 깨웠다. 외할아버지는 새벽에 딱 한 번 육갑을 통해 그날의 운세를 본다. 육갑을 보니 오늘만이 남으로 내려갈 수 있는 운세라 했다. 내일이면 살길이 북으로 열린다며 피난길을 재촉했다. 짐을 서둘러 꾸렸다. 아버지는 쌀과 약간의 세간을. 어머니는 옷가지를 챙겨 머리에 이었다. 나는 쌀 반말을 짊어졌다. 바로 아래 12살 된 여동생은 4살된 여동생, 두 번째 여동생은 2 살된 여동생을 들쳐 업었다

아침 일찍 집을 떠났지만 심천과 영동(永同), 추풍령(秋風嶺)을 거쳐 김천(金泉) 인근에 접어드니 어둑어둑하였다.

한때의 피난민 행렬이 김천을 향해 부지런히 서둘러 가고 있었다. 바로 그때 밤하늘 머리 위로 벌건 유탄(流彈)이핑~핑 귓전을 때리며 스쳐 지나갔다. 벌써 북한군이 가까이 온 것일까.

피난길에 오른 모든 사람들이 웅성 거렸다. 모두 허리를 낮추고 개천을 따라 김천 시내를 향해 낮은 포복자세로 종종걸음을 재촉했다.

다음날 아침 용케 김천역에서 마지막 남행 열차를 잡아 탈수 있었다. 자리는 화물짐칸 맨 꼭대기였다. 잠시 후 화물짐칸 꼭대기는 틈새 없이 사람들로 빼곡했다. 피난 열차는 대구를 거쳐 밀양역에 정차했다.

임시 거처인 시내 한 중학교에서 쌀과 보리를 반반 섞은 주먹밥을 먹으며 3일정도 머문 뒤 우리는 청도(淸道) 방향으로 한참을 걸어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작은 시골 초등학교에 수용되었다.

처음엔 쌀과 통보리쌀을 반반 섞어 주었다. 날이 갈수록 쌀 양이 줄더니 한 달이 못되어 통보리만 배급했다. 피난민들은 들녘에 나가 먹을 수 있는 나물이란 나물은 몽땅 뜯어 된장국을 끓여 푹 삶은 보리밥에 부어 쓱쓱 비벼먹었다. 통보리쌀도 잠시, 통밀로 바뀌었다.

밤이면 북쪽하늘이 번쩍 번쩍 빛났고 우르르~ 쾅쾅 하는 천둥소리가 이어졌다. 피난민 수용소에서 산하나 넘는 지척의 낙동강에서 벌어지는 야간전투 상황이었다. 해만지면 피난민수용소는 물론 온 마을이 불을 껐다. 미군 폭격기가 오폭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빛이라곤 밤하늘 별빛 뿐이었다. 피난민 수용소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경찰과 군에서 나를 비롯해 젊은이를 모두 차출했다. 군에 입대시키기 위해서다. 이를 용케 모면한 젊은이들은 한밤중에 불시 검문에 걸려 잡혀갔다. 아버지도 잡혀간 일이 있다. 그러나 나이가 많아 되돌아왔다.

간장과 된장 등 기본 반찬이 동이 나자 학교 교장선생님 인도로 피난민 수용소에서 꽤 떨어진 마을로 찬거리 동냥을 나갔다. 나는 대전 중학 교복과 모자를 쓰고 동냥에 합류했다. 그 마을 이장님의 안내로 여러 팀으로 나뉘어 가가호호를 방문하며 찬거리를 동냥했다. 이장님은 나를 부르더니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이장님 집은 꽤 넓었다. 마당엔 옥수수며 토마토, 가지와 고추 그리고 호박과 참외 등이 자라고 있었다. 이장님이 나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가자 내 또래의 아들이 힐끗 쳐다보며 거지를 왜 데리고 오는기요라며 소리쳤다. 나는 몸둘바를 몰랐다. 이장님은 아들을 나무라며 내 손을 잡고 신경 쓰지 마라이하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그러면서 점심상을 겸상으로 차려오라고 하였다. 잠시 후 젊은 여인이 밥상을 들여왔다. 한 그릇은 보리가 많이 섞인 찬밥이고 한 그릇은 방금 지은 듯 따끈따끈한 쌀밥이었다. 찬밥이 내 앞으로 놓여졌다. 이장님은 여인이 나가자 밥상을 돌려놓았다. 그러면서 어서 많이 먹으라 했다. 내 앞에 따뜻한 쌀밥을 보면서 숟가락을 들 수가 없었다. 거듭거듭 사양을 했지만 어서 먹으라며 먼저 찬밥을 먹기 시작하셨다. 어쩔 수 없이 따뜻한 쌀밥을 먹게 되었다. 잠시 후 이장님은 옛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젊어서 단신으로 일본 북해도 지역으로 돈 벌러 갔는데, 일본 말이 서툴러 일거리를 찾지 못했단다. 가지고 간 돈마저 똑 떨어졌지. 일거리를 찾으러 다니다 그만 추위에 지쳐 정신을 잃었는데, 얼마 후 눈을 뜨니 웬 일본인 집이었어. 일본인은 길에 쓰러진 나를 업어 집으로 옮겨 살려 낸 거야. 일본인은 자초지종을 묻더니 자신의 가게에서 일을 하라며 잠자리와 일터를 마련해 주었고 5년 후 가게도 독립시켜 주었지. 가게를 마련해 주며 일본 주인은 옛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일본인 주인이 젊어서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좋은 사람을 만나 큰 은혜를 입었단다. 그래서 사례 하고자 찾아갔더니 극구 사양하며 어려운 사람 만나거든 꼭 도와주었으면 좋겠다고 당부하더란 말이지.’

이장님이 바로 그 혜택을 물려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장님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며 커서 잊지 말고 작은 일이라도 좋은 일을 해주었으면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름이 한나라 한() 동녘 동() 터 기()라 했다. ‘한동기지금도 그 이름과 함께 감격이 나의 가슴에 또렷이 아로 새겨져있다.

통밀을 먹기 시작하면서 피난민 수용소에 이질(痢疾)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장티푸스도 유행했다. 많은 어린이와 노인이 영양실조에 이들 질병으로 죽어 나갔다. 막내 여동생이 이때 이질로 세상을 떴고 그 위 여동생도 이질을 앓다가 대전 집까지 왔지만 어머니 품에서 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숨을 거두었다. 다섯 살이었다. 나는 이 무렵 하루거리 - 학질(malaria)에 걸려 큰 어려움을 겪었다. 약이란 생각할 수 없었기에 그저 낫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전쟁에서 한국군이 이겼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군이 퇴각했다는 것이다. 어느 날 고향으로 갈 사람을 점검했다. 우리 가족은 밀양으로 나와 무개차를 타고 대구까지 왔다. 대구에서 서울로 가는 열차는 잡기가 어려웠다. 궁여지책으로 피난 열차 때와 같은 화물차 지붕위에 자리를 잡았다.

열차는 느릿느릿 김천역에 닿았다. 그리고 추풍령 터널을 오르고 있었다. 터널 속에서 기차는 힘에 지쳤는지 쿵쿵, 쿵쿵대며 뜨거운 시커먼 연기를 연신 뿜어냈다. 짐칸 위에 빼곡히 앉아있던 피난민들이 도처에서 아우성을 치며 기침을 해댔다. 기차는 얼마 후 후진을 했고 다시 칙칙폭폭 전진했다. 그러나 피난민 짐차는 터널을 넘지 못하고 다시 뒷걸음질 했다. 이러기를 여러 번, 가까스로 터널을 빠져 나와 직지사(直指寺)역에 도착했다. 탱크와 자동자 등 장비를 싣고 북으로 올라가는 미군 열차와 잠시 마주쳤다. 짐칸 꼭대기에서 한 중년의 남성이 후레이(hurray, 만세)를 연발했다. 그러면서 유창한 영어로 미군과 인사를 나누었다. 미군병사는 이를 반기며 먹을 것을 던져 주었다.

서둘러 대전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집은 인민군에 접수되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옛 사진을 비롯해서 세간이란 세간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외할아버지는 전쟁 중에 목 뒤에 난 악성 종기인 발찌가 악화되어 돌아가셨다. 발찌가 너무 심해 읍내에 나가 의사를 모셔와 수술을 받았다. 외할아버지는 수술을 받으면서 오늘 고비만 넘기면 장수할 텐데, 오늘이 고비라며 걱정하셨다. 의사가 마을을 벗어나기 전 오한 발작이 일어 결국 돌아가셨다. 마지막까지 육갑으로 본인의 운명을 점쳤지만 운명을 피해가지 못했다.

귀가 후 곧 학교를 찾았다. 교사(校舍)가 미군에 접수돼 보문산 야트막한 야산 아기능 터에 야전 칠판을 이용해 공부를 했다. 도처에서 아기 뼈가 나왔고 개미 등 각종 벌레가 무릎으로 기어올랐다. 공부가 될 리 없었다.

얼마 후 중공군의 개입으로 두 여동생은 친척집에 맡기고 나만 부모님을 따라 부산으로 내려갔다. 집을 구할 수 없어 건물 담벼락을 의지해 가마니로 두른 움막을 짓고 안에 연탄불을 지펴 한겨울을 지냈다. 나는 사과 궤짝을 개조한 좌판을 매고 부산 국제시장에서 찹쌀떡, 마른오징어, 양담배 등을 팔았다. 깡패를 만나 털리기도 하였다. 죽을 고비도 여러 번 넘겼다.

전방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운 좋게 좋은 직장이라 해서 언론계에 발을 디뎠다. ·석간 시대 조간신문인 한국일보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였다하여 과학과 의학담당 전문 기자로 발탁되었다. 1965년부터 시작된 인간 달착륙을 목표로 한, 미국의 아폴로 계획은 과학기자로서 최고의 시기를 보냈다. 밤을 꼬박 새우고 아침 일찍 동아 방송(전두환 대통령 때 언론사 통폐합으로 KBS에 합병) 등에 나가 생방송을 했다. 기자 생활은 만만치 않았다. 밤을 낮같이 31년을 보냈다. 휴일 반납은 당연하고 밤 12시 이전에 잠을 잔 것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새벽 5시까지 일하곤 인근 대중목욕탕에서 잠시 눈을 붙이고 아침 10시 회의에 들어가야 하는 날이 다반사였고 격무로 건강이 나빠져 입원도 했다. ‘불평이 나올 법도 하지만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살았다. 당대를 살아온 대부분 사람들의 생활상이리라.

한마디로 감개무량하다. 내가 사회생활을 시작한 60년대 초만 해도 40대는 노털이었다. 5·16혁명이 있던 196130대가 대거 군()에서 관()과 공공기관으로 이동되면서 50대는 물론 40대마저 자의반타의반으로 물러나야 했다. 평균수명 50대이던 시절이다. 60세를 넘기기만 해도 장수자였다. 환갑, 진갑 다 지났다고 자랑하던 시절이다. 그래서 큰 잔치가 베풀어졌다. 팔십대란 그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나이였다. 그런데 내가 바로 팔십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 세대는 모진 풍파를 겪으며 오늘의 풍요를 이루었다. 하지만 우리의 자녀들마저 듣기 싫어하고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는 우리들의 족적(足跡)이다. 생각에 따라서는 서운하고 분할 법도하다. 그러나 팔십의 중반을 바라보며 되돌아보니 이 숱한 고난들이 아련한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에 남아있다. 오히려 감사가 샘물처럼 솟아나온다. 나아가 자랑스럽기도 하다.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다. 나이가 많은 이들은 대화 중 자신의 나이를 자랑이라도 하듯 들어낸다. 그 기분을 알 것 같다.

프랑스의 저명한 심리학자 마리 드 엔젤(Marie de Hen -nezel)늙음의 의미는 성과가 아니라 성숙이라고 했던가. 노년은 쇠퇴기가 아니라 다른 기와 마찬가지로 기쁨과 어려움이 있으며 살만한 가치가 있고 또한 풍요로운 시기란 것이다. 늙음은 쇠락이 아니라 호기심이 가득한 모험으로 경험할 수 있다고 했다. 보다 성숙한 삶을 다짐해 본다.

<필자소개>한국일보 과학·의학 전문기자/한국과학자협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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