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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성가대

[희곡] 지도와 나침반: 지휘자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하모니

작성자김정호 토마스|작성시간26.06.12|조회수50 목록 댓글 0

[희곡] 지도와 나침반: 지휘자의 손끝에서 피어나는 하모니

[때] 평일 저녁, 요한 성가대 연습 시간

[장소] 무실동 성당 마리아방

[등장인물]

  • 엘리사벳 (30대 여, 지휘자): 단원들을 음악적으로, 영적으로 이끄는 따뜻하고 단단한 나침반 같은 존재.
  • 토마스 (50대 남, 단장/베이스): 성가대의 악동.
  • 안드레아 (60대 남, 테너): 꼼꼼하게 악보를 분석하는 단원.
  • 프란체스카 (50대 후반 여, 메조소프라노): 풍부한 감수성을 지닌 베테랑.
  • 소피아 (40대 초반 여, 소프라노): 맑은 고음을 가졌지만 아직 복잡한 리듬엔 긴장한다.
  • 요셉 (40대 후반 남, 신입 베이스): 열정은 넘치나 엇박자 악보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초보 단원.

(요한 성가대가 특송 곡 <하느님의 사람아>를 연습 중이다. 엇박자(당김음)가 유독 많은 곡이라 단원들 모두 고개를 푹 숙인 채, 악보에 코를 박고 노래 부르기에 급급하다. 파트마다 미세하게 박자가 어긋나고, 끝나는 음절이 지저분하게 끌리자 엘리사벳이 부드럽게 반주를 멈춘다.)

 

엘리사벳: 자, 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 음정은 얼추 다 맞았는데, 화음이 아름답게 섞이지 않고 왠지 모르게 불안하고 산만하죠? 지금 제가 지휘석에서 보니까, 단원분들 정수리만 보이고 눈을 마주치는 분이 한 분도 안 계시네요.

요셉: (멋쩍게 이마를 긁적이며) 아휴, 지휘자님. <하느님의 사람아> 이 곡은 엇박자가 워낙 많지 않습니까. 까딱 눈을 돌렸다가 박자를 놓칠까 봐 겁이 나서, 다들 악보에 코를 박고 부르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안드레아: 맞습니다. 다들 틀리지 않으려고 저마다 속으로 열심히 박자를 세며 부르는데도, 이상하게 템포가 따로 놀아서 음악이 어수선해지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엘리사벳: 바로 그 지점입니다. 합창에서 소리를 내는 사람은 우리 단원분들이지만, 그 소리들을 하나의 '음악'으로 엮어내는 사람은 저, 지휘자입니다. 악보만 믿고 지휘자를 보지 않으시면 합창의 본질인 '하모니(조화)'가 무너지게 돼요.

소피아: 하모니가 무너진다고요? 저희 딴에는 각자 자기 파트 박자를 아주 정확하게 맞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요.

엘리사벳: 우리가 부르는 건 '우리가 맞추는 박자'가 아니라 **'나만의 박자'**가 되어버렸기 때문이에요. 사람은 저마다 타고난 생체 리듬이 다릅니다. 저를 보지 않고 각자 속으로만 박자를 세면, 본인은 정확하다고 생각해도 미세하게 빨라지거나 느려지게 됩니다. 수십 명의 단원이 각자 자기 리듬대로 부르니 템포가 불일치할 수밖에요. 게다가 시작과 끝의 아티큘레이션(명확한 발음)도 붕괴됩니다. 아까 단어의 끝 음절인 자음 받침을 끊을 때, 제 사인이 없으니 누구는 먼저 끊고 누구는 길게 끌어서 지저분한 소리가 났죠? 첫 음을 치고 들어오는 타이밍도 다들 흐려졌고요.

프란체스카: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 보니 그러네요. 악보에 적힌 p(여리게)나 f(세게), 점점 느리게(ritardando) 같은 기호들도 그냥 기계적으로만 불렀지, 마음을 울리는 감동이 없었어요.

엘리사벳: 맞습니다, 프란체스카 자매님. 악보의 기호들은 절대적인 수학 수치가 아니에요. '얼마나 여리게 할 것인가?', '얼마나 극적으로 느려질 것인가?' 이 감정의 깊이와 호흡의 길이를 결정하고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지휘자입니다. 저를 보지 않으시면 음악의 '밀당(호흡과 감정의 조절)'이 불가능해져서 결코 감동을 줄 수 없어요.

소피아: 어쩐지... 아까 악보만 뚫어지게 보느라, 소프라노 소리가 튀는지 테너 소리가 묻히는지 다른 파트 소리는 하나도 안 들리더라고요.

엘리사벳: 네, 지휘자를 보지 않으면 파트 간의 소리 균형(Balance)도 다 깨져버립니다. 합창은 내 소리만 잘 낸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요? 저는 객석의 입장에서 전체를 들으며 "소프라노 조금 줄이고, 테너 좀 더 키워주세요"라는 신호를 실시간으로 보냅니다. 그런데 다들 악보만 보고 계시면 그 신호를 못 보니, 특정 파트가 전체 음악을 덮어버리게 되죠.

토마스: (깊이 공감하며) 가만 생각해 보면, 우리가 바닥이나 악보만 쳐다보고 노래하면 미사에 참례한 교우들과의 소통과 시선 처리도 완전히 단절되겠군요. 관객들 눈에는 그저 '연습이 부족해서 악보 보기에 급급한 성가대'로 보일 테니까요.

엘리사벳: 단장님 말씀이 정확합니다. 지휘자를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고개가 들리고 시선이 위로 향하게 되어, 소리가 바닥으로 꺼지지 않고 교우들에게 훨씬 잘 전달됩니다. 무대 매너도 당당해지고요. 자, 요약해 볼까요? 악보는 '지도'이고, 지휘자는 '나침반'입니다.

요셉: 아하! 지도를 아무리 꿰뚫고 있다고 한들, 나침반을 보지 않고 걸으면 결국 엉뚱한 곳으로 길을 잃거나 일행과 뒤처지게 되는 이치군요!

엘리사벳: 정답입니다, 요셉 형제님! <하느님의 사람아>처럼 엇박자가 많고 복잡한 곡일수록 더더욱 나침반을 믿으셔야 해요. 악보와 리듬은 연습을 통해 이미 머릿속에 완전히 숙지해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무대 위에서는 오직 지휘자의 손끝과 눈빛에 여러분의 호흡을 맞춰주셔야 비로소 하나의 아름다운 울림이 탄생할 수 있습니다.

토마스: 자, 단원 여러분! 이제 악보에서 눈을 떼고 우리 엘리사벳 지휘자님의 눈빛이라는 나침반을 똑바로 쳐다봅시다!

엘리사벳: (활짝 웃으며 지휘봉을 든다) 좋습니다. 다들 고개 드시고, 척추 세우시고요. 제 숨결과 손끝에 집중해 주세요. 시작과 끝, 그리고 엇박자의 모든 호흡을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자, <하느님의 사람아> 다시 갑니다!

(엘리사벳의 열정적이고 섬세한 지휘가 시작된다. 악보에서 고개를 든 단원들이 일제히 지휘자의 눈빛과 손끝에 시선을 고정한다. 제각각 흩어졌던 엇박자의 리듬이 마법처럼 톱니바퀴 맞물리듯 정확히 맞아떨어지고, 완벽한 밸런스와 감동적인 밀당(호흡)이 섞인 천상의 하모니가 마리아방을 가득 채운다.)

- 幕 (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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