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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세 계

[스크랩] 인상주의 미술이란?

작성자럭키맨|작성시간10.08.13|조회수1,016 목록 댓글 0


1. 인상주의 미술이란?
인상주의 미술이란 서양 근대 미술에서 중요한 한 획을 긋는 도회적인 미술 사조로써 19세기 후반 주로 1860-9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미술 유파의 하나이다. 고유색을 부정하고 빛에 의해 변하는 순간적인 색채로 그림을 그려 ‘오광파’라고도 한다. 자연을 하나의 색채현상으로 보고 빛과 함께 시시각각으로 움직이는 색채의 미묘한 변화 속에서 자연을 묘사하고, 어두운 자연이 아닌 빛에 변화에 따른 유동적이고 변화무쌍한 자연을 표현했다. 특히 이때는 그 이전까지의 역사나 신화에 대한 소재에서 탈피하여 도시풍경, 주변 인물들을 그렸는데 당시 기세를 올리기 시작한 실증주의와 사실주의의 흐름을 따라, 대상을 어디까지나 눈에 보이는 대로, 순간적인 인상을 포착하여 재현하려는 운동이 일부 청년작가들 사이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야외로 나가 태양의 직사광선 아래 진동하는 자연의 순간적 양상을 묘사하는 일이 시도되기도 하였다. 이런 인상주의 미술을 추진한 화가를 칭하는 말이 바로 인상파이다.


2. 인상파의 탄생 배경(발생)
19세기에는 자유사상으로 과거의 고정 관념을 깨뜨리려는 경향이 많아지고, 이러한 일은 인상파 후기에 주관적인 표현 방법으로 굳어져 현대 미술과 같이 격렬하고 자유로운 표현 방법을 낳게 하였다. 한편, 이 시대에는 자연 과학이 발전하였으며 그에 따라 사진술과 광학도 나타났다. 따라서 예술가들은 개관적인 사실주의보다 태양 광선에 의하여 시시각각 변하는 인상적인 모습을 표현하려고 했다. 그래서 이러한 의도를 나타내려는 새로운 기법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이러한 19세기 후반을 일반적으로 인상주의라고 한다. 인상주의는 화풍의 변천 단계에 따라 인상파. 신인상파. 후기인상파로 나눌 수 있는데, 이 인상주의 그림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밝은 그림’이다. 밝은 사회와 사람들의 의식변화가 그 원인이라 하겠다.
밝은 사회라는 말의 뜻을 설명하자면 이렇다. 1775년 미국혁명, 1789년 프랑스 혁명, 이즈음 진행 중이던 산업혁명 등 18세기말과 19세기 초는 인류역사상 유래가 없는 혁명의 시기였다. 이러한 혁명을 거치면서 농노와, 지주, 수공업자로 대변되던 장원제도가 무너지면서 전통적인 귀족이라는 계급이 해체되었으며, 급격한 산업혁명으로 인하여 도시가 탄생되었다. 농노들은 도시로 몰리고 도시는 인구가 밀집했으며, 그들은 시민계급이라는 새로운 중산층 계급을 형성하게 되었다.

 

대표적인 작가

 

(1) 마네(Edouard Manet 1832~1883)
 

인상주의자들로 알려진 화가들과의 공식적인 연결로부터 거리를 두고 있었음에도 마네는 일찍이 아방가르드 인물로 간주되고 있었다.

그가 활동할 당시는 사실주의가 주도권을 잡고 있었던 때인 만큼 그는 쿠르베가 그의 [작업실]에서 재창조하는 영웅으로서의 예술가의 지위를 과시했다면, 마네는 물감 자체가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 주었다. 사실주의로부터 그는 당대의 삶으로부터 채택해 그것을 실물 크기로 그린다는 것의 중요함을 배웠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접근 방법을 전통적인 도상학적 주제(iconograpic theme)에 대담하게 접합시키기도 했고 때로는 옛 거장들 특히 스페인과 베네치아의 거장들의 양식을 이용하기도 했다.

 

현대 미술의 출발점으로 간주되는 1863년의 [낙선전]은 마네는 물론 휘슬러, 피사로, 세잔느 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 낙선전에 마네는 [풀밭 위의 식사]를 출품하여 큰 반향을 일으킨다. 똑바로 앞을 보며 두려워하지 않는 그녀의 시선은 보는 이를 화폭 안으로 끌어들인다. 그린 방법 역시 색조의 조정에 의해 명암효과를 추구하는 전통방식을 버리고 면면이 강조되고 단일 색채로 크게 처리하여 평면적으로 보이는 방법을 선보인다. 얼핏 보기에는 평면적으로 보이는 방법 실제로 여과되지 않은 대낮의 광선과 세부 묘사의 단순화, 뚜렷한 실루엣, 빛나는 색채의 효과를 포착하는 방법을 선호했다.

 

 같은 해에 제작된 [올랭피아]는 역시 고전주의적 주제에서 누드를 차용하고 있는데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와 고야의 [누드의 마야]에 이르기 까지 반복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비난을 받은 이유는 누드의 여체로서의 관능성, 신비로운 신화적 일면을 배제하고 창녀임을 알 수 있는 도상적 특징에도 불구하고 당당하고 자신 있으며 저돌적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재현양식은 중간색조는 사용하지 않은 단순화된 색채가 어둡고 밝게 대조되어 단조로운 색채들을 대위법적으로 배치했다.

 

마네의 의의는 근대회화의 기틀을 마련하는 새로운 양식의 작가로서 회화의 평면성을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상의 주제를 채택하여 새로운 회화언어를 추구하는 것은 이제 회화의 문제가 무엇을 그리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느냐의 문제에 달려있게 되는 것이다.

 

 

(2) 모네(Claude Monet 1840~1926)

 

스튜디오를 박차고 나와 소재 앞에서가 아니면 결코 붓에 손도 대지 못하게 했던 모네는 오래된 습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었다. 시시각각 변하는 자연 앞에서 대상의 순간적인 양상을 놓치지 않으려는 화가는 화면전체의 효과를 위해 세부묘사에 신경을 덜 쓰면서 빠른 붓질로 캔버스에 물감을 칠해나가야만 했다.

 

비평가들이 참을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이러한 불안정한 마무리였다. 또한 비평가들이 격분한 이유는 그림의 기법뿐 만이 아니라 화가들이 선택한 소재에도 있었다. 그림 같은 화면이 아니라 일상생활을 그린 모네는 일상의 광경이 지니는 진정한 인상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강>은 그림 속의 대상물들이 모두 리얼하게 표현되어 있고, 형태는 낱낱이 해체되어 색채의 빛으로 환원되어 있다. 이 그림에는 검정색이 전혀 사용되지 않았으며 그늘 부분에도 색채가 넘쳐 흐른다.

 

 

(3) 르느와르(Pierre Auguste Renoir 1841~1919)

 

프랑스 중부 리모주 출생. 4세 때 파리로 이사하였다.
집안이 가난한 양복점이어서 13세부터 도자기공장에 들어가 도자기에 그림그리는 일을 하였다. 이곳에서 색채를 익힌 것이 뒤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무렵부터 점심시간에는 루브르미술관에서 와토나 부셰 등의 작품에 이끌려 화가가 될 것을 꿈꾸었다. 그러나 4년 후 기계화의 물결에 밀려 실직하였다. 1862년 글레이르의 아틀리에에 들어가 모네, 시슬레 등을 알게 되고 또 피사로, 세잔과도 사귀어, 훗날 인상파운동을 지향한 젊은 혁신화가들과 어울리게 되었다.

 

1874년 제1회 전람회에는 <판자 관람석>을 출품하였고, 계속하여 제2회와 제3회에도 참가하여, 한동안 인상파 그룹의 한 사람으로서 더욱 더 눈부시게 빛나는 색채표현을 전개하였다. <물랭 드 라 갈레트>와 <샤토에서 뱃놀이를 하는 사람들>은 인상파시대의 대표작이다.
1881년 이탈리아를 여행, 라파엘로나 폼페이의 벽화에서 감동을 받고부터는 인상파에서 이탈하여 재차 독자적인 풍부한 색채표현을 되찾아 원색대비에 의한 원숙한 작풍을 확립하였다.
더욱이 1890년대부터는 꽃·어린이·여성상, 특히 <나부>등은 강한 의욕으로 빨강이나 주황색과 황색을 초록이나 청색 따위의 엷은 색채로 떠올리면서 부드럽고 미묘한 대상의 뉘앙스를 관능적으로 묘사하였다.

1900년에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만년에는 지병인 류머티즘성 관절염 때문에 손가락에 연필을 매고 그렸다. 최후 10년 간은 조각에도 손대어 <모자>와 같은 작품을 남겼다.

얀스텐이나 와토의 경향과 상통하는 르느와르의 작품이 그들과 다른 점은 그의 관심사가 밝은 색채의 혼합물을 보여주고 술렁이는 인파에 쏟아지는 햇빛의 효과를 연구했다는 점이다.

 

 

(4) 드가(Edga Dgas 1834~1917)

 

드가는 구도와 소묘에 관심이 있었으며 그의 초상화에서는 가장 의외의 각도에서 본 공간과 입체감 나는 형태들의 인상을 전달하고자 했다. 드가의 <압생트 술잔>은 스냅사진을 찍은 듯이 자연스럽다. 고독감을 한층 깊이 있게 만드는 테이블의 배치 구도는 드가를 다른 인상주의 화가들과 구별시킨다. <목욕하는 여인> 또한 원근법을 사용하지 않고 있으며 화면 구도나 대상물의 배치가 독특하다. 드가에 있어 주목할 점은 화면을 창으로 보는 르네상스 적 개념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다

 

 

(5) 피사로 (1830 ~ 1903)

 

서인도제도의 세인트토마스섬 출생. 1855년 화가를 지망하여 파리로 나왔으며, 같은 해 만국박람회의 미술전에서 코로의 작품에 감명받아 그로부터 풍경화에 전념하였다.
그리고 몇 차례 살롱에 출품하였으나 번번이 낙선하고 70년의 프로이센-프랑스전쟁 때는 런던으로 피난하여 그곳에서 모네와 함께 터너 등의 영국 풍경화를 연구하였다.

 

전후에는 파리 북서쪽 교외에 정주하면서 다시 질박한 전원풍경을 연작, 74년에 시작된 인상파그룹전에 참가한 이래 매회 계속하여 출품함으로써 인상파의 최연장자가 되었다.
그의 작풍은 인상파 특유의 기법을 바탕으로 수수하면서도 견실성을 보여 모네와 시슬레보다 한층 구성적인 면에 특색을 보였다. 만년에는 시력이 약화되었으나 최후까지 제작활동을 계속하여 인상주의 운동과 운명을 함께 하려는 성실성을 보였다.

인상주의자 그룹의 모든 전시회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던 유일한 사람. 1884년 이후에 앙데팡당 전시회에서 쇠라 작품에 감명받아 신인상주의로 전향하나 신인상주의의 한계(제작 기간이 너무 오래 걸리며 자신의 감각을 추구하기 어려우며 또한 운동적이거나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자연의 아름다운 양상을 추구할 수 없었기 때문에)를 느끼고 1888년부터 1890년경 신인상주의 기법을 버린다. 그 후 연작을 제작하며 인상주의 운동과 운명을 함께 한다 

 

 

 

 

인상주의 미술 <마네>의 작품세계

 

- Edouard Manet; Painting -

- 다만 내 자신이 되고 싶다 -

      1840년 대에 풍미한 철학의 사조는 콩트[Comte]를 중심으로 성립된 실증주의 였다. 이러한 철학의 사조와 함께 미술계 에도 크루베[Courbet]를 위시한 리얼리즘 작가들의 대두를 보게 되었고 현실성을 반영시켰던것이다. 마네의 미술 세계는 이러한 리얼리즘과 뒤에오는 인상주의 와의 사이에 얽혀있기 때문에 여러가지 구구한 해석과 이해를 낳고 있다. 그러나 마네는 사물에 대한 그의 주관적인 자세로 자신의 개성을 강조하고자 했다. 마네의 세계는 밝고 상쾌하고 색채의 과감한 대비를 통해 색채의 새로운 아름다움을 창 조하고 있다. 이러한 과정에서 외광[外光]을 찾았고 재래적인 기법인 형태 재현을위한 점차적인 명암 처리를 도외시한다. 그는 원색의 평면적인 표현으로 색채와 형태의 2원적 세계를 구별지우고 당시까지 고수되 어오던 모든 회화적 원칙을 포기하였다. 이러한 점은 <마네>가 당시에 비난을 받은 이유이긴 하지만 뒤에 나타나는 인상주의의 선구자 로서의 위치를 확인해 주는것이다. 마네를 두고 현대미술의 길을 열어준 화가라고 말하여 지는것도 바로 여기에서 찾아볼수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과 작품세계


설명이 필요 없는 미술이 대두한다. 이제 관객은 그림에서 주제를 찾아내고, 그것이 어떤 적절한 표현방법을 통해 표현되었는가를 보면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또 재현된 대상물들이나 공간의 실제같음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을 보는 것이 아니라, 색채들의 조화, 필치의 변화에서 비롯되는 아름다움을 감상하게 된다.


꾸르베와 특히 마네 같은 화가들을 통해서 과거의 미술양식은 붕괴되었다. 신고전주의의 이상과 낭만주의의 격렬한 몽상 모두가 설득력을 잃었으며, 현실을 과학적인 눈으로 보는 사실주의적인 관점만이 남게 되었다. 이 새로운 미술은 에두아르 마네가 과거양식을 완전히 부정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이미 밝혔다. 그 결과 젊은 화가들은 새로운 양식을 개척해야 했으며,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후일 인상주의자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젊은 화가들은 우선 자연을 묘사하기 시작했다. 과거처럼 아뜰리에서 스케치나 기억에 의해서 자연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캔버스를 야외로 들고 나가서 햇빛 아래의 자연을 그려내었다. 이들 모두가 동일한 시각과 목적에서 작업하였기 때문에, 이들의 초기 작품들은 서로 유사하였으며, 특별히 무슨 양식이라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단지 그들은 각자의 다른 감각과 취향을 가지고 있었고, 그들의 취향의 차이만큼 다른 종류의 그림들을 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십년, 이십년이 지나면서 열정적으로 묘사된 자연풍경이나 인물상등은 나름대로 독자적인 형식을 갖게 되었다. 즉 아무것도 아니었던 현실의 단면들이 예술가들의 열정이라는 용광로 속에서 예술로 승화되고, 예술세계로 편입된 것이다. 그들은 당시까지 별로 평가를 받지 못했던 풍경화라는 장르를 통해서 새로운 미술의 길을 열었다.


1. 빛의 진실


17세기 네덜란드 풍경화는 눈에 보이는 자연경의 진실을 표현하였고, 영국의 풍경화는 앞서 본 바와 같이 자연의 서정 혹은 웅장한 자연경에 이입된 인간의 격정을 표현하고 있다. 몇 명의 소외된 화가들이 빠리 주변과 북쪽 해안 풍경들을 그려내면서, 지역적 경치의 특수성을 재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상주의자들의 소박한 풍경화는 네덜란드 풍경화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곧 인상주의자들은 풍경의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데 머무르지 않았고, 다른 무엇을 함께 추구하였는데, 바로 이점이 풍경화를 근대미술의 중요한 장르로 평가받게 하는 요인이 된다. 그들이 추구한 것은 특별히 아름다운 풍경이라기보다는, 풍경화를 빌미로 한 “햇빛 진실” 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빛의 효과가 풍부한 강가, 바닷가, 눈밭을 주로 그렸다. 시슬레가 햇빛으로 충만된 물을 그리기 위해서 홍수가 난 마을까지 찾아가서 그려내는 극성을 부리기도 했듯이, 그들은 빛의 변화, 색채의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한층 큰 예술적 목표를 정하고 있었기에, 지역적 풍경의 소재적 재현이라는 실경풍경화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카데미즘을 벗어난 새로운 그림을 그렸던 화가들은 1874년부터 1876년, 1877년, 1879년, 1880년, 1881년, 1882년, 1886년까지 8회의 단체전람회를 열었다. 소규모의 그룹으로 존재했기 때문에, 이들을 좁은 의미에서의 인상파라는 유파 개념의 호칭을 붙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들의 작업은 매우 다양하여 뚜렷한 공통적인 특성이 없으므로(예컨데, 8회전에는 모네, 르누아르, 시슬레, 세잔느 등 주축이 되는 작가들이 불참했다), 또 이 그룹에 참가하지 않은 많은 화가들도 아카데미즘 바깥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새로운 미술운동을 전체적으로 지칭하기 위해서는 인상주의라는 폭넓은 표현이 더 알맞는다. 또한 이 인상주의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각 지역의 문화적 특성에 따라 수정되어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그 모습도 다양하다. 여하튼 새로운 미를 개척하는 인상주의의 시작은 몇몇 젊은 화가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1861년 아카데미 쉬스에서 까미유 피사로, 폴 세잔느, 아르망 기요맹이 만났고, 1862년 애꼴 데 보자르의 글레르의 화실에서 끌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 프레데릭 바지유, 오귀스트 르누아르가 만난다. 이 두 그룹은 곧 가까워졌고 이들에 의해서 에두아르 마네를 추종하는 회화의 혁명이 시작된다. 초기에 그들은 분명한 방향을 갖지 못했다. 그들은 다만 과거의 미술양식을 거부했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추구하고자 했다. 우선 그들은 동시대의 다른 화가들이 아뜰리에의 채광창으로 들어오는 빛에 의지하여 작업하는 것에 반발하여, 야회의 햇빛 아래에서 자연풍경을 눈에 보이는 대로 묘사하는 것으로 새로운 미술을 시작했다.

 

빛의 추구, 빛의 진실의 추구라는 순정한 의미에서의 인상주의는 끌로드 모네를 중심으로 한다. 1865년 퐁텐블로 숲을 무대로 한 “풀밭위의 점심”을 그릴 때부터, 모네는 야외의 자연경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재현하기 시작했다. 1867년작 “정원의 여인들”도 야외에서 직접 제작한 작품이다. 화면의 상부를 그리기 위해서 화단에 긴 고랑을 파고, 도르레를 사용해 가면서 이 대작을 야외에서 그렸던 모네를 보고 꾸르베가 매우 재미있어 했다는 이야기는 야외에서의 제작이 매우 특별한 일이었고, 이것이 모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일이었음을 알려


준다. 모네의 이러한 태도는 “에트레타 절벽”을 그린 꾸르베와는 다른 종류의 풍경화를 모네가 그리고 있었음을 분명히 알려준다. 꾸르베에게 현실 자체는 관념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것으로 만족했으며, 그의 많은 풍경화들을 아뜰리에에서 완성했다. 그러나 모네는 현실 자체의 표현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경험과 감정에 더 충실했다.

 

모네: 정원의 여인들 The Women in the Garden, Oil on Canvas, 255 x 205, 1866-67, 오르세 미술관


“정원의 여인들”이 살롱전에 낙선된 후, 그는 풍경화에 전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는 젊은 시절 르아브르에서 만났고, 그에게 야외 그림의 즐거움을 가르쳐 준 외젠느 부뎅과 네덜란드에서 온 풍경화가 용킨트, 그리고 가끔 꾸르베와 함께 세느강변, 노르망디 지방을 유랑하며 제작했다.


1870년 보불전쟁이 일어나자 피사로와 모네는 런던으로 피신하고, 그곳에서 색채와 빛이 현란한 윌리암 터너의 작품들을 발견한다. 1871년 말 귀국한 모네는 아르장떼이유에 정착해서 본격적으로 빛과 색을 추구한다.

인상주의라는 용어는 모네의 작품에서 비롯되었다. 1874년에 사진사 나다르의 아뜰리에에서 30여 명의 무명작가가 참가한 최초의 그룹전시회가 열렸는데, 모네는 이 전시회에 “르아브르 항에 들어오는 배”, “카푸신 거리”, “일출”을 출품했다. 그는 팜플렛 제작시 제목 “일출”에 ‘인상’이라는 단어를 첨가했다. 이 제목을 본 일간지의 샤비리바리지의 기자 루이 브루아는 ‘인상주의 전람회’라는 제목의 혹평을 실었다. 이 제목이 새로운 미술의 세례명이 되었다.

 

Monet, Claude

아르장떼이유의 요트경주 The Regatta at Argenteuil

c. 1872 19 x 29 1/2 in. (48 x 75 cm)

Musee d'Orsay, Paris


줄 끌라르티는 '모네는 그림이 인상에 만족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화가의 한 사람이다. 이들은 카푸신가에 있는 나다르의 작업실에서 전람회를 열었는데, 완전한 혼란뿐이었다'라 비난했고 1876년 2회전에 알베르 볼프는 더 강한 어조로 비난하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1875년 드루에 경매장에서 인상주의자들의 작품들이 헐값에나마 팔려서 그들의 추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에트레타의 바다, 1868년경”은 꾸르베의 “에트레타 절벽”과 비교가 되는 작품이다. 꾸르베의 절벽이 바위의 육중하고 거친 질감을 가진 사실적 묘사라고 한다면, 모네의 이 작품은 질감보다는 그것을 그리던 순간 모네의 시각경험과 정신상태가 더 중요해 보이며, 마네의 작품들에서 처럼 신속하고 경쾌한 필치가 돋보인다. 절벽은 전혀 사실적이지 않다. 그는 육중한 양괴감 대신에 파도가 밀려오고, 비가 올 듯한 해변의 그 스산하면서도 엄중한 분위기를 표현해 놓았다. 견고한 것이 유동적인 것으로 대체되는 것이다. 윤곽선, 형태, 식별할 수 있는 물건들 대신에 부숴진 형태의 색점들이 모여서 대상의 인상 정도를 알려 준다. 한편 밝기만 했던 모네의 작품은 1870년대 들어서면서 제작했는데, 1871년부터 1878년까지 아르장떼이유에 거주하면서 강과 돛배들이 있는 반짝이는 수면을 그의 주된 소재로 삼았다. “아르장떼이유의 요트경주, 1872년경” 등 많은 작품들이 물가에서 그려졌다. ‘수면이 움직이는 것인지, 빛이 움직이는 것인지? 세느 강변은 반짝이는 빛의 반사로써 덮여있다. 더 가까이서 봐야겠다.“ 이 당시 모네는 그래서 배 위에서 그림을 제작할 정도로 적극적이었고, 대상의 고정적인 세계가 아니고 빛의 변화에 따라 변형된 여러 세계를 보여 주는 자연을 발견하였다. 빛의 추구는 수면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었다.


“글라디올러스”는 햇빛이 찬란하게 쏟아지는 정원의 한 모퉁이를 재현한 작품이다. 우리가 이 작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할 때, 이는 이 그림이 꽃이나 여인을 묘사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인상만에 만족하고’, ‘물감과 화포와 붓으로 장난’을 쳤다고 비난받기도 했던 이 작품의 매력은 강렬한 태양빛에 노출된 밝고 투명한 색채들, 그것들의 조화에 있다. 밝은 초록색들의 변조 속에 언뜻언뜻 보이는 빨강의 강렬함처럼, 짙은 그늘의 어둠도 밝은 세계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그는 1877년에 “생 라자르 역”을 주제로 그렸다. 이것은 이제 밀려닥치기 시작한 기계들에 매료되었던 마네처럼 그도 역시 열광하여 그의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기차는 중요하지 않다. 그의 관심은 여전히 빛의 변화에 있었고, 기차가 내뿜는 증기 위에는 떨어지는 풍부한 다색의 빛을 그려내었다. 그는 1890년 겨울부터 1891년 봄까지 베퇴이유에서 눈과 서리를 그려내었다. “짚단” 연작은 이때에 그려졌다. 그는 쌓인 짚단 위에서 계절과 날씨와 때를 따라서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마술과도 같은 빛을 포착해 내었다. 그의 다른 모든 그림에서도 그렇지만, 특히 이 연작에서 소재는 아무런 아름다움도 가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 평범하고 지루하게 서 있는 이 짚단을 수 십장 그려내면서 모네는 빛으로 이루어진 그림, 빛의 진실이 드러난 그림을 창조해 내었다. 소재란 결국 색과 빛을 묻어나게 하는 핑계거리 불과한 것이다.


그는 동일한 목적과 자세로 1894년에는 “루앙 성당”연작 8장을 그렸다. 건축적 구조의 아름다움은 전혀 그의 관심 밖이었다. 우리는 이 작품들에서 석재의 표면에 들러붙어 있는 것 같은, 스스로 빛을 발하는 생명체 같은 빛의 껍질에 매료당하게 된다. 모네는 1883년 빠리에서 조금 떨어진 지베르니에 정착했다. 이곳에 그 유명한 정원을 만들었다. 가지각색의 꽃들이 항상 피어있는 화원과 버드나무가 둘러쳐 심어지고, 일본식 다리가 놓여진 연꽃으로 이루어진 이곳에서 불후의 걸작들을 산출했다. “수련” 연작은 그의 회화상의 목표를 넘어선 작품들이다. 이 작품들은 빛의 추구라기보다는 그의 범신적이고 불교적인 명상으로 통하는 자연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수련이 있는 연못의 빛나는 심연 빛과 공기와, 물의 향연, 태양의 황금빛 조각들, 대기의 푸른 빛, 은색구름의 흐름, 연곷의 분홍과 연잎이 녹색, 보라색 황혼, 하늘의 높이만큼 깊은 연못, 모네는 자연과 그의 비밀, 깊은 시정, 인간의 영원에 대한 꿈까지도 표현해내었다.

 


모네: 셍 라자르 역 Saint-Lazare Station

1877 (180 Kb); Oil on canvas, 54.3 x 73.6 cm (21 3/8 x 29 in); National Gallery, London


모네와 비슷한 길을 간 화가로 까미유 피사로를 들 수 있다. 그도 처음에는 야외에서 자연을 그대로 그려내는 데에 만족했다. 그래서 그의 초기작들은 “루벵시엔느의 밤나무”처럼 모네의 작품과 쉽게 구별할 수 없다. 그런데 자연을 대하고, 그 느낌을 솔직하게 그려내는 자세는 그림 속에 화가 개인이 성격을 드러나게 한다. 모네와 비교하자면, 그는 더 완만하고 끈질기고 붙임성있는 성격을 가졌다고나 할까?

 


Pissarro, Camille: 빨간 지붕 Red Roofs, 1877

Oil on canvas, 21 1/2 x 25 3/4" (54.5 x 65.6 cm) Musee d'Orsay, Paris

 


그는 다른 인상주의자들이 맑고 투명한 빛이 반짝이는 물가로 모두 떠날 때, 대지에 남았다. 그래섡 한층 거칠고 끈끈한 필치의 그림이 되었다. 그리고 색채에 있어서도 모네의 것보다 더 화려하다. 1877년 작 “빨간 지붕”은 다양한 붉은 색과 초록색들의 조화가 돋보이는 작품이다. 집들의 벽의 흰색과 나무들의 옅은 노랑색들도 잘 어우러지며 대지의 훈기를 느끼게 한다. 모네가 말년까지 직감을 통하여 대상을 표현하고자 했다면, 피사로는 잠시 그 길을 떠났다. 그는 '이차원의 평면 위에 삼차원을 포착하는 과학'에서 멀어져 버린 그들의 작품에 광학이라는 과학을 이용해서 다시 한번 미술에 과학적인 면모를 부여하고 싶어했다. "에라니 초원의 봄날 햇빛"이 신인상주의적인 특징들을 보여 준다. 인상주의 미술작품의 큰 특징의 하나는 보라빛 그늘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그늘은 무슨 색인가?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의 눈은 그늘을 회색으로 본다. 당시에 인상주의자들이 보라색 그늘을 주장했던 것은 광학이 '물체의 그늘은 그 물체의 보색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즉 빨간색 물체의 그림자는 초록색이며, 파랑색 물체의 그림자는 주황색이라는 것이다. 인상주의자들의 주된 소재는 초록과 노랑이 주조가 되는 풍경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그림자는 보라색이 되는 것이다. 인상주의자들은 이를 철저하게 지키지는 않았다. 그들은 과학에 의지하고 있기는 했지만, 직관에 더 많이 의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과학의 미술에의 적용은 신인상주의자들이라 불리는 화가들에게 맡겨진 임무가 된다. 한때 신인상주의에 경도되었던 피사로는 만년에 다시 인상주의로 귀환한다.

 


2. 시정의 삶

인상주의는 주로 풍경화에 국한된다고 할 수 있다. 햇빛, 선명한 색체, 보라색 그늘, 인상 등과 같은 인상주의의 잘 알려진 모든 특성들은 사실 풍경화와 밀접한 것들이다.


테오도르 뒤레가 1906년 "인상주의 화가들의 역사"를 출판했을 때, 여기서 그는 피사로, 끌로드 모네, 시슬레, 르누아르, 베르트 모리조, 세잔느, 기요맹 등 대상의 재현에서 새로운 시각을 가졌던 풍경화가들만을 언급한다. 에두아르 마네는 첫머리에 언급되었으나, 드가와 라파엘라, 포렝, 까이유봇트는 언급되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인상주의 전람회에 열심히 출품했던, 새로운 미술을 위한 투쟁의 동반자들이었다. 이들의 여러 개성을 제외한다면, 인상주의는 빈약한 운동에 그칠 따름이며, 아카데미즘으로부터 벗어나는 다양한 아름다움에 대한 주장과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을 실현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인상주의는 빛의 진실을 추구하는 운동으로서 그 개념이 축소될 수 있는 미술운동이 아니다. 과거의 미술체계가 만들어져 가는 혼란기에 있었던 모든 시도들을 한데 묶는 미술운동에 대한 이름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여기에 풍경화라기보다는 인물화가인 삐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와 주로 인물화만을 그렸던 에드가 드가 그리고 한 세대 건너 있는 뚤루즈 드 로트렉을 추가할 수 있다.

 


Renoir, Pierre-Auguste: 물랭 드 라 갈렛뜨의 무도회, Le Moulin de la Galette, 1876, Oil on canvas

51 5/8 x 68 7/8 in. (131 x 175 cm)

Musee d'Orsay, Paris


사랑스러운 여인과 아름다운 꽃의 화가로 알려진 삐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는 처음부터 인상주의 그룹에 참가했고, 빛을 추적하는 그들의 새로운 시각을 화면에 재현했다. 그는 2회 인상주의 전람회에 “숲속의 누드”를 출품했다. 그래서 알베로 볼프로부터 ‘여인의 토르소를 그리는 일이 시체이 완전한 부패를 연상시키는 녹색과 보라색 반점으로 썩어가는 살덩어리들의 집합을 그리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한다.’는 비난을 받는다. 그는 모네와 이웃에서 살았으면서도 풍경화에는 큰 흥미를 갖지 못했던 듯하다. 주로 인물화를 그렸고, “숲속의 누드”에서 보듯이 인체의 미를 빛과 함께 추구했으나, 점점 인물들의 몸에 떨어지는 빛이 조각들에는 무심해진다. “물렝 드 라 걀렛트의 무도회”에서도 알록달록하게 빛나는 빛들은 부차적일 따름이다. 그는 춤추고, 즐거운 대화를 나누는 밝고 신선한 매력을 가진 젊은 연인들의 경쾌한 몸짓과 사랑스러운 미소들에 더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르누아르는 1876년경부터 먹고살기 위해서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고, 곧 부르주아 사회에서 각광받는 초상화가가 되었다. 이탈리아의 여행 동안 라파엘로에게서 감동받은 듯, 한동안은 색채보다 데생을 더 중요시하는 그림을 그렸다. “도시의 무도회”와 “시골의 무도회”가 이 시기에 그려진 작품이다.


아름답고 행복한 장면만을 찾아 그려낸 르누아르는 인상주의자들 중에서 가장 불우한 청년기를 보냈던 화가이다. 도공의 아들로 태어나서, 도자기 공장에서 일을 했던 그는 에꼴 데 보자르에 입학해서도 물감을 구입할 돈을 쉽게 구입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친구들의 도움으로 근근히 제작할 수 있었는데,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그는 낙천적인 성격을 간직하고 있었다. 르누아르의 아름다운 예술은 이러한 낙천적 성격에서 흘러나왔다. 그는 행복한 인간들을 자기 주위의 어느 곳에서나 발견해낼 수 있었고, 그들을 최상의 모습으로 그려내었다. 그의 주된 소재는 그래서 여인, 아이들, 꽃과 같은 가장 생기있고 발랄한 것들이었으며, 그는 그만의 독특한 화려한 색채들과 부드러운 필치로 이를 실현해 내었다.


에드가 드가는 1789년 혁명 때 나폴리로 이민간 브레따뉴 지방의 귀족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은행가였고, 어머니는 미국 뉴올리언즈의 부유한 집안 태생이었다. 그는 빠리와 로마, 나폴리, 피렌체를 여행하며 그림을 공부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젊은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1855년 에꼴데 보자르에 입학한 드가는 고전미술에 대단한 흥미를 가졌다. 1865년부터 살롱전에 전시하기 시작했다. 1870년 보불전쟁에 참가하느라 중단했고, 미국여행을 마치고, 1873년 귀국한 후에 인상주의자들과 만난다.


이러한 경력의 드가를 인상주의자라고 하기에는 조금 어색할 정도로 그의 화법은 아카데미즘의 것에 더 가깝다. 사실 그의 작품은 살롱전에 더 잘 어울린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그는 살롱전에 참가하기보다는 인상주의 전람회에 참가하기를 더 좋아했다. 그는 이 전람회에 가장 여러 번 참가한 화가이다. 인상주의의 대표자 격인 끌로드 모네조차도 회원들과의 불화로 3번 불참했는데, 그는 1882년 전시회를 제외하고 7회 동안 참가했다.


인상을 포착하는 화가들과는 달리 드가는 매우 탐구적이었다. 발레리나들과 악사들, 다림질하는 여자들, 술 마시는 사람들 등등을 완벽하게 그리기 위해 수없이 많은 데생과 스케치를 했다. 그리고 각개의 불완전한 것들을 악착같이 교정했다. 그 스스로 그의 예술이 즉흥적이지 않다고 했으며, 완벽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열 번 스무 번 반복해야 된다고 말한다.



Degas, Edgar: 다림질하는 여인들, Les repasseuses (Women Ironing), 1884

Oil on canvas,

29 7/8 x 31 7/8 in. (76 x 81 cm)

Musee d'Orsay, Paris


길을 지나가다가 우연히 목격한 듯한 “다림질하는 여인들”같은 작품들은 사실은 치밀한 관찰과 끝없는 수정의 결과인 것이다. 가장 순간적인 장면을 그려내기 위하여, 가장 오랫동안 관찰한 화가가 드가이다. 그는 가장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당시 사회를 묘사할 수 있었다.

 

그의 그림들은 이 냉정한 객관성 때문인지, 혹은 1875년부터 급격히 나빠진 경제사정 때문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매우 우울해보인다. 민첩하고 정확히 극에 달한 달필이지만 그의 그림들은 항상 차갑다. 그의 조카가 그려진, 아름답지만 쌀쌀한 느낌을 주는 표정의 “젊은 여인의 초상”과 르누아르의 천진하고, 화사하기 만한 “책 읽는 여인”을 비교해 보면 드가의 냉정함을 단적으로 볼 수 있다.


1860년대 말 일본의 목판화를 접한 후부터 그의 구도는 주제를 자주 화면의 가장자리로 몰아낸다. 또한 드가는 그가 그려낸 장면의 중심에 있지도 않다. 그의 주제 또한 항상 예기치 못한 것들이었다. 예컨데 그의 수없이 많은 발레 연작들 중에 발레의 극치인 공연장면은 거의 없다. “오페라의 발레 연습실”처럼 연습중이거나 공연이 끝난 후의 땀냄새 나는 듯한 장면만을 그려내었다. 또한 그는 그 주변을 돌아다니면서 차가운 렌즈를 들이대는 관찰자이기를 고집한다. 드가는 르누아르처럼 행복하고, 안정된 아름다운 구성 대신에, 스쳐지나가는 짧은 순간에 포착된 찰나적인 장면을 원했던 것이다.

 


Edgar De Gas: 오페라의 발레 연습실 Dance Lesson,

1872, 32x46cm.

Oil on Canvas

Paris, Musee d'Orsay


모네는 빛이 순간적인 변화와 인상을 재현했다. 그렇다면 시정에서 일어나는 인간사의 파노라마의 한 순간적인 장면을 포착하는 드가 역시 인상주의자라고 부를 수 있지 않겠는가? 그의 색채는 아카데미의 교육과는 전혀 달랐고 그의 구성 또한 예외적이었기 때문이다.


3. 빛의 과학


제 1회 영데빵당 전시회는 전신우체국 사업을 잠정적으로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바라크에서 1884년 살롱전에 낙선한 작가들에 의해 열렸다. 402명이 참가했는데, 이중에는 살롱전에 출품하지도 않았던 작가들도 있다.

 


Degas, Edgar: 젊은 여인의 초상, Portrait of a Young Woman, 1867

Oil on canvas

10 5/8 x 8 5/8 in (27 x 22 cm)

Musee d'Orsay, Paris


 

이들에게는 대중들에게 작품을 보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왜냐하면 그 당시까지는 어느 화랑도 개인전이나 단체전을 기획하지 않았다. 당시까지는 살롱전이 대중과의 접촉을 위한 유일한 전시회였다. 이 밖에는 인상주의전이라는 무명, 미친놈들의 전시회가 있었다.

 


르느와르: 책읽는 여인

Woman Reading

1874, 47 x 39 cm,

Oil on Canvas

Paris, Musee d'Orsay


조르뉴 쇠라는 1884년 살롱전에 “아니에르의 수욕”을 출품하였으나 낙선하고, 이를 엥데빵당전에 출품했다. 형태들을 단순화하고 견고하게 한 이 작품은 ‘분할기법’을 사용하여 그렸다. 분할기법이란 보색대비의 법칙을 이용한 것이다. 폴 시냑도 이 전시회에 “오스테리츠 다리”를 출품하였는데, 인상주의 화풍의 영향을 받고 있다. 그는 빠렛뜨에서 섞지 않은 프리즘의 색채만을 화면 위에 병치시켰다. 이들의 방법은 발전하여 제 8회 인상주의 전람회에 순수하고 분할되고 균형있는 색채들이 이성적인 기법에 따라 그려진 본격적인 신인상주의 그림이 나왔다. 그들은 가장 순수한 색들을 사용해서 그림을 그린다. 빨강, 파랑, 노랑이 기본색이고, 주황, 초록, 보라가 이차색이다. 만약에 주황과 노랑 사이에 있는 색을 표현하려 한다면, 이들은 주황과 노랑을 화면 위에 나란히 칠해 놓는다. 색채를 혼합하면 그 선명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병치된 두 색을 우리의 망막이 혼합해서 보게 된다.

 


Seurat, Georges: 아니에르의 수욕 Bathers at Asnieres

1883-84 (retouched 1887)

Oil on Canvas, 79 x 118 1/2 in

National Gallery, London


분할의 세부적인 방법으로는 우선 순색들만의 시각적 혼합방법을 사용하고 대상물의 색, 조명된 색, 이들의 반사색 등등으로 다양한 요소들을 분리하고, 화면의 크기에 따른 붓의 크기를 선택해서 제작하는 것을 말한다.


우리는 신인상주의자들을 점묘파라고 부르고 있다. 그런데 이 분할기법은 초라한 점묘법과는 매우 다른 것이다. 점묘라는 것은 색채를 펼치는 것보다는 점으로 찍어나가는 것으로 균형의 의지도, 대조에 대한 근심도 없다. 점은 붓자국에 불과할 따름이다. 신인상주의자들은 점묘주의자들이란 말을 항상 싫어했다. 그들은 색채-광휘주의자라는 호칭을 좋아했으며, 그들의 선구자인 인상주의자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신인상주의라는 호칭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시각적 혼합의 광도는 색채 혼합의 광도보다 높다. 그러나 이 분할기법을 정확하게 시행하기 위해서는 화가는 직감이나 영감, 탄력있는 필치, 움직임, 동세 등등 많은 것을 희생해야 했다. 들라크루아는 색채의 풍부함과 조화를 원했고, 인상주의자들은 강조되거나 혹은 완화되어 조절된 핵채의 빛남을 원했다. 그런데 신안상주의자들은 색채를 희생시키면서까지도 빛의 지배를 원했다. 그들은 이것을 색채를 시각적으로 혼합하고, 필촉을 분할하는 방법으로 달성했고, 또한 그들의 이론도 험잡을 곳이 없었지만, 이론이 작품을 완성하는 것은 아니다. 작품에 세심하게 적용된 과학은 정적이고 차갑고, 동일하게 그려진 작품들만을 생산했다. 피사로가 만년에 다시 인상주의의 직감적인 회화기법으로 되돌아간 것은 신인상주의 화법의 이러한 약점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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