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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니에리즘(Manierism)과 초현실주의(Surrealism) 사진의 미학

작성자김영태|작성시간05.01.31|조회수310 목록 댓글 1


제2회 사진평론상 가작당선자, 진동선

 

 

듀안 마이클과 에머트 고윈 사진에 나타난 보이어리즘을 중심으로
 
I
역사에는 시대마다 그 시대의 요구에 따른 변천이 있는데 역사의 일부인 예술도 예외일 수 없다. 미술의 역사는 헬레니즘시대와 중세 르네상스가 구분되고 19세기 인상주의에서 표현주의, 다다이즘으로 이어져 왔다. 이러한 흐름은 진정한 삶과 함께 하는 예술은 언제나 낡은 껍질을 벗어버림으로써 가능하다는 점에서 필연이며, 예술가들이 인상적이고 관념적인 형태와 인식을 끊임없이 부수며 한 시대에 새로운 장을 마련한 결과였다.
사진술의 등장과 함께 그것으로 인한 근대와 현대미술, 특히 구성회화에 끼친 절대적 영향과 그것에 관한 굴절 많은 발자취를 더듬는다는 것, 그 자체가 아마도 근대 현대회화의 매우 흥미있는 측면사를 더듬어 보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사진은 19세기 후반 이래의 회화의 향방과 그 성격규정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사진술을 받아들이는 회화의 입장을 곧 회화자체의 방향과 성격을 규정짓는 것이 되기도 했다. 그리하여 당초에는 회화에 대한 커다란 위험으로 등장했던 사진술이 특히 현대회화에 이르러 회화언어의 가장 중요한 미디어의 하나로서 군림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 회화적 표현 및 이에 대한 개념자체의 변질과 회화영역의 새로운 확장을 가져다 주기도 했다.
20세기 과학의 발달은 카메라의 자동화를 촉진시킴으로써 사진제작의 용이성을 더해 왔다. 사진의 카메라를 통해서 제작되어진다는 용이함과 그 간접적 요소 때문에,그리고 ‘하나(Originality)’라는 절대적인 가치를 잃게 하는 세속적 요소 때문에 예술의 존재성은 많은 논쟁을 남겨왔다. 아마도 픽토리얼사진, 스트레이트사진 등의 명칭들은 이런 사실에 대한 하나의 답을 얻어내고자 했던 노력의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기계, 기술의 진보가 가져다 주는 카메라의 자동화 현상은 인간이 매체를 통하지 않고 어려운 수공을 통해 제작하는 활동을 예술창작의 근원이라 생각하는 점에 재고찰을 하게 하였으며, 또한 인쇄술 발달 역시 예술의 세속화를 강화시키고 있는 이 시점에서 확실히 예술에 대한 전근대적인 정의는 변화되었다고 하는 것이 옳겠다.

1839년 사진 발명의 공식적인 발표 이후, 사진은 인간의 생활자체가 되기도 하였고 한때는 회화의 시녀가 되기도 하였으며, 19세기 말에는 회화가 사진에게 묘사기능을 포기하고 회화자체의 자율성 즉, 순수성을 추구하도록 하였다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둘의 상·하의 개념은 무너지고 동일한 차원으로 변모하여 왔다 피터 타우스크(Peter Tausk)의 저서 ‘일백 년 사진의 환영(Geschichte der Fotografie im wo Jahrhundert)’은 예술로서 사진을 의심치 않고 미학적인 면에서도 체계적으로 분류한 훌륭한 책으로서 위의 사실에 좋은 예를 보여준다.
본 글에서는 사진 예술성의 존재여지에 대한 해묵은 문제에 머무르지 않고 사진이 수행해 온 결과들이 미술사에서 얼마만한 효과를 발휘했는가를 살펴봄으로써 더욱 확실한 사진미학의 위치를 정립함이 그 첫째 목적이라 하겠다. 특히, 20세기에 와서 고전주의의 합리성에서 벗어나려는 내적 통찰력(Inner vision)을 통해 긍정적으로 해석되고 있는 마니에리즘(Manierism)1)과 20세기 회화에서 마니에리즘의 영향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는 초현실주의(Surrealism)2)를 미술사에서 끄집어 내어서 그것들이 주장하고자 하는 것을 찾아보고 여기에 사진이 어떠한 방법으로 만나고 있는지를 규명해 보기로 하겠다. 둘째는 보이어리즘(Voyeurism)3)을 통해 초현실주의 사진에 나타난 미학적 해석을 듀안 마이클(Duane Michals)4)과 에머트 고윈(Emmet Gowin)5)의 작품세계를 통해 살펴 보는 것이다.
즉 자연주의적이면서도 반자연주의적이고, 합리적이면서도 지극히 비합리적인 전통과 혁신 사이에서 오는 긴장 상태, 인간의 위기의식과 불확실성을 표출하고 있는 이 두 개의 이즘(ism)에서의 사진은 현실이면서도 말하자면 대상에 철저히 묶여서 ‘기록’하면서도 이들의 비현실화 작업을 어떻게 수행해내며 동시에 놀라운 미학적인 효과를 가져다 주는가를 살펴본다. 방법에 있어서는 편리상 사진에 나타나 있는 외면적인 표현방법에 따라 분류해서 분석을 해보지만, 결국에는 사진이 인습적으로 사용되지 않고 고전적인 시야에서 벗어나서 실험되고 응용되어진 마니에리즘과 보이어리즘적인 초현실주의 사진 시각과의 만남을 기본개념으로 한다.


개인이 목표를 향해서 행하고 결과의 만족을 희구할 때 그것은 순전히 한 개인을 위해 일어나고 행하는 행위뿐만은 아니다. 즉 개인과 사회, 인간과 문화 사이에는 의식치 못하는 하나의 상수가 존재하고 있다. 사회적 동물로서 인간은 특정 개인이 문화의 능동적인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으며, 둘 사이에 잠재되어 있는 상수에 대해 거의 수동적인 태도를 취하기 쉽다. 즉, 사회적 상황이 심리적 상황을 유도한다고 할 수 있겠다. 모순적인 체계를 갖고 있는 사회적 배경은 이중 감정이나 심리적 복선유발이 가능하며, 인간이 행하는 혁명적인 예술운동과 불안정한 정치구조 그리고 사회구조 사이의 상호 관계는 그래서 더욱 복잡해질 ?밖에 없다.
마니에리즘의 정적인 르네상스와 동적인 바로크시대 사이에 끼여 피할 수 없는 불균형의 사회상황에 의해 심리적 불균형을 불러일으킨 결과이다. 16세기 로마의 약탈, 이태리 경제적 우위의 흔들림, 종교개혁에 의한 사회적 동요는 동(同)시대의 인간 심리적 불확실성을 자극했다. 이미 사회적 조화와 안정이란 기분은 들 수 없으며, 이성과 전통에 의한 모든 양식과 질서의 지배를 받았던 정교하고도 체계적으로 표현된 삶에 대한 신념이 붕괴되었다. 그래서 당시 예술 또한 인간의 감각기관에서 생겨나와 균형을 취하려한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은 어차피 이상일 뿐이지 자연, 즉 위기감이 고조된 사회 자체는 아니였던 것이다.
초현실주의 미학은 20세기에서 가장 마니에리즘적인 성격을 진하게 표출하고 있다. 구스타브 렘 호크(Gustav Reme Hocke, 1908 ~, 독일문학자, 철학자)는 “유럽에서의 마니에리즘은 기원전부터 존재해 왔으나, 16세기에는 의식적이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고, 그 영향은 20세기까지 미친다”고 한적이 있으며, 아놀드 하우저(Arnold Hauser, 헝가리, 1948년 영국으로 귀화한 미술사학자)는 “초현실주의는 마니에리즘 경향의 가장 순수한 형태”라 하였다.
현실은 예술가들에게는 불확실한 것이다. 그것을 경험한 예술가는 더 이상 현실에 의존하려 하지 않고 믿으려 하지 않는다. 현실은 마니에리스트(Manieriste)들에게는 기이하고 미궁과 같은 것이 되었고, 초현실주의자들에게는 경악스럽고 환상적으로 변화하는 것이 되었다. 그들이 기존 질서와 조화를 인정하고 전통을 따르는 것은 삶에 대한 신념이 무너져버린 느낌을 갖게 된 자신들을 배반하는 행위가 되기 때문에 응당 철저히 거부하는 몸짓의 표현이 되었다. 예술사에서 하나의 양식이란 자연발행적이질 못한다. 하나의 양식 속에는 그 시대를 암시하는 정신사를 내포하고 있다. 마니에리즘과 초현실주의 미학은 현존사회에 대한 신뢰감의 부정, 허무, 경멸감을 갖게 하고, 나약한 예술을 다시금 생각하고 때론 파괴적이기도 하다가는 지극히 암시적인 내면적 변화에서는 예술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갖는다. 흔히들 위와 같은 현상들을 과도기적 성격이라 쉽게 규정짓는다. 그러나 역사 속에서 과도기가 아닌 시대는 있을 수 없다. 하지만 마니에리즘과 초현실주의의 시대적 배경은 어느 시대보다도 더욱 과도기이다.
1925년 1월 29일 초현실주의 선언문에 의하면 “초현실주의는 새로운 표현수단도, 과거의 것보다 더 간단한 것도 아니고 또 시대의 형이상학은 더욱 아니다. 초현실주의는 정신세계와 또 이와 유사한 모든 것의 완전한 해방이다”라고 표기되어 있다.
현실세계는 일견 조화스러운 듯 하여도 극히 비합리적이며 조화스럽지 못하다. 이런 모순은 때때로 모순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런 사실에 대한 인지가 20세기 초 초현실주의 선언문에 나타난 ‘정신체계의 해방’을 의미하며, 마니에리즘이 20세기에 와서 다시 평가되어지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가 여기 있다 하겠다. 즉, 인류문화사에 고전주의라는 인간이성이 지배하는 절대적인 미에 대항하는 정신혁명을 마니에리즘과 초현실주의는 묵묵히 행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은 기존형식으로는 현실세계를 항상 ‘암시’만할 뿐이지 설명할 수는 없다는 긴장감을 낳음으로써 고전주의에서 벗어나는 자유를 누렸다. 20세기 초현실주의가 외적인 현실과 내적인 현실의 일체화를 그 최고 목표로 한 이상, 이성과 비이성이 융합되어진 즉 일체화 되어진 세계의 본질이란 의미는 마니에리스트들이 암시하고 있는 기이하게 왜곡되어진 세계의 동시적 공존이 그 본질이며, 서로 다른 양식적 요소들 사이의 긴장감과 모순 속에서 만이 가장 순수하게 표현된다는 의미와 같은 것이다.
마니에리스트와 초현실주의자들의 미학이란 모순된 사물을 선택함으로써 우리들로 하여금 모두 긴장 속에서 서로가 역반응을 일으키는 대립물 속에 던져져 있음을 깨닫게 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 정신사적 선구자들은 이성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유로워진 영혼이 인간이성에 의해 지배 받는 합리성을 대신하여 모순과 갈등에 대한 가장 진실된 예술표현의 원리를 두고 그것을 심화시키려 하였다. 무한한 상상력에 의한 행위, 이것은 결국 인간해방을 의미한다.
그들은 분명 초감각적이고 초현실적인 방법으로써 결코 기존의 예술의 한 형식으로는 대신할 수 없는 암시와 긴장감 속의 일치를 추구하려 했으며, 무질서한 세계에 질서를 갖춰 주고자 하는 노력의 시도는 그들에게는 조화를 향하는 열쇠가 되었다. 초현실주의의 거장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 ~ 1984, 스페인 출신의 초현실주의화가)는 영원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인 ‘눈의 속임수(From pel’oeil)’적인 환상의 극대화로 비합리적이고 환상적인 사고를 전달하기도 했다.
초현실주의는 확실히 극단적이 환상의 세계를 현실과 일치시키고자 하는 행위이다. 내적 세계와 외적세계와의 화해, 의식과 무의식과의 화해, 자연주의와 비자연주의와의 화해를 원하며 요컨대 그들의 행위는 조화된 부조화의 현실체계를 다시 조화 자체에는 무관하게 짐지워졌는가에 대한 이유를 밝히려는 자발적인 몸짓이기도 하다.

1859년 나다르(Nadar, 1820 ~ 1910, 프랑스 사진가, 본명은 가스빠르 펠릭스 토나송(Gaspard Felix Tournachon))가 처음으로 기구에 올라 파리시가지 촬영을 시도했을 때, 오노르 다미에르(Honore Daumier, 1819 ~ 1979, 프랑스 낭만파 화가이면서 풍자만화가)는 만화로써 사진이 예술적 경지에로 도약하려 함을 조롱했다. 그러나 나다르가 사진제작 활동을 한 1850 ~ 60년은 회화에서는 쿠베르(G. Courbert, 1819 ~ 77)의 사실주의가 전성기에 처해 있었기 때문에 나다르가 이런 외부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상상하기는 어려우나 그의 사진이 르네상스 이후 500년에 결쳐 회화를 지배해 온 선원근법 체계로부터 해방을 구체화시켰다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비록 직업상의 관심에서 지작되었지만 그의 조감 영상은 수평에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좌우되는 영상공간은 파기되고 대상이 이화되는 현상을 만들었고, 그로 하여금 우리들을 르네상스 이후 지속되어 온 수평적 영상관습에서 이탈하게 했다. 왜냐하면 이같은 선원근법에 의한 공간구성의 수학적 정확성은 경험적인 정확성과는 아주 드물게 일치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기에 피터 헨리 에머슨(Peter Henry Emerson, 1856 ~ 1936, 영국에 살고 있던 미국인 의사)이 자연주의 사진을 제창하면서 인간의 눈과 유사하게 보이게끔 하기 위해 초점 이외의 것은 약간 흐리게 하도록 주창하였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실제로 본다는 사실은 카메라가 정확하게 사람의 눈과 비슷하게 즉, 초점글라스(Ground Glass)가 각막과 비슷하다고 해도 실제로 각막과 연결된 것이 아니고 상에 의해 대뇌의 후두엽에 있는 시각막 중에서 생기는 매우 복잡한 과정의 결과이다.
마니에리즘 시대의 대표적인 화가 파미지아니노(Parmigiannino)가 1524년에 제작한 자화상에서 마치 어안렌즈에 의해 촬영된 것처럼 앞쪽의 손은 기이하리만큼 크게 과장하고, 뒷쪽의 창문은 둥글게 휘어져 묘사하려 했던 것은 그 시대의 신선한 충격으로 보여진다. 이 시대의 심리적 모순과 사회적인 불안을 이런 종류의 초상화 하나에서도 충분히 읽어낼 수 있다. 우리의 경험을 기준으로 하여 그림 속에 어느 하나라도 재는 것을 거부하듯, 더군다나 자연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름다움이라고 예기하는 듯, 심하게 뒤틀어진 현실 속에서도 어떠한 동요없이 침착하게 바라보는 볼록거울에 비쳐진 자신을 그렸다. 마니에리즘 시대의 카메라의 발명이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상을 왜곡시키는 거울이 15세기 이래 친밀한 실내장식품으로서 쉽게 광학과 예술의 만남은 이루질 수 있었고 그 환상적인 분위기를 마니에리스트들은 애호했다. 이런 왜곡되어진 원근법에서 오는 기이한 효과를 20세기의 빌 브란트(Bill Brandt, 1904 ~ 1983, 영국사진가)에머트 고윈의 사진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빌 브란트의 ‘Perspective of Nudes’와 에미트 고윈이 그의 가족을 즐겨찍은 사진 중에서 아니를 소재로 한 ‘Edith’는 파미지아니노의 자화상에서 풍기는 휘어져서 기이하게 되어버린 분위기와 다를 바 없지만, 왜곡되어진 침착한 분위기와는 달라 한가하게 휴식을 취하는 자세가 과장된 원근법에 의해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을 갖게한다.
20세기 마니에리스트의 거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달리가 1951년에 제작한 ‘책형도’는 완전한 조감구도를 사용한 유화작품으로서 미술사에서는 흔히들 ‘변형된’ 도구라고 언급되어진다. 그의 조감구도는 그리스도가 우주의 통일자라는 생각을 주는 형이상학적인 면까지 그 효과를 주었고, 카메라에서 하이앵글과 같은 조감구도를 이용하여 구성상의 양식뿐 아니라 내용의 변화를 얻는 장점까지 누렸다. 이러한 효과는 20세기 사진에서 허다하게 찾아볼 수 있다.
알렉산더 로드켄코(Alexander Rodchenko, 1891 ` 1956, 러시아 전위예술운동에 있어서 가장 현대적인 화가이자 사진가 중의 한사람)가 그림에서 사진으로 전향하여 제작한 ‘At the Telephone, 1928’에서의 과감한 하이앵글 촬영은 아주 흔한 일상생활의 광경을 흔하지 않은 영상으로 변화시켜서 비현실감을 주고 더욱이 추상적이기까지 하다. 이것은 그의 전적인 화가의 안목에서 온 결과라고도 할 수 있겠다.
이같이 전적 화가에 의해서 만들어진 하이앵글 기법의 절정은 모홀리 나기(Moholy Nagy, 1895 ~ 1946, 헝가리 출신의 세계적 조형주의자이자 사진가)에서 개화된다. 시점에 있어서 모홀리 나기 만큼 폭넓고 멀리 바라본 사진가는 없다. 그는 인간의 신체적인 감각의 한계를 뛰어넘어 시간과 공간의 자원에서 대상을 새롭게 발견한 가장 완벽한 사람이었다.


보이어리즘(Voyeurism, 관 주의 :훔쳐보기)은 말 그대로 타인의 나체나 성행위를 훔쳐보고 만족을 얻는 성적 도착주의를 말한다. 인간이 성(性)에 눈뜬 이래 훔쳐보기 만큼 강렬하고 짜릿한 엑스터시(Excitacy)를 피할 수 없었듯이 초현실주의자들에게도 보이어리즘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마니에리즘을 거쳐 초현실주의에 이르는 과정은 오브제로서 성을 진하게 암시해 왔다. 초현실주의자들의 성에 대한 보이어리즘적 경향에는 가장 열정적이고 불균형을 수반하는 이중감정과 심리적 복선이 깔려 있다. 초현실주의 사진가들이 성을 매개로 한 고전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실험하고 왜곡시킬 의도로 보여지는 보이어리즘적 실마리는 잠재적인 성적 본능과 폭력의 강박관념이다.
보이어리즘은 융과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 이전의 성적 역사이며, ‘들여다보는 구멍(Peep hole)’의 앞, 뒷면은 의식과 무의식의 긴장상태다. 현실과 초현실의 좌표축은 핍호(Peep hole) 직경의 크기와 길이, 그리고 심리적 상수가 존재한다.
듀안 마이클과 에머트 고윈은 보이어리즘 경향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는 초현실주의 사진가라 하겠다. 초현실주의 사진가들의 특징은 현실세계를 비정형적 방법이나 수단을 통해서 극복해 보려는 메카니즘적 특성과 무의식의 세계를 은유와 상징을 통해서 재현해보려는 심리적 긴장을 함께 갖고 있다.
초현실주의 회화주의자, 예를 들면 르네 마그리트, 살바도르 달리, 막스 에른스트의 회화는 풍부하고 자유스럽기까지한 인간의 상상력으로 현실과 비현실, 의지와 무의지의 세계를 연출하는데 반해 초현실주의 사진가들, 예를 들면 만 레이, 율스만과 같은 작가들은 렌즈의 광학적 메카니즘이나 암실 테크닉을 통한 이미지 병치(Juxta Position)에 의해서 주로 초현실세계를 표현해 왔다 하겠다. 듀안 마이클과 에머트 고윈은 초현실주의 사진가로서 비교적 초현실주의 회화주의자의 개념을 적절히 활용한 대표적 작가로 보여진다. 초현실주의 이론적 모티브는 성과 무의식의 세계다. 듀안 마이클의 사진은 칼 융과 프로이드의 무의식의 세계, 잠재적 성적본능과 강박관념을 영화적 재현방법으로 선보인 연작사진(Sequence Photographs)이 특징이다. 그는 정사진이 주는 일회적 영상과 시·공간을 포기한 대신 관념을 중요시하여 모방, 문자, 기호, 상징을 통한 알레고리(비유) 창출로 억압된 성, 무의식의 세계를 마음껏 발산하였다.
마이클의 초현실주의 연작사진은 대부분 현실공간(일상공간)과 비현실공간(초월적 공간)의 매개체인 보이어리즘에 의존하다. 듀안 마이클의 ‘추락한 천사’(The Fallen Angel, 1968), ‘Real Dreams’(1976)을 포함한 대표적 연작사진은 그가 직접 무대(Set)를 만들고 진행시킨 의식의 세계(Real time)와 그 속에서 일어나는 무의식의 세계(Surreal time)를 중첩시켜가면서 훔쳐낸다. 보이어리즘을 통해 훔쳐내고 즐기고 마음껏 에스터시를 느끼는 감독은 실제 마이클 자신이다. 감독은 ‘암시’만 할 뿐이지 실연(實演)하지 않는다. 극 속의 주인공을 통해 자신을 드러낼 뿐 무대밖에 숨어서 억압된 성을 발산한다. 보이어리즘은 ‘기억’과 ‘눈요기’라는 듀안 마이클의 초현실주의 사진세계의 핵심적 개념이라 하겠다.
에머트 고윈의 초현실세계는 성적 상징성을 매개로 한 보이어리즘을 근거로 하는 점에서는 듀안 마이클을 능가한다. 고윈이 마이클과 다른 점이 있다면 마이클이 기계적 메카니즘 보다는 관념적 메카니즘에 관심이 더 있었다는 점에 비해 에머트 고윈은 단사진의 리얼리티를 최대한으로 존중하면서 카메라 포맷의 다양성, 카메라 앵글, 촬영거리의 사진적 메카니즘을 충실히 따랐다는 점이라 하겠다.
고윈의 초현실주의 사진의 특징은 마이클처럼 자신을 더욱 드러내지 않고 철저히 숨기는 보이어리즘적 사진의 또 다른 전형이다. 자신의 아니(Edith)를 오브제로 선택한 고윈의 작품은 훨씬 적나라한 훔쳐보기이다.
고윈의 사진은 흑으로 둘러싸인 이미지 서클(Image Circle)속의 Edith를 성의 상장화로 전환시켰으며, 빈 공간 속에서 무표정한 Edith의 형상은 사방의 창을 통해 쏟아지는 백색 빛과 백색커튼 그리고 백색 침대와 함께 오버 랩 된다. 이미지 서클은 소우주를 상징하며 창은 의식과 무의식의 통로이다. 고윈가 마이클의 초현실주의 사진에서는 마니에리즘과 보이어리즘 미학을 창과 원을 통해 확실히 공인된 훔쳐보기를 진행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 20세기에서 마니에리즘의 영향이 가장 순수한 형태로 나타나는 초현실주의를 미술사에서 끄집어내어서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마니에리즘을 통해 찾아보았다.
또한 전통과 혁신 속에서, 현실과 초현실속에서, 억압된 성을 다스리고 잠재의식의 폭력성까지도 철저히 표현해 온 초현실주의 사진의 대표적 전형을 듀안 마이클 사진과 에머트 고윈 사진의 초현실주의 미학 속에 감춰진 보이어리즘을 통해서 새롭게 해석해 보았다.

1) 마이에리즘(Manierisme(불), Mannerism(영)) : 불란서, 이태리를 중심으로 고전적 미학에 의한 조화와 균형을 거부하고 왜곡된 형상, 비례의 변형, 성에 대한 심리적 갈등묘사를 특징으로 하는 16세기 예술양식의 하나
2) 초현실주의(Surrealisme(불), Surrealism(영)) :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인 물질의 배열에 의해 실제세계를 비정형화된 이상세계로 표출하고, 억압된 성적욕구와 꿈과 같은 잠재된 무의식의 세계를 현실공간과 비현실공간의 중첩이나 변형을 통해 재현하려 했다. 20세기 근대예술 사조의 하나.
3) 보이어리즘(Voyeurism(불), Voyeurism(영)) : 관음주의, 구멍(Peeping hole)이나 창문을 통해 타인의 나체나 성 행위장면을 훔쳐보고 만족을 얻는 성적 도착주의를 말하며 16세기 마니에리즘에서는 삽화(Illustration)를 통해서 그리고 20세기 초현실주의 미학에서는 그림이나 사진을 통해서 표현되는 성적 관념주의를 말함.
4) 듀안 마이클(Duane Michals, 미국사진가) : 초현실주의 사진가라기 보다는 개념미술가 혹은 아티스트로 불리워져야 할 미국 사진가로서 연작사진을 통해 잠재의식 속의 성적 문제에 대해 시·공간을 초월하여 심도있게 표현해 왔다.
5) 에머트 고윈(Emmet Gowin, 1941 ~, 미국사진가) : 작품에 우주에 대한 초월주의 예술개념을 도입시킨 사진가로서 자신의 아내(Edith)를 통해 근원적인 성에 대한 신비, 소우주적 자연 그리고 관능적 물질세계와의 대비를 통해 초월세계를 형상화 한 사진가.

< 참 고 문 헌 >
1. 니코흐 스텐고스, 현대미술의 개념, 런던 1983
   (Nikos Stangos, Concepts of Modern art, London 1983)
2. 피터 타우스크, 20세기 사진, 포칼프레스, 런던 1980
   (Peter Tausk, Photography in the 20th Century, Focal Press, London 1980)
3. 달리 살바도르, 살바도르 달리의 비밀의 삶, 런던 1942
   (Dali Salvador, The Secret Life of Salvador Dali, London 1942)
4. 조나단 그린, 비평적 역사로서의 미국사진, 아브람스 1984
   (Jonathan Green, A Critical History American Photography, Abrams 1984)
5. 최기득 편역, 현대회화의 원리, 미진사, 1989
6. 아론 샤프 / 문범 역, 미술과 사진, 미진사, 1989
7. 뷰먼트 뉴홀 / 정진국 역, 사진의 역사, 열화당, 1989
8. 프로이드 / 김성태 역, 정신분석입문, 삼성사, 1982
9. 육명심저, 세계사진가론, 열화당, 1987
10. 계간미술, 현대미술비평 30선, 중앙일보 계간미술, 1987
11. 박미현, 19세기 이후 현대미술과 사진과의 연관성, 1990
12. 이영환 저, 서양미술사, 박영사, 1973

[ 심 사 평]
한 해를 걸러서 공모한 사진평론상의 응모작은 역시 기대에 못 미치는 숫자였다. 창작이 발전하는 데는 비평의 역할이 절대적인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사진평론이 불모지인 것은 과연 무엇 때문일까? 회의와 함께 만감이 교차하는 가운데 응모작 6편을 검토해 보았다. 1회 때보다 2편이 많았고, 수준도 다소 높아진 느낌이지만, 전체적인 소감은 충만감을 주기에 좀 미흡한 것이었다. 비평은 창작의 한 현상이나, 한 작품 또는 한 작가를 분석하고 평가하는 행위로 파악되는데, 이것의 해석은 도서관적 지식의 나열이 아니라, 자기 나름의 이해와 판단인 것이다. 우리의 사진평론이 이에까지 미치기에는 아직 이르다는 것을 감안한다 해도 이런저런 지식의 정보를 제시하는 것으로 만족하기에는 좀 억울한 느낌이다.
이번에도 엄정성과 공정성을 기하기 위해 제1회 때와 똑같은 방법으로 심사를 했다. 심사기준은 1. 전문지식(사진) 2. 비평능력 3. 문장력 등으로 나누고, 비평부문은 이명동(본지 발행인), 사진부문은 육명심(서울예전교수), 문장부문은 전규완(밝사진 사랑 대표)씨가 각기 평가하여 합평회에서 최종결론을 짓기로 했다.
합평회의 결과 다음과 같이 의견을 종합할 수 있었다.
진동선은 세편을 냈는데, 세편 모두가 논점의 명징성이 부족했다. 논리의 전개에 있어서도 인용과 논거가 생략되어 모호하고, 그 흐름이 빽빽하다. 또 불필요한 한문의 혼용으로 오히려 의미와 내용의 인식을 흔들리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뿐만 아니라, 어휘의 정확한 선택과 의미의 명료성을 가장 중요시하는 평론에 있어서 한문자의 오기 등은 커다란 결함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어려운 한문이나 외국어를 남용하고, 문장을 어렵게 쓰는 우리의 평론이나 논문의 구태의연한 폐단을 답습하는 것으로 크게 고쳐야 할 점으로 지적된다. 그러나 사진지식의 전문성과 논점의 논리적 전개에 있어서 비록 미흡한 면이 보일지라도 장래성을 인정하기에 인색할 필요가 없다는데 의견을 일치하고 ‘마니에리즘과 초현실주의 사진의 미학’을 가작으로 결정하였다.
홍경의 ‘복제시대의 예술사진’은 논점의 신선함이 뒤떨어지는 것이었으나 논리의 전개를 쉽게 풀어나가면서 할 말을 신축성있게 다하는 저널리스틱한 전개기법이 좋아 보였다. 이것은 논점이 비록 선선하지 못하다해도, 그 논지를 우선 필자 자신이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다는 증거로 받아들일 수 있다고 할 때 평론가적 장래성을 기대해 봄에 궁색하지 말자는데 의견일치를 보고 역시 가작으로 정하였다.
김태완의 ‘사진이해에 대한 올바른 비판과 시각정립’은 논점이 없이 상식적인 지식을 소개한 것에 불과하다는 느낌이고, 김영모의 ‘김가중의 사진세계’는 앞으로 더 전문적인 지식을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사진예술’에서 ‘사진평론상’을 제정한 근본 취지는 사진창작활동의 방향타가 될 사진평론이 전무한 한국 사진풍토에 창작과 비평의 두 기둥을 세우기 위한 기초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두 번째 공모를 시행하면서, 이 평론가상을 수상한 평론가가 반드시 배출되고, 그가 공인되고 역량있는 사진평론가로서 우리 사진계에 크게 공헌할 날이 올 때까지 ‘사진예술’과 심사위원 일동이 다 함께 부단히 노력할 것임을 이 자리를 빌어 다짐하는 바이다. // 글·심사위원 전규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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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김영태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05.01.31 이때부터는 사진평론가 진동선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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