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선과 관용의 수상록 / 박주택
독선,
그리고 독선이여 너는 평판이 나쁘다. 너의 끝없는 자존심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참아 온 사람들이 지는 잎으로 떨어져
붉은 흙이 되었음을 생각하면, 너의 굽힘 없는 힘때문에
부서지기도 하다 별이 하얀 가루로 보이기도 했지.
그 욱신거리는 전망에 입을 다눈 채 明月空山을 느끼던
사람들, 흐르는 구름에게 물어볼까? 근심으로 새운 날의
흐린 날씨에 대해.
그러나, 독선이여. 우리는 너를 크게 나무랄 자격이 없다.
환심을 사려고 쓸개를 빼놓거나 - 갈대의 각도보다
더 큰 각도로 휩쓸리는 - 부드러운 눈을 가진 자의 감춰진
칼보다는 나은 것이기에, 그리고 너의 눈을 붙인 채로
세상을 바라볼 때의 그 정정당당함이란!
관용
너의 더디게 오는 게으름으로 인하여 두근거리던 일
얼마나 기다려야 너는 오는가? 활시위 끊어질 듯 살면서
포근한 솜털이나 바다같이 넓은 가슴을 생각이나 할 수
있었겠느냐. 우리들 자신이 용서받는 순간을 맞닥뜨려
본 후에 너의 깊은 사랑을 알아볼 줄을. 그러면서 우리는
어찌했는가. 이 넓은 세상에, 믿음과 돈과 타인에 대해.
너의 창으로는 푸르른 들판이 보이고 바다가 간간이
출렁이는 뒷켠에서는 일시에 눈이 부신 천상.
- 박주택 시집 <꿈의 이동건축> 1991
강남역 / 박주택
그리하여 시간이란 계급을 재편성하는 과정이란 느낌이 들 때
햄버거는 입속에서 혈관을 터뜨리고 커피는 저녁처럼 어두워졌다
순환하는 인간들, 청춘은 중년이 되고 또 다른 청춘은
이곳을 가득 메우며 노년에 이르게 됨을 눈치채지 못한다
이십 년 전에도 그랬다, 포장마차가 즐비하던 자리는
고층으로 새를 부르고 검게 그을린 유리창에 잎사귀를 부르지만
저 싱싱한 다리는 아주 기분 나뿐 팔자를 만나
저녁의 숙명에 흘러가는 것을
화장품 상점에서 환한 빛으로 나오는 여자가 남자 속에서
둥글어지는 여름이다, 땀내 무럭무럭 자라 보잘 것 없음이
나의 나라라는 것임을 마침내 떠가며 알아갈 것이니
여름이란 이곳을 차지하던 그 누군가들이 부푼 육체 속에
청춘의 찜통을 채우는 일이다, 편성된 계급에 기대어
유리창 너머로 들리는 꿈의 찰칵거리는 소리에
혹독한 운명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하지만
평화가, 평화가, 나의 국가에서 울려 퍼지는 것이라고
저 시간은 벽 속에 도는 피에 빗대 저녁을 침묵시킨다
- 박주택 시집 <시간의 동공> 2009
겨울 저녁의 시 / 박주택
사위가 고요한 겨울 저녁 창 틈으로 스미는
빙판을 지나온 바람을 맞으며,
어느 산골쯤
차가운 달빛 아래에서
밤을 견딜 나무들을 떠올렸다
기억에도 집이 있으리라,
내가 나로부터 가장 멀 듯이
혹은 내가 나로부터 가장 가깝듯이
그 윙윙거리는 나무들처럼
그리움이 시작되는 곳에서
나에 대한 나의 사랑도
추위에 떠는 것들이었으리라,
보잘것 없이 깜박거리는
움푹 패인 눈으로
잿빛으로 물들인 밤에는 쓸쓸한 거리의
뒷골목에서 운명을
잡아줄 것 같은 불빛에 잠시 젖어
있기도 했을 것이라네,
그러나 그렇게 믿는 것들은
제게도 뜻이 있어 희미하게 다시 사라져가고
청춘의 우듬지를 흔드는 슬픈 잠 속에서는
서로에게 돌아가지 않는 사랑 때문에
밤새도록 창문도 덜컹거리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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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序
이제 이 기록들은 한 젊은이의 자성에 찬 기억뿐일
것이며 또한 그가 그의 삶 속으로 가는 중에 만난
많은 감정들을 앞뒤를 재지 않고 말해버린
어떤 보고서와도 같을 것이다.
정말로, 사유를 통해서 만난 것들은 부스러져
없어졌다.
존재의 정면, ..... 그것은 그의 잘못이다.
1991년 5월 박주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