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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마시집

서시序詩(外 9편)/ 김리영

작성자박종영|작성시간26.06.20|조회수1 목록 댓글 0

서시序詩(外 9편)/ 김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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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시序詩 김리영

 

 

별에게 가자.

찻집 유리벽 바깥,

고층 빌딩들 사이로 겨우 바라보이는 하늘에

방금 얼굴 내민 샛별에게 가자.

 

맨발로

샛별의 초롱초롱한 눈빛을 향해 솟아오르자.

 

서울은 지금

영하 12도,

사람들 서로 어깨를 부딪치며

얼음길 조심조심 걷고 있는 저녁

찻집 안에는

아무리 고개 쳐들고 둘러봐도

자욱한 담배 연기와 낮은 천정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 삶과 서울의 땅끝이 보이지 않는다.

 

별에게 가자.

마음에 널린 마른 장작에

성냥불 댕기고 날아올라,

우리가 살고 있는 땅덩어리

조그맣게 한옆으로 기울어져 돌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자.

 

 

 

헌 구두와 나 김리영

 

 

뒷굽이 점점 낮아지는

양가죽 구두를 벗고

발걸음 가볍게 내딛으면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낡은 구두창 갈아붙이고

낯선 사람들과 마주치면

거리엔 새로 문 연 악기점의 푸른 간판

 

바순, 남몰래 흐르는 눈물의

그 잔잔한 선도先道

 

나는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스스로 구두굽을 갈고

싱그런 바순의 소리처럼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맨 처음 나의 맨발을 조이던 새 신의 가뿐함으로.

 

 

 

춤으로 쓴 편지 김리영

 

 

금박 쾌자에 가슴띠 두르고 등장하면

어깨에 머문 긴장쯤 녹아내려야 해.

낯선 관객 앞, 어색한 기분 가라앉히고

손끝이 자유롭게 움직일 거야.

 

맺은 호흡 툭 떨어뜨리고

관자놀이 스친 손끝으로

희망을 길어 올려봐.

지금이 절정이야, 기회를 미루지 마.

두 바퀴 반, 도드라지게 돌고

아슬아슬했던 순간은 잊어버려.

음악은 두 소절 남아있어.

 

단 한 장 찍어내는 모노타이프

발밑에 밟혀오는 뜨거운 활자들

3분 34초 공연 시간이 흘러가버리면

다시 불 켜져도 읽을 수 없을 거야.

 

참을 수 없게 차오른 숨

춤으로 맥박을 바치는 편지를 전한다.

 

 

 

선녀춤 김리영

 

 

공연 끝난 무대 뒤

피난 안내도가 붙은 빛바랜 벽,

거울 앞 유리병이 뒹굴고

덧칠하고 고친 화장을

깨끗이 지우고 돌아갈 시간

 

처음 눈앞이 캄캄하던 객석의 어둠이

드문드문 익숙해져 갈 때,

무대 밖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 둘

무대 향해 가면을 벗고

물끄러미 바라본 순간

 

어깨에 새하얀 깃털이 돋아났다.

선녀가 일으켜 양팔 휘감아 돌고

숨이 잦아들 때까지

춤이 끝날 때까지

보듬으며 종종걸음쳤다.

 

언제나 무대에서 가면을 벗은 나는

서둘러 사람의 탈을 쓰고,

검은 가방에 접어 넣은

날개 한 쌍 반납하러 간다.

 

 

 

순록이 국숫집에 왔다 김리영

 

 

시내를 떠돌다 독이 성성하게 박혀온

순록이 국수를 삼키는 낙낙한 시간,

날 세운 뿔이 면발처럼 연해지고

길 위에 쓸린 발굽도 부드럽다.

 

다시마가 우러난 뜨거운 국물 삼키면

시력이 떨어져도 며칠 잘 살아가겠지.

눈 덮인 침엽수림 지나가는

빡빡한 언덕길도 잘 넘어설 하루.

 

국숫집 창문에 햇살 비껴오면

순록이 짙푸른 눈으로 툰드라를 향해 일어선다.

 

 

 

아버지의 새 김리영

 

 

곡성 관음사 댓돌 위 고무신,

아버지의 랜드로바가 겹쳐 보인다.

흐드러진 불두화 꽃술 아래,

돌무지에서 새어 나온 아버지의 목소리.

찾을 수 없는 아버지의 무른 표정만

사천왕문 밖으로 바람에 날려간다.

 

원통전 관음금상은 아버지가 내 마음속에

집을 지으셨다고 가르쳐 준다.

 

막 뒤에서 객석을 훔쳐보며 아버지를 찾던 날,

그때로 돌아가 아버지의 저녁을 밝혀 드릴 수 있다면

어린 춤이 나지막이 날아오를 텐데…

팔, 다리, 어깨 꺾어 춤 고운 새가 될 텐데……

 

 

 

물의 집 김리영

 

 

물이 뱉는 말을 놓친다.

검은 현무암 둥글게 쌓은 담장 아래

솟아 나온 용천수를 가두고

 

물속에 들어앉아 몸을 닦으며

물의 말이 어디서 시작되고 끝나는지

한 마디도 정리하지 못한다.

귀 기울일 수 없다.

 

바다 가까이, 쉬지 않고 고인 민물

명백히 다른 두 물이 햇빛 아래 빛나고

 

돌아나가지 않는 물이 있을까.

불어난 물을 안고 생각하는 동안

체중이 줄어든 사람 하나 물에 지워진다.

 

닮은 돌들이 얼굴 맞대어 온 수백 년

담 안의 물은 무너지지 않는데

 

이번 생에 몹시 중얼거린 당신

아파서, 아파서 마주 볼 때마다 미적지근하던

물의 온도를 짚어주지 못하고 보낸다.

 

 

 

속 김리영

 

 

배추 한 포기 잎들은 결이 같아요.

 

벗겨낼 때마다 한 방향으로 기지개 켜요.

윗잎 일어나면 아랫잎 들떠

함께 갈 준비를 마쳐요.

 

깊이 박힌 정이란 말 쓰지 말아요.

꽃대 끝, 피우지 못할 노란 꽃은 잊어요.

 

겉잎 안에 다시 드러난 청춘

움튼 속잎끼리 서로 놓치지 않아요.

고갱이들 빈틈없이 포개어 숨 쉬어요

발가벗겨져도 당당해요.

 

떼어낼수록 하늘 향해 오므리자는 결속이 보여요.

 

 

 

광희문, 다시 춤 김리영

 

 

넋두리 소리로 북 좀 쳐주세요.

 

문밖에 조명이 꺼졌어요.

소가 자주 울던 마을

내장으로 고깃국 끓이고

소가죽으로 가방을 만드는

공방의 불빛은 희미해요.

 

다시 무대에 오를 수 있다면

리듬과 박자를 끌어당겨

댄스배틀에서 선명하게 이길 겁니다.

 

골목길 낮아진 담장 바라보며

시선 잃지 않고 돌아요.

소름 돋게 추는 춤

기를 쏟아 연습해요.

 

경건하게 바람 불고, 빗장은 열려있고

빛나는 단청 아래 들어섭니다.

 

춤이 나를 일으켜 세워요.

발걸음이 추스르는 장단

넉넉한 춤집으로 짚어주며

혼신 다해 살겠습니다.

 

 

 

늦은 결심 김리영

 

 

청어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야지.

 

고소하게 삼키면 고개 쳐드는

청어의 가느다란 독백을 들으러 가야지.

 

밤안개 낀 차창 밖

어머니의 손짓이 보인다.

 

어머니는 왜 가시 많은 청어를 좋아하셨나.

있는 듯 없는 듯 슬며시 일어선 잔가시들

한 번도 웃으며 넘기지 못한 불편한 밥상

 

상다리 기울고 두 다리 펴고 앉아

기름진 살만 받아먹었지.

 

안개강 넘어, 휜 가시 박혀

손 흔드는 어머니

 

허물어진 늑골 사이

잠든 가시들 빼 드리러 가야지.

 

 

 

▲김리영 시인

서울 출생, 1991년 월간 『현대문학』에 시 〈죽은 개의 슬픔〉 외 5편 당선 등단.

시집 『서기 1054년에 폭발한 그』 『바람은 혼자 가네』 『푸른 콩 한 줌』 『춤으로 쓴 편지』

『푸른 목마 게스트하우스』 eBook 『비 오는 날엔 아포가토를』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제4회 바움문학작품상, 

제3회 공간시낭독회 문학상을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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