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 하나에 담긴 길의 기억
서문곤
길을 가다 보면 낯선 지명이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학창 시절 충남 부여 등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귀에 익숙하게 들었던 논티, 삽티, 지티, 새티, 장티, 곰티, 절티, 모랫티, …. 예전에 나도 그랬듯이, 처음 듣는 사람에게는 그저 특이한 이름처럼 들리지만, 그 속에는 오래전 사람들이 남긴 삶의 흔적이 숨어 있다.
요즘은 고개를 넘는 일이 예전만큼 특별하지 않다. 터널이 뚫리고 도로가 넓어져 산을 돌아가거나 뚫고 지나간다. 하지만 옛날 사람들에게 고개는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장에 가기 위해서도, 이웃 마을에 혼사를 치르기 위해서도,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곳이 고개였다.
충청도 예산, 홍성, 청양, 부여와 전라도, 경상도 남부 지방 곳곳에 남아 있는 '티'라는 지명은 바로 그 고개를 뜻한다. 논이 있는 고개는 '논티'가 되고, 절이 가까운 고개는 '절티'가 되었다. 반면에 강원도에서는 작은 고개를 재, 큰 고개를 령(嶺). 치(峙)를 써왔다. 이름은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마을 사람들의 눈길과 발길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도를 들여다보면 지금은 평범한 마을 이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수많은 사람이 오르내리며 다져 놓은 생활의 기록인 셈이다.
나는 이런 지명들을 만날 때마다 오래된 풍경을 상상해 본다. 새벽안개가 산허리를 감싸고, 나뭇짐을 진 사람이 숨을 고르며 고개를 오르던 모습. 장날이면 광주리를 든 아낙네들이 서로 안부를 묻고, 아이들은 뛰어다니며 먼 길을 재촉하던 모습들. 그들의 발자국은 사라졌지만, '티'라는 이름은 아직도 그 자리에 남아 옛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지명은 단순한 주소가 아니다. 그것은 한 지역의 역사이자 사람들의 기억이다. 우리는 흔히 새로운 것만을 찾지만, 오래된 이름 하나에도 수백 년의 시간이 스며 있다. '논티'와 '삽티', 그중 기억에 오래 남은 부여군 내산면 지티리에 있던 '지티국민학교', 지금은 '삽티로' 로 불리는 도로명 이름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은 어쩌면 그 길을 오가던 사람들의 삶이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길가에 흔히 피어 있는 들꽃이 누군가의 눈길을 받을 때 비로소 특별해지듯, 무심코 지나치던 지명도 그 뜻을 알고 나면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산간 마을과 고갯길 중심으로 지금도 남아 있는 '티'라는 짧은 한 글자 속에는 산을 넘고 세월을 건너온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오늘도 우리에게 조용히 말을 건넨다. 이름은 남고, 기억은 그 이름을 따라 흐른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