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安城奉業寺址五層石塔)
<경기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148-5>
2026.6.11(목) 오전 5시 30분 숙소인 아비숑모텔을 출발하여
첫번째 일정으로 경기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 148-5 에 위치한 봉업사지 오층석탑을 찾는다(05:20~05:30)
봉업사는 8세기 중엽에 창건되었으며, 854년경에는 화차사(華次寺)라 불렸다고 한다.
신라 말 죽주 출신 호족의 후원을 받았던 것으로 추정되나 후삼국시대에 사역 전체가 황폐화되었다.
사지에서 출토된 능달명(能達銘) 기와 명문을 보면, 청주 출신의 호족 능달이 태조 왕건의 명을 받들어 절을 중창하였다고 한다.
이 때 죽주(현재 안성시 죽산면) 호족세력의 지원을 받았다고 하며 이후 사찰의 세가 커져 죽주를 대표하는 사찰이 되었다.
제4대 고려 국왕 광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봉업사를 대규모로 중창하고
태조의 진영을 봉안하고, 진전사원(眞殿寺院)으로 봉했는데, 당시 경기 지역 최대의 사찰이었다.
봉업사는 중심사역(불전, 승방 영역)과 진전영역이 분리된 다원 체계 사찰이었다.
고려사에 따르면 공민왕 12년 (1363년) 공민왕이 이 절을 찾아와 태조의 진영을 알현했다는 기록이 있어
고려말까지 사세가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으나 조선시대 모종의 이유로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말여초에 조성된 석불입상은 칠장사로 이전되었으며, 고려시대에 조성된 당간 지주와 봉업사지 오층석탑(보물), 반자 2개, 향완 등이 있다.
고려시대 안성의 수호신 송문주 장군 동상
봉업사지 오층석탑과 당간지주
안성 죽산리 당간지주 (安城竹山里幢竿支株)
높이 4.7m, 너비 0.8m, 두께 0.5m. 1979년 경기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현재 당간은 없어지고 1m 간격으로 서 있는 두 지주는 원래 현위치에 넘어져 있던 것을 1980년에 일으켜 세워놓은 것이다.
고려 시대의 대사찰이었던 봉업사지(奉業寺址)에 있는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보물, 1966년 지정)과
약 30m 거리를 두고 남북으로 마주하고 서 있어 일명 ‘봉업사지당간지주’라고도 일컫고 있다.
장방형의 돌로 쌓은 낮은 단 위에 있는 이 지주는 표면이 거칠며 소박하고 간결한 형태의 것으로 아무런 장식적 조식(彫飾)은 없으나
정상부의 바깥쪽 모서리를 둥글려 완만하게 하였으며 그 안쪽으로는 가름대를 꽂는 장방형의 간구(杆溝)를 설치하였다.
다른 당간지주와는 달리 당간을 고정시키던 원공(圓孔)이 없으며 남쪽 기둥은 상단의 4분의 1 정도가 깨어진 상태이다.
전체적인 형태와 양식적 특징으로 미루어 안성죽산리오층석탑과 같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당간지주는 5층 석탑과 같은 공간에 있는데, 원위치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당간지주는 동서로 마주 서 있는데, 두 지주를 사각형 기둥처럼 동일하게 다듬어 세웠다.
각 면에 정자국이 그대로 남아있어 거친 수법을 보이고 있다.
당간지주의 모서리는 경사지게 깎아 부드럽게 하였으며
정상부는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나가면서 곡선을 그리도록 다듬어 다소나마 장식적인 기교를 엿볼 수 있다.
당간지주 안쪽 면에 별다른 흔적은 없으며, 꼭대기에 사각형으로 판 간구를 마련하여 당간을 고정할 때 연결하는 간을 끼우도록 했다.
지금은 주변이 경작지로 변한 봉업사(奉業寺)의 옛터에 위치하고 있는 안성 봉업사지 오층석탑은 고려를 세운 태조 왕건과 직접 연결된 석탑이다.
이곳은 한때 봉업사라 불린 국가 사찰의 자리였고 태조 왕건의 영정, 왕의 초상이 봉안되었던 곳이다.
왕실이 직접 관리하던 사찰이었지만 조선 초기에 사라지고 지금은 안성 봉업사지 석탑 하나만이 그 역사를 전하고 있다.
발굴 조사에서 통일신라시대 기와가 발견되었고 그 위에는 ‘화차사華次寺’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이 사찰은 고려 초, 봉업사로 이름을 바꾸며 새 왕조의 시작을 함께한 공간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봉업사지 석탑은 높이 약 6m, 넓고 큰 돌을 차곡차곡 쌓아 만든 1단의 기단(基壇) 위에 5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구조다.
1층 탑신은 유난히 높고, 몸돌 네 모서리에는 기둥을 새겨 놓았다.
기단은 하나로 짠 두툼한 널돌 위에 올려 완성하였는데, 이 때의 석재가 두툼한 탓인지 전체적으로 둔중한 느낌을 준다.
기단 위의 탑신은 1층 몸돌만 4장으로 이루어졌고 나머지는 한 돌로 구성하였다.
각 층의 네 모서리에는 폭이 좁은 기둥을 새겼다.
1층 몸돌 남쪽면 중앙에는 작은 감실(龕室:불상을 모시는 방)을 만들어 놓았으나 모양만 새기는 형식에 그치고 말았다.
지붕돌은 얇고 추녀는 거의 수평을 이루었으며 끝에서의 치켜올림도 미미하다. 머리장식은 모두 없어졌다.
탑의 전체적인 체감도 적당하지 못하고, 각 부의 조각도 형식에 그치고 있다.
신라의 양식을 계승하고 있어 석재의 조합 방식은 우수하나
기단에 새긴 조각이 형식화 되는 점 등에서 약화되고 둔중해진 고려석탑 특유의 모습이 보이고 있다.
남쪽 면의 작은 감실(龕室, 불상을 모시는 방)
불상을 모시기 위한 공간이 마련되어 있지만 형식만 남고 실제 사용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봉업사지 오층석탑의 지붕돌은 얇고 평평하다.
끝부분의 치켜올림은 거의 없고 각 층마다 5단의 받침만이 반복된다.
봉업사지 오층석탑은 화려함 대신 절제, 장식 대신 구조가 말하는 탑이다. 상륜부는 사라졌다.
왕조의 시작, 왕을 기리는 사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