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1:20-22 세상 사람들처럼 사람을 차별하면서 만찬을 하면 그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고 가난한 성도들에게 수치를 주는 것은 절대로 칭찬할 수 없다.
이전 말씀은 여러분이 모여서 하는 일이 좋은 방향이 아니고 오히려 나쁜 방향으로 가고 있기에 칭찬할 수 없다. 너희 가운데서 검증된 사람들이 환히 드러나려면 파당이 있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는 내용이었다. 이어지는 말씀은 여러분 가운데 분열이 있어 부자들과 가난한 사람들이 따로 먹어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취한다며 이 점에서는 칭찬할 수 없다고 말하는 내용이다.
20절은 원어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함께 모일 때" 라는 말로 시작한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상류층들은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 넓은 공간에서 누워서 먹고 가난한 사람들은 좁은 곳에서 서거나 바닥에 앉아서 먹는 것처럼 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고린도 교회의 상류층들은 수준차이 난다며 신분 차별을 하면서 함께 모였던 것이다.
당시의 주의 만찬은 오늘날과 같은 의식이 아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의 마지막 만찬과 같은 일반적인 식사였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빵과 잔을 나누며 자신의 십자가의 죽음을 기억하라고 하신 것을 세상의 귀족층들이 베푸는 만찬으로 바꾼 것이다. Pliny the Younger(AD 61-113)의 글을 보면 당시 초대한 주인은 최고의 음식은 초대한 자신과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을 위해 놓였고 질이 떨어지는 찌꺼기 같은 음식들을 내놓았다며 손님의 등급에 따라 술과 음식이 차별적으로 제공되었다고 했다.
이는 명예와 수치로 표현되는 당시 사회 체계를 이러한 연회를 통해 보여준 것이다. 바울이 책망하는 이유는 자신의 집을 교회 모임 장소로 제공한 어느 귀족층이 그렇게 했다는 뜻일 것이다. 함께 또는 한자리로 번역한 말은 원어에서는 같은 장소 위에서 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는 같은 실내 공간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로 모이는 어느 저택 안에서 라는뜻이다. 바울은 이렇게 신분 차별하면서 한 집에 모이는 것은 그것은 주의 만찬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21절에 나와 있다. 21절은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먹을 때에 각자가 자기의 음식을 먼저 먹어서 어떤 사람은 배가 고프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배고파 죽게 생겼고 어떤 사람들은 취하도록 마셨다는 뜻이다. 어째서 배고픈 사람과 취한 사람을 대비시켜 놓았을까? 배고픈 사람과 배부른 사람을 대비시켜 놓아야 하지 않을까?
이 구절을 이해하려면 당시의 파티를 이해해야 한다. 당시의 파티는 2부로 되어 있다. 1부는 고기를 먹는 파티이다. 고기를 실컷 먹고 나면 2차로 술을 마시는 파티가 열립니다. 존귀한 사람들은 일찍 올 수 있었기 때문에 1차 파티 때 Triclinium에서 기대어 누워 고기를 양껏 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가난한 성도들은 해가 진 뒤에 일을 마치고 더러운 옷차림으로 교회 모임에 늦게 와 보니 존귀한 자들이 고기를 다 먹어 치웠고 벌써 2차 파티인 술파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존귀한 사람들은 벌써 술에 취해 Triclinium에서 떠들고 있는데 늦게 온 가난한 사람들은 일에 지친데다가 먹을 것이 모자란 것이다. 그래서 주린 배를 움켜 쥐고 빈속에 술을 마실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배고프고 어떤 이들은 취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 존귀한 자들은 교회에서의 주의 만찬 모임을 당시 세상의 일반적인 연회처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고린도 교회의 존귀한 자들에게 질문하고 있다. 22절도 왜냐하면 이라는 말로 시작하며 질문으로 책망을 하는 것이다. 왜 그렇게 하고 있느냐는 뜻이다. 22절은 다섯개의 질문과 하나의 결론으로 되어있다. 첫째 질문은 너희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는 질문이다. 몰라서 묻는 질문이 아니라 당연히 각자 집이 있기에 그렇게 먹고 마시려먼 각자 너희들 집에서 세상적인 화려한 연회를 열고 너희들끼리 먹으라는 것이다. 주의 만찬은 세상의 연회가 아니니 주의 만찬의 의미를 똑바로 알라는 것이다.
두번째 질문은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멸시하느냐는 것이냐는 것이다. 업신여기거나 멸시한다고 번역한 말은 원어에서는 아래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교회란 하나님의 소유의 교회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이는 단순히 인간 사회의 사람들이 모인 사교모임이 아니라는 뜻이다. 고린도 교회 대부분의 성도들은 소수의 상류층들에게 속한 하층민이었기에 집에서 하던 습관대로 교회 안에서도 대부분 성도들을 그렇게 아래로 생각하고 멸시한 것이다. 따라서 두번째 질문은 하나님의 소유된 교회를 세상의 방식으로 멸시하며 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세번째 질문은 가난한 사람을 부끄럽게 하느냐는 질문이다. 두번째 질문은 아래로 본다는 뜻인데 부끄럽게 한다는 말은 아래에 두고 부끄럽게 한다는 뜻이다. 바로 앞의 질문에 나온 아래로 생각한다는 말은 속으로 상대를 아래로 보고 업신여긴다는 뜻이다. 그러나 세번째 질문에 나온 부끄럽게 한다는 말은 실제로 아래에 세워놓고 행동으로 상대에게 수치를 느끼게 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쓰레기 같은 음식을 주고 먹으라고 하거나 만찬의 장소에서 먹을 것이 없게 하여 굶기는 것을 뜻한다. 오늘날 식으로 말한다면 개에게 줘도 안 먹을 것 같은 음식 쓰레기를 주고 먹으라고 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 부끄럽게 한다는 말의 의미이다.
네번째 질문은 내가 너희에게 뭐라고 말해야 하느냐는 질문이다. 네번째 질문은 다섯번째 질문인 "내가 너희를 칭찬하랴?" 라는 것과 연결이 된다. 이는 17절에서 너희를 칭찬할 수 없다고 한 말과도 연결해서 읽어야 한다. 절대로 칭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바울은 이것 안에서 나는 너희를 칭창할 수 없다고 결론적으로 말한 것이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점은 고린도에서 상류층이었던 사람들이 교회에서도 자기들 집에서 일하는 가난한 성도들을 아래로 보고 멸시하면서 자기들끼리 따로 모이던 것이었다. 만약 오늘날도 교회에서 많이 배운 사람들이나 많이 가진 사람들 끼리끼리만 상대하면서 세상적으로 자신들 보다 못한 사람들을 상대하지 않으려 한다면 정확히 고린도 교회 같은 모습인 것이다.
물론 끼리끼리 모이면 부담도 없고 편안하고 재미도 있다. 하지만 그건 주님께서 피로 세우신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아래로 보는 것이고 주님께서 피로 사신 존귀한 성도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은 우리 주님을 부끄럽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힘들더라도 세상에서는 절대로 상대하지 않을 사람들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내하며 낮은 자리에서 섬겨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