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계절 내내 주인 손길 기다리는
얼굴보다 큰 둥근 부채는
여름날을 책임지는 일꾼
어두운 곳에서 쉬고 있어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더운 날 여자의 손이 다가오더니
빨리 바람을 피우라고
어지럽도록 마구 흔든다.
그러다 휙 내던지고
필요하면 허리춤을 쥐어 잡고
또 바람 질을 강요한다.
땀내나는 부채는
양산 대신 태양 빛도 막아야 해
덩치 크고 귀중품이 아니라
가방 속에 넣지도 않네
그래도 여름날 살갖이 찢어지도록
바람을 피우면
다른 계절에는 시체처럼
어느 구석에서든 편히 잠을 잘 수가
있어 좋았다
이제는 깨우지도 않네
여자의 손길이 닿으면
내 몸에서 시원한 바람이 나오건만
차 안 공기는 시베리아 벌판이고
길을 다닐 때는 손 선풍기
집안은 에어컨 찬바람이 있으니
벌써 나를 잊었는지 찾지도 않네
잠자는 나를 이제는 깨워봐
저혈압이라 온기는 없지만,
냉기는 가득 차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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