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속 부채 <시>
여름의 진한 끈적임을 품은
아열대 상어
남으로부터 몰려와
동해에 둥지를 틀었다
전기 바람을 만들기 위해
석탄을 징하게 불붙이더니
태양의 뜨거움을 막던 커튼은
찢어지고
AI의 허기를 채운 발전소는
쇳물 끓는 도가니마저 삼켰다
김정희의 난초 그림 부채에는
시원함 바람 한 줄기 있었는데
전기 선풍기만
텁텁한 열기와 맞선다
태초부터 사람의 늑골에
단단히 접혀 있던
곧은 뼈대 하나
사하라의 붉은 모래바람 속에서도
제 숨결이 만든
서늘함이 있다
오늘 아침
냉각 기계
OFF 버튼 위에
투명한 결심 하나를 붙여둔다
제갈의 처 월영 <수필>
2개월째 선생님은 소설을 써보라고 권하신다. 목소리는 부드러우시지만, 나에게는 피할 수 없는 압력이다. 한국의 대표적 역사 소설가이신 작가님의 말씀은 절대적이다. 나는 여러 차례 말했다. “이제 문장을 만드는 공부를 하는 중인데 수필이면 몰라도 소설은 다음에 쓰겠습니다.” 내 의견은 전달되지 못한 채 허공으로 사라졌다. 한 주에 두 번가량 뵙는데, 만날 때마다 왜 소설을 쓰지 않느냐고 재촉하셨다.
주제를 주셨다. <제갈공명과 부인>이다. 소설 한 편을 써서 드리지 않으면 이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글쓰기를 공부하는 초보자인데 소설로 영역을 넓히는 첫 작품이니 뛰어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전체 구상 자체가 안된다. 소설을 공부한 적도 없고 문학적으로 다양한 장르에 도전할 만큼 기본 자질이 없다. 먼저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의 인물됨과 역사적 평가를 살폈다. 그리고 야사일지 모르나 인터넷에 떠도는 그의 부인 월영에 대해 정보를 수집했다. 제갈은 부모를 일찍 여의고 결혼한 누나는 공명을 장가보내려고 신붓감을 수소문했다. 마침, 지역의 토호 세력인 황승언은 결혼 적령기를 넘긴 딸을 시집보낼 사윗감을 찾고 있었다. 제갈의 인물 됨됨이를 눈여겨보고 있었다. 월영은 소문이 파다한 박색이다. 누나는 가문을 일으키는 데 힘이 되어줄 황승언의 집안을 관심 있게 보았다. 결국, 누나와 황승언은 제갈과 월영의 혼사를 매듭지었다.
후세 사람들은 제갈의 지혜에 관심을 두었다. 내 소설의 초점은 월영의 소문난 외모와 세상을 호령한 영웅을 움직인 지혜에 맞추기로 했다.
첫날밤 제갈은 신부와 합방하려고 면사포를 벗기는 순간 기겁을 하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문 앞에서 이런 사태를 예견했던 장인 황승언은 제갈을 엎어치기로 다시 신방으로 밀어 넣었다. 제갈은 밤새 술로 화를 달랬다. 그러나 새벽, 잠이 깬 제갈에게 시대를 호령할 지혜의 날들이 시작되고 있었다. 월영은 공학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 국수를 만드는 자동 기계를 만들어 잔칫집 손님들을 대접했다. 훗날 제갈은 대군에 물자를 공급하는 운송 수단을 만들어 전략적 성공을 거두었다. 그 기본 개념을 월영이 만든 자동 국수 기계에서 얻었다. 그녀는 제갈의 재능을 알고 성격을 파악했다. 제갈은 자신이 생각한 것을 안색에 감출 수 없는 인물이었다. 월영은 이런 제갈에게 학우선을 선물했다. 정치인들과 협상하고 시국을 논할 때 학우선이라 이름 붙은 부채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소설을 쓰라는 독촉을 피하고자 정면으로 돌파했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몰라 책을 읽고 인터넷 자료를 찾는 데만 열흘이 걸렸다. 어떤 형태의 구상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멍하던 가을밤 무엇에 홀린 듯 책상에 앉았다. 단편 소설 초고 원고지 35매를 마감했다. 쓰는 데 걸린 시간은 세 시간 정도다. 경이롭게 짧은 시간에 쓸 수 있었던 원동력은 선생님의 과분한 관심이었을 것이다.
소설을 제출한 다음 날부터 꼬박 이틀 동안 눈이 감기지 않았다. 아마도, 첫 번째 소설의 주인공 월영을 얻기 위해 머릿속에 있는 잠자는 인자까지도 다 소진했는지 모른다.
소설의 주제는 제갈의 처였으나 내 머릿속에 남은 굵은 선은 천하의 박색 월영이었다. 그녀가 남편의 약점을 가리기 위해 선물한 부채에는 자신의 못난 얼굴을 덮고도 넘칠 만큼 지혜가 담겨 있었다.
선생님께서 대가의 면모가 보인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말씀보다 월영이 마음에 짙게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