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영수 여사 생가를 다녀와서
이흥근
공무원 문인협회에서 충북 옥천 육영수 여사 생가에 갔다.
버스에서 내리니 안개비가 내린다. 고향길을 따라 100미터 도로 옆에 생가가 있다. 입구에서 일행은 사진을 찍었다. 99칸의 생가에 대문, 곳간채를 비롯해 12동의 99칸의 건물이다.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주변을 보았다. 건물은 1600 년대 “조선 시대 사대부 건축의 구조를 잘 보여주는 곳으로 100년대부터 김정승, 송정승, 민정승의 삼정승이 살았던 곳이다.” 교동집이라 불리던 옥천 지역의 명가”로 1918년 육종관(육영수 여사의 부친)이 집을 매입하여 1925.11.29. 육영수 여사가 태어나 결혼 전(1950년)까지 살았다.
1969년에 현대건설에서 전면적인 개. 보수를 하면서 원형이 훼손되었다. 육영수 여사 생가 복원추진위원회를 창립하여 충청북도 유형문화유산 기념물로 지정하고 육영수 생가 종합 정비계획을 수립 총사업비 37억 5천만 원이 소요 되었다.
2003년부터 2010년까지 육영수 생가 문화유산 지표조사 및 발굴 조사, 육영수 생가 복원 공사를 하고 2011.5.11에 개관하였다.
안채는 ‘디극자’형으로 정면 2칸의 안방과 정면 2칸의 대청으로 구성, 안방에는 어머니 이경령이, 뒷방에는 육영수 여사가, 동쪽 날개채에 아버지 육종관이 주로 거주하였다고 한다.
위채는 ‘미음자’형으로 평면으로 안채에서 통행할 수 있는 진입로가 서쪽으로 있고, 동족으로는 외부 출입문이 있다.
사량채는 정면 3칸의 사랑 대청과 정면 2칸의 온돌방과 온돌방 후면으로 전화방과 암실, 창고 등의 부속 공간으로 구성되었다. 주로 손님 접대 공간으로 박정희 대통령 방문시 임시 집무실로 사용하였다. 아래채는 ‘기억자’ 형 평면으로 둿마루와 후면에는 쪽마루로 구성 조선 시대 후기 가옥 중 안채의 평면 유형을 따랐다.
연당 사랑은 정면 3칸 반 규모의 누마루 집과 연못 후면에 배치된 가옥으로, 생가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곳이다.
연못에 있는 수련이 피어 청초하고 아름답다. 금붕어가 이리저리 지나가는 것이 눈길을 끈다.
육영수 여사는 1925년 11월에 충북 옥천에서 출생했으며 아버지 육종관, 어머니 이경령 1남 3녀 중 셋째다.
1950.12.12일에 박정희와 대구에서 결혼 하였다. 송재천 소위의 소개로 박정희 전 대통령(당시 소령)을 만났다. 해설사는 당시 육영수 여사는 박대통령에게 처음에 호감을 가졌으며 키가 작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육영수 여사는 옥천 죽향초등학교를 졸업, 서울 배화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45년11월에 옥천여자중학교 교사(가사)가 되어 학생들에게 수예, 도화(미술) 등을 가르쳤다.
1963년 12월부터 1974년 8월까지 제 5대~8대 영부인을 했다. 서울 남산< 어린이회관> 건립 『어깨동무』 발간, <어린이 대공원> 건립 등 청소년 육성에 많은 열정을 쏟았으며, 양지회 봉사활동 등을 통해 고통받고 소외된 서민들을 위로하였다.
‘웃고 뛰놀자 그리고 하늘을 보며 생각하고 푸른 내일의 꿈을 키우자 ’
1974.9.5.일 육영수
영수의 잠자는 모습을 바라보고
1952년 7월 2일 밤. 박정희
옥과도 같이 금과도 같이 아무리 혼탁한 세속에 젖을지언정 길이 빛나고 아름다워라.착하고 어질고 위대한 그대의 여성다운 인격에 흡수되고 동화되어 한 개 사나이의 개성으로 세련하고 완성하리. 행복에 도취한 이 한밤의 찰나가 무한한 그대의 인력으로서 인생 코스가 되어 주오.
그대 편안히 잠자는 모습을 보고 이 밤 다 가도록 새날이 오도록 ...
당신이 그리우면
1974년 9월 30일 박정희
당신이 이곳에 와서 고이 잠든지. 41일째 어머니도 불편하진 몸을 무릅쓰고 같이 오셨는데, 어찌 왔느냐 하는 말 한마디 없오. 잘 있었느냐는 인사 한마디 없오. 아니야 인사를 했겠지.
당신도 무척 반가워서 다만 우리가 당신의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을 뿐이야
나는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 내 귀에 생생히 들리는 것 같에 당신도 잘 있었오 홀로 얼마나 외로웠겠오. 그러나 우리는 언제까지나 당신이 옆에 있다 믿고 있어요. 언제까지나 언제까지나 당신이 그리우면 언제나 또 찾아오겠오. 고이 잠드오. 또 찾아오고 또 찾아 올테니. 그럼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