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베기
이흥근
김포고등학교 시절이 생각난다. 무더운 여름방학 동안 일정한 날에 풀을 가지고 학교에 갔다. 고등학교에서 풀을 쌓아 퇴비를 만들었다. 나는 장릉 인근에서 풀을 베어 친구와 같이 새끼로 묶어 등에 지고 갔다. 다른 친구는 자전거로. 지게. 수레에 끌고 왔다. 여름방학 때 퇴비를 학교에 제출하는 것은 봉사가 아니라 ‘의무적 방학 숙제 였다.
그 당시는 학교에 농협과, 축산과, 농과가 있었다. 학교에 밭이 있었다. 콩과 채소 등을 심었다.
1970년대에는 쌀 증대를 위해 마을 곳곳에 ‘퇴비 증산’이라는 표어가 붙어 있었다. 새마을 운동과 연계한 역점 시책이다. 퇴비장은 가구 여건에 따라 네모나게 만들고 물이 새지 않게 낮게 벽돌로 쌓은 곳도 있었다. 이 풀들이 자리에 지금은 아파트와 상가들이 들어서며 보기가 힘들어졌다.
도에서 군별, 군에서 면별, 읍면에서는 마을별, 가구별 농경지 면적에 따라 퇴비 생산 목표를 정해 주었다. 퇴비장 전면에는 생산자, 목표량을 기록한 푯말을 꽂아 놓았다. 퇴비를 생산하라는 독려는 7월부터 9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른 새벽이 되면 면사무소 직원이 나와 풀을 베라고 ‘새벽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너도나도 일어나 새마을 가꾸세’라는 노래가 마을 스피커에서 울려 퍼졌다. 군수와 면장이 풀베기를 장려하기 위해 순시를 나온다고 마을을 순회했다.
아침 일찍 낫을 들고 이슬 내린 들과 산기슭, 하천 등에 나가 풀을 베었다. 퇴비량을 늘이기 위해 갈대 잡목까지 베어 지게로 지고, 손수레로 실어 퇴비장에 넣고 높게 쌓아 작은 동산을 만들었다. 외양간 소똥과 깐 볏짚, 재, 오줌까지 퇴비 위에 섞어 주었다.
군청에서 9월 말에 퇴비심사가 나오면 온 마을이 비상이다. 군청과 면 담당자가 줄자로 가로, 세로, 높이를 재고 퇴비량을 산출한다. 마을 이장과 새마을 지도자가 참석하고 개인 퇴비 ‘증산왕,’과 ‘우수 마을상’을 뽑았다. 마당 한 모퉁이에 퇴비장을 마련하여 억새, 갈대, 땅꽈리. 쇠무릎, 개불알풀, 강아지풀, 개비름, 명아주, 개보리 등 풀을 베어 퇴비 하였다. 퇴비를 많이 생산하기 위하여 온갖 수단을 동원했다.
아침 일찍 퇴비 독려를 나갔다. 집마다 대문 앞에서 “퇴비 하세요”.라고 큰 소리로 말했다. 어느 집에서 부스스 나온 여성에게 “아주머니 퇴비 하세요” 하였더니 기분이 상한 듯 “나는 아줌마가 아니라”라며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풀베기에만, 몰두하여 사람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아 실수했다. 정부 시책에 맞춰 퇴비를 만들라고 장려하여도 일하는 사람이 부족하여 풀을 벨 시간이 없었다.
그 마을에 김포고등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이 살고 계셨는데 부업으로 논농사가 있어 아침 일찍 방문하면 사모님이 커피와 달걀후라이를 주셔서 맛있게 먹던 생각이 난다. 구수한 향기와 커피맛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검단면사무소에 근무할 때 담당 마을에 심사를 나갔다가 발을 헛딛는 순간 소똥에 빠져 버렸다. 물에 씻었으나 버스를 타고 갈 때 소똥 냄새로 주위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던 일이 생각났다. 한 시간을 버스를 타고 가는데 코를 막는 사람, 눈치를 주는 사람, 눈을 감고 갔다. 출근할 때 시간이 늦을 때는 시간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 같은데 왜 시간이 안가는지, 집이 왜 이렇게 먼지. 마음이 조급하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생각난다. 마음으로 10시간이 지난 것 같다.
집에 도착하니 아내가 무슨 냄새가 난다고 한다. 나는 잘 모르는데, 똥을 밟았다고 하니 웃는다. 똥을 밟으면 뜻밖의 재물. 행운. 예상치 못한 기회가 들어오는 흐름으로 풀이 된다고 한다. 그동안 아무 탈 없이 살아 왔으니 그동안의 추억으로 남지 않을까 생각한다.
퇴비 증산 사업은 1970년대 말 초가지붕을 슬레이트와 기와지붕으로 개량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지붕을 만들던 볏짚이 남게 되자 이를 땅에 뿌리게 되었다.
1970년도다. 토요일은 물론 일요일에도 사무실에 나왔다. 지금은 개발이 되어 상가와 아파트가 세워졌다. 내가 담당했던 마을에 초가지붕이 90%였다. 신규 직원이라 맨 먼저 지붕에 올라가 용마루를 벗겼다. 김포 양도 마을은 김포공항 근처라 지붕개량이 역점 시책이었다. 추억만이 남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