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 한 자락을 잘 듣고 나서 때이사는 비구 스님들의 해야할 의무를 법에 맞게 잘 하게 되었다.
크고, 적고, 중간의 모든 대중들과 적당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마음과 몸은 품위있게 잘
지내지 못했다.
교단에 처음 들어온 것부터가 신심이 반듯해서 온 것이 아니었다. 지금은 큰 형님 부처님의 법문
을 듣고서 신심이 조금 생겼다. 그 신심은 지혜와 함께 해야만 항상 오래 튼튼해질 것이다. 그러니
그때 지혜 없이 신심만 있었기 때문에 그 딱한 이는 목표 없이 아무 일에나 고개를 끄덕이는 격이
되었다.
“스님들, 저의 몸이 매우 무거운 것 같습니다. 사방조차 구분할 수 없습니다. 경전을 배우는 것,
외우는 것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저의 마음이 뒤로 물러나는 것 같습니다. 교단의 짐을 제대로 져서
법을 얻을 수나 있겠는가 하고 의심이 듭니다.”
정확한 목적 없이 흔들거리는 때이사가 잘 쓰는 말이다.
전처럼 질서 없는 태도는 없어졌지만 이런 중얼거림을 자주자주 들어야 하는 스님들께서는 귀가
질려버렸다.
그러나 지금 동생 때이사는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르침에 어느 한 가지 의심이 없다. 사람을
존중하게 되었기 때문에 법도 존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법을 내가 얻기나 하겠는가 하고, 나를
연결해서 생각하여 의심이 생긴 것이다.
법을 법대로 깨끗하게 보지 못하면, 보도록 가르치는 스승님의 말씀을 자기 지혜로 받아드리지
못하면 윤회의 굴레에서 돌고 도는 것이다.
동생 때이사는 ‘너’도 넣지 말고 ‘나’도 섞지 말고 있는 성품 그대로 담마에 나라고 집착해서 어지러
이 생각하기 때문에 의심이 든 것이다.
‘담마를 내가 얻기나 하려나?’라는 의심을 그냥 보통으로 생각하면 자기에게 의심이 들어온 것이
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이 담마를 내가 얻기나 하려나?’라고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이 가르침 전체에 의심을 하는 것이 된다. 이 교단의 영역에 가까이 들어온 것만으로도 ‘나’
라는 대문을 잘 열어젖힌 것이 아니겠는가?
이 교단에 들어와 수행자가 됨은 이 생에, 이 몸으로, 이 가르침을 전적으로 따르기 위해서이다.
동생 때이사는 ‘나’라는 대문을 스스로 끌여당겨서 꼭 닫아 놓고 있으니 이 교단의 생활에 즐거워하
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겠는가?
원인에 맞게 따라서 생겨나는 결과일 뿐인 것이다. 그의 앞에 닫아놓은 아집의 대문을 우리 모두가
같이 열어 주려고 노력했다. 할 수 있는 만큼 도움을 주었다. 그러나 정작 그 본인은 그의 대문에 큰
빗장을 걸어 닫아 놓았기 때문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우리들로서는 도저치 그 의심을 풀어줄 수
없었기 때문에 결국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시간이 되기 전에는 그냥 지나치셨던 부처님께서 때가
되자 그 동생을 부르셨다.
- 이어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