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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경전의 이름(經題)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뜻하는 의미

작성자미월|작성시간15.12.30|조회수807 목록 댓글 0

앞에서 법화경은 어려운 경이 아니며, 우리가 법화경을 어렵게 생각하는 이유는 삼승귀일(三乘歸一)과 구원성불(久遠成佛)이라는 법화경의 대의가 우리 불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전통적인 불교 이해와는 다르기 때문임을 밝힌 바 있습니다. 따라서 법화경을 제대로 신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경전의 이름(經題)인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 뜻하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른 종교의 경전과는 달리 불교의 경전은 그 경에서 설하고자 하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핵심이 경전의 이름에 축약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경전의 이름이 뜻하는 바를 제대로 파악하면 그 경의 주된 사상을 거의 단숨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법화경을 범어로 나타내면 “Saddharma-Pundarika-Sutram”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Sad”는 “정(正)” 또는 “묘(妙)”로 해석되고, “Dharma”는 “법(法)”으로, “Pundarika”는 “흰 연꽃”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Sutram”은 성인(聖人)의 말씀을 적어놓은 “경(經)”의 뜻입니다. 그래서 286년 서진의 축법호(竺法護, Dharmaraksa는 “정법화경(正法華經)”이라 번역하였고, 406년 요진(姚秦)의 삼장(三藏) 구마라집(鳩摩羅什, Kumārajīva)은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이라고 번역하였으며, 601년 사나굴다(闍那崛多)는 “첨품묘법연화경(添品妙法蓮華經)”으로 번역하였는데, 여러 불자님들도 다 아시다시피 현재는 구마라집 삼장의 번역본인 “묘법연화경”이 가장 널리 독송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법화경의 제목에서도 볼 수 있듯이 법화경의 대의는 “묘법(妙法)”과 “백련(白蓮)”의 두 가지로 구분해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먼저 법화경의 가르침은 “묘법(妙法)”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묘(妙)”란 “묘하게 생겼다”라고 하는 용례처럼 “신기하거나 이상한 것”, 또는 “비정상적인 것”을 뜻하는 것으로 잘못 알기 쉬운데, 사실 “묘(妙)”의 뜻은 “절대(絶待)”의 뜻에 가깝습니다. 그리고 “법(法)”이란 가르침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진리(眞理)”라고 해석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서 “묘법(妙法)”이란 “절대적인 진리”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묘법”의 의미를 더 자세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법화경 방편품 제2에 대해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통상 부처님께서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청하는 자의 근기를 살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들의 근기에 맞는 수준으로 설법을 하시는 것이 통상인데, 이를 대기설법이라고 합니다. 즉, 방편설법입니다. 그러나 법화경의 방편품 제2의 서두에 부처님께서는 무량의처 삼매에서 벗어나시며, 누가 묻지도 않으셨건만 다음과 같이 스스로 부처님의 경지를 밝히시고 있습니다.

 

 

佛所成就 第一稀有 難解之法 唯佛與佛 乃能究盡 諸法實相

 

부처님이 성취한 바는 제일 드물게 있고 알기가 어려운 법이니, 오직 부처님과 더불어 부처님만이 이에 능히 모든 법의 실상을 헤아림을 다할 수 있기 때문이니라.

 

 

이처럼 부처님의 깨달음은 절대적입니다. 그 누구도 부처의 깨달음이 없이는 그 경지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들만이 이해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假使滿世間 皆如舍利弗 盡思共度量 不能測佛智

 

가령 하여금 모두 사리불 같은 이가 세간에 가득차서 생각을 다하여 함께 추측하고 헤아릴지라도 부처님의 지혜는 능히 측량하지 못하며,

 

 

우리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우리가 아는 것만큼만 보고 이해를 할 수 있을 뿐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은 보지도 못하고 이해하지도 못합니다. “무명(無明)”이란 별것이 아닙니다. 모르기에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현재의 우리는 과거의 우리의 누적된 결과입니다. 태어난 환경과 가정교육, 학교교육, 교유관계, 우리의 노력 등이 오늘의 우리를 결정짓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지어진 우리는 우리와 다른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알지 못하니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니 갈등이 그치지 않습니다. 여래수량품 제16에 나오는 경문처럼 우리 중생들은 가지가지의 성품과, 가지가지의 욕심과, 가지가지의 행과, 가지가지를 기억하고 생각하며 분별하기 때문에 욕심과 원한과 차별로 세상은 시끄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고해(苦海)입니다. 12인연법의 처음이 무명인 이유입니다.

 

 

그러니 완전한 이해와 완전한 평화를 위해서는 결국 무명(無明)을 밝혀줄 깨달음의 빛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깨달음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추측도 하지 못하는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결국 “묘법(妙法)”이란 그 누구도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는 “절대의 진리”입니다.

 

 

그러나 이정도로 “묘법”이라고 하지는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서 중생 모두를 부처가 되게 하는 것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출현하신 목적(一大事因緣)이라고 천명하시고, 부처님의 모든 가르침은 우리 어리석은 중생 모두가 부처가 되게 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니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르기만 한다면,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부처가 된다는 믿을 수 없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묘법(妙法)”입니다. “믿기 어려운 절대의 진리”입니다. 그래서 난신난해입니다. “믿기 어렵고 이해하기도 어려운 절대적인 진리”가 바로 “묘법”의 진정한 뜻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묘법”의 주된 내용은 우리 모두는 언젠가 성불하리라는 부처님의 선언이고, 성불의 길에 이르도록 하는 법화경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결국 적문의 의의가 바로 묘법이 뜻하는 바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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