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짜르트 레퀴엠 레퀴엠은 죽은 사람의 안식을 기원하는 가톨릭미사곡으로 진혼곡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진혼미사전례의
첫 머리 입당송이 라틴어로 "Requiem aeternam dona eis, Domine"(주여, 그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로 시작되기 때문에 레퀴엠 미사 또는 레퀴엠(진혼곡)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여기에서 첫 단어만 따서 레퀴엠미사 또는 그냥 레퀴엠이라는 명칭으로 진혼미사를 대신하여 불렀고
이것이 점차 종교적 의식이란 의미에서 벗어나 하나의 독립된 음악장르로서의 ‘진혼곡’을 뜻하게 되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미완성이라는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레퀴엠 역사상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동시에 가장 자주 연주되고 또한 대중적인 인기도 높은 곡이다. 모차르트가 그의 마지막 작품이 된 이 레퀴엠을 쓰기 시작한 것은 1791년 7월 어느 날
검은 옷을 입은 정체불명의 이상한 풍채의 한 남자로부터 그 작곡을 의뢰받으면서부터였다. 오랫동안 생활의 어려움을 겪어온 모차르트는 심신의 피로로 당장 작곡을 시작할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으나, 완성할 날짜를 정하지 않는 조건으로 승낙하였다.
사나이는 작곡료는 충분히 주겠으니 의뢰인이 누군지 알려고 하지 말라는 단서를 붙이고 돌아갔다. 건강이 악화된 모차르트는 이 곡을 자신의 죽음을 위하여 작곡하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
동년 11월 20일, 모차르트의 병은 급격하게 악화되어 자리에 눕는다.
그러나, 그는 괴로움 속에서도 생명의 전부를 이 곡에 쏟아넣어 작곡을 계속한다.
12월 4일 모차르트는 그의 애제자 쥐스마이어를 불러 작곡하다 중단된 바로 이곡, 제3곡 6부 눈물겨운
그 날이 오면(Lacrimosa)을 어떻게 완결할 것인가를 지시하고 다음날 5일 오전 0시 55분,
36세의 나이로 영원히 잠들고 만다. 끝내 완성하지 못한「백조의 노래 레퀴엠」은 성악 부분은 제4곡 2부「제물과 기구」곡의 54마디까지
완성되었고, 「눈물겨운 그 날이 오면」곡도 8마디에서 중단되어 있었다.
관현악 부분은 단지 처음의「입당송」과「자비의 찬가」만 완성되어 있었을 뿐이고, 나머지는
부분적으로 작곡되어 있었다.
이처럼 전체의 2/3정도 밖에 완성되지 못한 레퀴엠을 쥐스마이어는 스승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악상을 더듬어서, 그의 기법을 그대로 사용하여 모차르트가 죽은 2개월 후에 완성하였다. 이것이 오늘날 ‘쥐스마이어판’으로 알려진 모차르트의 레퀴엠이다. 그러나 스승과 같은 신적인 영감을 갖고 있지 못했던 쥐스마이어는 모차르트가 미처 구술하지 못한
부분들을 작곡하면서 그 미숙함을 드러내었고 곡의 마무리인 제7부에서는 제1부 인트로이투스
(입당송)와 제2부 키리에에서 몇 부분을 발췌하여 이어 붙이는 미봉책으로 곡을 끝맺고 말았다.
그리고 발제크 백작에게 넘겨져 그의 이름으로 발표되었다. 레퀴엠을 둘러싼 모차르트의 전설은 발세크 슈트파크라는 백작이 심부름꾼을 시켜 모차르트에게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한데서 비롯된다.
그는 남의 작품을 자신의 작품처럼 발표하기를 즐겼던 인물로, 레퀴엠으로 다시 그 재주를 부리려 했다.
그러므로 심부름꾼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은밀하게 보낼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 무렵 빈사상태에 있었던 모차르트는 그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예감하고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느려져 있었을 때, 검은 망토를 걸친 복면의 사나이가 하필이면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하였으니, 모차르트가 그 수수께끼의 사나이를 죽음의 사자로 여겼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이 레퀴엠을 의뢰한 사람은 발제크 백작으로, 그는 그해 2월에 세상을 떠난 젊은 아내의 1주기에
이 작품을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하기 위하여 철저히 의뢰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모차르트와 발제크 백작과의 계약자료가 발견되어 앞의 이야기는 꾸며진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부분이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각색되어 마치 '살리에르'가 그 사자(使者)인 듯 그려졌다. 영화에서 보면 그 사람은 상당히 커다란 액수의 돈을 보수로 지급하면서 진혼곡의 완성을 재촉
하였는데 모차르트는 곡의 진정한 의뢰자를 끝까지 밝히지 않는 이 괴상한 분위기의 사나이를 보고
마치 자신을 죽음의 세계로 이끌고 가려는 손길이 강력하게 작용하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극도로 궁핍한 가운데 몸을 돌보지 않으면서 작곡에만 전념하고 있던 모차르트는 레퀴엠의 작곡에
앞서 오페라 <마술피리>를 마무리하는 동안 이미 여러 번 쓰러졌을 정도로 기력이 쇠하여 있었다.
그는 자기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느끼고 있었으며 자신이 작곡하고 있는 진혼곡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음악이 될 것이라 믿고 있었다.
모든 것을 바쳐 레퀴엠의 작곡에 전념하던 모차르트는 결국 다시 쓰러지게 되었고 침대에 누운 채로
꼼짝도 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전히 그의 머리 속은 온통 레퀴엠 뿐이었다.
그는 제자인 쥐스마이어에게 구술하면서 작곡을 계속해 나갔으나 그 것 조차도 힘에 겨워 작품의
진전은 더딜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12월 4일 오후, 친구들이 모차르트를 찾아왔고 그는 악보를 보며 그들과 함께 레퀴엠을 읊조렸다.
제3부의 여섯 번째 곡인 ‘라크리모사’의 8번째 마디에서 음표는 멈추어 있었고 여기에서 모차르트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는 쥐스마이어에게 아직 반쯤 남아있는 이 곡을 어떻게 완성할 것인가에 대하여 일러 준 후
곧 의식을 잃었고 자정을 막 넘긴 시각에 36년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모차르트가 눈을 감았을 때 전체적인 윤곽을 스케치로 남겨 놓기는 했지만 그가 완성한 부분은
라크리모사(Lacrimosa)까지였다.
모차르트의 레퀴엠 중에서도 우리의 가슴을 가장 메어지게 하는 부분이 바로 <라크리모사>이다.
그리고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극적인 일화와 함께 후세의 사람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레퀴엠의 완성에 대하여 이 곡은 1791년 7월에 의뢰받았으나 같은해 12월 5일 모짜르트의 사후 미망인인 콘스탄체는
이곡을 완성시켜야 하는 문제에 봉착했다.
모짜르트의 제자인 쥐스마이어가 이 과업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쥐스마이어로 결정되기전, 콘스탄체는 아이블러(Joseph Eybler),
알브레히츠베르거(Albrechts berger)외 몇명에게 부탁했었다.
쥐스마이어 자신의 말에 의하면 그자신은 세네번째에야 고려된 인물이었다고 한다. 하여튼 이곡을 완성한 인물은 쥐스마이어였고, 이곡의 의뢰인인 쉬투파흐(Walsegg zu Stuppach)
백작은 1793년 12월 14일 비너 노이쉬타트에서 이곡의 연주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에 앞서 같은해 1월 2일, 스비텐(Van Swieten)남작에 의해 비인의 한 작은 사적 모임에서
연주되었다.
인트로이투스와 키리에(Kyrie)부분의 모짜르트의 자필악보는 완벽한데, 세쿠엔티아의 여섯곡
(디에스 이레부터 콘프타티스 까지)과 오페르토리움의 2곡(Domine Jesu와 Hositas)부분에
남아 있는 것은 성악 부분과 통주저음, 제1바이올린 부분 및 악기에 관한 개략적인 지시뿐이다.
세쿠엔티아의 제6곡 라크리모사(Lacrimosa)도 마찬가지다.
이곳에서 몇소절 지나 악보는 멈춰있다.
따라서 상투스(Sanctus), 베네딕투스(Benedictus), 아누스데이(Agnus Dei)는 원본엔 없다.
쥐스마이어는 초안이라든가, 말로된 지시사항 등을 임의로 처리했다. 룩스 애테르나(Lux aeterna)에서 끝부분까지 테데체트 힘누스(Tedecet hymnus)는 하이든의
1771년 레퀴엠 C단조에서처럼 모짜르트가 사용한 그레고리안 멜로디를 사용했고 쿰 상티스 루이스
(Cum Sanctis Tuis)는 모짜르트 키리에의 푸가를 썼다.
쥐스마이어는 이 난처한 작업을 위엄있고, 완전 무결하게 완수해서 당대의 비엔나 음악을 대표하는
인물임을 입증했다.
모짜르트의 레퀴엠은 그의 초기 미사곡들과 비교시, 조금은 우울한 듯하면서도 감동을 주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다소 어두운 색채를 띄지만 전체적인 일관된 선명한 화음속에 모짜르트의 대단한 감수성이 스며져 있다.
때로는 대단한 힘으로, 또는 극적인 효과로 절정에 이르기도 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귀함이
넘쳐 흐르기도 한다.
'아마데우스'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모짜르트가 자루에 담긴채 이름모를 집단묘지에 매장되는 장면을 기억할것이다..
그러나 그 장면과 함께 흐르는 레퀴엠의 7번째곡(눈물의 날 또는 애도의 눈물등으로 번역되는) 'Lacrimosa'를 기억하는 사람은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 장면에서 흐르던 곡이 바로 정식명칭 '레퀴엠 D 단조 K.626'으로 모짜르트 자신의 진혼곡이
되고 만 마지막 작품이다.
1791년 7월 발제크 공작은 모짜르트에게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이 레퀴엠을 의뢰했다.
몹시 병약해 있던 모짜르트는 그 '회색 옷을 입은 낯선자'를 자신의 운명을 너무나도 잘 알고
찾아온 죽음의 사자로 알았다.
그리고 그 날을 위해 진혼곡을 의뢰한 것이 틀림없다고 믿었다.
당시 모짜르트는 그의 생의 마지막 오페라인 '마술피리'에 ('마적','요술피리'등으로 불리우는
오페라에 열중하고 있었으나 당장 레퀴엠에 착수, 첫부분인 영원한 안식(Requiem aeternam)과
이어지는 키리에를 완성시켰다. 모짜르트는 '마술피리'를 완성시킨 후 다시 레퀴엠에 몰두했으나
이미 건강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상태였다. 일곱번째 곡인 Lacrimosa 여덟 소절에서
그의 펜은 더 이상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후 그의 아내 콘스탄체 베버가 모짜르트의 제자 중 쥐스마이어를 불러 완성시켰다.
모짜르트가 작곡했던 원본과 현재 우리가 즐겨 듣는 쥐스마이어의 곡은 편성이 다르다.
관과 타악기가 보강된 웅장한 완성본과는 다르게 원본은 나름대로 간결함과 청아한 슬픔을 보여준다.
물론 불행하게도 원본은 여덟 소절에서 끊어져 있다.
이 끊어진 원곡을 들어보면 마지막 끊어진 부분에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감정에 빠지게 된다.
일면 무섭기까지 하다.
한 천재의 마지막 순간과 이 음악은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알 수 없는 슬픔과 회한의 여운.. 계속 나아가고 싶으나 한발짝도 내디딜 수 없는 운명의 순간..
그는 그 마디 이후에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모짜르트 / 레퀴엠
라크리모사(Lacrimosa)
쥐스마이어 완성본 (카라얀-빈필하모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