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산 동학농민혁명사 자료)
금산 동학농민혁명 전개 과정과 주요 사적지
/ 채길순(명지전문대학 명예교수, 소설가)
1. 들어가며
금산 지역은 “1894년 3월 8일에 무장한 동학군이 제원역에서 기포하여 이야면 (李也勉)을 선봉장으로 5천여 명이 죽창과 농기를 들고 대거 금산읍에 들어와 관아 를 습격하여 문서와 각종 기물을 불사르고 서리들의 가옥을 파괴했다”는 군지 기록과, 『오하기문』의 기록으로 보아 최초 기포지이다.
전봉준과 손화중이 고창 여시 뫼봉에서 기포한 날을 3월 18일로 친다면 금산 지역 기포 날짜는 10일 정도 빨랐다. 그리고 1895년 1월 23일에 신식무기로 무장한 장위영병과 일본군 3개분대가 대둔산에 도착하여 24일 토벌됨으로써 마지막 항쟁을 벌였다. 곧 동학농민혁명의 처음과 끝의 사적 기록이 존재하는 지역이다. 그럼에도 학계에서는 이 사실이 외면 되고 있다.
이 글은 금산지역 동학·동학농민혁명사 전개 과정과 실증적인 사적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금산 지역의 동학·동학농민혁명의 전개 과정
2.1 동학의 유입과 동학농민혁명 전개 과정
(1) 동학 창도 초기부터 동학유입
황현의 『오하기문』에 “경주의 최제우가 지례, 김산 및 호남의 진산, 금산 산골을 왕래 하였다.”라고 했다. 그러나 기록으로 보아 금산지역에는 1862년 상반기에 동학이 유입되었다. 1887년에 이르러 황간의 조재벽이 입도하여 포덕을 시작하여 옥천, 영동, 청산 지역에 서 포교 활동을 하다가 1890년경부터는 금산, 진산, 고산, 용담지역으로 범위를 넓혀 갔다.
(2) 광화문복합상소와 보은취회에 참여
1892년 11월에 삼례 교조신원운동이 일어나고 민심이 동학으로 쏠리기 시작하면서 조재벽은 막강한 지도자로 등장한다. 1893년 2월 광화문 교조신원운동 때에는 금산 진산의 많은 동학교도가 참가했으며, 3월 충청도 보은 장내리와 전라도 원평에서 일어난 집회에도 많은 도인을 이 끌고 참가하였다.
(3) 전국에서 최초 기포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났다. 『금산군지』에 따르면, “3월 8일에 무장한 동학군이 제원역에 회합하여 이야면(李也勉)을 선봉장으로 5천여 명이 죽창과 농기를 들고 대거 금산읍에 들어와 관아를 습격하여 문서와 각종 기물을 불사르고 서리들의 가옥을 파괴했다”는 기록과, 『오하기문』에 “금(3월) 12일에 동학도 수천 명이 몽둥이로 무장, 흰 수건을 두르고 읍으로 몰려와 관리들의 집을 불살랐다”라는 두 기록을 기준으로 금산지역 최초 기포 날짜는 3월 8일 혹은 12일이다. 전봉준과 손화중이 고창 여시뫼봉에서 기포한 날을 3월 18일로 친다면 금산 지역 기포 날짜는 이보다 6일 혹은 10일 정도 빨랐다.
따라서 최초의 기포 장소는 고창이 아닌 금산 제원장터와 진산 방축리인 셈이다. 제원장터 동학농민군은 이야면이 통솔하였고, 방축리에 모인 동학농민군은 조재벽과 최공우 접주가, 그리고 금산 동학농민군은 박능선 접주가 지휘했다. 동학농민군은 금산 동헌을 점령하고 악질 관리들을 응징 함으로써 성공적이었으나 10여 일이 지나자 보수 세력들이 진산 방축리를 점거한 동학농민군을 반격한다. 『수록』 영기 조에 “4월 초 2일 금산 보부상 김치홍과 임한석은 읍민과 행상 1천여 명을 이끌고 진산 방축리 동학도들을 공격, 114명을 육살하였다”고 했다.
(4) 전주화약 후 집강소 설치
전라감영 관찰사의 명령으로 6월 중순에 동학군 집강소가 설립되자, 금산의 보수 세력의 저항이 한풀 꺾였다. 금산지역 초대 집강에 임명된 동학도는 용담현에 사는 김기조이며, 그의 후임은 금산읍에 사는 조동현이었다. 그러나 집강소는 금산 동헌이 유력하지만 현재 정확한 장소는 알 길 없다.
(5) 제2차기포 시기에 치열한 공방전
2차 봉기 시기인 1894년 10월 22일, 금산 동학농민군 수 천 명과 민보군 수 천명이 진산군과 금산군의 접경인 소리니재에서 접전을 벌였다. 22일 오후부터 치열 한 공방전이 벌어졌으나 승패가 나지 않았다. 이틀간이나 대치했던 전투는 24일 오전 10시에 동학농민군이 총공격을 감행하자 민보군이 64명의 전사자와 많은 부상자를 내고 흩어졌다. 이렇게 위세를 떨치고 있던 진산과 금산 옥천 지역의 동학농민군은 뜻밖에도 11 월 11일과 13일에 공주전투와 청주성 전투에서 전봉준과 김개남이 대패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6) 관 일본군의 토벌에 맞서 동학농민군 게릴라 전법 구사
일본 오이타 시라키(白木)이 지휘하는 일본군이 11월 6일에 옥천을 거쳐 금산으 로 방향을 돌려 제원역 동쪽 10km 지점인 양산마을로 와서 유숙하게 되었다. 동학농민군 천여 명이 11월 8일 밤에 이들을 포위하고 야습했다. 맹렬한 교전이 벌어지자 200m 전방 민가에 동학농민군이 불을 질렀다. 주변이 환해지자 일본군은 동학농민군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집중사격을 가했다. 약 1시간 쯤 교전 끝에 동학농민군은 금산 방면으로 퇴각했다. 수적으로 월등한 동학농민군 은 일본군의 연발총을 당해 내지 못했던 것이다. 금산읍으로 들어와 동학농민군을 제압하자 보수 세력들은 날뛰기 시작하다가 일 본군이 물러나자 동학농민군이 다시 나타나 활동하였다. 동학농민군은 관군이 쳐들어오면 숨었다가 떠나가면 다시 나타나는 게릴라전법 을 구사하였다.저항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근거지가 필요했다.
(7) 대둔산 미록바위에서 마지막 항쟁 준비
위세를 떨치고 있던 진산, 금산, 옥천 지역 동학농민군은 11월 11일과 13일에 벌 어진 공주전투와 청주성 전투에서 전봉준과 김개남이 각각 대패했다는 소식이 들 려오자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그러나 조재벽과 최사문, 최공우 부자가 이끄는 동 학농민군은 저항을 계속하기 위해서는 안전한 근거지가 필요했다. 물색한 끝에 전 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북서쪽 석도골 대둔산 미륵 바위에 초막을 짓고 항쟁에 들어간다. 1895년 1월 9일(양 2월 3일)에 이르자 충청감영은 병력을 출동시켜 대둔산 동학 농민군을 공격하였으나 이틀간 체류하다 대책이 없자 진산으로 철수한다. 금산 의 병장 김진용이 300명을 이끌고 왔으나 그도 역시 속수무책이었다. 도리어 동학농 민군은 금산읍을 공격하여 영군을 불러들인 진산 군관 하경석을 처단하고 많은 병 사들을 사살한다. 감영군은 이 소식을 듣고 소모사 문석봉을 다시 출동시켰으나 대- 67 책을 세워보지도 못하고 진산으로 물러난다.
(8) 대둔산서 완패, 염정동으로 후퇴
1895년 1월 23일에 신식무기로 무장한 장위영병과 일본군 3개분대가 대둔산에 도착하면서 사태는 급전한다. 일본군은 24일 새벽 공격을 개시했다. 동학농민군은 험준한 벼랑만 믿고 배후는 방심한 채 전방의 장위영병을 향해 발포를 계속했다. 이 틈에 일본군은 뒤쪽으로 잠복하여 불시에 돌격했다. 동학농민군은 당황하여 어떤 자는 천 길이나 되는 계곡으로 뛰어들었고 어떤 자는 바위 굴 속으로 숨었다. 살아남은 자를 모두 포박하려 했으나 장위영 병사들이 모두 사살하고 겨우 한 소년만 남겼다. 29세 쯤 되는 임산부도 일본군 총에 맞아 죽어 있었다. 접주 김석순은 한 살짜리 여아를 안고 천 길의 벼랑을 뛰어내려 바위에 부딪쳐 즉사했다. 일본군에 의해 대둔산에서 완패한 동학 지도부는 염정동으로 후퇴한다. 금산의 또다른 동학 세력 최사문 최공우 등은 수백 명의 동학농민군을 다시 모아 항쟁을 시도했지만 끝내 토벌되었다.
2.2 금산군 주요 사적지
○ 진산 방축리 봉기 및 싸움터(현, 논산시 은진면 방축리) ○ 제원역 봉기 터(현, 역말, 금산군 제원면 제원리, 제원초등학교) ○ 금산 관아 터(동학농민군이 동헌을 점령, 현, 금산읍 인삼로 69) ○ 불이리 동학농민군 위령탑(현,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 마을 입구) ○ 소라니재(松院峙) 전투지(진산군과 금산군의 접경 고개) ○ 대둔산 최후 항쟁터 미륵바위(현 전북 완주군 운주면 산북리)
3. 나오며
살펴본 바와 같이 금산 지역 동학혁명은 금산 진산 동학군이 주축이 되어 조재 벽과 최사문, 최공우 부자 및 옥천, 청산, 영동, 황간, 고산, 용담, 연산 지역 등 주변 여러 지역 접주에 의해 전개되었다. 보수 세력과 동학 세력의 대립 관계도 여느 지역 못지 않게 치열했고, 특히 금산군의 보수 및 보부상 세력과 진산군의 동학 세력의 대결로 전개되었다. 당시 동학과 유교는 서로 용납할 수 없는 대립 집단이었다. 최초의 기포에서부터 집강소 활동기와 10월 소리니재 전투에서, 그리 고 최후의 대둔산 미륵바위 항쟁에서 동학농민혁명의 저항정신이 잘 드러나고 있 다.
조재벽은 12월 무렵 2세교주 최시형과 손병희의 동학군과 합류하여 영동전투를 거쳐 12월 18일의 보은 북실전투, 12월 24일의 음성 되자니전투에서 일본군과 끝 까지 항쟁했다. 한편 김석순 최사문, 최공우 부자를 비롯한 많은 동학지도자들이 대둔산과 염정골에서 끈질기게 항쟁했다. 이들의 숭고한 발자취는 이 시대의 역사를 전환시키는데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고 할 수 있다.
금산 동학농민혁명사의 의의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금산 동학은 충청도 전라도를 잇는 동학혁명사의 연결고리였다. 둘째, 금산은 동학 혁명의 최초 기포 지역이며, 동학농민군과 보수 세력과의 공 방전은 어느 지역보다 처참했다. 셋째, 금산의 동학농민군은 이듬해 1월 하순까지 일본군과 끈질기게 항쟁했다.
참고문헌 (기본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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