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1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3월 18일(정축) 1번째 기사
우박이 내리다. 무신을 거느리고 마이천 남쪽에서 매사냥을 하다
우박이 내리었다. 임금이 무신(武臣)을 거느리고 마이천 남쪽에서 사냥하였는데, 활과 화살을 차고 말을 달리고 매[鷹]를 놓았다. 늦게 새 서울[新京] 남쪽에 머무르니, 상왕(上王)이 내관(內官)을 보내어 술을 베풀었다. 좌정승(左政丞) 이거이(李居易)·판삼군부사(判三軍府事) 이무(李茂) 등이 시연(侍宴)하였다. 연회가 파하매, 도승지(都承旨) 박석명(朴錫命)이 아뢰기를,
“질고 험한 길에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매[鷹]를 받고 말을 달리시니, 신은 불가(不可)한가 합니다. 신 등이 성품이 본래 노둔(駑鈍)하고 겁이 있어, 처음에 감히 청하지 못하였으나, 원컨대, 다시는 하지 마옵소서”
태종 1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3월 18일(정축) 3번째 기사
문하부낭사에서 태종에게 사냥을 자제할 것을 건의하다
문하부(門下府) 낭사(郞舍)가 상서하였는데, 그 대략은 이러하였다.
“전하께서 천승(千乘)의 지존(至尊)으로 아래로 필부의 용맹을 본받으시어 친히 궁시(弓矢)를 차고 숲속에 드나드시니, 신 등은 간절히 전하를 위하여 위태롭게 여깁니다.”
태종 1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윤3월 20일(기유) 1번째기사
마암에 행차하여 호위군사들의 활쏘기를 구경하고 상을 내리다
마암(馬巖)에 행차하여 위사(衛士)들의 기사(騎射)·보사(步射)를 구경하고, 맞힌 자는 활과 화살로 상을 주었다.
태종 2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12월 9일(계해) 2번째 기사
사신 갔던 이서, 안원이 돌아와《대학연의》《통감집람》등을 바치다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서(李舒)·총제(摠制) 안원(安瑗) 등이 명나라 서울에서 돌아왔다. 이서 등이 《대학연의(大學衍義)》·《통감집람(通鑑集覽)》·《사림광기(事林廣記)》 각각 1부(部), 각궁(角弓) 2장(張), 색사(色絲) 2근(斤)을 바치고 아뢰었다.
“명나라의 예제(禮制)를 예부(禮部)에 청하였더니, ‘중국의 예제는 번국(藩國)에서 행할 수 없다.’ 하였고, 면복(冕服)을 청하였더니, ‘주문(奏聞)하면 만들어 보내겠다.’ 하였고, 관제를 고치기를 청하였더니, ‘주문하면 허락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신(臣)이 경사(京師)에 있으면서 황제가 친히 군사를 점검하는 것을 보았는데, 사람들이 말하기를, ‘장차 연왕(燕王)을 치려는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태종 2권, 1년(1401 신사 / 명 건문(建文) 3년) 10월 10일(을축) 1번째기사
미륵당 서천가에서 사냥하다
활과 화살을 차고 미륵당(彌勒堂)서천(西川) 가에서 사냥하였다
태종 3권, 2년(1402 임오 / 명 건문(建文) 4년) 5월 4일(병술) 2번째기사
임팔라실리 등이 병기를 바치다
임팔라실리(林八剌失里)·최강(崔康) 등이 병기(兵器)를 바쳤으니, 갑옷이 11벌, 활이 2백 24개, 화살이 2천 6백 53개, 철두구(鐵頭具)가 56개, 창이 98개, 칼이 67개, 각(角)이 3개, 둑(纛)이 2개, 기(旗)가 15개, 활줄[弓弦]이 1백 8개, 나발(螺鉢)이 1개, 징[錚]이 1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