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왔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묵상>
'함께 하는 여정'에서 27기 예비신자님들과 나눔을 가지다가 이 시가 생각이 나서 나눔이 끝날 무렵에 낭송을 하고 내 느낌을 사족처럼 말씀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이 자리에서 함께 나눔을 하던 스테파노 형재님이 이 시가 참 좋다면서 꼭 홈페이지에 올려달라는 부탁을 해 왔습니다.
윤동주는 총칼을 들고 독립 항쟁의 일선에서 싸우지는 않았지만 나라없는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또 시인으로서 치열한 고민과 부끄러움을 피처럼 토한 시를 남겼습니다.
상기한 시도 그 중 하나라 생각합니다.
어느날 시인은 길을 가다가 문득 첨탑 위에 세워진 교회의 십자가를 쳐다 봅니다. 무심코 따라 오던 해가 십자가와 일치되어 나를 비춥니다.
나는 결코 올라갈 수 없는 저 아득한 높이의 십자가에 올라갈 수 있는 해의 경지가 부럽기도 하고 그럴 수 없는 내 처지가 안타깝기도 합니다.
종소리는 희망의 소리입니다. 지금은 그 종소리마저 돌려오지 않는 암담한 상황입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하릴없는 휘파람이나 불며 내 스스로를 달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예수님을 떠 올립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뒤집어 쓰고 모진 백성들의 저주 속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가야 했던 예수야 말로 인간적으로 가장 괴로운 사나이임에 이설이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하느님의 어린양이 되어 거룩한 죽음을 맞이했으니 이는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서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나에게도 예수님에게 주어진 십자가처럼 그러한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골고다의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고개를 드리우고 죽어간 예수님처럼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꽃처럼 피어나는 피'의 이미지가 주는 의미가 깊습니다. 죄많은 형제들의 구원을 위해 흘리는 거룩한 피가 꽃으로 피어나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처럼'을 굳이 독립시켜 한 행으로 잡은 시인의 심경을 헤아렸으면 합니다. 이는 나같은 사람에게는 영원히 허락되지 않을 십자가이지만 그래도 만약 그 십자가처럼 주어질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들이 생략되었다고 봅니다.
시가 쓰여질 당시인 1941년의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이 '어두워가는 하늘'은 일제 말기의 암담한 조국의 현실을 드러낸 것이라고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꽃처럼 피어나는 피'는 나를 위해서 흘리는 피가 아니라 나라 잃은 시대의 모든 겨레를 위해 흘리는 피여서 꽃처럼 피어나는 것입니다.
저는 시인 윤동주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누구보다 더 정확히 인지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시처럼 그는 스물 아홉의 꽃같은 생애를 조국의 하늘에 영원히 비치고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는 아직도 우리 겨레의 가슴깊이 남아 해마다 꽃처럼 피어나고 있습니다.
2018.2.15 허남술 세바스티아노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