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5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토록 오랜 역사를 가지고 단일 민족으로 살아온 겨레는 세계 역사상 드물 것이다.
일찍이 중국에서는 우리 나라를 일컬어‘동방의 예의바른 나라〔東方禮義之國〕’, ‘군자의 나라〔 君子之國〕’등으로 불러 왔는데, 이것은 우리의 민족성(民族性)을 드러내는 명칭 들이다. 또한,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 나라를 가리켜‘고요한 아침의 나라’,‘동방의 해뜨는 나라’라고도 하였는데, 이는 우리나라의 금수강산(錦繡江山)에서 연유(緣由)하여 불려진 명칭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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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민족을 일컬어‘배달겨레’,‘백의민족(白衣民族)’이라 한다. 배달(倍達)은 단군(檀君)의 박달(檀〕에서 나온 것으로 단군의 자손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으며, 백의민족은 우리 민족이 흰 옷을 즐겨 입고 순결을 중시하여 불려진 것이다. 이러한 배달겨레의 민족성을 닮고 배달 나라의 아름다운 자연에 걸맞는 ‘신(神)의 꽃’ 이 있어왔다. 그 이름하여‘무궁화(無窮花)’-끝이 없는 꽃, 영원히 피고 또 피어 지지 않는 꽃, 억겁(億 劫)의 영원무궁(永遠無窮)토록 빛나 겨레의 환한 등불이 되어질 꽃인 것이다. 무궁화는 태고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세워지기 이전인 신시시대(神市時代) 환나라(桓國)의 나라꽃인 ‘환화(桓花)’로 나타나 오늘날까지 5천여 년 동안을 배달 겨레와 동고동락(同苦 同樂)하며 자연스레 겨레의 꽃으로 자리잡게 되어 배달 겨레의 얼을 면면히 이어 오고 있다. |
예로부터 우리 민족이 무궁화를 사랑해 온 것은 비단 겉으로 드러나는 무궁화의 빼어난 자 태나 색깔에 연연해서라기보다는 이 꽃이 주는 이미지와 상징성의 풍부함에 연원(淵源)한 것으로 보인다.
우리 민족은 개천(開天)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다른 나라를 정벌하여 지배하기도 하였으나, 그보다도 더욱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아 왔다. 이처럼 잦은 외세의 침입에도 굴하지 않고 예지(叡智)와 용기를 모아 꿋꿋하게 단일 민족으로서 나라와 겨레를 지켜 온 그 정신은 민족얼의 표상으로서 무궁화 정신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다른 어떠한 꽃보다도 무궁화를 더욱 좋아하였을지도 모른다. 김규선은 《무궁화 교본》에서 무궁화의 뛰어난 점을 들어 ‘무궁화 사랑의 근본 뜻’을 서술하고 있는데, 이것을 살펴보면 그 속에 나타난 우리의 민족성을 찾아볼 수 있다. 다음은《무궁화 교본》에 실린 내용들을 정리한 것이다.
무궁화가 여느 화훼 식물과 다른 뛰어난 점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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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무궁화는 다른 예사로운 화훼 식물들처럼 연약한 풀줄기 즉, 초본경(草本莖)인 1년생 의 것이 아니고, 강건하고 장대한 다년생의 나무줄기 즉, 목본경(木本莖)인 식물이다. 그 꽃을 완상(玩賞)함을 근본으로 하는 화훼 식물치고는 목련, 백일홍, 홍도화들처럼 자못 거수 (巨樹)로 촌가의 울타리 곁에서 만도 흔히 4∼5m를 넘는 폭과 키의 무궁화를 발견 할 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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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곱기는 하지만 잗다랗다 할 만큼 작은 일순(一瞬)의 아름다움을 택하지 않고, 장대한 오랜 누림을 더욱 값진 것으로 받아들이는 우리들 선인에게서 이 무궁화가 다년생의 목본(木本)인 점이 우선 호감을 준 것이다.
또 무궁화는 다른 예사의 꽃들처럼 사람의 시각, 후각을 일순(一瞬)에 자극할 만큼 현란(絢 爛)하거나 향기로운 꽃이 아니기 때문에 더욱 사랑받는 꽃이 되었다.
모란은 화려한 꽃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향기가 전혀 없는 이유로 매화에게 중국의 나라꽃 자리를 빼앗겼고, 불가(佛家)에서 그토록 존숭(尊崇)하는 연꽃 역시도 향기가 그다지 좋지는 않다.
우리 선인들은 홍도화, 백일홍 등을 너무 미려하다 해서 오히려 집안에 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은거(隱居)하는 군자(君子)의 가라앉은 마음과 시선을 흐트려 놓지 않으려 했던 우리 선 인들의 곧은 성품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우리의 선인들은 멋과 미(美)를 시간, 거리, 중량의 단위로 계량(計量)하는 법이 없었기에 미인을 형용하여‘돋아오르는 반달 같은 얼굴, 맑은 눈, 붉은 입술, 하얀 이, 오똑한 코…’ 등으로 표현하여, 지나칠 정도로 드러나는 아름다움보다는 은은한 보편의 미를 사랑하였다.
이런 우리의 선인에게 무궁화의 그 장대한 몸체를 뒤덮은 싱그런 잎은 그대로 한 무리의 자연이요, 있는 듯 없는 듯한 은은한 향기를 지닌 채, 꽃바탕의 대부분은 무색인 흰빛이요, 가운데에만 짙붉은 화섬 (花心)일 뿐 있는 듯 없는 듯한 색조의 꽃이었기에 은자(隱者)의 풍격(風格)을 사랑하던 우리 선인들의 전통적인 취향에 꼭 들어맞는 꽃이었다. 이것은 다음 의 글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무궁화는 몹시 예쁜 꽃이거나 향기가 짙은 꽃이 아닙니다. 아담하고 은은한 향기를 지난 순 결한 꽃입니다.〔조지훈,1948,〈무궁화〉,《중등 국어1》〕 우리 선인들은 또 무궁화의 수수하고 부쩝 좋은 것을 좋아하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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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는 어떤 의미에 있어, 아니 어떤 의미에서가 아니라 무엇보다도 은자(隱者)의 꽃이라 할 수 있겠다. 외인(外人)은 우리 한국을 불러 은자의 나라라고 하는데, 그 연유를 알지 못하나 과연 은자의 나라다운 곳이 있다면 무궁화는 따라서 우리 나라를 잘 상징하는 꽃이 되겠다. 무궁화는 첫째, 성(性)을 따지자면 결코 여성이 아니다. 중성(中性)이다. 요염한 색채도 없고 복욱(馥郁)한 방향(芳香)도 없다. 양귀비를 너무 요염하다 해서 뜰에 넣지 않은 우리 선인의 취미에 맞을 뿐 아니라, 향기를 기피하여 목서(木犀)까지 뜰에서 추방한 아나톨 프랑스의 사제(司祭) 도 타협할 수 있는 은일(隱逸)의 꽃이다. 그리고 은자로서의 우리 선인의 풍모를 잠깐 상상한다면 수수한 베옷이나 무명옷을 입고, 살부채를 들고 조그만 초당(草堂) 뜰을 거니는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 모습에 잘 어울리는 꽃으로 무궁화 이외의 꽃을 쉬이 상상할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뿐 아니라, 무궁화는 은자가 구하고 높이는 모든 덕을 구비하 였다. 무궁화에는 은자가 대기(大忌)하는 속취(俗臭)라든가, 세속적 탐욕 내지 악착을 암시 하는 데가 미진(微塵)도 없고, 덕(德)있는 사람이 타기(唾棄)하는 요사(妖邪)라든가 망집(妄 執)이라든가 오만(傲慢)이라든가를 찾아 볼 구석이 없다. |
어디까지든지 점잖고 은근하고 겸 허하여, 너그러운 대인군자(大人君子)의 풍모를 가졌다. 서양 사람들은 무슨 꽃을 겸허의 상 징으로 삼는가 잠깐 상고(詳考)할 수 없으나, 나는 어떤 꽃보다도 우리의 무궁화가 겸허를 표현하고 있지 아니한가 하는데, 과연 그렇다면 무궁화는 최고의 덕을 가진 탁월한 꽃이라 고 찬양할 수 있겠다. 왜 그러냐 하면 겸허는 사람의 아들로서 가질 수 있는 가장 숭고한 심경(心境)일 뿐 아니라, 나아가선 온 땅을 누럴 수 있는 미덕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 면 무궁화는 어느 정도 한국 사람의 성질을 말하고, 우리의 지취(志趣)가 흔구(欣求)하는 바 에도 상부(相符)하는 것이어서 국화(國花)로 삼아 의당할 뿐 아니라, 무궁화가 가진 덕을 몸 소 배워 구현(具現)하는 데 힘쓴다면, 우리는 세계 어느 나라 사람보다도 훌륭하고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겠다.〔이양하,1948,〈무궁화〉〕
둘째, 우리 민족은 단군 개국 이래 밝고 맑음을, 그리고 그것의 근원인 하늘과 태양을 숭앙 (崇仰)하는 겨레였다. 그래서 우리 민족을 박달(朴達)·배달 민족이라 하고, 밝고 맑음의 색 인 흰빛을 사랑하기에 백의민족이라 일컬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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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 중에서 가장 귀하게 여기는 것은 흰색의 무궁화로, 이 꽃은 너른 흰꽃 바탕에 짙붉 은 화심(花心)을 하고 있으므로 이것은 백단심(白丹心)을 상징하는 것으로 일컬어져 왔다. 곧 백의를 숭상하는 민족의 기호(嗜好)에 안성맞춤인 꽃이었기에 나라꽃으로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
무궁화는…아담하고 은은한 향기를 지닌 순결한 꽃입니다. 희디흰 바탕은 이 나라 사람의 깨끗한 마음씨요, 안으로 들어갈수록 연연히 붉게 물들어, 마침내 그 한복판에서 자줏빛으로 활짝 불타는 이 꽃은 이 나라 사람이 그리워하는 삶이라 합니다.〔조지훈〕 …하루 아침 문득 푸른 잎새 사이로 보이는 한 송이의 흰 무궁화는-무궁화는 흰 무궁화라야 한다. 우리의 선인(先人)이 취한 것도 흰 무궁화임에 틀림이 없다. 백단심이라는 말이 있을 뿐 아니라, 흰빛은 우리가 항상 몸에 감는 빛이요, 화심(花心)의 빨강은 또 우리의 선인 들이 즐겨 쓰던 단청(丹靑)의 빨강이다-감탄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 〔이양하〕
셋째, 무궁화는 보통 7월부터 피기 시작하여 찬 바람이 부는 10월 하순까지 끊임없이 계속 해서 필 만큼 화기(花期)가 길다. 반만년의 역사, 유구히 이어 오는 고유 문화의 전통을 사 랑하는 겨레, 그 숱한 국난(國難)을 당하면서도 결코 민족의 순수를 단절함이 없이 영구히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정신력, 조국과 군왕(君王)과 가문(家門)의 만세 (萬歲)를 염원(念願)하여 자손 만대의 끊임없음을 자랑하던 단일 민족인 우리들에게 그런 염원에 안성맞춤인 꽃 무궁화는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꽃이었다.
무려 백일(百日)이상을 날로 날로 새롭게 피어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하는 기상은 곧 우 리 겨레의 진취성(進就性)을 닮은 것이요, 백일을 토굴 속에서 참고 견디며 인간이 되고자 했던 단군 신화의 곰의 인내와 끈기, 백일 불공(佛供)의 기원을 들이는 우리 민족의 정성스 러움, 그 한결같은 우리 민족의 인내와 관용과 우정의 영원함을 상징한다. 그래서 무궁화의 꽃피는 기간의 장구함에 대해서도 많은 이들이 다음과 같은 찬탄의 글을 남겼다.
朝鮮民族(조선민족)을 代表(대표)하는 無窮花〔무궁화 : 木槿(목근)〕로 말하면 꽃으로는 開 花期(개화기)가 無窮(무궁)하다 안이 할 수 업슬만치 참으로 長久(장구)하며 그 꽃의 形狀 (형상)의 儼然(엄연)하고 美麗(미려)하고 情操(정조)잇고 潔白(결백)함은 實(실)로 朝鮮民族 性(조선민족성)을 그리여 내엿다. 何國(하국)을 勿論(물론)하고 各自(각자)民族(민족)을 代表 (대표)하는 꽃이 있지만은 우리를 代表(대표)하는 無窮花(무궁화)가티 形(형)으로나 質(질)로 나 適合(적합)한 것은 볼 수 없다.〔김동혁,1928,〈朝蘇産(조선산)의 花草(화초)와 動物(동 물)〉,《別乾坤(별건곤)》〕
미상불 조선에는 어디를 가든지 무궁화가 흔히 있으니까 무궁화 나라라고 함이 까닭 없달 수 없으며, 또 무궁화는 꽃으로 가장 좋은 것이 아닐지는 모르지마는, 그 발그레한 고운 빛 이 미인(美人)의 얼굴을 형용하는 데 쓰이는 터이며, 또 날마다 새 꽃이 피어 가면서 봄, 여 름, 가을을 지내는 긴 동안에 줄기차고 씩씩하게 피기를 말지 아니하는 점이 왕성한 생명력 을 나타내는 듯하여서, 나라를 대표하는 꽃(National Flowers)을 삼기에 부족할 것이 없다 할 만합니다. 〔최남선,1946,《조선상식문답(朝鮮常識問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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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피기 시작하여 가을까지 계속적(繼續的)으로 피는 것은 자강불식(自强不息)하는 군 자(君子)의 이상(理想)을 보여 주는 바다. 그 화기(花期)의 장구 (長久)한 것은 화품(花品)의 청아(淸雅)한 것과 아울러 이 꽃의 두드러진 특징(特徵)이라 할 것인 바, 조선인(朝鮮人)의 최고 예찬(最高禮讚)을 받는 이유(理由)도 주(主)로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문일평,윗글] |
무궁화는 한 송이 한 송이로는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떨어지는 꽃입니다. 그러나 새로 뒤 따라 피고, 이어 피기 때문에 언제나 예대로 조금도 줄지 않고, 새로운 꽃이 가득히 피어 있 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이 꽃은 늦은 봄철에서부터 여름을 거쳐, 서릿발이 높아 가는 가을에 까지 피기 때문에 무궁화란 이름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죽어 갈지라 도 새로 이어 나고 자라나서 길이 무궁한 빛을 누리는 우리 겨레, 이 모든 겨레의 힘으로 또한 무궁히 뻗어 나갈 우리 나라, 이는 오로지 사람 사람이 제 스스로의 구실을 다하고, 깨끗이 지는 무궁화를 배움으로써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조지훈,윗글〕
피기 시작하면 꽃 한 송이 한 송이는 대개 그날 밤사이에 시들어 뒤말라버리고 말지만, 다음날 새 송이가 잇대어 피고 하는 것이 8월이 가고 9월이 가고 10월에 들어서도, 어떤 때는 아침 저녁 산들바람에 흰 무명 바지 저고리가 차가울 때까지 끊임없이 핀다. 그동안 피고 지는 꽃송이를 센다면 대체 몇천 송이, 몇만 송이 될 것일까? 그 중 많은 꽃을 피우는 때는 8월 하순경인데, 이때면 나의 키만한 나무에 수백 송이를 셀 수가 있다. 형제가 벌열(閥閱) 하고 자손이 자자손손(子子孫孫) 백대(百代), 천대(千代)이어가는 것을 무엇보다 큰 덕(德)으 로 생각하던 우리의 선인들은, 첫째 이러한 의미에 있어서 아마 무궁화를 사랑하였을 것이 다. 그리고 꽃으로서도 이만큼 무성하고 이만큼 오래고 보면 그것만으로도 한 덕(德)이라 할 수 있지 아니할까?〔이양하, 윗글〕
넷째, 옛부터 우리의 선인들은 많은 꽃들이 다투어 피는 계절에 피는 꽃보다 외롭지만 고 고(孤高)히 늦피는 꽃을 숭상하였다. 그래서 한란(寒蘭)이며, 설중매(雪中梅)와 오상고절(傲 霜孤節)의 국화(菊花)를 더욱 사랑하였던 것이다.
4월, 5월 모든 초본(草本)의 꽃 식물이 한껏 자라나 온갖 꽃을 피워 내는 계절에 무궁화는 겨우 눈이 터서 잎이 자라 천천히 꽃을 피운다. 백일홍이 비록 집 안마당에 들여지기를 꺼려도 누대(樓臺)의 뜰에 많이 심어지는 것이 그런 까닭이었고, 실과(實果)중에 대추(棗)가 더욱 귀하게 대접받는 것 역시 그렇다. 이것들은 거의 5월 중순을 넘어서야 비로소 눈엽 (嫩葉) 즉, 여린 잎을 갖출 정도로 느리고 점잖아서, 드러나지는 않은 채, 강의목눌(剛毅木 訥)을 숭상하던 인자(仁者)의 기풍을 가졌음으로 해서 사랑받는 꽃이었다. 이에 대해서 이양 하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앵두꽃이 피고 살구, 복숭아가 피고 져도 무궁화는 아직 메마른 가지에 잎새를 장식할 줄도 모른다. 잎새가 움트기 시작하여도 물 올라가는 나무뿌리 가까운 그루터기에서부터 시작 되는 것이어서, 온 뜰이 푸른 가운데 지난해의 마른 꽃씨를 달고 있는 나뭇가지가 오랫동안 눈에 거슬린다. 라일락이 피고, 황매(黃梅)가 피고, 장미가 피고 나야 비로소 잎새를 갖춘다. 잎새는 자질구레한 것이 나무 그루터기에서부터 가지의 끝까지 달리는 것이어서, 말하자면 온 나무가 잎새가 된다. 꽃 피는 것도 무척 더디다. 봉오리가 맺기 시작하여도 한두 주일을 기다려야 꽃이 피는데, 첫 꽃이 피는 것은 서울에서는 대개 여름 방학이 시작되는 7월 초순 이다. 오래 기다리던 나머지요, 또 대개의 꽃이 한봄의 영화(榮華)를 누리고 간 뒤의 뜰이 퍽이 쓸쓸한 탓도 있을 터이지만, 하루 아침 문득 푸른 잎새 사이로 보이는 한 송이의 흰 무궁화는…감탄 없이는 바라볼 수 없는 것이다.〔이양하,윗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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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무궁화는 토질의 후박(厚薄)을 가리지 않기 때문에 어디든지 옮겨다 심어도 잘 자 란다. 무궁화는 오동나무, 미루나무, 자귀나무처럼 당년(當年)에 몇 길씩 자라 주체할 수 없 을 만큼 자라는 것이 아니라 바향나무, 주목나무 자라듯 천천히 자라되 몇 년, 몇십 년을 흐 르는 사이에 거목(巨木)으로 자라난다. |
또 이렇게 자라는 나무는 일단 웬만큼 자라면 옮겨 심어 키우기가 어려운데, 무궁화는 거 목(巨木)이 된 다음에 옮겨 심어 놓아도 마치 우리 문화 전통의 그것처럼 실하고 숱한 뿌리 들 때문에 아무 탈없이 잘 자란다. 뿐만 아니라 무궁화는 계절을 두고서 까탈을 부리지 않 기 때문에 겨울철을 제하고는 어느 때든지 옮겨 심을 수 있고 번식을 시킬 수 있다.
번식은 씨로도 되고 꺾꽂이, 어느 쪽이라도 다 용이(容易)하다. 일조량(日照量)이 웬만하고 배수만 잘되면 긴 가뭄, 오랜 장마가 들어도 끄떡없고, 빽빽히 밀고 나오는 가지 펼침을 적당히 솎아 주면 그뿐, 수형(樹型)을 잡느라고 큰 고생을 하지 않아도 제대로 알맞은 모양으 로 자란다.
이런 특성에 무궁화는 큰 정성을 들여 돌보지 않아도 좀처럼 절종(絶種)하거나 희소(稀少) 해지는 일이 없다. 이 모두는 강인한 우리의 민족성과 창성(昌盛)하는 국운(國運)을 그대로 상징하고 있다고 할 만하다. 무궁화의 이러한 면모를 조지훈과 이양하는 다음과 같이 얘기 하고 있다.
무궁화는 쓸쓸한 울타리 옆, 거친 들판, 외로운 길가 아무 데나 피어, 쓸쓸하고 거칠고 외 로움을 아늑하고 즐겁게 하는 꽃입니다.〔조지훈,윗글〕
무궁화는 별로 토지(土地)의 후박(厚薄)을 가리지 아니하고, 청송오죽(靑松烏竹)처럼 까다 롭게 계절을 가리지 아니한다. 동절(冬節)을 제하고는 어느 때 옮겨 심어도 자라고, 또 아무 데 갖다 놓아도 청탁 없이 잘 자란다. 밭 기슭에서 자라고, 집 울타리에다 심으면 집 울타리 에서 자라고, 사랑 마당에 심으면 사랑 마당에서 자란다. 아니, 심어서 자란다느니보다 씨 떨어진 곳에 나서 자라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이 꽃은 벌레 타는 법이 없다. 혹시 진딧물 이 끼고 거미가 줄을 치는 법은 있어도, 벌레 때문에 마르는 법이라곤 없다. 이렇게 까탈부 릴 줄을 알지 못하고, 타박할 줄 모르는 것이, 이 꽃이 사람의 귀여움을 받지 못하는 소이 (所以)의 하나가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하도 부쩝이 좋고 까탈이 없고 보니, 사 람이 비록 소중히 하지 아니한다 하여도 절종(絶種)되거나 희소(稀少)해지거나 할 염려는 조금도 없다. 그냥 내버려 두어도 어디까지든지 퍼지고 자라고 번성할 운명(運命)을 가졌다. 여기 우리는 무궁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선인의 마음 가운데 다시 자손(子孫)의 창성(昌盛) 과 국운(國運)의 장구(長久)를 염원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다.〔이양하,윗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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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째, 무궁화는 공해(公害), 충해(蟲害)에 아랑곳하지 않을 정도로 강한 화훼 식물이다. |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국화(菊花)무리의 꽃들은 진딧물의 퇴치(退治)를 위해 자주 약을 뿌려 주어야 하나, 무궁화는 약을 뿌리지 않아도 진딧물쯤이야 자연 퇴치해 버린다. 간혹 거미가 깃하고 파리들이 꼬이기도 하나 그것 때문에 나무나 꽃이 못쓰게 되는 일이 절대로 없다. 어쩌다 약을 뿌릴 일이 생기기도 하나, 이것 역시 다른 예사의 꽃들에 비해 희소(稀少) 하여 전화기(全花期)동안에 그저 한두 번으로써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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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상 우리 민족이 겪은 국난(國難)을을 한결같이 끈기로써 극복해 낸 그런 면면(面面)을 잘도 닮은 꽃이 바로 무궁화이다.
일곱째, 무궁화는 겸허한 자세인 듯 조용히 피었다가 곱게 지는 수줍은 꽃이다. 영국인이 자랑하는 장미의 화려한 아름다움, 초봄의 이른 정원을 온통 풍만한 꽃으로 뒤덮게 하는 황 매화(黃梅花)를 사람들은 사랑하지만 화기(花期)가 다하여 며칠씩 마르다 가는 오랜 비라도 맞으면 그 자리에서 썩어, 보기 흉한 몰골로 변하는 낙화(落花)모습은 참으로 추하기 이를 데 없다.
《채근담(菜根譚)》에는 군자의 기풍에 관해 다음과 같은 구절이 기록되어 있다.
風 來 疎 竹 風 過 而 竹 不 留 影 雁 度 寒 潭 雁 去 而 潭 不 留 影
풍 래 소 죽 풍 과 이 죽 불 류 영 안 도 한 담 안 거 이 담 불 류 영
故 君 子 事 來 而 心 始 現 事 去 而 心 隨 空
고 군 자 사 래 이 심 시 현 사 거 이 심 수 공
바람이 성근 대밭을 지나 불지만, 바람이 지난 뒤에는 대나무가 바람소리를 머물러 두지 않는다. 기러기가 차가운 못 위를 지나 날아가지만, 그 기러기가 날아간 뒤에는 못물이 기러기 그림자를 머물러 두지 않는다. 그러기에 군자는 일이 있어야만 비로소 그 마음이 나타나 고, 일이 지난 뒤면 마음조차 따라 빈다.
무궁화가 바로 이런 군자(君子)의 기풍(氣風)을 보이는 꽃이다. 땅에서 얻은 정기(精氣)로 꽃피워, 그 정(精)을 미련없이 고이 땅으로 되돌려 주는 정성이 깊을 뿐, 무궁화는 마르고 썩어지면서까지 그 근원을 떠나지 않으려는 악착을 결코 보이지 않는 대인군자(大人君子)의 풍모를 지녔다.
무궁화가 지닌 이런 대인군자의 풍모를 조지훈은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무궁화는 깨끗이 피고 깨끗이 지는 꽃입니다. 모든 꽃이 아무리 아름답더라도 질 때는 더 러워지는 것인데, 이 무궁화만은 곱게 오무라진 뒤에 꼭지가 빠지는 것이므로, 여간 깨끗하 게 지는 것이 아닙니다. 〔조지훈,윗글〕
여덟째, 어떤 이들 특히, 일본 사람들은 한 송이 한 송이의 무궁화꽃이 조개모락(朝開暮落) 이랄 수 있을 만큼 금방 져버리므로, 인간 부귀영화(富貴榮華)의 덧없음 같다 하여 이를 별 로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이 점은 연이어 피어나는 다른 꽃들의 장구(長久)한 화기 (花期)로써 충분히 보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즉, 열흘을 붉은 꽃이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한 떨기의 꽃핌이 하루이건 열흘이건 그것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다. 유구한 영겁(永劫)에 비하면 천년(千年)도 잠깐 사이일진대, 예사 꽃이 무궁화보다 며칠 더 피어 있을 수 있다 해도 그것은 결국 오십보로서 백보를 웃는 격[五十步笑百步]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하나 무궁화의 꽃핌이 일순(一瞬)이라 해서 그것이 결코 결점일 수만도 없다.
인생이 무상(無常)하고 영화(榮華)가 뜬 구름 같음은 인간세(人間世)의 당연한 철리(哲理) 이다. 이런 연유로 무궁화는 사람을 무상하도록 가르치는 게 아니라 무상한 것임을 깨닫게 하는 곧, 영고무상(榮枯無常)한 인생의 원리를 보여 주는 꽃이다.
아홉째, 무궁화는 일급(日及)이란 별명 그대로 태양과 함께 한 삶을 영위하는 바, 비록 동산 너머 일광(日光)을 비치지 않은 시간에도 일출의 꼭두 새벽이면 어김없이 피어나 일몰(日 沒)과 함께 입을 다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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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겨레의 타고난 근면성꽃이 질 때도 장미, 모란, 작약들처럼 잎 하나하나 가 사방으로 흩어지듯 떨어지지 않고 송이 자체가 피기 직전 순간의 모양으로 말려들어 통째로 떨어진다. 이는 곧, 우리 민족이 어떠한 고난 앞에서도 겨레 모두가 협동하여 한마음으로을 닮아 그 개화(開花) 하는 순간의 아름다움은 부지런한 사람이 아니고선 도저히 볼 수 없는 부지런함을 가르치는 꽃이면서 일몰(日沒)후의 어둠이 싫어 입 을 다물어 버리는 그 자태에서 광명이세(光明理世)의 실현을 염원(念願)했던 겨레의 넋을 살필 수가 있는 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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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궁화의 꽃잎이 다섯임은 우리 겨레가 완성(完成)을 의미하는 다섯, 곧 오행(五行), 오상 (五常), 오복(五福), 오곡(五穀), 오관(五官), 오륜(五倫), 오계(五戒)의 다섯을 생각토록 한다. 우리 겨레는 완성된 인간상의 추구를 표현하는 이런 다섯이란 숫자를 좋아한다. 그러기에 이 다섯 꽃잎의 무궁화는 우리 민족이 온 인류의 행복과 평화를 염원하는 박애(博愛)의 정 신을 가졌고, 완성의 세계관 및 완성된 아름다움의 멋을 지니고자 하는 바람에 꼭 들어맞는 꽃이기도 하다.
이처럼 무궁화는 오천년 겨레의 역사와 함께 하여 온 민족의 꽃, 겨레 모두의 몸과 마음을 모아 결의한 우리 배달 민족의 꽃이다. 곧, 오천년 역사가 무궁화의 역사이며 또한 영원히 홍익인간(弘益人間), 한(韓)민족이 존재하는 한 피고 져도 또 새롭게 필 영원한 우리의 꽃인 것이다.
출처 : 무궁나라






